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 폭염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여름날의 무더위를 이기는 법 중에 빠지지 않는 것이 보양식이다. 그래서인지 복날에 삼계탕 집에는 긴 줄이 늘어서 있고, 보신탕집도 성업이다. 보신탕하면 떠오르는 개고기의 식용에 대해서는 외국은 물론이고, 국내에서도 여전히 논란이 많다. 조선시대 세시풍속을 기록한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의 기록을 보면, 우리의 선조들은 복날에 개고기를 즐겼음이 기록되어 있고,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 잔치를 성대하게 베풀어 줄 때 잔칫상에 개고기가 올라온 것도 흥미롭다. 정약용(丁若鏞)이 강진의 유배지에서 흑산도에 유배되어 있던 형님 정약전(丁若銓)에게 보낸 편지에는 개고기 요리법에 대한 상세한 내용이 나온다. 편지의 내용을 보자
보내주신 편지에서 짐승의 고기는 도무지 먹지 못하고 있다고 하셨는데 이것이 어찌 생명을 연장할 수 있는 도(道)라 하겠습니까. 본도(本島)에는 야생 개가 수없이 많을 텐데, 제가 거기에 있다면 5일에 한 마리씩 반드시 드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본도에 활이나 화살, 총이나 탄환이 없다고 해도 그물이나 덫이야 설치하지 못하겠습니까. 이곳에 어떤 사람이 있는데, 개 잡는 기술이 뛰어납니다. 그 방법은 이렇습니다. 식통(食桶) 하나를 만드는데 그 둘레는 개의 입이 들어갈 만하게 하고 깊이는 개의 머리가 빠질 만하게 만든 다음 그 통(桶) 안의 사방 가장자리에는 두루 쇠낫을 꽂는데 그 모양이 송곳처럼 곧아야지 낚시 갈고리처럼 굽어서는 안 됩니다. 그 통의 밑바닥에는 뼈다귀를 묶어 놓아도 되고 밥이나 죽 모두 미끼로 할 수 있습니다. 그 쇠낫의 밑둥을 위로 향하게 하고 날의 끝을 아래로 향하도록 비스듬히 꽂아야 하는데 이렇게 되면 개가 주둥이를 넣기는 수월해도 빼내기는 거북합니다. 또 개가 이미 미끼를 물면 그 주둥이가 불룩하게 커져서 사방으로 찔리기 때문에 끝내는 걸리게 되어 공손히 엎드려 꼬리만 흔들 수밖에 없습니다. [來敎云禽獸之肉。都不入口。此豈可長之道耶。本島山犬不啻千百。使我當之。五日一烹。必無缺矣。島中無弓矢銃丸。獨不得設爲罟獲乎。此中有一人。工於捕犬。其法作一食桶。其圓可容犬口。其深可沒犬頭。於其桶內四畔。徧揷鐵鐖。其形直如錐子。不可曲如釣鉤。於其桶底。縛以骨鯁或飯粥。皆可爲餌也。其鐖根高梢卑則犬納吻勢順。出吻勢逆。且犬旣含餌。其吻張大。四面受觸。遂爲所罥。恭伏搖其尾而已。]
정약용은 흑산도에서 육식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형님을 위해 개고기를 먹을 것을 권유했다. 우선 산속의 개를 잡는 방법부터 설명하고 있다. 개고기 요리법에 대한 설명도 매우 구체적이다.
5일마다 한 마리를 삶으면 하루 이틀쯤 해채(鮭菜)를 먹는다 해도 어찌 기운을 잃기까지야 하겠습니까. 1년 3백 66일에 52마리의 개를 삶으면 충분히 고기를 계속 먹을 수가 있습니다. 하늘이 흑산도(黑山島)를 선생의 탕목읍(湯沐邑)으로 만들어주어 고기를 먹고 부귀(富貴)를 누리게 하였는데도 오히려 고달픔과 괴로움을 스스로 택하다니, 역시 사정에 어두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호마(胡麻:들깨) 한 말을 이에 부쳐드리니 볶아서 가루로 만드십시오. 채소밭에 파가 있고 방에 식초가 있으면 이제 개를 잡을 차례입니다. 또 삶는 법을 말씀드리면, 우선 티끌이 묻지 않도록 달아매어 껍질을 벗기고 창자나 밥통은 씻어도 그 나머지는 절대로 씻지 말고 곧장 가마솥에 넣어서 바로 맑은 물로 삶습니다. 그리고는 일단 꺼내놓고 식초ㆍ장ㆍ기름ㆍ파 등으로 양념을 하여 더러는 다시 볶기도 하고 더러는 다시 삶는데 이렇게 해야 훌륭한 맛이 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박초정(朴楚亭:초정은 박제가(朴齊家)의 호)의 개고기 요리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每五日一烹則一兩日雖食鮭菜。豈至損氣。朞三百六旬有六日。烹五十二犬。足可以繼肉。天以黑山爲先生湯沐邑。使之食肉富貴。顧乃自受困苦。不亦迀乎。胡麻一斗。玆以付去。炒之爲屑。圃有蔥房有醋則於是乎坐犬矣。又凡烹法。懸而剝之。勿受塵芥。洗其腸胃。其餘切勿洗之。直納釜中。直以淸水烹之。旣出乃調醋醬油蔥。或再炒或再烹。乃爲佳味。乃朴楚亭之烹法也。]
정약용은 5일마다 개고기 한 마리를 먹을 것을 권유하고, 들깨 한 말까지 보내주는 세심함을 보였다. 마지막 부분에는 자신이 설명한 요리법이 박제가에게 배운 것임을 기록하고 있다. 박제가, 정약용 등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실학자까지 개고기 요리법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었던 것을 보면 당시 개고기 요리가 광범위하게 보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세기의 학자 홍석모(洪錫謨)가 기록한 『동국세시기』에도 ‘시장에서도 구장(狗醬)을 많이 판다.’고 기록하고 있다.
