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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인시대'와 한국정치
경 송
요즘 필자는 SBS에서 새벽 5~7시 사이에 재방송하는 대하드라마 “야인시대(野人時代)”를 매일 빠짐없이 시청하고 있다. 이는 필자가 본 드라마에 대해서만 세 번째 시청이다. 특히 내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드라마의 후반부분으로서, 당시 한국의 ‘주먹’들이 ‘정치깡패’로 변신하여 일대 풍파를 일으킨 1950년대 부패하고 파란만장한 한국정치사를 엿볼 수 있는 장면들이다. 10년 전 필자는 한국유학시절 비슷한 내용으로 만들어진 ‘비디오드라마’ “무풍지대(無風地帶)”를 비디오가게에서 임대해 한부도 빠짐없이 상세하게 보았는데, 그 충격적인 내용들이 지금도 눈앞에 삼삼하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비슷한 시기를 전후하여 미국의 갱(gang) 폭력단, 일본의 ‘야쿠자’ 조직 및 중국의 홍콩, 상하이(上海)에도 ‘黑社會’ 깡패조직이 있었지만, 한국처럼 주먹(깡패)이 정치가 어우러진 경우는 드물다고 봐야 할 것이다.
드라마 “야인시대”는 한국의 민족영웅 金좌진 장군의 아들인 金두환의 일대성장기를 그렸는데, 그는 당시 조선 주먹계를 ‘통일’한 자타가 승인하는 ‘주먹황제’이었다. 젊은 시절의 김두환은 조선민중이 ‘숭배’하고 아끼는 깡패두목으로서 국내 주먹계는 물론 일본 ‘야쿠자’ 조직을 수차례 평정하였고, 혼자서 수십 명의 ‘북한 축구대원’들을 격파하는 주먹계의 명실상부한 ‘대부’(大父)이었으며, 중년시절의 金두환은 ‘동족상잔’의 남북전쟁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공산주의자’들과 맛서 싸우는 맹장이었다. 그 후 주먹계를 벗어나 무소속으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고, 집권여당인 자유당(自由黨)의 핍박에 못 이겨 여당(집권당) 국회의원으로 탈바꿈하지만, 부패한 여당(자유당)과 강력하게 맛서 싸운다. 그 후 몇 차례의 낙선을 거쳐 다시 국회의원으로 재선된 그는 독재정부의 부패정치와 맛서 싸우며, 마침내는 국회회의장에 들어가 총리와 장관 등 정부요원들에게 똥물을 퍼붓고, 대성질타(大聲叱咤)하는데 이것이 바로 당시 국내외를 들썽했던 유명한 “오물투척사건”이다. 이로 인해 형무소에서 오랜 기간 고생하다가 병으로 보석 석방된 후 얼마안지나 55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한 한생을 마감한다. 본 드라마는 몇 년 전 SBS 방송사에서 시리이즈(series)로 장기간 방영되었는데, 당시 한국 시청자들의 인기를 폭발시킨 적이 있다. 어쩌면 그 원인이 여전히 냉전시대의 이데올로기 속에서 살고 있고, 현실 정치에 대해 불만으로 가득 찬 한국인들의 ‘구미에 맞는’ 드라마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무식하지만 애국적이고 불의와 싸우는 ‘정의의 사나이’, “김두환”에 대해 그처럼 많은 한국국민들이 열광하고 ‘흠모’하는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사고해본다.
