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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정산(金井山801.5m)
<김해 신어산(神漁山)정상에서 바라본 금정산 전경>
부산의 진산 금정산(金井山801,5m)에는 금샘(金井)이 있는데 세상에 전하는 말에 의하면 산정에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우물에 황금빛 물이 가득차서 범천(梵天)에서 금빛 물고기가 오색구름을 타고 내려와 이 우물에서 노닐었다하여 이 샘을 금정(金井)이라하고 이산을 금정산(金井山)이라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그 아래 절을 지어 범어사(梵魚寺)라 칭한다. 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알려진 국내최장 산성 둘레 18km에 이르는 금정산성 (金井山城 사적 제215호)이 있고 산 아래 동래온천이 있어 사철 가마솥처럼 펄펄 끓는 물이 솟아올라 우리나라 제2의 도시 부산(釜山)을 이루었다. 이 산은 낙동정맥이 남쪽으로 뻗어 낙동강하구 몰운대(沒雲臺)까지 이어진다. 정상 고당봉 (姑堂峰)에 서면 낙동강하구와 남으로 광안대교가 내려다보이고 동쪽으로는 동해가 보이고 북으로 신불산이 보인다. 서쪽으로 눈 아래 낙동강과 김해평야가 내려다보이고 불모산(佛母山)과 낙남정맥의 끝자락 신어산(神魚山)이 낙동강 건너에 보인다. 서울의 진산이 북한산이라면 부산의 진산이 금정산이다. 금정산성, 동래온천, 금강공원, 범어사 등이 있다. 봄가을에 찾으면 좋은 이산은 성안에 금성동 산성막걸리가 유명하다. 따라서 시내에서 가깝고 교통편도 좋아 많은 사람이 찾는다.
봄바람 가르며 산성 길 따라 오른 금정산
<상계봉에서 내려다본 만덕터널입구 풍경>
오늘 금정산 산행기점은 만덕동(万德洞) 만덕역(만덕터널입구)이다. 이곳은 북구 구포동과 동래구 온천동을 연결하는 도로가 지나는 곳이다. 09시50분 차에서 내리니 북쪽으로 상계봉이 멋지다. 당초 계획은 남문마을을 거쳐 남문으로 오를 계획이었으나 도착을 해보니 상계봉에 매력이 끌려 상계봉으로 방향을 틀었다. 만덕역에서 걸어서 소방도로를 따라 약 1km를 오르니 상계봉아래 상계초등학교가 있다. 여기서 상계봉 오름길은 학교 좌우로 산 중턱에서 만나는 두 개의 길이 있다. 등산로 안내표시가 없어 초행자는 당황할 수가 있다. 첫 단추를 잘 꽤어야 산행계획에 차질이 없다. 오랜만에 와서 보니 예전에 없던 학교가 생겼다. 나는 이리 갈까 저리 갈까 망설이던 중에 약수터에 약수를 길르러 가는 할머니를 만났다. 옛말에 “아는 길도 물어서가라!”했거늘 익숙하지 못한 길은 물어서 가는 것이 내게 유익이다. 요즘 보기 드물게 허리가 기역(ㄱ)자로 굽은 할머니를 따라 산길로 접어들었다. 배낭을 짊어지고 물병을 든 올해 일흔 아홉 되셨다는 할머니는 “평생을 이 마을에서 살았는데 젊어서 저 먼 당에 산나물 뜯으러 많이도 올라 댕겼지요.”했다. 먼 당이라? 내게도 그리 낮선 용어가 아니다. 옛적 민간신앙에서 집안에 정한 수 떠 놓고 소원을 빌기도 했지만 흔히 산위에 소원을 빌던 고모당이나 산신당 같은 당집이 있었던 연유에서 비롯된 용어가 아닌가?