개를 삶아 파를 넣고 푹 끓인 것을 구장이라고 하며, 여기에 죽순을 넣으면 더욱 좋고, 구장에 고춧가루를 타서 밥을 말아서 시절 음식으로 먹는다. 땀을 흘리면 더위를 물리치고 허한 기운을 보충할 수 있다. 시장에서도 또한 많이 그것을 판다. [烹狗和蔥爛蒸 名曰狗醬 入鷄笋 更佳 又作羹調番椒屑 燒白飯 爲時食 發汗可以袪暑補虛 市上亦多賣之]
▶ 필자가 2007년 흑산도 답사 때 찍은 정약전이 유배 생활했던 사촌서당
왕실에서도 개고기를 즐겼음은 정조의 8일간의 화성행차와 그 이후의 상황을 정리한 『원행을묘정리의궤(園行乙卯整理儀軌)』의 기록에 나타난다. 1795년 6월 18일 정조는 창경궁 연희당(延禧堂)에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한 회갑 잔치를 베풀었다. 그런데 이 회갑 잔칫상에 올려진 82종의 음식 중에 구증(狗蒸:개고기찜)이 포한된 것이 주목된다. 구증은 개고기와 돼지고기 등을 넣고 끓인 음식으로, 구증에 들어간 재료는, 황구(黃狗) 1마리, 쇠고기 안심육 1부, 숙저(熟猪) 1각, 묵은닭 2마리, 파 30단, 참기름 2승, 잣 2홉, 참깨 1승, 후춧가루 1전, 밀가루 5홉, 고추 20개, 장 7홉 등이었다. 회갑 잔칫상에 개고기가 오를 정도로 여름에 왕실에서 개고기를 즐겼음이 나타난다. 한편, 『중종실록』에는 개고기를 뇌물로 바치고 벼슬을 얻었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 『중종실록』 중종 31년(1536년) 3월 21일, 반석평ㆍ남세건ㆍ김희열ㆍ황기ㆍ진복창에게 관직을 제수했던 날의 기록을 보자.
반석평(潘碩枰)을 호조 참판에, 남세건(南世健)을 승정원 도승지에, 김희열(金希說)을 좌승지에, 황기(黃琦)를 홍문관 전한에, 진복창(陳復昌)을 봉상시 주부에 제수하였다. 사신(史臣)은 논한다. “김안로(金安老)가 권세를 휘두를 때 이팽수(李彭壽)가 봉상시 참봉이었는데, 김안로가 개고기 구이를 좋아하는 줄 알고 날마다 개고기 구이를 만들어 제공하며 마침내 김안로의 추천을 받아 청현직(淸顯職)에 올랐다. 그 뒤 진복창이 봉상시 주부가 되어서도 개고기 구이로 김안로의 뜻을 맞추어 온갖 요사스러운 짓을 다 하는가 하면, 매번 좌중(座中)에서 김안로가 개고기를 좋아하는 사실까지 자랑삼아 설명하였으나 오히려 크게 쓰이지 못하였으므로, 남의 구미를 맞추어 요행을 바라는 실력이 이팽수만 못해서 그러하다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以潘碩枰爲戶曹參判, 南世健爲承政院都承旨, 金希說爲左承旨, 黃琦爲弘文館典翰, 陳復昌爲奉常寺主簿。史臣曰: “當安老擅權之日, 李彭壽爲奉常寺參奉, 知安老好狗炙, 日以狗炙啗之。 竟買安老之薦, 列於淸顯。 復昌繼爲主簿, 又以狗炙, 諂悅其意, 極盡妖媚, 每於座上, 誇說安老, 能食狗肉之狀, 猶未見顯用。 其適口巧中之能, 人或謂未及彭壽而然也。”]
위에서는 당시의 권력 실세 김안로에게 아부하기 위해 개고기를 뇌물로 바친 진복창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는데, 당시 개고기가 매우 귀한 요리의 하나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조선시대 개고기는 뇌물로 바쳐지기도 하고, 왕실의 잔칫상에 등장할 만큼 귀한 요리이기도 했지만, 조선후기에는 서민층에게까지 확대되어 복날에 개고기를 즐긴 백성이 많았다. 박제가에게 배운 개고기 요리법을 형님에게 편지로 전한 정약용의 모습에서는 누구보다도 인간적이고 자상한 면모를 확인할 수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