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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 10,46-52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여러분들 어떻게 오셨습니까?
웃지 말고 진지하게 여러분들 어떻게 오셨습니까?
아무리 이미 알고 있는 정답이지만 그렇게 실실 웃으면서 살면 진실성 없이 느껴져요.
하느님이 불러주셨으니까 왔죠?
그런데 저도 여기서 살면서 똑같은 생각을 들어요.
내가 청주교구 신부이니 은퇴해도 충북에 살아야 하는데, 그 넓은 땅에서 왜 이리로 왔을까?
겉으로 보면 교우들한테 땅 좀 알아보라고 하고 내가 정해서 와서 이렇게 만든 거예요.
이렇게 겉으로 보면 모든 주도권이 나한테 있는 것 같은데, 여러분들도 여러분 차를 끌고 왔지만,
여러분 입에서는 주님이 불러서 왔다고 그랬죠.
진짜 그런 마음으로 여기 앉아 있다 가셔야 해요.
나도 그런 마음으로 살아요.
왜 나를 이곳에서 자리를 잡게 하셨을까?
은퇴 후 그냥 조그마한 집에서 살 수도 있었고 신자들도 안 만나도 누가 뭐라 그러지 않죠.
역시 나도 여러분이 ‘신부님은 여기 왜 사십니까?’라고 물으신다면 어떤 말이 나올까요?
주님이 살라고 하니까 사는 거예요.
여러분들 기도 잘하세요?
또 다르게 물어볼게요. 기도하기 쉬워요?
여러분 일생 가운데 기도하는 시간이 얼마나 될 것 같아요?
평균 70으로 봅시다. 70년 동안에 기도하는 시간이 얼마나 될 것 같아요?
그러면 밥 먹는 시간은? 화장실에 앉아 있는 시간? 노는 시간, 취미 생활하는 시간은?
어느 심신 깊은 통계학자가 사람 평균 수명을 70년으로 봤을 때 어떻게 사용하느냐 통계를 냈대요.
제일 먼저 확인한 것이 잠자는 시간의 평균이에요. 평균 하루에 8시간을 잔대요.
그러면 칠십 년 동안 이십사 년을 자요.
근데 하루에 여덟 시간만 자는 사람만 있겠느냐 이거야.
아침 먹고 오전 취침, 점심 먹고 오후 취침, 그런 사람들은 따지면 24년이 아니죠.
거의 인생의 40프로 잠으로 사는 거예요.
그다음에는 화장실에 앉아 있는 시간이 어떻게 되느냐?
이건 남자 여자가 좀 다른데, 남자가 일 년 반 더 길어서 7년 6개월이야.
여자들은 5년 8개월이 나왔대요.
지금은 신문을 안 보는 시대이지만, 남자들은 신문 갖고 들어가면 끝장 보고 나오잖아요.
반대로 목욕탕에 가서 쓰는 시간은 여자들이 2년 반이 더 길어서 8년 7개월, 남자는 5년.
그런데 이 통계학자가 알고 싶은 그 포인트는 뭐냐?
70년 동안 하느님과 기도하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알고 싶었던 거예요.
이렇게 세상 것을 위해서는 모든 시간과 돈과 정력을 다 쏟는데,
과연 영원한 세상 천국에 가기 위해서 얼마나 하느님께 기도하는 데 시간을 바치고 있느냐 이거예요.
놀랍게도 하루에 15분씩 매일 기도하는 사람이래야 6개월이에요.
나 처음에 그거 듣고 좀 충격을 받아서 계산기 두들겨 봤어요.
하루 15분 기도해야 70년 모아놓으면 6개월 나와.
그런데 솔직히 여러분들 분심 없이 15분씩 매일 기도하시나요?
안 하잖아요.
아프다고 안 하고, 오늘 날씨 찌뿌둥하다고 안 하고, 성당 가서 어떤 여자가 성질 돋웠다고 안 하고,
새로운 본당 신부 못생겼다고 안 하고, 아무튼 오만 핑계를 대면서 우리는 안 하죠.
그리고 하더라도 찜찜하니깐 하지, 오늘 복음 바르티매오의 마음으로 기도하는 게 아니죠.
70년의 6개월은 140분의 1이에요.