<상계봉 오름길에서 내려다본 낙동강 구포대교>
<상계봉 북쪽풍경>
약수터 갈림길에서 할머니와 작별하고 혼자서 상계봉(上鷄峰640,2m)에 올랐다. 산 아래에서 보는 것도 좋지만 와서 보면 더 좋다. 금정산은 봉마다 비경이 아닌 것이 없지마는 상계봉의 멋진 풍광에 시간가는 줄 모른다. 내려다보니 산 아래 만덕터널입구 주변의 산 벚꽃들이 수를 놓았고 낙동강 삼각주의 멋진 풍광이 눈 아래 펼쳐진다. 또 남문 쪽으로 몰운대로 이어지는 능선에는 진달래도 곱게 피어있다. 오늘은 혼자 왔기로 시간에 얽매이지 않고 느긋하게 산행을 하고 있다. 하지만 마냥 한곳에 머무를 수는 없다. 남문으로 향한다.
<금정산성 남문>
진달래 꽃길 따라 걸어서 금정산성 남문이다. 금정산성(金井山城 사적 제515호)은 동래산성으로 부르다가 금정산성으로 고처 부르고 있다. 우리나라 최장인 둘레18km의 산성으로 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 남문은 여섯 갈래 사통팔달의 등산로가 연결된 중요한곳이다. 여기 와서 많은 사람을 만났다. 신라가 가야를 치기위해 눈독을 들였을 남문 옆 서쪽 상계봉(上鷄峰640,2m)에 오르면 낙동강 건너 옛 가야의 도읍지 김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동쪽으로 산 아래에 오랜 역사를 자랑하며 가마솥처럼 펄펄 끓는 물이 솟아올라 부산의 지명이 부산(釜山)이 되게 한 동래온천과 금강공원이 자리하고 있다. 동래는 지금의 부산 전 지역을 관할하던 옛 동래부의 소재지다.
남문 동편에 남북으로 이어지는 이 능선은 낙동정맥 금정산에서 몰운대로 이어지는 능선으로 만덕터널과 구덕터널이 관통되고 몰운대에서 산줄기는 꼬리를 감춘다. 몰운대(沒雲臺)전망대에 서면 낙동강하구 삼각주에 철새 도래지로 유명한 을숙도와 다대포가 내려다보이다. 충무공 이순신 (忠武公 李舜臣1545~1598)장군의 난중일기에 임진년 다음해인 계사년 구월 초하룻날 새벽 두시쯤에 출항하여 다대포 앞바다 몰운대에 이르렀다 했다. 장군의 선봉장이었던 정운 (鄭運)이 500여척의 왜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는데 생전에 이곳이 몰운대라는 말을 듣고 운(雲)자가 자기이름 운(運)자와 음이 같아 아몰차대 (我沒此臺)라 곧 “내가 이대에서 죽을 것이다.” 라고 했다한다.
일본을 통일시킨 왜국의 절대 권력자 풍신수길(豊臣秀吉,도요토미 히데요시1536~1598)은 명나라를 치기 위하여 조선에 길을 내어달라고 요구해왔다. 선조는 단호히 거절했다. 이에 격분한 풍신수길은 “내 조선팔도를 우리 말발굽으로 짓밟아 없애리라”하고 전국에 동원령을 내렸다. 부산포를 일격에 함락시킨 왜군은 동래성을 포위했다. 동래성전투는1592년 4월15일 정발(鄭撥1553~1592)장군이 이끄는 조선군사 7천명으로 훈련이 부족한 군사, 보잘것없는 무기로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다. 여기서 당시 비장의 무기인 조총으로 무장한 잘 훈련된 소서행장(小西行長)이 이끄는 왜군20만 대군과 싸워 참패했다. 이때 정발장군과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이 순절했다. 왜군은 바람처럼 휩쓸어 상주 충주 한양을 함락시키고 조선팔도를 초토화시키며 평양성까지 함락시켰다. 이때 선조는 의주로 피신했다.
