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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하 2;1-11, 삶의 탈림에서? 1, 2017. 9. 17.
1. 삶의 모서리, 삶의 가장자리입니다. 지금 예배를 드리는 이 시간에 우리에게 영향을 주는 18호 태풍의 이름이 탈림입니다. 이 탈림의 영향권 때문에 어제에 이어서 오늘과 내일, 일본 열도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태풍 탈림은 3번째인데 2005년 8월 27일부터 9월 2일까지 활동했고 최저기압 925 hPa를 기록했던 2005년의 제13호 태풍입니다. 이 탈림이 타이완과 중국에 거대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탈림이 탈림이 아니었습니다. 태풍 탈림의 두 번째는 2012년 6월 18일부터 6월 21일까지 활동했고 최저기압 985hPa로 타이완과 중국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두 번째는 탈림이었습니다. 그리고 2017년 태풍 지금 탈림입니다. 원래는 대만에서 중국으로 영향을 줄 예정이었는데 갑자기 90도 이상이 꺽이면서 일본으로 향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네티즌들이 탈림, 이름이 별로 맘에 안드네, 태풍 탈림 초가을날씨에 한풀 털림, 그런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18호 태풍 탈림은 필리핀에서 제출한 이름으로 뽀족한 가장자리'라는 뜻입니다. 원래 탈림은 기대하지 않는, 별 영향력이 없는, 그렇게 주목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가장자리, 맨 끝에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태풍의 중심기압이 핵으로 떠오르면서 1급 태풍으로 변했습니다. 주목해야 되고 관심을 가져야 되고, 그래서 조심하고 준비하고 예방하는 생중계를 하는 태풍, 탈림으로 변했습니다. 탈림이 탈림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중심이 되었습니다. 이름은 탈림이지만 그러나 세력은, 영향력은, 탈림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변방에 있다고 생각이 되십니까? 삶의 가장자리에서 몸부림을 치십니까? 맨 끝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면 어떻게 해야 내가 중심에 있고, 어떻게 해야 세상에 영향을 주는 사람이 될까요? 어떻게 해야 탈림이 탈림이 안될까요?
어느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어느 목사님께서 섬기시던 교회의 임직식 때 지인, 한 분 목사님께서 액자, 3개를 선물로 주셨다고 합니다. 그 액자는 성지순례 때 직접 찍으셨던 사진을 액자로 만든 액자입니다. 그런데 선물로 받은 액자 중에 두 개는 본당에 걸어 놓고, 하나는 담임 목사님의 목양실에 걸었습니다. 그런데 담임목사님께서 액자를 받고 감사를 했는데 그 액자를 볼 때마다 주님께서 위로를 해 주셨다고 합니다. 무슨 위로인가?
첫 번째 액자는 사해바다입니다. 사해는 이스라엘 나라에게 가장 낮은 곳에 있는 바다입니다. 하지만 요단강으로 흘러내리는 모든 물들이 모이는 곳이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곳입니다. 마치 어머니의 품같이 모든 것을 품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곳, 모든 영혼을 다 받아주고 품어주는 곳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죽어서 다른 이들을 살리는 곳입니다. 바로 그러한 은혜의 자리가 생명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래서 담임 목사님은 늘 이 액자를 보면서 위로를 받고, 그리고 교회가 사해가 아닌 사해로써 모든 것을 받아주는 은혜의 자리가 되도록 늘 마음에 담고 목양을 했다고 합니다.
두 번째는 페트라입니다. 사해의 남단에 있는 페트라입니다. 사해의 서쪽에 있는 쿰란과 함께 바위로 되어 있는 곳입니다. 페트라라는 이름은 헬라어로 바위를 말합니다. 바로 베드로와 같은 뜻입니다. 그런데 담임 목사님은 하나님께서 그 사진을 통해서 교회에 주신 약속을 기억했는데, 베드로의 신앙고백 이후에 내가 너의 반석위에, 페트라 위에, 주님 교회를 세우리라고 하셨던 바로 그 반석, 페트라를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 비전 교회의 교회인 여러분들의 신앙고백위에 반드시 페트라위에, 반석위에 주님의 교회를 세워 가시고 든든하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아멘.
