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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01^30475730^http://tv.c3tv.com/svclink/daum/index.asp?mode=esermon&mcode=3&dcode=20110522^1^92210601^30475730^http://tv.c3tv.com/svclink/daum/index.asp?mode=esermon&mcode=3&dcode=20110522^010601^30475730^http://tv.c3tv.com/svclink/daum/index.asp?mode=esermon&mcode=3&dcode=20110522^1^92210601^30475730^http://tv.c3tv.com/svclink/daum/index.asp?mode=esermon&mcode=3浮草の町
우키구사노마치
唱: 多岐川舞子
作詞: 石原信一 作曲: 徳久広司 編曲: 南鄕達也
1 =========================
히토오오시노케 이키라레나쿠테
人を押しのけ 生きられなくて
남을 밀쳐내고 살 수 없어서
헤타나요와타리 소레가스키
へたな世渡り それが好き
서툰 세상살이 그게 좋아요
아나타노네우치와 와타시가와카루
あなたの値打ちは わたしがわかる
당신의 가치는 내가 알아요
이마니가만노 하나가사쿠
いまに我慢の 花が咲く
이제 곧 인내의 꽃 필거에요
나미다모오사케모 한분와케테
涙もお酒も 半分わけて
눈물도 술도 반씩 나누며
소바니오이테네 우키구사노마치
そばにおいてね 浮草の町
곁에 있게 해줘요 부평초 마을
2 =========================
호레테이루요토 구치니와다사즈
惚れているよと 口には出さず
반해 있다고 입 밖엔 내지 않고
히로이세나카데 모노오이우
広い背中で ものを言う
넓은 등으로 말을 하네요
아나타노코코로와 와타시가와카루
あなたの心は わたしがわかる
당신의 마음은 내가 알아요
스코시누쿠모리 아레바이이
少しぬくもり あればいい
조금 따스함만 있으면 돼요
세츠나사츠라사모 한분와케테
せつなさ辛さも 半分わけて
안타까움 괴로움도 반씩 나누며
소바니오이테네 우키구사노마치
そばにおいてね 浮草の町
곁에 있게 해줘요 부평초 마을
3 =========================
유비와난카와 호시가리마센
指輪なんかは 欲しがりません
반지 따위는 바라지 않아요
도오조지분노 유메오미테
どうぞ自分の 夢を見て
모쪼록 자신의 꿈을 꾸세요
아나타노네우치와 와타시가와카루
あなたの値打ちは わたしがわかる
당신의 가치는 내가 알아요
츠이테유키마스 도코마데모
ついて行きます どこまでも
따라 가겠어요 어디까지나
코고에루사무사모 한분와케테
凍える寒さも 半分わけて
얼어붙는 추위도 반씩 나누며
소바니오이테네 우키구사노마치
そばにおいてね 浮草の町
곁에 있게 해줘요 부평초 마을
이름: 多岐川舞子 [たきがわ まいこ 다키가와 마이코]
본명: 丸山静美[마루야마 시즈미]
생일: 1969年11月24日 혈액형: O형
출신: 京都府 南丹市 八木町 出身
(이하 퍼온 글임)
강릉 참소리 박물관장인 손성목 관장을 2월 15일 화요일 저녁
휴넷의 골드클래스 강의를 통해서 처음 접하게 되었다.
일과 연관되지 않은 강의를 들을때면 일종의 휴식이라는 느낌을 받곤 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강의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박물관을 만들고 키워낸 한 평범한 열정의 소유자의 이야기정도로 예단했었다....
동영상을 보고 손관장의 지나온 과거를 회상하며 듣는 이야기에서 묘한 뜨거움을 느낀다.
그럴 수 밖에 없는 태생적인 이유도 발견하게 되었고
그러한 확실한 사명을 스스로 만들고 가꾼 한 사람의 열정에 박수를 치고 싶었다.
"에디슨은 청각장애자였슴다 아버지는 못수였고 엄마는 선생이었지요 7자녀중 막내였는데
하도 말도 안되는 질문들을 해대니 6개월만에 학교가 손 든 가망이 없어보이는 존재였슴다....."
라고...시작된 강연장에 손관장은 100년이 넘은 축음기와 에디슨이 직접 발명한 벽열전구를 가져와
아름다운 필라멘트 빛을 선보여 주기도 했다. 알고보니 더욱 아름다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인류의 역사는 소리와 빛을 자본화 해온 역사다라고 정의를 내리는 손관장의 강연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척도가 소리와 빛에 얼마나 집중되어있는지 그 열정을 가름할 수 있었다.