왜군은 1592년4월14일 부산포를 함락시키고 다음날 4월15일 동래성이 함락됐다. 왜장 소서행장(小西行長)은“ 싸울 테면 싸우고 싸우지 못하겠으면 우리에게 길을 내어 놓으라고 (戰則戰矣 不戰則假道)”고 요구했다. 이에 동래부사 천곡 송상현 (泉谷 宋象賢1531~1592)은 “죽기는 쉬우나 길은 내어놓기 어렵다(戰死易假道難)”며 거부하다가 순절했다. “東萊 四月十五日”은 이로부터 15년 뒤 1607년 4월15일 동악 이안눌(東岳 李安訥1571~1637)선생이 동래부사로 부임하던 날, 속담에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했는데 임진왜란을 겪은 후15년이 지난 그때까지도 지워지지 않은 비극적인 참상을 목격하고 시적으로 표현한 사료적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나는 오늘도 메모해 온 “동래 4월15일”을 펼쳐들고 다시 한 번 읽어본다.
東萊 四月十五日 (동래 4월15일)
四月十五日 平明家家哭 天地變 蕭瑟振林木(사월십오일 평명가가곡 천지변 소슬진림목) 4월15일 새벽 집집마다 곡을 하니 천지가 온통 쓸쓸하게 변하고 스산한 바람이 숲을 뒤흔든다.
驚怪問老吏 哭聲何慘憺 壬辰海賊至 是日城陷沒(경괴문노리 곡성하참담 임진해적지 시일성함몰) 임진년에 해적들이 들이닥쳐 그날에 성은 무너졌다는 것은 알지만 놀라고 기괴하여 늙은 아전에게 물었지. “통곡하는 소리 어찌 이리 참혹한가?”
唯時宋使君 堅壁壁守忠節 閤境驅入城 同時化爲血(유시송사군 견벽벽수충절 합경구입성 동시화위혈) “다만 송 사또만 있어서 성벽을 굳게 닫고 충절을 지키니 경내의 사람들이 성안으로 몰려들어 동시에 피바다를 이루었지요.
投身積屍底 千百遺一二 所以逢是日 設尊哭其死(투신적시저 천백유일이 소이봉시일 설존곡기사) 쌓인 주검에 몸을 던졌으니 천명중에 한두 명만 살아났지요. 그날 이곳에 처 들어와서 죽은 자를 위해 곡하는 것이지요.
父或哭其子 子或哭其父 祖或哭其孫 孫或哭其祖(부혹곡기자 자혹곡기부 조혹곡기손 손혹곡기조) 아버지가 자식을 위해 곡하기도 하고 자식이 아버지를 위해 곡하기도 하고 할아비가 손자위해 곡하기도하고 손자가 할아버지를 위해 곡하기도하고
亦有母哭女 亦有女谷母 亦有婦哭夫 亦有夫哭婦(역유모곡녀 역유여곡모 역유부곡부 역유부곡부) 또 어미는 딸 때문에 곡하기도하고 또 딸은 어미 때문에 곡하기도하고 또 아낙네는 남편 때문에 곡하기도하고 또 남편은 아내 때문에 곡을 하고
兄弟與姉妹 有生皆哭之 蹙額聽未終 涕泗忽交頤(형제여자매 유생개곡지 축액청미종 체사홀교이) 형제와 자매까지 산자는 모두가 곡 한다오” 찡그린 채 차마 다 듣지 못하는데 눈물이 문득 뺨에 가득하네.
吏乃前致詞 有哭猶未悲 幾多白刃下 擧族無哭者(이내전치사 유곡유미비 기다백인하 거족무곡자) 아전이 앞에 나아와 다시 말하기를 “곡할 이 있는 것은 그래도 슬프지 않지요. 얼마나 많은데요, 시퍼런 칼날에 온 가족이 다 죽어 곡 할이 조차 없는 사람이...”