세 번째는 아르논 골짜기입니다. 아르논 골짜기는 사해바다의 가장자리 동편에 있는 광야입니다. 부제로 나오미와 룻이 건너간 곳이라고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나오미는 이방 땅에서 모든 것을 다 잃었습니다. 남편도 잃고 자식들을 앞서 떠나보내고 재산도 다 잃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유일한 한 가지 소망으로 하나님을 찾아오면서 건너왔던 곳이 아르논 골짜기입니다. 돌아오는 그 광야 어디에도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길을 보게 하셨습니다. 그 광야에서 길을 만드셨습니다. 여러분, 현대그룹의 창업주였던 고 정주영 회장이 길이 없으면 길을 찾고, 찾아도 없으면 길을 만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진정한 길, 진정한 호도스는 사람이 만드는 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시는 길입니다. 광야와 같은 우리의 인생에 하나님께서 길을 만드십니다.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샘을 만드십니다.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길이 만들어지는 교회가 되고 그러한 길을 걷는 성도의 은혜를 세 번째 액자에서 늘 본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세 가지의 액자가 주는 공통적인 멧세지가 있는데 그 것이 무엇일까요? 탈림입니다. 가장자리입니다. 뽀족한 가장자리입니다. 이전에는 주목을 받지 못한 곳입니다. 영향이 없던 곳입니다. 하지만 탈림에서, 가장자리에서, 그 것도 가장자리의 꼭지에서, 주목을 받지 못한 곳에서, 영향이 없던 곳에서 주목을 받고, 영향을 주는 그런 중심이 됩니다. 오늘 일본 이 땅에 태풍, 탈림이 탈림의 이름을 가지고 영향을 주듯이 이 세상과 어두움의 세계에, 죽음의 세계에 영향을 주는 그런 사해바다, 그런 페트라, 그런 아르논 골짜기입니다. 이 시간 예배를 드리면서 은혜가 넘치기를 사모하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여러분의 이름을 가지고, 이런 주목을 받고, 영향을 주는 그런 주님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먼저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그러면 이런 탈림에서 하나님의 역사는 어디에서 시작이 될까요?
1-1. 주님의 역사는 삶의 가장자리에서 시작됩니다. 그 것도 뽀족한 가장자리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세계의 역사 속에서 사해와 같은 언저리, 가장자리에 위치한 보잘 것 없는 민족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들어서 당신의 위대한 역사를 이루십니다. 성경의 나타난 하나님의 사람들은 다 이러한 삶의 가장자리를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야곱이 그랬고, 모세가 그랬고, 다윗이 그랬습니다. 예수님의 12제자들이 다 이스라엘의 가장자리인 갈릴리 출신들입니다. 여러분, 주님은 삶의 가장자리를 좌절과 절망의 자리로 말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새로운 회복과 소망의 자리로 말씀하십니다. 중심으로 나아 갈 수 있는 자리가 삶의 가장자리입니다. 주님의 소망이 시작되는 곳은 바로 삶의 가장자리이고, 삶의 낮은 곳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세상은 어디서 소망을 봅니까? 높은 곳이고, 정상입니다. 자신의 가능성입니다. 자신의 능력입니다. 한국의 걸 그룹 중에 2NE1이라는 걸그룹이 부르는 노래가 있는데 제목이 내가 제일 잘나가. 입니다. 내가 제일 잘 나가. 누가 봐도 내가 좀 죽여주잖아. 둘째가라면 이 몸이 서럽잖아. 내가 제일 잘 나가. 내가 봐도 내가 좀 끝내주잖아. 네가 나라도 이 몸이 부럽잖아. 여러분, 사람들은 자신의 잘남에서 소망을 찾고, 자신의 능력에서 소망을 보고, 자신의 높아짐에서 소망을 찾습니다. 그래서 미리 판단하고 루저와 구별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주님 나라는 참 신앙인은 그렇지 않습니다. 낮은 곳에서 소망을 보고, 자신의 부족에서 소망을 찾습니다. 자신의 능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소망을 봅니다. 사회적인 약자들에 대한 이해, 삶의 고난과 아픔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이해, 감당할 수 없는 시련가운데 있는 분들에 대한 이해는 이러한 삶의 가장자리를 경험한 사람들을 통해서 이해가 되고 삶의 탈림을 체험한 사람들을 통해서 만들어지고 아름다워집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왜 마굿간에 오셨습니까? 삶의 가장자리에, 삶의 가장 낮은 곳에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삶의 가장자리에서 눈물을 흘리시는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눈물은 사랑하지 않고는 울 수 없고, 예수님의 눈물은 애통하지 않고는 울 수 없습니다. 