130년전만 하더라도, 소리나 빛은 절대로 저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니였다.
불과 100여년 전부터 시작된 소리와 빛의 저장의 역사가 에디슨을 통해 시작되었다는 사실!
우리에게 너무 당연한 형광등과 LED의 시초가 불과 100여년전이라니...
알면서도 새삼 놀랜다는 건 바로 이런걸 두고 얘기하나보다.
200여가지의 주옥같은 발명품을 남긴 에디슨에게 라이프지 기자가 물어보았다.
"그많은 발명품 중 그래도 애착이 가고 보람이 남다른 발명품이 있을텐데요?"
에디슨의 답은 명확했다.
"아니요! 어느 하나를 꼽을 수가 없답니다. 전부 산고의 고통을 안고 태어난 자식들이니까요!"
여러차례 계속된 물음에 어느 하나를 꼽는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버티다가 결국 하나를 꼽았다.
그건 바로 축음기입니다.
고종3년에 세브란스 설립자인 엘렌 선교사가 축음기를 들고와서 고종에게 들려주려 했을 때
고종뿐 아니라 아무도 믿지 안았다고 한다.
고종은 박춘재 명창을 불러 적벽가를 부르게 하였고, 엘렌은 녹음된 박춘재명창의 적벽가를 다시 틀어주었다.
고종황제와 박춘재 명창 그리고 함꼐 자리했던 많은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떄 박춘재 명창이 했던 말이 간떨어질뻔 했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소리를 저장해두었다가 다시 듣는다는 100여년전 사람들의 꿈은 에디슨을 통해 세상에 드러났고,
당시 오페라 입장권이 10달러였는데 축음기의 값이 20달러정도였다고 하니 얼마나 축음기의 인기가 높았을까 생각이 든다.
강연장에서 100년이 넘은 축음기를 통해 국내 최초의 유행가였던 윤심덕의 사의찬미 판을 가져왔으나 듣지는 못했고
대신 1958년 발매된 앵두나무사랑이라는 유행가를 들었다. 마치 태어나기 전으로 돌아간 듯한 느낌으로...
강릉에 가면 참소리박물관과 에디슨박물관이 있다.
에디슨의 고향은 미국이지만, 에디슨의 영혼을 보려면 한국의 강릉을 찾으라고 할 정도다.
그 소문을 뒷받침할 증거는 명명백백한듯 하다.
당시 축음기의 음을 재생시키는 판을 15만장이나 보유하고 있을 뿐 아니라
에디슨의 손떄가 묻은 일상품들, 그리고 축음기를 비롯해 다리미 세탁기 전기자동차까지
그야말로 에디슨을 보려면 강릉을 찾아야할 것 같다.
세계 최초의 전기자동차 발병도 에디슨인지는 이 떄 처음 알았다.
에디슨과 친했던 포드가 자동차를 만들었지만, 동네가 시끄럽고 매연이 심했던 그 당시
에디슨은 최초의 전기자동차를 3대 만들어 1대를 포드의 부인에게 선물했다고 한다.
그 중 한대가 에디슨 박물관에 있다 손관장이 직접 수집을 한 것이다.
수집가의 과정이 우리의 예상처럼 순탄치만은 않다는 사실 확인은
강연이 끝난 뒤 질문시간에 던진 재원마련이란 질문의 답변에서였다.
현대건설 직장인 시절부터 중동으로부터 축음기를 5~600 대나 들여오는 극성을(?) 떨던 손관장은
회사를 그만두고 강릉에 임대아파트를 지어 그 분양대금으로 축음기와 각종 수집품들을 사들이고 하다가
파산까지 갔던 기억들을 되내이셨다.
김연아가 따로 있을까? 박태환이 따로 있을까?
축음기 아니 소리와 빛의 역사의 세계에 장미란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현재 박물관의 99%의 실물들은 전부 작동이 되는것이라고 하는 게 또한 놀라웠다.
영화제는 있지만, 영화박물관이 없다는 말씀!
사람의 움직임을 저장해보자 꿈꿔왔던 에디슨이 영사기를 만들었기에
그래서 영화를 만들 수 있었기에 반드시 영화 박물관을 만드리라 다짐을 해보이는 손관장은
6500 여점이나 되는 자식(?)들을 진짜 자식들에게 물려줄 생각이 없다고 한다.
