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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문학동네 1996년 겨울/제3권 제4호/통권9호/특집 세기말, 한국문학의 비상구
스러진, 그러나 가야할 세계에 대한 동경
한창훈, 성석제의 소설에 대하여
1한국문학 전반에서 ‘상호대립자들의 관계 속에서 총체성으로서의 이념을 형성하려는 의지’가 구현되는 작품을 만나고 싶다는 것은, 이제 하나의 슬픈 염원이다. 모든 대상, 현상, 인간의 존재방식은, 삶과 죽음, 의식과 무의식, 정신과 육체, 자기보존과 자기소멸, 남성성과 여성성, 자기동일자와 타자, 중심부와 주변부, 영원한 것과 일시적인 것, 주체와 구조, 실재와 환상, 희망과 절망, 모험적 행동과 환멸, 세계사적 보편성과 한국적 개별성 등 상호대립물의 모순적인 통일로 구성된다. 또 한 시대의 사회적렛せ瑛? 발전단계는 어떠한 지배적 요소들의 집합체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잔류된 요소들과 미래를 향해 부상하는 요소들의 다양한 결합에 의해서 그 형태가 결정된다. 그런데 현재의 한국문학에서는, 하나의 대상 속에 서로 상이하고 매우 특수한 비율로 존재하는 이 대립자들의 관계 속에서 진리를 찾으려는, 다시 말해 지각과 대상을 일치시키려는 열정과 의지가 서서히 빠져나가고 있는 것이다.
희망, 모험적 행동 등으로부터 배척된 자들은 모든 현상을 희망의 원리로 환원하는 것에 대해 혐오감을 품게 되었으며 대신에 절망과 환멸을 현실을 총괄하는 원리로 제시한다. 이들은 현실의 몇몇 징후 속에서만, 그리고 작가의 관념 속에서만 살아 움직일 뿐 아직 현실 전반으로 확장되거나 다른 생명체에는 도달하지 않은 경우에도 ‘전체’ 혹은 ‘우리’라는 표현을 구사하기에 망설임이 없다. 이들이 제시한 원리는 소여적 현실을 총괄한 이후에 얻어진 귀납적인 결론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떠한 추상적인 틀을 현실과의 대비를 통해 증명하는 연역적인 결론도 아니다. 이 원리는 ‘나’에 지나지 않으면서 ‘우리’라고 말하며, 통시적(通時的)인 맥락과 단절된 공시적(共時的)인 현상에만 집착하는(그 공시적인 현상 중에서도 아주 부분적인 현상에 매달리는) 유아론(唯我論)의 성격을 지닌다. 그리고 이 유아론에 가까운 시대의 중심담론은 그 시대를 평정해버린다. 즉 상호대립물의 비율관계 혹은 결합방식에 따라서가 아니라 상호대립물 중 어느 한 축을 절대화하며 한 시대를 파악하는 것이다.
물론 하나의 극단적인 견해가 군림하면 현실을 보는 다른 시각은 스러지는 것, 하나의 담론이 중심담론으로 부상하면 새롭게 등장하는 거의 모든 작가들은 그 성스러운 휘광(?) 속으로 뛰어드는 것은, 그러나 한국문학사에 있어서 결코 낯선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것을 한국문학의 특성이라 규정해도 그리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여기, 이전의 논리로는 설명하기 힘든(다만 설명하기 힘들 뿐이다!) 사회적 현상이 발생한다. 이때 한국문학 전반은 혼돈에 빠지고, 그러면 어디선가 그 새로운 현상을 설명하기 쉬운 거대담론이 제기된다. 이 담론은 가설의 차원으로 혹은 참고자료의 의미로 수용되는 것이 아니라 더할 나위 없는 절대적인 진리로 떠받들어진다. 한 사회의 사회적렛せ瑛? 발전단계가 생산렉橘瓮교환렐捻廚임금려測酉재산럭騙湯농업 등 다양한 요소들의 서로 상이하고 매우 특수한 비율에 따라 결정된다면, 이들의 어떤 단계에 대한 명명행위가 이 다양한 요소들의 상이하고 매우 특수한 비율을 고려한 것인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다만 어디에선가 흘러들어온 거대 서사틀을 맹목적으로 신봉하며, 그 맹목적인 문제틀을 내세워 이전의 모든 것을 부정한다. 이때의 부정은, 어떤 개념이 부정되어야 할 대상이 된다는 것은 그만큼 부정되는 대상이 그에 못지 않게 긍정적인 요소를 안고 있다는 사실도 전제되어 있지 않으며 따라서 어떤 특수한 내용의 부정이 아닌 부정할 대상 전체를 영(零)이나 추상적인 무(無)로 해소해버리는, 전면적 부정의 양상을 띤다. 즉 어떤 것에 대한 부정은 하나의 새로운 개념이면서 동시에 앞서간 개념보다는 좀더 고차적이며 풍부한 개념으로 이어지는 것(이때의 부정은 선행했던 개념을 내포하면서도 또한 이보다도 더 많은 것을 내포하게 된다)이 아니라 단지 새로운 개념의 제시라는 차원에 머물고 마는 것이다. 