고난과 아픔과 인간의 절망을 알지 못하고는 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소망입니다. 그러한 삶의 가장자리를 경험하신 예수님으로부터 모든 소망이 시작되었습니다. 마11;28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삶의 가장자리에서 부르십니다. 삶의 가장 낮은 곳에서 부르십니다. 우리를 알기 때문에 초청을 하시고 쉼을 주십니다. 그리고 중앙으로 인도하고 이끄시고 책임을 지십니다. 보잘 것 없는 가장자리 탈림을 바람과 바다의 수온을 통해서 방향을 틀고, 격상시켜서 주목하고 영향을 주는 것처럼 오늘 우리도 이렇게 하십니다. 동남풍을 불게하고, 북서풍을 동원해서 환경과 여건의 온도를 높여서 생각지도 않은 자리로 이끄십니다. 주님은 삶의 가장자리에서 소망을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힘이 들고 어렵습니까? 눈물의 세월이십니까? 부활하신 주님께서 여러분의 사람의 가장자리에서 일으켜 세워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1-2. 시작은 초라해도 시작은 미약해도입니다. 여러분, 끝이 좋으면 모든 것이 좋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사실 목적을 위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부정적인 의미가 있지만 또 다른 의미는 시작은 그리 화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장자리에서 시작을 해도 끝이 좋게 되는 의미입니다. 탈림에서 중앙무대로의 이동을 말합니다. 사자성어 중에 유시유종(有始有終)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한번 시작하면 끝도 좋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시작도 중요하지만 마무리에 비중을 둔 말입니다. 여러분, 끝이 안 좋았던 사례들 가운데 시작이 화려했던 경우가 많습니다. 사울 왕이 그랬고, 솔로몬이 그랬습니다. 차라리 시작과 끝이 반대가 되었으면 훨씬 좋았습니다. 처음보다는 나중이 좋아야 하잖아요. 어제보다는 오늘, 오늘보다는 내일이, 내일보다는 미래가 점점 더욱 번성하는 것을 원하잖아요. 그러데 이 세상 속에서 처음은 화려했는데 나중이 그렇고 그런 사람을 볼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처음이 좀 초라하더라도 나중이 더 좋은 것이 좋지 않습니까. 시작은 변두리지만, 시작은 변방이지만, 시작은 가장자리이지만 나중이 심히 창대하려면 주님을 절대 의존해야 합니다. 다윗은 시작이 미약했습니다. 10년 이상 광야 생활을 하던 다윗이 헤브론으로 갑니다. 사울 왕이 죽고 나서 자유의 몸이 되고 조국으로 돌아갑니다. 거기서 다윗은 유다 족속에게 왕으로 추대를 받고 한 나라의 통치자가 됩니다. 다윗은 이미 일찍이 사무엘 선지자로부터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기에 이것은 정해진 절차였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 중 겨우 한 지파만의 왕이 되었습니다. 아무리 유다지파가 크고 유력한 지파 라 하지만 1/12 짜리 대관식은 그리 화려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더라도 이 일은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이요, 그 분의 섭리 가운데 시작된 일이므로 의기소침할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나간 세월의 곤고함에 비교해 보면 감사에 감사를 더해야 할 일입니다. 다윗의 시작은 초라했습니다. 왕으로서의 등극도 탈림의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 8절에서 11절 사이에, 11족속은 사울왕의 아들 이스보셋을 왕으로 추대합니다. 헤브론에서 할 수 없으니까 이스보셋을 모시고 마하나임에서 왕으로 추대 합니다. 그것도 11족속이 이스보셋을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추대합니다. 거기에 비하면 다윗의 왕 됨은 1/12의 지극히 초라한 모습입니다. 아무리 헤브론이지만 왕의 대관식이 미약했습니다. 축하객도, 응원팀도 유다 족속 뿐입니다. 탈림입니다. 왕으로서 처음 한 일도 아주 작은 일입니다. 목숨을 걸고 블레셋 진영까지 가서 사울과 그의 아들들 시신을 수습해서 장사를 치룬 야베스 족속을 불러다 치하한 일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격려하고 왕으로서 고마움을 표했습니다. 그러나 왕이 되었지만 나라 살림이 넉넉하지 못해서 선물은 말로 표현을 했습니다. 그런데 야베스 족속이 이 다윗의 작은 표현에 자부심과 긍지를 갖습니다. 다윗의 첫 걸음은 소박했지만 거기엔 무한한 가능성이 숨어 있습니다. 그 가정은 남들이 보기에 깨진 가정이요, 결손 가정이요, 회복 불가능의 가정이었습니다. 자신들조차도 실패한 인생으로 생각할 만큼 그 시작은 미약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작은 시작이라도, 아무리 탈림이라도 하나님과 함께 한 시작은 회복이 되고, 나중에 심히 창대해지고, 결국에는 이스라엘의 한 위대한 왕이 다윗 가문에서 나왔습니다. 