모든것은 사회로 환원될 것이고, 후세들이 소리와 빛을 즐기고 그 도움없이 살아갈 수 없지만,
그 역사만큼은 반드시 알아야 하기에 꼭 사회에 환원하여 많은 이들에게 알리고 싶다 하셨다.
평안도 원남태생의 그가 1.4 후퇴 그 아비규환의 상황에서 어린나이에 아버지가 사 준 축음기를 들고
피난을 가겠다는 믿지못할 장면부터 그의 꿈과 사명은 싹트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에디슨을 만났고 에디슨에게 빚을 지지않은 사람은 지구상에 몇사람 없다고 말 할 정도로
에디슨에 애착을 가졌다. 그래서 그의 꿈도 진화를 했고 강릉을 품은 한국을 명실상부한 에디슨의 제2의 고향으로 만들어버렸다.
복권을 산 자만이 당첨을 기대할 수 있듯이 꿈을 꾼 자만이 그 꿈을 얻을 수 있다.
손성목 관장의 강의 100분이 내 인생의 또다른 영점조정의 순간이 되었다.
암투병으로 위를 잘라내고 대장까지 잘라낸 분이라 가끔씩 의자에 탁자에 의지하면서도
에디슨과 축음기 영사기 얘기에 벌떡 벌덕 일어나 그 사랑스러운 언어를 토해내신 값진 열정에 입이 다물어질 정도였다.
진정한 영화 박물관을 꼭 만들겠다. 테마공원이 아닌 진짜 어린이 박물관을 꼭 선보이겠다는 많은 공약도
저세상에 가서도 꼭 박물고나을 짓고 있을겁니다.라는 말로 전부 가름이 되지 않을까...
한밤중 여의도의 골드특강에서 나는 또다른 세상과 조우했다. 고맙고 감사하다.
얼마전 다녀왔던 강릉을 3월이 가기전에 아이들을 데리고 다시 다녀올란다.
한 사람의 꿈과 열정이 어떤 파급효과를 낳는지를 설명해주면서...~^L^~...
참소리 축음기. 에디슨 박물관
어제(17일)는 우리 발명인들의 우상이자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중의 한사람인 발명왕 토마스 에디슨의 숨결이 느껴지고 손때가 묻은 그의 진품 발명품과, 그의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인해서 탄생한 수많은 발명품들을 바로 눈앞에서 볼수 있었습니다. 그많은 전시물들이 여타의 박물관에서 진품 보호를 위해 모조품을 전시하는것과 달리 "손성목"이라는, 에디슨과 그의 발명품, 특히 축음기를 당신의 목숨보다 더 아끼는 집념의 사나이가 50년간 60여개국을 죽음을 무릅쓰고 다니며 수집한 진품들로 이루어진 전시물인 것입니다.
손성목 관장님의 친절한 안내를 받으며 사람으로 태어나서 무엇엔가 이토록 미쳐서(?) 빠져볼수 있다는게 그저 놀라웁고 감탄스럴 따름입니다. 궁금한게 있으면 얘기해보라 했을때 진짜로 궁금해도 속시원히 질문을 하지 못한게, 그많은 전시품을 무슨돈으로 다 사들였는지, 당신께선 국내 굴지의 건설회사 근무당시 번돈으로 장만했다 하지만 쉽게 수긍이 안갑니다. 못밌어서가 아니라 그만큼 전시품이 많다는 얘기지요. 현재 전시중인게 3분의1밖에 안된다네요. 본전시관 관람을 마치고 관장님의 특별배려로 전시관이 부족해 컨테이너를 개조해 보관중인 창고에, 귀하디 귀한 영사기와 영화 타이타닉호에 실제 달려있던 손종(핸드벨)도 볼수 있었습니다. 안내를 맡은 해설사의 말이 모든 전시품은 다 작동이 된다 합니다. 실제로 바쁘신 가운데 전시품을 손수 수선하는 관장님의 사진을 볼수 있었습니다.
