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에 대한 상담을 진행하면서 폭력 때문에 고통 받고 때로는 죽거나 방어하기 위해 살인에 이르고 마는 사건들에는 거의 비슷하게 전개되는 패턴이 있습니다. 이를 대중적으로 이슈화하면 피해를 줄일 수 있지 않겠어요.”
이화영 서울여성의전화 사무국장이 밝힌 ‘여성인권영화제’의 존재 이유다. 용기 있게 얘기하지 못하는 문제들에 거부감 없이 다가가는 데에는 영화만큼 좋은 아이템이 없기 때문이다.
여성에 대한 폭력의 문제를 영화를 통해 이야기하는 제2회 여성인권영화제가 16일부터 19일까지 서울 성북구 아리랑시네센터에서 개최된다. 올해 영화제의 주제는 ‘친밀한, 그러나 치명적인’이다. 가족, 친척, 이웃, 데이트 강간 등 가까운 관계들 속에서 벌어지는 폭력을 다룬 7개국 33편의 영화를 상영한다.
“아는 사람에 의한 성폭력이 80%에 육박하며 결혼한 남편 중 30%가 아내에게 구타를 가하고, 데이트 폭력을 경험한 20대 여성이 32.1%”라는 놀라운 사실을 알고 있는지. 이번에 상영되는 영화들을 통해 친밀한 관계에서 일어나는 폭력이 그 어떤 폭력행위보다 피해자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남긴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여성영화제도, 인권영화제도 있는데 왜 굳이 여성인권영화제를 만드느냐는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그렇지만 그 어느 영화제에서도 ‘여성에 대한 폭력’이란 주제를 깊이있게 다루진 못하고 있어요.” 서울여성의전화측은 매일 매일 벌어지는 상담 속에서 폭력의 현실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게 되는 여성단체에서 나서야 했다고 설명한다.
▲ 영화 ‘임신36개월’. 애인이 배신한 충격으로 36개월 동안 임신하게 되는 여성의 이야기.
전문적인 영화 스태프가 아닌 시민단체가 영화제를 조직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수많은 자원활동가들의 힘이 영화제를 여기까지 오게 했다. 실제 열리는 기간에만 반짝 일하는 여타 행사들과 달리 여성인권영화제에선 1월부터 지금까지 70여명의 자원활동가가 스태프들과 함께 준비해왔고, 영화제가 시작되면 그 수는 200여명으로 늘어날 예정이다. 이들은 영화를 선정하는 일에서부터 프로그램 기획, 자잘한 행사도구 만들기까지 모든 활동에 직접 참여했다.
영화제 사무실 한쪽에서 이벤트를 위한 도구를 열심히 만들고 있던 이학성(27·고려대 기계공학과)씨는 ‘부대행사팀’ 소속의 자원활동가. 평소 여성주의에 관심이 많아 서울여성의전화 온라인 회원에 가입했었는데 뉴스레터에서 모집공고를 보고 지원하게 됐단다. 박의준(25·서울장신대 사회복지학과)씨는 크고 작은 여러 영화제에서 자원활동가를 해온 베테랑. 같은 집 2층에 사는 아주머니가 평소 남편한테 맞고 사는 모습을 봐왔기 때문에 여성폭력이라는 주제에 관심을 갖게 됐단다. 이화영 사무국장은 “지난해 영화제의 가장 큰 성과가 자원활동가들의 변화”라고 얘기한다. “영화제에 관심이 있어 왔는데 여성주의를 배우고 간다”고 말했던 자원활동가들에게서 희망을 보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여성인권영화제는 지역주민 속으로 들어가는 지역축제로서 영화제를 확장시키려는 새로운 접근방법을 시도한다. 이번에 유명 상영관이 아닌 아리랑시네센터를 선택하게 된 것도 같은 이유다. 차려 입고 가는 문화행사가 아니라 슬리퍼를 끌고 나온 아줌마나 트레이닝복 차림의 아저씨들도 부담 없이 자연스럽게 즐길 수 있는 축제를 만들고 싶은 것이 여성인권영화제 스태프들의 바람이다. 앞으로도 각 지역을 돌아다니며 지역축제로서의 여성인권영화제를 활성화시킬 계획이다.
상영되는 주요 영화는폭력 극복한 여성들의 33가지 이야기
▲ 개막작 ‘가정폭력을 말하라’.
이번 영화제에서는 7개국 33편의 영화들을 3개의 주제로 나누어 상영한다.
개막작은 엠마누엘 미에 등 10명의 프랑스 감독이 만든 옴니버스 단편영화 ‘가정폭력을 말하라’. “가정폭력에 대해 말하십시오. 당신은 이미 문제를 해결하기 시작한 것입니다”라는 슬로건 아래 가정폭력 피해 여성들에게 침묵을 깨라고 요구한다. 10명 중 1명이 가정폭력에 희생당하고 3일마다 1명의 여성이 가정폭력으로 사망한다는 프랑스의 믿을 수 없는 현실 속에서 가정폭력에 대한 대중의 의식을 환기시키고 예방하기 위해 제작됐다.
‘나 마주하다’ 섹션은 폭력임을 몰랐다가 이를 인식하게 되는 사람들을 다룬다. 아내 강간과 관련한 논란을 주제로 한 ‘친밀한 강간’, 가사노동 분담과 아내 재취업 문제로 갈등하는 부부 논쟁을 그린 ‘당신과 나 사이’ 등 8편을 상영한다.
‘그래도 살고 있다’ 섹션에선 폭력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여성들을 그린다. 명예살인의 실화를 기초해 만든 ‘아침에’, 고된 일과 살림을 하며 엄마, 마누라, 아줌마의 1인 3역을 강요받는 여성의 하루하루를 표현한 ‘남정순, 엄마누라줌마’ 등 12편이 마련된다.
‘오늘, 피어나다’ 섹션은 폭력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꾸려가는 여성들의 당당한 이야기를 담는다. 상드린 베시세 감독의 자전적 스토리 ‘크리스마스에 눈이 올까요?’, 여성과 정신병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는 ‘미친 여성들과의 대화’, 같은 이름을 가지고 저마다의 삶을 살아가는 여성을 그린 유쾌한 다큐멘터리 ‘그레이스 리 프로젝트’, 유아 성폭력 생존자들의 상처를 담은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 ‘더 워시: 클리닝 스토리’ 등 13편이 관객을 기다린다.
박윤수 기자 birdy@
929호 [문화] (2007-0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