본 글은 부천개혁교회에서 2024년 겨울사경회를 부천개혁성경신학교의 '종교개혁사' 강의를 병행하여 '종교개혁시대의 신학과 신앙 : 종교개혁 이야기' 주제로 1월 13일(토요일)-14일(주일)에 가지며 강의한 내용입니다. 강사는 고경태 목사님(주님의 교회, 조직신학 교수)입니다. 열한 번째 시간인 11강은 '도르트 총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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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시대의 신학과 신앙
- 종교개혁 이야기 -
목 차
1. 우리가 생각하는 종교개혁 진영이란
2. 종교개혁 이전의 개혁자들
3. 종교개혁 대략
4. 때가 찬 종교개혁
5. 루터의 종교개혁
6. 칼빈의 종교개혁
7. 잉글랜드의 종교개혁
8.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
9. 재세례파와 신령주의(신비주의)
10. 로마 카톨릭주의와 세르베투스주의(소시니안)
11. 도르트 총회
12. 웨스트민스터 총회(1643-1649)
※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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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사경회 둘째 날 : 열한 번째 시간 -
11강 도르트 총회(the Synod of Dordrecht/Dort)
1054년에 한 교회는 로마 가톨릭교회(서방교회)과 정교회로 분열했고, 서방교회는 1517년에 개신교, 개혁교회로 분열했다. 신성로마제국의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를 중심으로, 칼빈(John Calvin, 1509-1564)의 영향에서 스위스, 프랑스, 스코틀랜드 그리고 네덜란드에 개혁 사상이 작용했다. 이들은 로마 카톨릭에서 나오면서 먼저 루터 신학을 채용하면서 개혁의 길을 가다가 칼빈 신학으로 개혁파 교회를 구성했다. 네덜란드는 스페인에서 독립하면서 개혁파 신앙으로 투쟁하면서 독립을 쟁취했다(1568-1648).
1568년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하며 네덜란드 공화국을 선포한 네덜란드는 이로부터 독립을 승인받기까지 80년 동안 독립전쟁을 수행했다. 전쟁 초기 네덜란드군 지도자였던 오라녜 공 빌렘 1세는 새로운 공화국의 미래를 위해, 그리고 전 해에 스페인의 포위 공격을 버티어 낸 레이든 시민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1575년에 암스테르담에서 남쪽으로 약 40킬로미터 떨어진 작은 도시 레이든에 네덜란드 최초의 대학(the University of Leyden)을 세웠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개혁파가 학문을 사랑하는 증거라고 했다. 레이든 대학 건물은 레이든 시내 전체에 흩어져 있고, 가까운 헤이그에도 캠퍼스의 일부가 있다. 대학의 모토는 ‘Praesidium Libertatis’, ‘자유의 요새’라는 뜻이다. 도시가 캠퍼스이고 캠퍼스가 도시이다.
네덜란드는 네덜란드어로 ‘낮은 땅’이라는 뜻이 있다. 네달란드 지역이 해수면보다 낮은 땅이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는 홀랜드(Holland)라고도 한다. 한자로 음역을 하여 화란(和蘭)이라고 한 것은 홀랜드의 대역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네덜란드 하면, 풍차와 튤립을 떠올린다.
네덜란드는 종교개혁에 의해서 생겨난 나라이다. 1515년부터 무적함대를 가진 스페인으로부터 지배를 받게 되었고, 당시 황제인 카를 5세(Charles V, 1500-1558)와 다음 황제인 펠리페 2세(Felipe II de Habsburgo, 1527-1598)는 종교개혁의 개혁교회들을 박해했다. 로마 카롤릭 교회를 지지하는 국가들과 개혁교회를 지지하는 국가들 사이에서 30년 전쟁(The Thirty Years' War, 1618-1648)이 발생했다. 윌리엄 3세 반 오란여(Willem III van Oranje, 1650-1702)을 중심으로 하여 1581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고,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Peace of Westphalia)으로 인해 독립국가로 인정받았다.
네덜란드는 이런 배경으로 인해 개혁교회의 역사를 갖고 있다. 네덜란드 교회는 성경뿐만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을 배우고, 고백하는 신앙고백서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로마 카톨릭 교회로부터의 개혁된 교회는 무엇보다 성경을 어떻게 믿고, 고백하는지 신앙고백서가 필요했다. 네덜란드 교회는 세일치문서(Three Forms of Unity), 벨직신앙고백서(Belgic Confession, 1559),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Heidelberg Catechism, 1563), 도르트 교령(The Canons of Dort, 1619)을 고백한다. 네덜란드 개혁파의 형성은 도르트 신조를 작성하고 채택하는 것이다.
알미니우스(James Arminius, 1560-1609)
네덜란드 교회는 개혁교회로서 신앙과 신학을 견고히 해나가기 시작했다. 대학에서는 신학을 가르쳤다. 네덜란드를 독립 과정에 첫째에 세워진 대학인, 레이던 대학교(University of Leiden)에서 제임스 알미니우스가 신학부 교수로 있었다. 그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존 칼빈(John Calvin)의 제자인 데오도르 베자(Theodore Beza, 1519-1605)에게 신학을 배웠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의심하고, 인간의 자유를 강조하기 시작하였고, 네덜란드 교회가 개혁교회로서 고수했던 벨직신앙고백서를 수정할 것을 주장했다.
당시 네덜란드 교회는 칼빈적 개혁파 신학으로 교회를 세워나가고 있었고, 예정론을 믿었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6). 예정론, 이중예중, 선택과 유기(Election and Reprobation)가 하나님에 의해 미리 정해졌다는 교리이다. 예정론은 독자들이 많이 혼란을 겪었다. 그럼에도 칼빈은 예정론 진술을 포기하지 않았다. 예정론은 하나님 절대 주권 사상에 기초한다. 누가 예정받고, 누가 유기받았는지에 대한 규정(판단)이 아니라, 예정하신 주님을 믿고 그 불변의 자비를 믿고 믿음의 확실성을 갖도록 한 것이다.