우리는 놀고 화장실에서는 오만 시간을 많이 쓰면서, 하느님이 준 그 70년 동안에 1년도 안 되는 6개월,
적어도 기도하는 시간을 1년은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기도를 아예 놓고 계신 분들은 30분 바래지도 않아요. 묵주기도 5단만 드리고 주무세요.
15분 하신 분들은 30분 하세요.
주님 심판대에 갔을 때 주님이 다 아시거든.
지금은 천국도 전산화가 되어 누가 올라오면 이름만 치면 바로 뜬대요.
뭘 어떻게 하고 뭘 먹고 살았는지.
딱 예수님께서 쳐보시더니 ‘야 너 참 너 자신을 위해서는 끝내주게 썼다. 그런데 너 나랑 기도하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 줄 아니?’
‘모르긴 몰라도 꽤 될 거예요.’
‘자 컴퓨터 화면 돌려서 봐 봐. 2개월 3일 했어.’
‘그거 잘못된 거 아닙니까?’
‘아니야. 이거 삼성 최신형이야.’
예수님 앞에 가서 나 기도 많이 하고 왔다고 사기 칠 수는 없죠. 다 알고 계시니까
오늘 마르코복음 10장 46절에서 52절은 눈먼 거지가 예수님을 만나 눈을 뜨는 드라마틱한 얘기가 나와요.
읽어보고 오셨죠?
여러분들이 미사 가기 전에 독서 복음을 읽고 거기에 묵상까지 하고 간다면,
여러분 본당 신부님이 헛떡처럼 얘기해도 여러분 찰떡처럼 알아들어요.
읽고 오는 것과 안 읽고 오는 건 천지 차이예요.
사제가 복음을 읽을 때 그 광경이 눈에 쫙 떠오르죠, 이미 읽고 왔기 때문에.
바르티매오는 거지죠. 한평생 눈이 안 보이니 해먹을 게 뭐 있어?
누가 던져주는 돈, 빵으로 먹고 살아야 하죠.
당연히 거지가 될 수밖에 없어요.
그렇겠죠.
오늘 예수님이 어떤 방법으로 이 바르티매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가 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여러분의 이해를 좀 돕기 위해서 몇 단계로 나눠서 설명을 해드릴게요.
첫 번째는 이 소경은 예수님이 오신다는 얘기를 듣고 어느 쪽에 예수님이 계신 줄은 모르나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죠.
예수님께 자비를 청했지만, 예수님은 즉시 응답하지 않고 못 들은 척해요.
왜 그랬을까? 이게 첫 번째 화두예요.
주변 사람이 다 듣고 다른 사람이 말릴 정도로 그 사람은 목숨을 걸고 소리 질렀죠.
‘이번 기회 놓치면 나는 눈 못 떠.’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소리 지르는데 예수님의 먼 산만 쳐다보면서 가만히 계시는 거예요.
왜 그러셨는지 답 아시는 분 있으세요?
예수님은 정말 위대한 심리학자예요.
여러분들 ‘군중 심리’라는 거 아시죠?
다른 사람이 소리 지르면 같이 지를 수가 있어요. 그걸 군중 심리라고 그래요.
군중 심리 때문에 남이 하니까 따라서 예수님을 부를 수도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은 그 소리를 들으면서 분별하시는 거죠.
큰 소리로 하느님을 부르는 것 그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기도의 내용이 있어야 하기에,
예수님은 분별하시기 위하여 즉시 답을 안 하세요.
오늘 강론의 주제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이 ‘나 찾았구나’ 할 수 있는 기도가 되려면 적어도 네 가지가 조건이 있어야 해요.
첫 번째 진실된 기도를 해야 해요. 진실성이 있어야 해요.
두 번째 절박성이에요. 주님 옷자락 잡는 마음으로 절박해야 해.
세 번째 성실해야 해요.
기도하다 말고 또 생각나면 하고, 이런 것이 아니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기쁜 일이 있을 때나 고통이 올 때나
늘 변함없이 성실하게 하는 기도.
네 번째는 필요성이에요.
‘주님 이 기도 들어주시면 제가 주님의 종이 되겠습니다. 어떤 일을 해서 주님의 빛과 소금이 되도록 애쓰겠습니다.’
진실성, 절박성, 성실성, 필요성, 이 네 가지가 예수님이 즉시 답을 할 수 있게 하는 기도의 요소예요.
아멘
많은 사람이 기도하는 척하다가 응답이 없으면 포기해 버립니다.