하여, 한국문학사의 매시기에 등장했던 거대서사의 틀은 세상이 변화했다는 사실을 표나게 강조하나 정작 사회적 발전단계를 규정짓는 여러 요소들의 비율관계가 어떻게 변화했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설명하기 힘든 하나의 현상만 발생하면 그 현상을 빌미 삼아(결국 부분적일 수 있는 현상을 전체로 확장하면서) 온갖 거대서사틀을 끌어들였고, 때문에 일제시대부터 한국문학은 “서구문예사조의 전시장”이었고, 또 지금도 그러하다. 한마디로 한국문학은, 몇몇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바로 이 예외적인 경우로 인하여 한국문학의 발전은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우상의 집이며, 우상이 떠나면 집은 텅 비어버리는 적막한 터전이다.
현단계의 문학 역시, 이러한 한국문학사의 전통을 아주 충실히(?) 따르고 있다. 한 대상을 구성하는 상호대립자 중 어느 극단은 필연적인 것(영원한 것, 미래적인 것)으로 승격되고, 그 반대의 축은 우연적인 것(일시적인 것, 혹은 지나간 것)으로 규정될 뿐 아니라 급기야는 인식의 범위 밖으로 밀려난다. 하나의 극단만이 존재하며, 이것이 그 반대축에 놓여 있을 또 하나의 극단을 집어삼켜버린다. 희망의 원리가 절망의 징후를 집어삼킨 것이 이전 시대 문학의 특징이라면, 절망의 원리가 희망의 싹을 잘라내버리고 있는 형국이 현재 한국문학의 현주소이다. 한 대상, 사회가 상호대립자들의 모순적 통일이라는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는 마당에 ‘상호대립자들의 관계 속에서 획득된 총체성으로서의 이념’의 형성은 어쩌면 불가능한지도 모른다. 다만 한 가지 남은 방법은 구체적 현실과 관계없이, 그리고 자신의 개념이 이전의 개념보다 보다 고차의 개념인지(보다 현실의 본질에 육박했는지)에 대한 의심 없이, 새로운 현상이 나타나 자신의 개념이 결정적으로 흔들릴 때까지, 온몸으로 그야말로 온몸으로 밀어나가는 길뿐이다.
한 시대의 인간의 존재방식은 과거로부터 잔류된 요소들과 미래를 향해 부상하는 요소들의 다양한 결합에 의해서 그 형태가 결정된다면, 현재의 한국문학은 대부분 미래를 향해 부상하는 요소들에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다. 과거로부터 잔류된 요소들은, 그 요소들에 대한 어떤 특수한 내용을 부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전면적으로 부정하기 위해서만, 관심의 영역 안에 자리할 뿐이다. 그리고 그 관심사도 곧 사라져버렸다. 새로운 문제틀은 과거의 요소들의 불충분함을 통해 새로운 개념의 전지전능함(?)을 증명하고는, 과거로부터 잔류되어오는 요소들을 곧 박물관에 진열해버렸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과거로부터 이어져내려오던(그토록 오랜 기간 인간의 삶에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이 요소들이 그만큼 인간의 삶에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을 의미할 터이다) 삶의 구성요소들은, 그리고 삶의 구성요소들을 형성케 하는 원리를 많은 부분 밝혀주던 문제틀은, 이제 박물관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스러져가고 있으며, 켜켜이 쌓여가는 그 먼지의 두께만큼 한국문학은 황폐해지고 있다.
한창훈과 성석제는, 세인의 관심에서 멀어져버린 동시대인의 삶의 한 측면에 관심을 기울이는 작가들이다. 그들의 시선은 동시대 여타의 작가들과 다른 곳에 머물러 있다. 이전의 어떤 시대에는 집중적인 관심의 대상이었다가 한순간에 박물관의 한구석으로 밀려난 요소들, 즉 현재 한국문학에서는 더이상 새로울 것도 의미도 없다고 치부되는 대상, 삶, 개념틀, 바로 그곳에 가 있는 것이다. 90년대 한국문학 전반이 화려한 도시적 이미지, 영혼을 빼앗긴 채 육체만이 살아 움직이는 인간 형상, 제도에 짓눌린 주체 등에 시선이 집중되어 있다면, 한창훈과 성석제는 서서히 그 지배적인 힘을 상실하여가는 삶의 방식이나 가치관에 주목한다.