에디슨은 살아생전 2000여점을 발명하고 그중에 1093점을 특허 등록 했답니다. 그는 "나는 앞으로 300년을 더산다해도 그시간동안 발명할수있는 아이디어가 내 머릿속에 있다"고 하였답니다. 에디슨, 손성목관장님 같이 위대한분들을 300년 사실수있게 도와주는 발명품을 우리 <충남발명가협회> 에서 만들어보면 어떨까요? ㅎㅎ
잘 아시겠지만 에디슨의 3대 발명품은 전구, 축음기, 영사기 입니다. LED램프, 엠피3, 휴대폰 프로젝터가 흔한 요즘에 얼마나 가슴에 와 닿을까요.
최초의 전구 (마즈다-빛의신)
최초의 영사기 (모션 픽춰)
최초의 축음기 (틴포일)
어디선가 한번쯤 본듯한 그림. 참소리박물관의 마스코트이자 빅터레코드사의 심벌마크입니다. '니퍼'라는 이개는 자기 주인이 죽은것을 슬퍼하며 평소 주인과함께 즐겨듣던 음악이 나오면 축음기 나팔앞으로 다가가서 귀를 기울입니다. 음악이 끝나면 혹시나 주인이 나타 나려나....히즈 마스터스 보이스<주인의 목소리>라는 이상표는 오디오계의 인상적인 상표입니다.
강릉의 대표 관광지이고 관동8경중의 하나인 경포대가있는 경포호수 한켠에 자리잡고있는 에디슨참소리박물관. 손성목관장님은 먼훗날 당신께서 더이상 직접관리가 힘들게되면 본인 생명과도같은 수많은 귀중한 전시품을 국가에 헌납 하신답니다. 대한민국이 자랑스럽고 손관장님이 자랑스럽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감사 드립니다.
한 개인의 의지와 열정의 25년의 노력의 결과, 국내 최대의 사립박물관으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 글로벌 박물관을 만들어 냈다.
소리,빛,영상으로 대표되는 전시 시스템을 갖고 있으며,강릉 경포 도립공원 호수변에 위치해
교육적으로도 체험의 장이 될 뿐 아니라 외국인들도 꼭 들려가는
필수 관광코스로 각광을 받고 있다.
소리 특화박물관인 '참소리 축음기박물관'과 과학 특화박물관인 '에디슨 과학박물관' 으로 이원화 하여
각각 특성 있는 특화박물관으로 전문화되고 세계적인 박물관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에디슨의 발명품은 숫자를 셀 수가 없다. 최초의 탄소 필라멘트 전구를 바탕으로 발전기나
각종 전기시설을 발명해 생활가전 발명으로 혁명을 이루었다.
우리나라에 처음 축음기가 소개된 것은 고종 3년 선교사 알렌이 고종황제에게 처음 선을 보였다 한다.
소리를 저장 했다가 재생하는 축음기는 1877년 에디슨이 놋쇠 원통과 바늘을 이용한 틴포일을 발명한데서 시작한다.
토스터, 와플틀, 헤어 컬링기, 다리미,커피포트 등 주방용품에까지 다양한 분야에 까지
그의 손이 안 닿은 것을 찾기 힘들 정도다.
이근안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똑같이 일할 것…당시엔 '애국'"
김근태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1985년 9월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년) 의장 시절 당시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전기·물고문을 받으며 '짐승의 시간'을 보낸 후유증으로 병마에 시달리고 있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1980년대 고문수사에 대한 국민적 공분이 높아지고 있다. 김 전 장관은 지난 10일 딸의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1980년대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 시절 고문 수사를 일컬을 때마다 등장하는 인물이 이근안 전 경감(72·현 목사)이다.
1988년 12월 <한겨레>가 김근태 전 장관을 직접 고문한 '얼굴없는 고문기술자'의 실체를 얼굴 사진과 함께 처음 보도한 뒤 이씨는 11년간 도피생활 끝에 자수해 7년간 수감생활을 했다.
그런데 김 전 장관의 투병생활이 보도되면서 이씨의 행적이 다시 주목되고 있다. 트위터에서는 지난해 2월 시사주간지 <일요서울>에 두차례 걸쳐 보도된 이씨의 인터뷰 기사가 다시 회자되고 있다.
이씨는 인터뷰에서 자신은 고문기술자가 아니며 "굳이 기술자라는 호칭을 붙여야 한다면 심문기술자가 맞을 것 같다"며 전기고문 등 고문수사 행위를 전면 부인했다.
"논리로 자신을 방어하려는 이와 이를 깨려는 수사관은 치열한 두뇌싸움을 벌인다. 그런 의미에서 심문도 하나의 예술이다. 비록 나는 그 예술을 아름답게 장식하지 못했지만."