걸인들은 사람이 지나가면 딴 데 쳐다보면서도 손은 나가요.
인기척이 있으면 자동으로 나가요. 한 손으로 밥 먹으면서도 돈 놓고 가라고 손 나가요.
이건 습관이에요.
단순히 습관적으로만 그 안에 알맹이가 빠진 채 하는 기도는 예수님이 바로 답하지 않으세요.
다시 한번 잊기 전에, 기도의 4가지 요소.
첫 번째 진실해야 하고, 두 번째 절박한 마음으로, 세 번째 성실성, 네 번째 필요성.
그러면 여러분들의 기도는 이 기도의 중요한 요소 중에 뭐가 빠져 있을까?
뒤돌아보면 내가 아쉬울 때만 절박할 때만 기도했던 것 같아.
내 기도에는 성실함도 없었고, 기도의 응답을 들은 다음에 내가 어떻게 하겠다,
혹은 주님이 나를 어떻게 쓰시겠다는 것에 대한 다짐한 적이 없어.
그렇게 바르티매오가 소리를 질러도 예수님은 응답 안 하죠.
‘소리 지르는 게 너 하나뿐이었냐’ 그러셨어요. 물론 이 대목은 안 나왔어요.
예수님이 지나다니는 길목에 서서 오만 사람들이 다 살려달라고 소리쳤겠죠.
예수님은 분석하신 거예요.
이 네 가지를 다 가지고 있는 목소리구나.
여러분 아시는 이야기일 겁니다.
어느 동네에서 몇 년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어요.
그래서 개신교 천주교 연합해 운동장에서 비 내리게 해달라는 기도회를 갖자고 했어요.
개신교 신자들, 천주교 신자들이 공설운동장에 모여 연단에는 목사가 기도하고 그다음에 또 사제가 기도하고 3일을 기도했죠.
그런데도 하늘은 비구름 하나 없는 거예요.
사람들이 막 지쳐가고 네 번째 날에는 사람들이 그전보다 반으로 줄었어.
그런데 4일 내내 허리가 꼬부라진 할머니가 한 번도 안 빠지고 우산을 들고나오는 거야.
정말 4일째 되는 날 우르릉 구르릉하더니 비가 쏟아져요.
박수치고 난리가 났겠죠. 알렐루야 하면서.
비가 막 쏟아지니까 사람들이 처음엔 좋았는데, 이제는 비를 피하려고 허둥지둥.
그때 운동장 한가운데 할머니가 우산을 딱 피면서 하는 말,
‘이것들아 비 오게 해달라고 기도했으면 당연히 우산 준비해야지.’
결국 모인 사람 가운데서 그 할머니의 기도 하나 때문에 하늘이 열렸다는 얘기예요.
다른 사람은 목사랑, 본당 신부랑 눈도장 찍기 위해서 나온 거예요.
하지만 그 할머니는 첫날부터 비 올 거라고 1%도 의심하지 않았어.
하느님의 백성이 이렇게 모여서 가뭄 해소해달라고 기도하는데 왜 안 되겠어?
이 할머니 이 네 가지의 요소를 다 가지고 며칠 동안을 우산을 가지고 왔던 거예요.
그래서 오늘 이 첫 번째 우리가 묵상해야 할 것은 기도의 내용이에요.
진실성, 절박성, 성실성, 필요성 이 네 가지의 내용이 있어야 한다.
그다음에 두 번째로 바르티매오가 일대일로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께서 이 소리는 군중 심리에 휩싸여 안 부르면 손해날 것 같아서 한번 따라 부르는 소리가 아니라,
절박하구나, 필요하구나, 성실하구나. 또 진실이 있구나 분별하시죠.
그러고 난 다음에 어떡하세요?
‘그를 불러오너라’
일대일 만남을 원하시는 거예요.
여기에서 바로 영적 생활의 원칙이 나와요.
우리는 반드시 예수님과 일대일로 대면하는 시간이 필요해요.
사제도 마찬가지예요.
피정 다니고 수많은 사람을 만나 온몸이 파김치여도 사제관에 들어와서는 무릎 꿇어야 해요.
그분을 일대일로 만나야 해요.
여러분도 피정가서 함께 찬송 부르고 박수 치고 신부님 강론에 은혜받고 얼굴이 환해서 돌아가더라도,
집에 가면 여러분의 집의 벽에 걸려 있는 고상 앞에 무릎 꿇고 일대일 만남을 가져야 해요.