알미니우스는 예지예정을 주장하며, 고마루스(Francis Gomarus, 1563-1641)를 중심으로 개혁교회가 따르던 타락전선택설(Supralapsarian)을 거부했다. 타락전선택설과 타락후선택설은 창조 이전 선택설과 창조(타락)이후 선택설로 구분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작정 순서에 대한 토론이다. 타락전선택설도 영원에서 선택이 일어났다.
알미니우스는 예지예정을 주장하면서 기존 개혁교회의 절대예정 신학을 거부했다. 더 나아가 가장 큰 문제는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통해 선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알미니우스가 죽은 뒤 그의 제자들은 예정론을 반대하여 다섯 가지 항목으로 항의서(Remonstrance)를 주장했디. 그래서 알미니안이라 형성되기 전 그들의 명칭은 항론파(抗論派, Remonstrant)이다(Arminius taught conditional election on the ground of foreseen faith, universal atonement, partial depravity, resistible grace, and the possibility of a lapse from grace).
예정은 하나님께서 누가 복음을 믿을지 미리 아시고 그들을 구원하시기로 선택하신 것을 의미한다는 조건적 예정(Conditional Election: 예지예정),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받으신 고통은 모든 인류를 위한 것이었다는 보편 속죄(universal atonement), 인간은 하나님을 믿지 못할 만큼 타락한 것은 아니며 자신의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믿기로 선택할 수 있다는 부분 타락(Partial Depravity), 성령님께서 어떤 사람을 구원하시려고 베푸시는 은혜를 사람은 거부할 수 있다는 저항가능한 은혜 곧 가항적 은혜(Resistible Grace), 한 번 구원을 받은 사람도 훗날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인내의 불확실(Possibility of a lapse from grace)이다.
도르트 총회(The Synod of Dordrecht/Dort, 1618-1619)
항론을 주장하는 무리는 당대에 학식있는 자들이었다. 결국 네덜란드 교회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회의를 소집해야 했다. 네덜란드 도르트(Dordrecht, 도르트레히트)라는 도시에서, 네덜란드뿐만 아니라 주변 개혁교회의 다른 국가들에서 84명의 교회 대표와 18명의 의회 대표들을 초대해서, 1618년 11월 13일부터 1619년 5월 9일까지 154회의 개혁파 국제 회의, 총회를 개최했다.
이것을 주장했던 이들을 가리켜 항론파(Remonstrants)라고 하는데, 이에 변론하는 반항론파(Counter-Remonstrants) 또는 고마루스파는 개혁교회의 벨직신앙고백서를 보수하고, 항론파에 반대하는 다섯 가지 내용으로 작성한 문서를 체택한 것이 도르트 회의이다. 1618년 11월 13일부터 1619년 5월 9일까지 154회에 걸쳐 회의를 진행했고, 회의는 라틴어를 공용어로 운용했다. 이 총회에서 알미니우스와 알미니안주의자들은 배척되었고, 벨직신앙고백서,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서는 성경적인 가르침이라는 사실이 재확인되었다. 또한 알미니안주의자들의 항의서에 대한 반대의 변론으로 된 5개의 조항이 도르트 교령이 작성되었다. 그래서 도르트 교령을 “반대자들에 대항하는 다섯 조항”(The Decision of the Synod of Dort on the Five Main Points of Doctrine in Dispute in the Netherlands)이라는 다소 긴 명칭이 원 명칭이다.
도르트 교령(The Canons of Dordrecht/Dort)
※ ‘canons’를 ‘신조’라고 번역하지 않으려고 한다. ‘신조’는 ‘creed’에 한정되어 번역하는 것을 제언한다. 16세기 트렌트 공의회에서는 Creed를 사용하지 않고, Decree(Decretum)와 Canon을 사용했다. Decree는 교령(敎令)으로 번역한데, 어떤 공동체가 스스로 결정하여 발표하는 문서이다. Creed는 보편교회의 결정인데, 황제가 소집해서 결정한 문서이다. Canon은 규범으로 번역하며, Drcree에 근거해서 배격하는 세력에 대한 문장이다. (라틴어: decretum, decerno, "나는 심판한다")
도르트 교령을 “칼빈주의 5대 강요”(The Five Points of Calvinism, TULIP)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칼빈주의와 도르트 교령이 동등 관계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도르트 교령은 칼빈주의의 예정론에 관한 부분에 대한 토론이고 판결로 보아야 한다.
체적인 생명만 갖고 있는 모든 자연인은 그 본성이 타락하여 구원에 필요한 믿음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전적 부패(Total Depravity), 누구에게 참된 믿음을 줄 것인지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에는 아무런 조건이 없다는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실효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는 제한 속죄(Limited Atonement), 하나님이 믿음을 주시기로 작정하신 사람이 그리스도를 안 믿을 수 없다는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자리로 결코 떨어지지 않고 구원이 반드시 성취된다는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이다.
도르트 총회가 끝난 뒤에 네덜란드는 “나더러 레포르마치(Nadere Reformatie)”라는 제2종교개혁을 겪는다. 잉글랜드 청교도의 저서들이 네덜란드에 들어오면서 변화되는 모습이다. 대표적인 청교도는 윌리엄 에임스(William Ames; 1576-1633)이고, 우리나라에서는 브라켈(Wilhelmus à Brakel, 1635–1711)이라는 신학자가 대표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