그러면서 그는 그때로 돌아가도 똑같은 일을 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자신의 행위를 '애국'이라고 표현했다.
강제심문은 있었지만 피해자들이 주장하는 끔찍한 전기고문은 없었다며 실체가 과장됐다는 식으로 주장했다. 김근태 상임고문에 대해서도 "건전지 2개를 이용해 겁만 주었기 때문에 고문이 아니"라며 자신의 심문은 "일종의 예술"이라고 강변했다.
김근태 전 장관 고문 사건에 대해 법원은 고문 사실에 대해 유죄를 인정해 7년형을 선고했지만 이씨는 "당시 전기고문의 실체는 내가 취미삼아 만든 모형 비행기 모터에서 뺀 AA 건전지 2개를 이용해 겁을 준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김 전 장관 사건과 관련해 "그의 입을 열게 할 방법으로 고안한 것이 이른바 전기고문이었다"면서도 실행한 것은 전기고문이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그때 김근태씨를 앞에 두고 두시간 넘게 일부러 말로 겁을 줬다. '너같은 녀석은 전기구이를 해버려야 바른 말을 한다'는 식으로 상대를 주눅들게 한 것이다. 한참 후에 눈을 가린 뒤 맨발닥에 소금물을 뿌리고 건전지 두개를 대며 계속 겁을 줬다. 이미 잔뜩 긴장한 상태에서 찌릿찌릿한 감각이 느껴지는데 놀라지 않을 사람이 어디있나."
그러나 겁만 주었다는 이씨의 주장과는 달리 당시를 회고하는 김근태 고문의 진술은 고문의 악몽을 생생히 증언한다.
"소리를 지른다고 강하게 전류를 통하게 하고, 신음 소리가 나지 않도록 혀를 이빨로 꽉 물었다고 혀를 빼라며 강한 전류를 또 흘려보내고, 참으면 참는다고 또 그러고 이들의 목표는 총체적인 혼란, 착란상태로 돌입"(1987년 나온 '김근태의 이근안에 대한 기억')
"머리가 빠개질 듯한 통증이 오고 그 몰려오는 공포라니, 죽음의 그림자가 독수리처럼 날아와 파고드는 것처럼 아른 거렸습니다. 전기가 발을 통해서 머리 끝까지 쑤셔 댈 때마다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기고문은 담금질해서 뜨거운 불인두로 지져서 바싹 말라 바스락뜨리고 돌돌 말려서 불에 뛰기는 그런 것입니다. 전기고문은 핏줄을 뒤틀어놓고 신경을 팽팽하게 잡아당겨 마침내 마디마디 끊어버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도 이씨는 자신은 전기고문은 물론 일체의 고문기술을 자행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관절빼기' '볼펜심 꽂기' '통닭구이' 등과 같은 이씨의 전매특허로 알려진 고문기술에 대해서도 "주먹으로 몇대 쥐어박거나 유도 기술을 이용해 업어치기 정도는 했다. 이것을 고문이라고 하면 변명하지 않겠지만 그 이상의 가혹행위는 없었다"며 전면 부인했다. 그러면서 그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도 심문이 안되면 할 수 없이 강압심문을 하게 된다"며 자신의 행위를 강압심문이라고 했다.
그는 "과거 심문과정에서 난동을 부리는 피의자 몇명을 완력으로 제압하다 팔이 빠지는 경우가 있긴 했다"면서 "아마 이런 일화 때문에 내게 '기술자'라는 호칭이 붙은 것 같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피의자를 제압하는 과정에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사고"라고 주장했다.
그는 공안사건 관련 인사들이 고문받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자기 합리화 때문이라고 강변했다.
"공안사건에 연루된 인사들은 비밀 결사 등 조직에 소속돼 있다. 조사를 받은 이들 상당수는 해당 조직 기밀을 당국에 제공하는 조건으로 풀려났다. 원래 조직으로 복귀한 뒤 대접이 예전만 같겠는가. '배신자' 소리 듣지 않으려면 비밀 누설에 대한 정당한 이유를 대야 한다. 결국 '고문에 못이겨서'라는 대답이 제일 타당하지 않겠냐."
그는 또 박종철 고문치사사건과 납북어부 김성학 사건 등은 자신이 한 일이 아닌데도 "언론은 고문이란 단어만 나오면 이근안을 팔았다"면서 억울함을 호소했기도 했다.