북쪽 신불산에서 금정산을 거처 남쪽으로는 낙조로 유명한 몰운대(沒雲臺)로 이어지는 낙동 정맥이 지난다. 몰운대는 낙동강 하구와 강 건너 철새도래지로 알려진 을숙도와 다대포가 내려다보이는 곳, 충무공 이순신 (忠武公 李舜臣1545~1598)장군의 난중일기에 임진년 다음해인 계사년 구월 초하룻날 새벽 두시쯤에 출항하여 몰운대에 이르렀다 했다. 장군의 선봉장이었던 정운 (鄭運)이 500여척의 왜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는데 생전에 이곳이 몰운대라는 말을 듣고 운(雲)자가 자기이름 운(運)자와 음이 같아 아몰차대 (我沒此臺) 곧 “내가 이대에서 죽을 것이다.” 라는 말을 남겼다한다. 또, 임진왜란 발발 15년이 지난 후 동악 이안눌(東岳 李安訥1571~1637) 이 홀어머니를 남겨두고 동래부사로 부임해 왔다. 천리 타향에 동래부사로 와 있는 자신의 처지와 다대포를 순시하며 쑥대밭이 되어 복구조차 하지 못한 을씨년스런 풍경과, 황폐한 민심을 목격하고 나서 전후 참상을 한편의 시로 남겼다.
多大浦(다대포)
行盡黃茅到海邊 (행진황모도해변) 노란 띠 풀 길 끝나 바닷가에 이르니
壞城牢落斷人煙 (괴성뢰락단인연) 무너진 성 쓸쓸하고 민가는 끊어졌네
溟波直接蠻兒島 (명파직접만아도) 바다물결 곧바로 오랑케 섬에 닿아
邏卒常驚賈客船 (라졸상경가객선) 나졸 들은 장삿배에도 늘 놀라네
故國一千增卄里 (고국일천증입리) 고향은 일천리에 이 십리를 더하고
孀親八十小三年 (상친팔십소삼년) 홀어머니는 팔십에서 삼년이 적네
孤身此地頭堪白 (고신차지두감백) 외로운 몸 여기서 늙어 감을 견디는데
況對寒林聽晩蟬 (황대한림청만선) 건너편 찬 숲엔 늦은 매미소리만 들리누나!
<산성고갯길 부근에서 바라본 파리봉>
남문을 떠나 동문으로 향했다. 제2망루를 지나고 대륙봉(大陸峰520m)을 지나 산성 고개이다. 능선에서 내려다본 산성마을은 온통 벚꽃과 목련꽃으로 덮여있다. 동문에 이르기 전 이 산성고개 길은 시내에서 금성동 산성마을로 통하는 시내버스가 다닌다. 금정산은 시내에서 가깝고 접근이 용이해 부산시민들이 주말이면 많이 찾는다. 산성마을은 행정명칭으로는 금정구 금성동인데 군량미 창고가 있던 공해마을, 중성문이 있었던 중리마을, 화살을 만들 때 쓰던 대가 생산되었던 죽전마을 이렇게 해서 산성 안에 3개 마을을 통틀어 속칭 산성마을이라 부른다. 요즘 산성마을은 산성막걸리와 흑염소불고기가 유명한데 최초 산성막걸리를 제조한 이는 국(麴)씨와 두(杜)씨였다고 전 한다. 그들은 임진왜란당시 일본으로 잡혀갔고 이후에는 기장군 철마에 살던 김장사(金壯士)라는 사람이 이곳에서 대(代)를 이어왔다고 전한다.
<577봉 제3망루 부근의 풍경1>
동문을 지나 광안리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제3망루가 있는 577봉이다. 망루신축공사로 출입이 차단되어 있었다. 의상봉과 제4망루가 바라보이는 이 봉은 주변경관도 아주 좋다. 오늘은 주변에 진달래까지 만개해 멋진 바위와 진달래꽃이 수놓아져 금상첨화의 경관을 보여 주었다.