예수님은 군중 속에서 ‘그래 내가 고쳐줄게’가 아니라 ‘데리고 와.’
귀먹은 반벙어리도 그렇게 하셨죠?
군중들 사이에서 따로 불러내서 한적한 곳으로 가서 입을 열고. 눈을 뜨고 귀를 열게 했어요.
피정 때나 기도회 때 은혜 충만해서 기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끝나고 떠나서 집으로 돌아오면 혼자가 됩니다.
바로 이 혼자가 되는 시간은 주님과 일대일 만남의 시간이에요.
저는 어떨 때 밤에 잠이 안 오면 우리 초코와 십이사도 의자에 앉아 기도하다 보면 새벽이 될 때가 있어요.
겟세마니 동산에서 예수님이 기도할 때 바로 이런 마음이었구나, 그 생각을 할 때가 있죠.
그래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군중 속에서 무엇을 하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단둘이 있을 때 무엇을 하느냐’죠.
그 사람의 영적 성장은 사람들 가운데서도 물론 친교를 통해서도 성장 되죠.
그렇지만 정말 퀄리티가 높은 영적 성장은 홀로 있을 때 그분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있죠.
아멘
그래서 영성 생활의 가장 중요한 원칙은 모임 후에 그 모임이 레지오 주회든 성령 기도회든 본당의 평협회든 아니면 봉사하든
그 후에 반드시 개인 기도를 철저히 해야 한다는 거예요.
이제 세 번째 기도의 원칙이 나옵니다.
‘나한테 데려오너라’ 해서 사람들이 바르티매오 손을 잡고 예수님 앞에까지 왔죠.
그다음에 예수님이 뭐라 그래요?
‘나에게 바라는 게 뭐냐?’
네가 생각할 때 내가 너한테 뭐 해줄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어요.
기적이 일어나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신뢰예요.
더 나가서 우리는 그것을 ‘신앙’이라고 그래요.
불려 왔는데 ‘이 사람 멀리서 볼 때랑 다르네, 삐쩍 말라서, 자기 몸도 못 가누는데 내 어려움 해결해 줄 수 있을까?’
이런 분심이 아니라 기적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신뢰가 필요해요.
그래서 예수님이 ‘내가 너한테 뭐 해줄 것처럼 여겨’ 묻잖아요.
오늘도 똑같이 여러분에게 물으셔요.
사제의 입을 통해 ‘베드로야, 토마스야, 바오로야, 오늘 여기 왜 왔어?’
주님이 불러서 왔다는 걸 이분도 들으셨어요.
그러면 ‘오늘 내가 너한테 뭐 해줄 것으로 알고 왔어?’
여러분들은 속으로 대답하세요.
어떤 거라도 좋아해요. 유치한 거라도 좋아요.
아가처럼 ‘주님 저 살려주세요. 우리 피붙이 가운데 지금 아픈 사람 있어요. 살려주세요.’
만일 어떤 환자가 희망을 잃어버린다면 그런 상태에서는 아무리 명의가 그 사람을 고쳐주려 한들 그 환자는 고쳐줄 수가 없어요.
만일에 어떤 환자가 약 대신에 물을 마시는 게 낫다고 끝까지 우긴다면, 그 사람을 고칠 약이라는 건 세상에 없어요.
기적을 경험하려면 예수님의 팔에 내 생명을 전부 다 위탁하고 미리 앞당겨서 감사드려야 됩니다.
그래서 ‘아멘’이라고 하는 뜻이 뭐라 그랬죠?
‘앞으로 일어날 것을 내가 믿겠습니다.’ 그 뜻이 아니라고 그랬죠.
‘신부님이 얘기하는 그 말이 바로 이 순간 지금 일어났음을 믿습니다.’ 하는 것이 ‘아멘’입니다.
그래서 ‘아멘’은 현재 완료형이에요.
그러니 피정할 때마다, 본당 신부님이 강론할 때마다 ‘아멘’ 하세요.
주변에서 눈치 보이면 속으로라도 ‘아멘’ 하세요.
지금 당장은 길이 안 보여도 길이 보일 거라고 하는 믿음을 갖고 감사드려야 된다 이 얘기죠.
지금 당장은 희망이 안 보여도 반드시 해결해 주실 거라고 믿고 감사드려야 되는 거죠.