욥기8:7, 네 시작은 미약 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 하리라. 다윗의 시작은 초라하고 미약 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은 창대 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지금이 초라하더라도, 가장자리라도 실망하지 마십시오. 지금 처지가 무엇 하나 자랑할 것이 없더라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실력이 지금 좀 부족하더라도 열등감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조금 없더라도, 별 것 아니라고 하더라도, 상심 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시작일 뿐입니다. 여러분의 인생길이 하나님과 함께 걷는 길이라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여러분은 분명히 다윗처럼 창대해 집니다. 다윗처럼 조그만 일에 최선을 다하고,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시작과 마무리를 분명히 하고,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을 가장 소중한 사람으로 관심을 갖고 있다면, 퇴장 때도 다윗처럼 아름다울 것입니다. 여러분, 일본에 유도가 유명한데 유도를 배울 때 무엇부터 배우는지 아십니까? 넘어지는 것부터 배웁니다. 일본의 스모가 유명합니다. 이 스모도 하루 종일 넘어지고 또 넘어지는 낙법부터 배웁니다. 합기도는 상대방을 때리고 공격하는 것부터가 아니라 방어하고 맞는 것부터 배우고, 권투는 때리는 것부터가 아니라 아무리 맞아도 견디어 낼 수 있는 체력을 만드는 것이 우선이라고 합니다. 잠24;16, 대저 의인은 세상가운데 일곱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윗처럼 나중이 더 창대케 되는 그래서 탈림의 이름으로 세상의 중앙에 세워지는 창대케 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 탈림이 탈림이 되지 않고, 삶의 가장자리에서 중심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의 첫 번째는 여호와께 묻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참으로 강조하고 강조해야 합니다. 신앙인이 살아가면서 항상 기억해야 되고 항상 행동해야 하는 기준입니다. 여호와께 묻고 시작하고 여호와께 묻고 끝을 맺는 것은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의 기본입니다. 다윗도 오늘 본문의 시작을 무엇으로 시작 하는가? 1절에 그 후에 다윗이 여호와께 물어 가로되 유다의 한 성으로 올라 가리이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올라가라 다윗이 가로되 어디로 가리이까? 헤브론으로 갈찌니라. 다윗이 여호와께 물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한 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지금 다윗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은 다윗에게 유리하게 상황이 전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왕가의 장례가 치러진 이후에 권력의 공백이 생긴 이후에 이스라엘의 장래가 불확실한 이때에 다윗은 여호와께 묻습니다. 다윗은 묻는 것으로 시작을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오늘도 묻고 하루를 시작 하셨나요? 그런데 다윗이 두 가지를 여호와께 묻고 두 가지의 답을 하나님으로 부터 받습니다. 유다의 한 성으로 갑니까? 그렇다면 어디로 갑니까? 중요한 두 가지를 묻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무엇으로 시작 하셨습니까? 무엇을 먼저 생각하고 무엇을 먼저 하셨나요. 오늘 본문 다윗의 입장에서 보면 이제 사울 왕의 장례도 끝이 나고 본격적으로 다윗이 전면에 등장할 수밖에 없는 때입니다. 기회가 왔고 사람이 다윗을 부릅니다. 나라의 안녕도 시급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종합적으로 다윗이 마땅히 서두르고 당연히 자기를 앞세울 수 있는 처지입니다. 오늘 우리 곁의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합니다. 여러분, 이때를 위해서 다윗이 얼마나 고생 했습니까? 이 한 순간을 위해서, 사무엘로 부터 기름 부음 받은 이후로 수많은 세월을 눈물로, 한숨으로, 도망으로, 피신하며 살았습니다. 이방나라, 블레셋에 가서 침을 흘리고 미친척하고 문을 긁으며 실성한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마지막에는 할 수 없어서 망명까지 했던 다윗입니다. 당연히 다윗이 자기 생각을 드러내고 서두르고 자기의 의도대로 할 수 있는 때입니다. 