<577봉 제3망루 부근의 풍경2>
주말에 비바람이 몰아간 오늘은 바람도 적당히 부는 상쾌한 날씨다. 칼칼한 목도 트이고 막힌 코가 탁 트인다. 금정산 산행을 5일 앞당겨 실행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주말에 차가운 비바람을 맞았더니 코가 시큰 시큰하고 고열로 머리가 띵한 걸로 봐서 감기증세의 하나인 고뿔(高熱)이 온 듯했다. 한겨울에도 방문을 열어놓고 잠을 자는 나의 습관 때문에 찬바람이 들어오기도 했다. 이럴 때에는 나는 10 여 년 전부터 의례히 병원으로 가지 않고 대신에 산으로 갔다. 감기가 걸리면 병원으로 가는 것이 상식처럼 생각되지만 내게는 산으로 가는 남다른 방법을 쓴다. 아내는 번 번히 독감예방주사를 맞으라고 내게 권고하지만 나와는 대조적으로 정작 해마다 예방주사를 맞는 아내는 감기를 달고 산다. 때문에 산에 자주 다니고 부터는 나는 감기로 인하여 병원에 가본 적이 없다. 감기는 조심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춥다고 걸리는 것도 아니고 덥다고 안 걸리는 것도 아니다. 감기는 눈이 없어도 허약한자를 족집게처럼 골라 만만해 보이는 사람에게 잘 덤빈다.
<합죽선(合竹扇)을 펼쳐 놓은 듯 하다해서 부채바위>
이어 동문을 지나 오르막을 올라 부채 바위다. 바위 모양이 합죽선(合竹扇)을 펼친듯하다 하여 부채 바위다. 어느 것 하나 그냥 지나치고 싶지 않는 산성길이다.
<제3망루 577봉에서 바라본 의상봉과 제4망루>
(가까이서 본 의상봉 주변풍경>
다시 고도를 높여 제4 망루를 지나 의상봉(義湘峰640,7m)이다. 이 봉은 호봉(虎峰)과 용봉(龍峰) 두 개의 암봉으로 되어있다. 동 시대의 인물 신라의 고승 원효와 의상이 있다. 원효봉(元曉峰687m)과 의상봉(義湘峰641m)은 여기서도 이웃하고 있다. 의상봉 꼭대기에 올라가 본다. 의상망해(義湘望海)라 동해를 바라볼 수 있어 일출이 좋고 남으로 광안대교가 내려다보인다. 오늘은 기온이 올라가자 대기가 흐려져 흐릿하다, 원효(元曉617~686)가 있는 곳에 의상이 있고 의상(義湘625~702)이 있는 곳에 원효가 있다. 1970년대 산악인들이 가까이 원효봉이 있어 여기 호봉과 용봉 이 두 개의 봉을 의상봉으로 고처 부르게 되었다 한다.
의상봉에서 내려와 다시 원효봉으로 향한다. 다시 고도를 높여 원효봉(元曉峰686,9m)이다. 원효대사가 수도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의상봉보다 더 높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예정보다 많은 시간이 걸렸다. 오늘은 홀로 산행이라 느긋하게 시간을 보낸 것 같다. 정상 고당봉에 해가 서쪽으로 틀어지기 전에 도착해야 금정산의 백미인 고당봉 주변의 풍경을 깨끗하게 담아 갈수 있을 텐데 금샘을 거처 아직 1시간을 더 가야 된다. 오후 되자 날씨도 점점 흐려지는데 그늘까지 드리워지면 좋은 사진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원효봉을 내려서 북문이다. 여기는 길이 동서남북으로 통한다. 동으로 범어사, 서로 산성마을, 남으로 능선 산성 길, 북으로 1,1km 거리의 정상 고당봉으로 갈 수 있다. 북문주변은 세심정 아래로 비교적 넓은 평지다. 이곳에서 화엄법회를 열고 원효가 화엄경을 설법했다 해서 화엄벌이라고도 한다.
우리말에 야단법석(野壇法席)이란 말이 있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은 어디든 떠들썩하기 마련이다. 원효대사는 그때나 지금이나 이름만큼 유명했나 보다. 원효대사의 설법을 듣기위해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고 한다. 운집한 그 많은 사람들을 실내에 앉혀놓고 설법을 할 수 없을 정도여서 넓은 들판에 강단을 마련하고 법석을 깔아놓고 설법을 한데서 유래된 말이라 한다.