50년대 당시 한국 주먹계에는 김두환, 이정재, 이화룡 세 명의 ‘대부’가 있었는데, 그들의 ‘정치적 운명’은 드라마에서 보여준 것처럼 각자 정치적 참여에 따라 각이한 결과를 가져온다. 그 중 <동대문사단>의 ‘회장’(두목)이었던 이정재는 부패정치에 휘말린 ‘비극적 인물’이다. 그는 자유당 이기붕(李起鵬) 의장의 중용을 받아 자유당 감찰차장을 지낸 인물로서, 부정선거와 폭력을 사용하는 데 앞장선 ‘상인’(깡패)조직의 두목이었다. 하지만 부정정치의 ‘이용물’에 불과했던 그는 결국 이승만의 ‘정치앞잡이’이었던 이기붕의 농락을 당해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은퇴’를 하였지만, 그 책임추궁과 더불어 엄정한 판결을 받은 불행한 역사의 ‘죄인’ 신세를 면치 못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만다. 즉 ‘주먹황제’에서 국회의원 ‘정치가’로 변신한 김두환과 대조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일찍 젊어서 (조선)씨름계를 평정한 그는 리더십과 카리스마를 겸비한 ‘의리의 사나이’이었지만, 부패정치와 ‘주먹’이 어우러진 50년대 부패한 한국정치가 낳은 ‘비극적 인물’이었다. 한편 일생을 정치와 담쌓고 사는 <명동사단>의 (깡패)두목인 이화룡은 ‘본분을 지킨’ 비교적 명지한 (깡패)인물로 후세에 전해진다. 요컨대 자기의 본분을 지키지 않고 그 ‘도’(度)를 지나치면 ‘불행’이 찾아온다는 역사적 교훈을 모름지기 오늘날의 현대(정치)인들도 심사숙고할 필요가 있다는, 역사가 주는 ‘메시지’(message)다. 특히 민심(民心)을 읽을 줄 모르는 당대의 정치인들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아래에 본 드라마 후반부에서 가장 중요한 부정인물로 등장하는 이기붕(1896~1960)氏에 대한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역사가 기록한 실물 ‘프로필’(profile)을 간략하게 적는다. 미국유학파인 이기붕은 광복 후 이승만의 비서를 지낸 적이 있으며, 그 후 서울시장, 국방부 장관 등 요직을 담당하다가 이승만의 지시로 자유당을 창당했다. 그는 자유당 총수로서 이승만과 자신의 장기집권을 위해 한국 역사상 보기 드문 ‘깡패정치’를 연출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1956년 자유당 공천(公薦)으로 부통령에 입후보하여 민주당의 장면(張勉)에게 밀려 낙선하였으나. 1960년 3월 15일 부정과 폭력에 의한 선거로 이승만 대통령 밑에서 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하지만 이 [3·15 부정선거]가 발단이 되어 청년학도들에 의한 [4·19 학생혁명]이 일어나자, 부득이 부통령직을 사임하고 큰아들 강석(康石)의 권총으로 가족과 함께 자결, 비참한 일생을 마쳤다. 사실상 이승만 정권의 제2인자로서 부패정치를 주도한 이기붕은 1952년 5월 자유당 일당의 재선 욕망으로 [대통령 직선제]로 하는 제1차 개헌(改憲)안을 통과시켰고, 1954년 11월에는 장기 집권을 위해 이른바 [사사오입]이라고 불리는 제2차 개헌안을 통과시켰으며, 또한 이승만의 절대 추종자인 그는 비굴하게 자기의 큰 아들인 강석(康石)이를 ‘영원한 일인자’ 이승만 총통에게 양자(養子)로 ‘헌납’한다. 난해한 것은 항상 골골하는 약골(弱骨)인 그에게 ‘박 마리아’라고 부르는 앙큼하고 표독스러운 악처(惡妻) 부인이 ‘그림자’처럼 나타나 공공연히 ‘정치섭정’을 하는 해괴한 일까지 발생한다. 자고로 조선역사를 살펴봐도 어린 나이에 등극한 임금에게 선왕의 중전이나 가까운 외척(外戚)들이 섭정(攝政)한 케이스는 많지만, 부인이 남편의 정치에 ‘섭정’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래서 예로부터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속설(俗說)이 항간에 전해 내려오지 않았겠는가고 생각해본다. 이 또한 부패정치의 비참한 말로를 여실하게 보여준 실례이기도 하다.
한편 드라마의 내용을 따라 50여 년 전을 소급(遡及)하면, 그 뒤에는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며 ‘국부’(國父)로 불리었던 이승만(李承晩, 1875~1965) 박사가 있다. 장기집권을 목적하고 ‘영원한 일인자’를 희망한 그는 1948년 7월에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1960년까지 12년 동안 집권한 (독재)인물로서 정치상에서는 강력한 반공(反共) · 배일(排日) 정책을 실시하였고, 경제는 주로 미국의 원조에 의지하였으며, 대기업의 독점을 인정하고 매판자본을 형성하여 불합리한 경제구조와 함께 농업생산 구조를 파괴시켰다. 1951년 집권여당인 자유당을 창설하고 이기붕이라는 (정치)앞잡이를 내세워 자신의 장기집권에 이용하였으며, 여러 번의 불법적인 개헌과 ‘정치깡패’를 동원한 부정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3선되었으나, 결국 1960년 [4·19 학생운동]에 의해 실각한 후 미국의 하와이에 망명하여 병사하였다. 이승만 정부는 경제정책의 실패, 극심한 부정부패, 불법개헌 및 장기집권에 대항하여 일어난 학생을 위주로 한 민중의 [4·19 혁명]에 의해 붕괴되었다. 누군가 권력은 ‘필요악’(必要惡)이라고 했으며, “절재권력은 절대부패를 낳는다”고 말했다. 결국 장기집권과 권력에 연연한 그는 대한민국을 건립한 초대 대통령임에도 불구하고, 후세사람들에 의해 한국화폐 500원 동전뒷면(현재는 학으로 대체되었음)에 한동안 올랐다가 사라지고 말았다. 어쩌면 이 또한 역사가 그에 대한 객관적 평가일 것이다. 현재 필자가 살고 있는 집 부근에는 이승만 박사의 부부가 살고 있었던 <이화장 마을>이라고 불리는 옛날 저택(邸宅)이 있다. 그리고 그 <옛터>와 인접한 낙산공원의 입구에 있는 길옆의 돌비석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친필인 “경천애인(敬天愛人)”이라는 문구(文句)가 새겨져 있다. 거의 매일 (낙산)공원 정상을 운동으로 오르내리는 필자는 그 돌비석의 새겨진 고인(故人)의 생전에 남긴 “하늘을 존경하고 인간을 사랑하자”라는 문구를 바라보면서 경건한 생각에 잠긴다. 만약 그가 만년에 권력에 대한 집요한 추구를 버리고 지속적으로 청렴한 정치를 했더라면, 저 돌비석에 새겨진 명문(名文)이 더욱 빛나고 값졌을 것이고 따라서 후세들의 추앙을 받았을 것이며, 아울러 오늘날 한국지폐 만원(현재 세종대왕임)에 오른 ‘주인공’으로 선정되었을지도 모른다는 부질없는 잡념을 굴려본다.