이 때를 위해서 다윗이 시글락을 회복하고 아말렉을 물리치면서 얻은 전리품을 유다와 이스라엘 장로들과 각 지역의 방백들과 중요한 곳에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때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릅니다. 이때를 위해서 지금까지 고생을 했고, 이때를 위해서 눈물로 참고 이겨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렇게 하잖아요. 나의 미래와 내일을 위해서 열심히 살아가잖아요. 있는 것 없는 힘 다 쏟아 부으면서 한 때를 위해서 살잖아요. 그런데 이러한 기회와 때를 만난 다윗의 행동을 보면서 무엇인가? 다르지 않습니까? 다윗은 자기에게 찾아온 때, 아니 기다리고 기대 했던 소망의 때, 꿈과 소망이 이루어지는 그 순간을 여호와께 묻고 시작을 합니다. 기회가 왔어도, 꿈이 이루어 져도 하나님께 묻고 기도로 시작을 합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성공인생이 되려면 반드시 필요한 조항이 이것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어떤 일이든지 때가 됐든지 아니든지 여호와께서 묻는 것이 실패하지 않고, 바른 결정을 하게 되고 후회 없는 삶이 됩니다. 하나님께 묻고 시작한 그 일은 반드시 위대한 결과를 낳습니다. 느혜미야가 그랬습니다. 그래서 세계 최대의 토목공사를 단 52일만에 끝을 맺습니다. 수많은 적들을 돌파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묻고 시작한 일과 하나님께 묻고 시작한 사람은 고난은 있어도, 아픔은 있어도, 우여 곡절과 굴곡이 있어도, 위대한 사람과 위대한 결과에 이르게 됩니다. 왜냐하면 내가 만나고 내가 만들지만 뒤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역사를 누가 이끌어 가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역사를 이끄시는 하나님께 묻고 시작한 일은 실패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간 말 하나도 되돌아오지 않고 성취가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묻고 시작한 일이 아무 의미 없이 끝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해답을 주신일이 잘못될 수 있습니까? 특별히 인생을 바꿀 일 앞에서 더욱 그렇습니다. 위대한 일 앞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기대한 일이 이루어 졌다고 생각될 그 때 더욱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윗처럼 매사에 여호와께 묻고 시작을 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셔서 탈림의 자리에서 중심의 자리로 나아가게 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1. 그러면 다윗이 무엇을 여호와께 묻습니까? 유다의 한 성으로 갈까요? 왜 유다의 한 성으로 가는 것을 묻습니까? 다윗의 소견이 있지만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허락을 하시는가? 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유다라면 어디로 들어갈까요? 이 두 가지를 묻습니다. 여러분, 묻는 내용도 중요합니다. 지금 다윗은 시글락 성에 있지만 이스라엘과 유다 전역은 지금 텅 빈 리더쉽 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그냥 유다 땅이나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면 됩니다. 그냥 유다로 가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다윗의 결정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냥 받아 줄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자기의 족장 자기의 조상과 부모가 살고 있는 유다를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유다 중에서도 한 성에 들어갈 것을 하나님께 묻습니다. 여러분, 여기에 멧세지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를 인정 해주고 자기를 믿어줄 자기 집안 자기 족속에서 시작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근거가 있는 곳에서 시작을 하려고 하는 것이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이 것이 조금이라도 위험과 리스크를 줄이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은 12지파로 이루어져있고, 땅도 지파별로 분할이 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유다 족속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유다의 한 성으로 들어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도 다윗의 이 물음에 답 하시는 것을 봅니다. 놀라운 일이지요. 참으로 어린아이와 같은 다윗을 봅니다. 