신앙이 없는 사람도 어려운 일 해결되면 조상에게든 천지신명께든 다 감사하고 살죠.
그들과 우리가 다른 건 뭐냐?
우리들은 해결되지 않아도 미리 감사해야 해요.
그게 신앙인과 이방인의 차이예요.
이방인들은 좋은 결과가 나오면 그때야 감사합니다.
하지만 우리 믿는 자들은 캄캄한 밤에서 어디가 앞이고 어디가 뒤인지, 앞에는 절벽이고 뒤에는 낭떠러지,
정말 어떻게 할 수가 없는 상황이라도 ‘주님 저 살려주실 거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내 피정 때 그런 얘기한 적이 있어요.
어느 회장님이 등산을 갔다가 일행을 놓쳐 밤은 어두워졌는데 산속을 헤매다가 낭떠러지에 주르르 미끄러졌죠.
‘아이고’ 하면서 막 미끄러지다가 딱 나뭇가지를 잡았어.
대롱대롱 매달려 사람 살리라고 해도 아무도 없었죠.
사람이 도와줄 수 없다는 걸 아니까 그다음에 하느님을 찾았죠.
‘주님 저 좀 살려주세요.’
예수님이 샤워하다 어떤 놈이 시끄럽게 밑에서 떠들어.
문을 열고 보니 서울 어느 본당 회장이야.
그래서 예수님이 이렇게 보면서 ‘나 찾았냐?’
‘아유 주님 계셨네요. 주님 감사합니다. 저 좀 살려주세요.’
그랬더니 예수님이 쌀쌀맞게 ‘그냥 손 놔.’ 그러고서 창문 닫아버리는 거예요.
‘아이고 손 놓으면 저 죽어요.’
그렇게 손 놓으라는 말만 하고 문도 안 열어보셔.
그래서 30분을 더 매달리다 ‘세상에 믿을 인간 하나도 없네.’하며 예수님한테 욕을 퍼부었죠.
나중에는 이 나무가 뚝 부러지면서 떨어졌는데, 세상에!
떨어져 보니까 30cm 위에 매달려 있었던 거야.
예수님이 그거 봤잖아요.
거의 다 내려와서 손만 놓으면 되는 건데.
‘손 놔, 그러면 믿어야죠.’
손을 놔서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저분이 놓으라면 놔야 하는 거예요.
붙잡으라면 붙잡아야 하는 거고.
그거 딱 놓았으면 정말 예수님이 얼마나 칭찬했겠어요. ‘역시 사목회장이랑 달라.’
그러면 그냥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그 사람은 죽을 때까지 쪽팔렸대요.
회장직 내놓고 ‘저는 회장 할 자격이 없습니다. 예수님 말 안 들었어요.’
신앙인들은 고통 중에서 감사드려야 됩니다.
왜냐? 고통도 은혜이기 때문이지요.
내가 며칠 전 우이동 성당에 가서 하느님과 우리와의 주파수가 4가지 있다고 그랬죠.
FM 방송도 주파수가 안 맞으면 아무리 비싼 라디오라도 잡음밖에 안 들려요.
우리가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는 주파수 첫 번째는 양심이라고 했어요.
두 번째는 사제의 말씀이라고 그랬고, 세 번째는 성서의 가르침이라 그랬죠.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가 가장 힘 있게 우리에게 오지만 누구나 다 거부해요.
왜? 그 네 번째가 고통이기 때문에 그래요.
고통을 원하는 사람 없어요, 이 세상에 어느 사람도.
그런데 그 고통을 통해서 다른 어떤 주파수보다도 예수님의 목소리가 더 깨끗하게 들리죠.
그 주파수만 맞으면 목소리를 들으면서 우리는 분별이 생겨요.
이 고통 중에 어떻게 더 망가지지 않을 수 있는가 하는 방법을 그 주파수를 통해서 알려주신단 말이에요.
내가 개사한 노래 가운데도‘고통도 은혜여라.’가 있어요.
마지막으로 네 번째로 바르티매오는 은혜를 갚을 줄 아는 사람입니다.
아까 얘기한 대로 ‘주님이 나를 필요로 하고 계시구나.’
그래서 눈이 떠진 다음에 바르티매오는 예수님을 따라나섰다고 되어 있어요.
그 자리에 그냥 다시 주저앉은 것이 아니라, ‘내 눈을 뜨게 해주신 저분을 나는 따라다니면서 봉사해야 해 저분 도와드려야 해.’