이씨는 <일요서울>과 한 두차례 인터뷰 기사에서 오랜 도피 생활과 수감 생활 중 자신이 겪고 느낀 가족애와 부정(父情)을 털어놓기도 했다.
그는 "가족들 앞에서 나는 그저 죄인"이라며 "고문 기술자의 가족이라는 손가락질 때문에 정상적 생활이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특히 수감생활 중 세상을 떠난 둘째 아들에 대해서는 각별한 부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둘째가 아들 셋중에도 특히 착했다. 매주 면회를 오던 둘째 놈이 어느 날 '아부지, 나 오래 못 살게 될 것 같아요. 병원에서 심전도 검사를 했는데 결과가 안좋습니다'라며 침통해 했다. 평소 당뇨가 있긴 했지만 나이가 젊어(당시 39살) 설마했다. '아비 앞에서 쓸데없는 소리마라'고 호통을 쳤는데 꼭 한달만에 심근경색으로 죽었다. 임종도 지키지 못했다."
또 막내아들에게 취직 자리를 알아봐주겠다고 하자 "죽어도 아버지 덕은 안본다"며 "노동판에 나가는 막내 녀석이 야속하면서도 가슴 아프다고 털어놓았다"고 이씨는 털어놓았다.
2008년 정식으로 목회자가 된 이씨는 "당연히 이근안 목사가 맞지 않겠느냐. 경감은 30년 전 직함일 뿐"이라며 현재 목사 활동에 만족감을 표시했다.
이씨는 1998년 어둡고 눅눅한 천장에서 생활하다 종교에 귀의하게 됐다고 말했다. "어느 날 돌아가신 아버지가 그리워졌다. 부친이 독실한 크리스찬이셨다. 자연스럽게 아버지 손때가 묻은 성경책에 손이 갔다. 이후 10년 동안 노트에 3400개가 넘는 성경 구절을 손으로 베껴 쓰며 공부했다. 자수를 결심한 것도 성경 공부 한 덕분이다. 요한 일서 1장 9절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란 구절이 있다. 이 말씀을 받아 적으며 나 역시 스스로 죄를 자복하고 회개해야 한다는 결심이 섰다."
그러나 이씨의 회개가 진정한 의미를 갖고 있을까?
그는 '시간을 돌려 과거로 간다면 다른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라는 <일요서울> 기자의 질문에 "아니다. 지금 당장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나는 똑같이 일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당시 시대 상황에서는 '애국'이었으니까. 애국은 남에게 미룰 수 있는 일이 아니다"라고 자신의 과거 행적에 강한 자부심을 피력했다.
이에 대해 지난 4년간 1980년대 고문피해자의 심리상담을 통해 이근안씨를 비롯해 고문기술자의 행태를 너무나도 자세히 알고 있다는 정신과 의사 정혜신 마인드프리즘 대표는 11일 트위터에 "이근안, 당신이 목사라구요? 예수가 통곡합니다"라고 분노를 표시했다.
트위터에서도 "아...교회 다니는 것을 심히 부끄럽게 하는구나"(트위터 아이디 @i***) "이런 인간이 반성이라는 것을 할 리가 없지"(@malss**) 등 격한 반응이 쏟아졌다.
지난주 | tv팟48542738^http://tvpot.daum.net/clip/ClipView.do?clipid=37872797^19404854273848542738^http://tvpot.daum.net/clip/ClipView.do?clipid=37872797^194048542738^http://tvpot.daum.net/clip/ClipView.do?clipid=37872797^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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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중국의 한 여성 사형수가 사형 전날에도 순진무구한 얼굴로 환한 웃음을 지어 전세계 네티즌의 이목을 끌었다. 그녀가 '내일이 존재하지 않는' 순간에도 웃을 수 있었던 것은 사형 집행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인 것으로 드러나 안타까움을 주고 있다.
12일(한국시간) 영국 일간지 데일리메일 온라인판은 "웃고 있던 사형수의 진실-그녀는 최고의 모습을 보이고 싶어 했다"는 제목의 기사를 보도했다.
사형 집행 소식을 듣기 전의 시우링(왼쪽) 옷을 고르며 밝게 웃고 있다. 사형이 실제로 집행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눈물 흘리는 시우링(오른쪽 위), 형장으로 향하는 시우링(오른쪽 아래) (출처=데일리메일 웹사이트 캡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