그리고 어린아이에게 대답 하시는 하나님을 봅니다. 얼마나 순진 합니까? 한나라의 왕이 될 다윗이 이렇게 순수 합니다. 다윗의 꿈은 위대하고 비젼은 상상 할 수 없지만 하나님 앞에서만은 천진난만한 어린아이 다윗입니다. 왜 이렇게 성경의 말씀을 기록하여 놓았을까요? 무슨 일이든지 이렇게 해야 하나님께서 책임을 집니다. 어린아이의 부모가 자녀를 책임지지요.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을 찾고 그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아무 곳에 깃발을 꽂아도 승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승리의 기초는, 시작은 근거 있는 곳에서 시작을 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최소한의 우여곡절을 덜 겪고 아픔을 덜 경험하는 곳에서 시작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 묻고 시작 하는 것도 중요 하지만, 터전이 될 수 있는 곳에서,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곳에서 시작 하는 것도 중요 합니다. 다윗이 이렇게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묻는 것이 먼저이고 하나님께 묻는 것이 성공의 필요충분조건 입니다. 이 순서는 바뀔 수가 없습니다. 이 것이 바뀌면 아니 됩니다. 하나님께 묻지 않고 근거 있는 곳에서 시작을 하면 승리가 담보 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사람과 방백을 의지하고, 혈통을 의지하고 관계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경험을 의지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여기서 많이 착각을 합니다. 하나님 없이도 뒷 배경이 있으면, 권력과 힘이 있으면, 하나님이 없이도 물질이 있으면 되는 줄로 압니다. 일반 사람들뿐만 아니라, 믿는 신앙인도 이렇게 행동 하는 분이 많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묻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럼에도 나를 이끌어줄 지역, 나에게 힘을 실어줄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이 또한 중요합니다. 다윗은 기회가 왔다고 무조건 무모하게 유다로 들어 간 것이 아닙니다. 다 됐다고 생각 없이 뛰어 든 것이 아닙니다. 묻고 근거지를 이야기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다윗은 먼저 하나님께 묻고 자기의 의사를 하나님께 타진했습니다. 자기의 족장에서 시작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다윗처럼 우선순위에 입각해서 터전을, 지경을 넓혀 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2. 탈림이 탈림이 되지 않고 중앙에 세워지는 이유는 다윗이 하나님이 지시 하시는 곳에서 시작을 하기 때문입니다. 유다의 한 성 헤브론에서 시작합니다. 왜 다윗에게 헤브론으로 들어가라고 하실까요? 여기에 비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시 하시는 곳은 미래가 있는 곳입니다. 아브라함도 지시한 땅에서 성공을 합니다. 유다 땅 베들레헴도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거룩한 땅입니다. 유다 족속 중에서 지극히 작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예수님이 탄생 됩니다. 하나님께서 지시 하시면 실패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도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 하므로 주님이 지시 하시는 마케도니아로 갑니다. 거기서 주의 복음을 사모하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로마도 갑니다. 그리고 복음이 오늘 우리에게 까지 전달이 되어서 우리를 구속하신 주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곳은 언제든지 예비 된 그 무엇이 있고, 약속의 비밀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께서 지시 하시는 곳으로 가야 합니다. 그러면 비젼을 이루고, 꿈을 이루게 됩니다. 다윗은 헤브론으로 갔습니다. 헤브론에서 시작을 합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장소, 지시하시는 때에 시작하면 됩니다. 여러분, 오늘과 내일이 염려스럽습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반드시 예비 된 그 무엇이 있고, 약속이 있고 성취가 있고, 축복이 있고 은혜와 은총이 있습니다. 주님이 지시하는 갈릴리로 가십시오. 깊은 데로 가십시오. 오른 쪽으로 가십시오. 지시하기는 곳으로 가십시오. 그러면 탈림이 탈림이 아니라, 주목하고 영향을 주는 곳이 되고 거기에 풍성한 열매가 열립니다.
3. 탈림이 탈림이 되지 않고 중심이 되는 시작은 헤브론입니다. 그러면 왜 헤브론인가입니다.