<금정산<金井山)의 이름을 제공한 금샘 (金井)>
정상으로 향한다. 직진하면1,1km에 30분이면 충분히 오를 수 있으나 나는 지금 금샘을 거쳐 오를 예정이어서 1시간은 걸릴 것 같다. 금샘으로 가는 길은 정상 고당봉으로 오르는 길에서 우측으로 두 개의 길이 있다. 두 번째 길에서 우측으로 가야 빠른 길이다. 나는 굳이 이를 알면서도 거리가 곱절이나 먼 첫 번째 길을 택했다. 돌아서 올라 금샘이다.
금샘(金井)은 정상 고담봉 동남쪽 아래 암봉에 있다. 외진 곳에 있어 찾는 이가 많지는 않는 것 같다. 소뿔처럼 생긴 바위꼭대기에 금샘이 있다.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고 황금빛 물이 가득 차있다는 금샘, 하늘에서 황금빛 금어(金魚)가 오색구름을 타고 내려와 놀다가 갔다는 전설이 있는 금샘. 그래서 산 이름마저 금정산 (金井山)이 되게 한 금샘이다. 의상(義湘625~702)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하는 범어사의 창건설화와도 관련이 있다. 원효석대(元曉石臺), 자웅석계(雌雄石鷄)와 함께 암상금정(巖上金井)은 범어사(梵漁寺) 3기(三奇)의 하나다.
<금정산 정상 고당봉 동쪽풍경>
금정을 떠나 0,5km 거리 고당봉을 향해 오른다. 가까이서 쳐다보는 금정산 동편의 멋진 암봉들은 주변풍광이 역시 금정산의 백미이다. 시간이 늦어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 그늘이 지고 날씨마저 흐려져서 아쉽다. 오전 중에 왔어야 좋았을 건데 말이다.
예정보다 1시간 이상 늦은 15시10분 금정구 금성동 산1-1번지 금정산정상 고당봉 (姑堂峰801.5m)이다. 바위를 쌓아 거대한 봉우리를 빗어 놓았다. 정상에 서면 거칠게 없이 조망이 좋다. 동쪽으로 동해가 내려다보이고 서쪽으로 낙동강건너 김해평야가 눈 아래다. 남으로 광안대교가 내려다보이고 북으로는 눈 아래 양산시가지가 내려다보이고, 저만치 신불산등 영남알프스의 산군(山群)들이 몰려든다. 그러나 오늘은 기온이 올라가면서 연무현상이 시야를 가린다. 날씨가 좋으면 목이 시계바늘처럼 저절로 돌아가게 만드는 곳, 그러나 오늘은 시야가 흐려 아쉽다. 산 아래에서는 잎이 피고 꽃이 피는데 정상주변 해발700m 이상 고지대에는 아직도 겨울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천구만별 (千龜萬鼈)! 일천 마리의 거북과 일만 마리의 자라가 뒤덮고 있었다는 금정산, 이제부터 하산길이다.
<금정상 정상 고당봉 서쪽풍경>
정상에서 내려서는 순간에 나타나는 고모당 당집건물이 지금도 있다. 무룻 여자는 시집을 가서 아들딸 낳고 손주를 두어도 마음은 친정이 잘되기를 바란다. 사실 그래야 기죽지 않고 자신의 위상이 돋보인다. 하지만 요즘은 시대가 변하여 내 새끼 먹여 살리느라 정신이 없겠다. 어떻게든 정한 수 떠놓고 자손들이 잘되기만을 바라며 빌던 옛 할머니들 이었다. 지금도 금정산 정상 고당봉(姑堂峰801,5m)에는 민간신앙의 기도처인 고모산신당(姑母山神堂)이 있다. 고모영신 (姑母靈神;고당할미)과 산왕대신 (山王大神; 금정산 호랑이)의 위폐를 모신 사당이다. 안으로 들어가 본다. 방안에는 제단이 있고 밖에는 “무속행위금지”라는 경고판이 놓여 있었다. 지리산 노고단과 함께 금정산 고당봉이 대표적인 민간신앙의 기도처라 하겠다. 하늘에서 고모할미가 내려와 산신이 되었다는 전설에서 유래되었다.