한창훈과 성석제는, 분명 90년대의 지배적인 담론과는 이질적인 세계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한 사회는 결코 어떠한 지배적인 요소에 관심을 기울여서는 그 본질을 읽어낼 수 없다는 사실을, 또 이전의 인식틀이 결코 전면적으로 부정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만약 부정되어야 한다 하더라도 그 인식틀의 어떤 특정한 내용에 대한 부정이 아니어서는 새로운 개념틀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다 하더라도 풍부한 개념틀일 수 없다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한창훈과 성석제는, 하여, 현란하지만 소박성(인간성)을 지니지 못한, 보편적이지만 개별적이지 못한, 그리고 변화와 새로움을 강조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전혀 변화하지도 않았으며 새롭지도 않은 90년대식 자기동일성을 비추는 거울형상으로 손색이 없다. 90년대 소설의 지형도를 그리고자 할 때 한창훈과 성석제가 반드시 언급되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2한창훈은, 아직 미정형의 작가이다. 그는 ‘아직’ 세계를 하나의 고정된, 혹은 체계적인 시선으로 읽어내지 않는다. 때문에 그의 소설은 작가 자신이 설정한 목적에 따라 어떤 수단(소설과 관련시켜 이야기하자면 구성이라든가 묘사와 서사의 배치, 작가와 작중인물의 거리 등이 될 것이다)이 선택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무언가 초월적인 질서, 혹은 황홀한 기억이 작가로 하여금 소설을 쓰게 하고, 작가는 그 황홀경 혹은 휘광에 전율하며 하나하나의 문장이 풀려나오는 것, 그것이 한창훈의 소설이다. 즉 한창훈은 자신의 서사형식 속에서 자신을 파악하며 또 스스로 감성이나 감정으로 외화된 속에서도 자기를 재인식할 뿐만 아니라, 자기의 타자 속에서 자기를 파악하고 소외된 것을 사상으로 변화시켜 작가 스스로에게 복귀시키는 과정을 통해서, 즉 사유하는 정신을 기반으로 소설을 쓰지 않는다. 그의 글쓰기는 사유하는 정신을 통해 어떤 영혼에 접근하는 과정을 밟는 것이 아니라, 아직 분화되거나 분석되지 않은 어떤 힘에 이끌려 신들린 듯 수행된다.
미정형의 작가라는 표현은, 물론 그의 글쓰기에 어떠한 합목적적 과정도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한창훈은 아주 중요하고도 문제적인 목적을 설정해놓고 있으며 그의 소설은 그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씌어진다. 그는 첫번째 창작집인 『바다가 아름다운 이유』(솔출판사, 1996)의 서문에 자신의 글쓰는 목적을 “중심에서 더 멀리 떨어져나와 발톱 끝 같은 주변부에 또 하나의 중심을 세우는 것”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거니와, 실제로 한창훈 소설의 행간에는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혼신의 노력이 배어 있다. 한창훈이 시선을 집중하는 대상은, 자연 혹은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는 혹은 자연과 근사(近似)한 삶을 사는 인간존재들이다. 한창훈의 현실독법에 따르자면, 자연적인 질서는 인간을 자기와 통일하며 존재하는 반면, 인공적인 질서는 자연과 인간을 분리시키며 나아가 인간은 인간을 지배렐緇뽀? 뿐 아니라 자연마저 황폐화시킨다. 한창훈은 인간이 만들어낸 질서를 거부하며 대신에 현재는 ‘발톱 끝 같은 주변부’로 밀려나버린 자연적인 질서를 꿈꾼다. 결국 한창훈은 모든 고정된 것은 연기처럼 사라질 정도로, 다시 말해 하나의 사회적 내용이 사회적 형식으로 전화할 틈도 없이 새로운 사회적 내용이 발생할 정도로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의 한복판에서 과거로부터 잔류된 요소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 시대의 예외적인 개인인 셈이다.