3-1. 헤브론은 상징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헤브론의 옛 이름은 기럇아르바 입니다. 기럇 아르바는 키가 250센티 이상이 되는 아낙 사람들이 살았다는 사실에서 유래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포기하려고 했던 이유가 바로 이 아낙 사람들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모두 점령하고도 헤브론은 5년이 지나도록 주님이 허락하고 약속한 땅을 점령하지 못 했습니다. 여호수아 14:8 이하에 거기에는 이스라엘이 싸워서 이길 수 없다고 포기해 버린 땅입니다. 그 때에 85세 된 노인, 여리고 점령의 쌍두마차, 제2인자로 있으면서도 불평하지 않았던 갈렙이 헤브론 땅의 점령을 여호수아에게 요청합니다. 그리고 그 땅의 강력한 아낙 자손을 물리치고 그 땅을 이스라엘로 돌려놓습니다. 어느 누구도 감히 용기가 없던 시대에 약속의 말씀의 성취를 이루려고 하지 않은 일을 노인 갈렙이 정복한 땅입니다. 그래서 그곳이 이스라엘의 성지가 됩니다. 할 수 없는 일을 이루어 낸 현장이 바로 헤브론입니다. 메뚜기 앞에 아낙자손을 진정한 메뚜기 앞에 아낙 자손으로 바꾸어 놓은 곳이 헤브론입니다. 탈림에서 탈림의 이름을 가지고 약속의 성취를 이루어낸 상징적인 곳입니다. 헤브론은 승리의 상징이고, 할 수 없는 일을 이루어 낸 상징이고, 약속의 성취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탈림이 변하여 중심, 헤브론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헤브론이 중요합니다.
3-2. 가장 오랫동안 치열하고 가장 끈질기고, 가장 어려웠던 곳이 헤브론입니다.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냥 있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지만 갈렙에 의해서 헤브론을 위한 치열한 싸움이 매듭이 됩니다. 그러니까 이런 열정, 이런 용기, 이런 소망이 탈림에서, 가장자리에서, 주목하고 바라보고 영향을 주는 곳이 됩니다. 그래서 헤브론은 이스라엘의 역대 왕이 왕으로서 기름 부음 받는 곳입니다. 왕으로 등극하려면 여기서 시작합니다. 이 것이 관례가 됩니다. 사울 왕이 헤브론에서 왕이 됩니다. 왕으로서 헤브론에서 기름부음을 받습니다. 다윗이 사무엘 선지자로부터 예비 된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기름 부음 받았지만 이제 왕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어야 되는데 하나님은 이 것을 아시고 헤브론으로 다윗을 인도 합니다. 그리고 다윗은 헤브론에서 정식으로 유다족속의 왕으로 세움을 입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곳은 빈틈이 없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것은 미래적입니다. 소망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곳은 승리만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도 여호와의 지시하심으로 탈림에서 빠져나와 헤브론에서, 교회에서 싸워야 하는 현장에서 기름부음을 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3-3. 질서의 땅, 헤브론입니다. 헤브론은 갈렙의 요청으로 여호수아가 허락하면서 시작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소유하는데 쌍두마차가 여호수아와 갈렙입니다. 갈렙은 그냥 아무 말 없이, 허락없이 그냥 내 것으로 삼고 들어가서 싸워도 됩니다. 그런데 갈렙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여호수아에게 허락을 받습니다. 그래서 질서의 땅, 헤브론이 됩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항상, 신앙생활을 하실 때에 순서가 있고 질서가 있습니다. 성도간의 관계도 그렇고 봉사도 그렇습니다. 모든 것을 주님께 하는 것으로 하는 질서와 순서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사실 천국은 질서와 순서가 없고, 계급이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가장자리에서, 삶의 탈림에서 중앙에 세워지려면 이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삶에는,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의 교제는 순서와 질서가 있습니다. 이 것은 계급이 아닙니다. 주님을 더 영화롭게 하는 기능입니다. 그래서 장차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도 하나님께 허락을 받아야 하는 것은 반드시 허락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이루어 놓은 결과 위에 더 놀라운 일을 만들게 됩니다. 그래서 질서의 땅, 헤브론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삶의 현장 탈림에서 여러분의 꿈과 소망과 비전이 이루어지는 그래서 이 시대에 반드시 주의 증거를 나타내시는 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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