우리는 인생 삶이 어려울 때마다 하느님 앞에 이런저런 약속하며 도움을 청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 어려움이 해결되면 약속을 안 지킬 때가 많아요.
뭐, 때가 됐으니까 해결된 거지, 그 바쁜 분이 뭐 신경이나 썼겠어? 하면서도
‘따라나섰다’라는 것은 뭘 의미하겠습니까?
예수님 가신 길을 따라간다는 거죠. 예수님 가신 길은 어떤 길이에요?
첫 번째 십자가의 길이에요. 두 번째 환난의 길이에요. 세 번째 모욕당하는 길이에요.
이 세 가지의 길을 따라나섰다 그 뜻이에요.
예수님 따라가는 그 길이 꽃밭이 아니었죠. 고속도로가 아니었어요.
바르티매오는 눈이 낫고 난 다음에 주님 따라갔어요.
‘내가 저 어른 따라가면 내 십자가 이겨낼 수 있어. 내가 저 사람 쫓아다닌다고 나중에 한 패거리 소리 들어도,
모욕을 당해도, 내가 이겨낼 수 있어.’
뭐를 보면서? 나중에 부활할 것을 알았기 때문에.
우리가 고통 중에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이방인과는 달리 우리는 부활 신앙이 있기 때문이죠.
부활 신앙이 없다면 종교 그냥 그것은 그냥 사업이에요.
예수님 부활하셨잖아요?
부활하고 비로소 성령을 보내주신 다음에야, 그 12명의 오합지졸 제자가,
현세적인 출세만 할 줄 알았던 그 제자들이 잡혀갈까 무서워 벌벌 떨고 있다가
다락방 문을 박차고 나가면서 전 세계로 주님 부활하셨다는 걸 알렸습니다.
부활한 예수님이 지금 여러분을 위에서 웃고 계시죠?
‘내가 부활했듯이 분명히 부활할 거야. 조금도 의심하지 말아.’
‘오늘 치유의 역사가 일어날 거야. 어둠이 있는 자에게 구만의 역사가 일어날 거야.
그래서 들어올 때 얼굴과 전혀 다른 얼굴을 내가 내보내 줄게. 내가 웃듯이 같이 웃어라.’
한번 웃어봐요. 이쁘게.
우리 매괴 성모님도 웃고 계세요.
그런데 저 웃음은 싼 웃음이 아니야.
저 웃음 만들려고 내가 작가한테 세 번을 빠꾸를 시켰어.
처음엔 슬픈 얼굴이 왔어. 아니 아들 예수님이 웃고 있는데 왜 엄마가 슬퍼해야 해?
빠꾸 바꾸 하다가 세 번째는 물었어.
‘요셉아 너 기도 안 하지? 9일 기도하고 다시 작업 들어가 봐.’
9일 기도하고 난 다음에 이렇게 은은한 미소를 만들 수 있었던 거예요.
정말 성모님은 밤에 보면 살아계신 것 같아.
그리고 내가 좀 지치고 힘들고 그럴 때 쳐다보면 되게 걱정하는 얼굴이에요.
성모님 얼굴이 바뀌는 거 알죠?
여러분 집에 모시고 있는 성모상도 얼굴 바뀌어요.
체험해 보신 적 있죠? 바뀌어요. 바뀌어요.
우리들이 죄 중에 떨어졌을 때 성모님 얼굴은 슬퍼해요.
좌절에서 일어나지 못할 때는 너무너무 안타까운 얼굴이에요, 엄마이기 때문에.
오늘 복음은 그냥 눈먼 거지 소경이 눈 뜨는 그런 단순한 스토리가 아닙니다.
오늘 여러분들 지금 피정하고 계신 거 아시죠?
기도의 본질이 무엇이고, 일대일로 만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또 ‘내가 너에게 정말 무언가 해줄 것을 믿고 있느냐?’ 하는 그 말에 우리들은 자신 있게 대답해야 한다는 거죠.
그리고 바르티매오는 마지막에 어떻게 했다고요?
눈이 뜨고 난 다음에 다른 거 다 포기하고 예수님만 따라다녔어요.
십자가의 길을 따라다녔고, 고난의 길을 쫓아갔고, 모욕의 길을 받아들이면서
부활을 바라보면서 따라나섰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