한창훈의 자연적인 질서에 대한 동경은 문제적이다. 자연적인 질서에 대한 동경을 통해 두 개의 ‘중심’, 인간 혹은 문학의 충일성과 생동성을 심하게 훼손시키는 ‘중심’과 맞서고 있기 때문이다. 한창훈이 맞서는 ‘중심’ 중의 하나는 1990년대 한국문학의 주류적 흐름이다. 1990년대 한국문학은, 거칠게 단선화하자면, 다국적의 문학이며 무국적의 문학이다. 달리 표현하면 행복을 위해서 이전의 모든 것을 잊어버리려는 망각의 정신, 이전의 모든 것(전통)과 절연하려는 의지가 지배하는 곳, 그곳이 1990년대 한국문학이 서 있는 자리이다. 1990년대 한국문학에서는 ‘어제’보다는 ‘오늘’이, ‘오늘’보다는 ‘내일’이 중요한 관심사이다.
하여, 1990년대의 문학은 마치 새롭게 재생한 듯하다. 과거를 깨끗이 잊고 새출발을 다짐하는 회개자의 모습으로, 애써 과거의 기억을 푸른 바다 속에 던져버린 채 오로지 과거와는 다른 삶을 살고자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한국의 1990년대는 후기산업사회, 정보사회, 대중소비사회, 포스트모던한 사회, 세계화 시대를 구가하고 있으며, 1990년대의 문학 " 문학의 생명은 기억이고 변화 자체가 아니라 변화하기까지의 과정이며, 따라서 문학은 기억과 과정에 대한 관심으로 한 시대의 지배적인 담론과 맞서야 한다는 목소리는 여전히 높음에도 불구하고 " 또한 그 논리를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한 시대의 총체성을 감싸안지 않는 그 시대에 대한 명명법은, 엄연히 존재하는, 그리고 인간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삶의 영역을 인간의 삶 밖으로 강제적으로, 그리고 영원히 밀어내기 때문에, 자칫 인식상의 폭력으로 표출될 가능성이 높다면, 1990년대의 한국문학의 주류적 흐름은 이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1990년대 문학에서는, 과거 문학이 주로 관심을 기울였던 영역(인간의 삶에 작용하는 사회렌英맛岵? 측면, 그리고 주변부의 삶)이, 왜 그토록 오랜 기간 동안 많은 작가들의 관심의 대상이었는가에 대한 해명도 질문도 없이 강제적으로 밀려나고 있다. 그렇다면 주변부에 대한 한창훈의 관심은, 일단 소중하다.
한창훈이 맞서고자 하는 또 하나의 ‘중심’은, 자연의 질서를 대신하여 인간의 삶을 지배하기 시작한 인공의 질서 즉 문명이다. 한창훈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자연적 질서에 순응하는 인간적 삶을 제일 중요한 삶의 모델로 설정하며, 그를 통해 자연과 조화된 인간적 질서의 형성을 꿈꾼다. 문명의 역사는 곧 억압의 역사라고 할 때, 그 중 가장 큰 억압의 대상은 자연이며, 이는 궁극적으로 자연과 조화를 통해 얻어질 수 있는 인간의 행복을 가로막는다. 결국 자연은 인간의 합목적성이라는 휘황찬란한 이미지에 가려진 그늘이고 진실이며, 인공의 질서에 철저히 몸을 버린 희생양이다. 그러나 자연은 일그러진 대로 말없이 운동한다. 자연은 문명의, 인공의 질서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영원한 타자이며, 때묻지 않은 거울이다. 이 순수한 거울로 변화한 인간의 삶을 바라본다는 것, 이것은 현재 우리의 삶을 있는 그대로 재현할 수 있는 길이며, 때문에 한창훈이 소설이라는 수단을 통하여 달성하고자 하는 목적은 문제적이다. 이러한 한창훈의 문제틀은 “자연과 조화된 인간의 삶은 과거의 우리의 모습이다. 그리고 우리가 앞으로 그렇게 되어야 할 모습이다. (……) 이제 인간의 문화는 인간을, 이성과 자유를 통해 자연으로 되돌려보내야 한다”(쉴러, "소박문학과 감상문학")고 했던 쉴러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창훈은 미정형의 작가이다. 그는, 그 자신을, 그리고 그 자신의 목적을, 뿐만 아니라 자기와 구별되는 것을 아직 보편적인 개념을 통하여 사유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사유하는 정신으로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느낌으로 받아적는다. 쉴러의 말처럼 자연과 조화된 인간의 삶은 분명 과거의 모습(인간의 잃어버린 낙원)이며, 또 인간이 설정할 수 있는 의미 있는 미래상이다. 다시 말해 지금, 우리의 현재적인 모습이 아닌 것이며, 한창훈의 표현처럼 ‘발톱 끝 같은 주변부’에 위치한 모습이다. 그렇다면 한창훈이 자신이 설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간직했어야 할 과거의 모습이 사라진 이유는 무엇이며, 만약 돌아가야 한다면, 어떠한 방법을 통해 돌아갈 것인가 하는 점이 밝혀져야 할 터이다. 가령 쉴러의 경우를 보자. 쉴러는 자연과 인간의 조화가 깨진 시럭彭@막? 근대를, 합목적성에 의해 모든 것이 다시 기획되는 시점인 근대를 설정한다. 그러면서도 쉴러는 근대의 발전적 계기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쉴러는, 인간 각자가 어떠한 노력도 없이 이루어진 자연과 인간의 조화 상태보다는, 근대는, 비록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분열시켰다 하더라도, 주체(관)성의 능동적인 역할에 대한 발견이 이루어진 만큼 이 자기활동성을 통해 목적의식적으로 실현되는 자연과 인간의 조화가 보다 풍부한 이념내용이라고 규정한다. 즉 근대가 마련한 이성과 자유를 지니고 자연으로 돌아갈 때 인간과 자연의 조화는 미래적 전망으로 튼실하게 자리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창훈은 이 작업을 수행하지 않는다.