<472봉 아래 미륵사 풍경>
고모당을 나와 전망대가 설치된 계단을 타고 내려오면 서쪽으로 뻗은 능선부근에 갈림길이 있다. 남쪽으로 직진하면 북문으로 내려가고 서쪽 능선을 타면 약 6,3km의 호포역으로 간다. 나는 오늘 계획에 없는 서쪽능선으로 진입한다. 미륵사를 경유하기위해서다. 능선을 타고 1,2km를 내려가 472봉 아래 미륵사를 관람했다. 멋진 암봉 아래에 자리 잡은 암자다.
<금정산 범어사 주변의 신록>
암자를 나와 0,8km의 거리에 있는 북문으로 향했다. 북문을 거쳐 내려와 범어사(梵漁寺)다. 사찰주변은 봄이 완연하다. 봄의 꽃들이 만발하고 신록이 푸르렀다. 오늘산행은 범어사에서 범어사역까지 약2km의 거리를 걸어서 내려가기로 되어있는데 예정에 없던 상계봉과 미륵사를 경유했기로 현재시각 16시40분 범어사에서 산행을 종료하기로 했다. 오늘의 행로는 만덕역(만덕터널입구)~상계초등학교~상계봉~남문~동문~부채바위~제3망루(577봉)~의상봉~원효봉~북문~금샘(金井)~금정산 정상 고당봉~미륵사~북문~범어사다. 거리16,6km 6시간 30분이다.
2013년 4월8일 월요일 맑은 후 흐림
첫댓글 제가 자주가는 우리집 뒷산을 여기서 보니 넘 반갑습니다. ㅎㅎㅎ
올리신 손길 감사합니다. ^&^
예, 시시님 반갑습니다. 금정산 아래 사셨군요.
금정산에 자주가시면 금정산을 너무도 잘 아시겠지요.
시시님이 보시기에는 제 글이 아쉬운점 있으시겠지요. 감사합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저는 칭찬을 들어도 격려로 받아 들이겠습니다.
감사할 사람은 제가 아닐까요?
거듭 감사합니다.
오랫만에 보는 금정산이네요.
사진 감사합니다.
예, 影島님은 부산에 사시는 걸로 아는데 금정산에 자주 못가시는가 봐요?
하긴 저도 정작 집에서 가까운 산에는 생각보다 자주 못 가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못가본 산이지만...
산세가 수려합니다...
좋은 사진과 자세한 설명...
정말 '산이 좋아' 님이시군요! 크
금정산은 알고 보면 왠만한 국립공원 급의 수려한 산세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직 못가 보셨다니 다음에 가실 적에는 금정산에 대하여 알고 가시면 즐거움이 10배는 더 하시겠지요.
감사합니다.
잘 감상했습니다. 염소고기가 생각나내요.
산성마을 山莊들에는 산성 막걸리와 염소 불고기를 준비해 놓고
고객들이 찾아오기를 鶴首苦待하고 있습니다.
이런 곳에는 여러 사람이 가서 먹어야 제 맛이겠지요.
사진이 하나하나 아주 잘 나왔고 아름답습니다.
산행일기도 잘 읽고 갑니다.
언젠가 버스타고 순회한것 같습니다.
등산을 하며 산과 경치를 감상해야하는데
시간나면 가보고싶습니다.
금제님 반갑습니다. 집안 일이나 농사일 등으로 그동안 무척 바쁘셨겠지요.
저는 자연속에서 사시는 금제님이 부럽기도 하네요.
읽으시기에 편하게 하겠다고 약속을드렸는데 금정산도 그만 그대로 올리고 말았군요.
습관이 돼서그만...용서하세요.
내일은 도봉산갑니다 만 금년 봄의 꽃샘 추위는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어릴때 잠시 부산에서 산적이 있어서 금정산을 보니 옛추억이 새롭네요.
옛 기억도 더듬으시고 다음에 가실적에 부족하지만 산행에 도움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