주지하다시피 장기간의 이승만 독재체제가 1960년 [4 · 19학생혁명]으로 붕괴된 후, 군부(軍部)쿠데타로 ‘민주정권’이 사라지고 독재적인 군사정권이 이를 대체했다. 장장 18년간 집권한 朴정희 군사정권은 유신체제(維新體制) 등으로 집권연장을 꾀하다가 결국은 권력층 내부의 갈등에 의해 몰락하였으나, 불행하게도 그 ‘후계자’이며 군사독재자인 全두환에 의해 연장되었다. 주목할 것은 군부(軍部)쿠데타의 반복에 이어서 군사정권이 연속하여 20~30년간 통치한 한국정치는 세계정치사에서도 이례적인 것으로서, 현대 한국정치의 또 하나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후 80년대 말, 군부독재와 군사정권은 민주화 운동의 거세찬 도전 아래 점진적으로 무너졌으며, 따라서 획기적인 <문민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리고 간과할 수 없는 것은 한국정치가 위기에 봉착할 때마다 위대한 한국국민들은 지속적인 민주화 운동과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끈질긴 이념으로, 결국 <문민정치> 및 현재의 [자유민주주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였던 것이다. 오늘날 한국사회는 21세기 대전환기를 맞고 있다. 현재 한국의 정치체제와 정치문화는 21세기 국제화 시대, 국적과 이념을 초과한 세계화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불협화음’(不協和音)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으며, 따라서 정국(政局)의 불안정과 난리판은 국민들을 크게 실망시키고 있는 실정이다. 현재 여야(與野)당은 말로만 ‘상생의 정치’를 웨치고 있지만, 국정의 파트너로서가 아니라 ‘상대 당 죽이기’에만 골몰하고 차기대권 유치에만 ‘올인’하고 있으며, 민생정치에는 관심이 적기 때문에 많은 국민들의 빈축을 사고 있는 것이다. 또한 신성한 국회(國會)는 일부 몰지각한 여/야 의원들로 인해 여전히 ‘싸움판’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급박한 정치현안들을 해결하지 못한 채 ‘전전긍긍’하는 국회의 무능한 모습은 성스러운 국회와 ‘정치 엘리트’인 국회의원들의 이미지를 크게 실추시키고 있다. 최근에는 총리가 “3.1절 골프파문”으로 사직하였고, 집권여당이 지방선거에서 참패하였으며, 심지어는 중목소시(衆目所視) 하에 야당대표를 ‘폭행’하는 ‘정치테러’까지 발생하였다. 그리고 오랜 기간 존속되어 온 권위주의와 지역주의가 ‘난무’하는 한국의 정치구도에 대한 개혁은 한국정치가 해결해야 할 급선무로서 ‘의사일정’(議事日程)에 올라있으며, 아울러 성숙한 정치문화의 도래(到來)와 더불어 정치인들의 심각한 반성이 요구되는 시점이라고 볼 수 있다. 요컨대 성숙하고 제도화된 정치문화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선진적인 민주정치와 선진국 진입은 ‘공염불’(空念佛)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명실상부(名實相符)한 [자유민주주의]의 시대의 도래는 한낱 아름다운 꿈에 머물지 않겠는가 하는 필자의 기우(杞憂)이다. 한마디로 한국정치가 해결해야 할 일은 많고 갈 길은 멀다는 뜻으로, 임중도원(任重道遠)이다.
-2006년 6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