한창훈이 미정형의 작가인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자신의 포착한 대상을 아직은 역사화, 개념화시키지 않은 단계에서 그의 글쓰기가 행해지고 있다는 것. 하여, 그는 아직 자신이 중요한 것으로 설정한 대상에 대해 분명한 태도를 취하고 있지 못하다. 한창훈 소설의 주요 등장인물은 민중적, 토속적 세계에 근원을 두고 있는 순박한 인물들(황종연, "서민적 삶의 훈기와 활력", 한창훈, 『바다가 아름다운 이유』, 솔출판사, 1996, 300쪽)이며, 또한 자연에 삶의 터전을 둔, 그리고 영원한 파괴와 쇄신이라는 근대적 역동성으로부터 소외된 인물들이다(이러한 인물들을 우리는 일반적으로 서민이라고도 부를 수 있고, 80년대식 개념을 사용하자면 민중이라 부를 수 있을 터이다. 하지만, 한창훈 소설의 등장인물들을 이처럼 명명하기에는 힘들 듯하다. 작가 자신이 이들을 분명하게 개념화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은, 한때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는 삶을 살았거나 아니면 여전히 그 질서에 순응하며 사는 자들이다. 한창훈이 이러한 인물들을 대하는 태도는 대단히 불명확하다. 내려다보는가 하면 어떤 대목에서 올려다보기도 한다. 어느 대목에서 이들은 어쩔 수 없이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수레바퀴에 스러질 수밖에 없는 존재로 설정되어 씁쓸한 페이소스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또 어떤 대목에서는 가속도가 붙어 이제는 멈추게 할 수 없는 자본주의라는 기차에서 떨려난 이들을 감싸안는 놀랄 만한 생명력을 지닌 존재로 형상화된다. 즉 한창훈에게 있어 자연적 질서는, 자연적 질서에 순응하는 삶은, 스러져가는 존재이기도 하고 동시에 도달해야 할 목표이기도 하다.
한창훈은, 따라서 심한 내적 모순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자연의 한 부분으로 살았던 유년의 황홀한 기억은 너무도 깊게 각인되어 있어 자연을 성스럽고 높은 질서로 파악하는 것 이외의 개념화를 용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연과 관련된 작가의 ‘생애 중 가장 황홀한 기억’은 과거의 것이다. 작가가 아무리 유년의 기억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하더라도 현대인의 삶 속에서 이 기억은 점점 구석진 자리로 밀려가며(이미 밀려가 있으며) 그 자리에는 새로운 개념틀이 들어차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따라서 한창훈은 자연이라는 대상에 서로 양립하기 힘든 양가적인 감정을 동시에 느낀다.
이 양가적인 감정(상호대립자)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 과거의 기억과 보다 선명한 형태로 남아 있을 보다 가까운 과거의 개념틀을 어떻게든 통일시킬 수 있는 방법으로는 두 가지가 가능할 터이다. 하나의 방법은 현재의 삶 속에서 갑작스레 과거의 기억을 떠올린 이유는 무엇인가라고 묻고 그에 답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하나의 방법은 현재의 자기 자신을 잊거나 포기하는 길이며, 그리하여 새로이 습득한 개념틀이 활동할 영역을 최소화하고 과거의 기억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는 후자의 길보다 복잡한 매개와 과정을 필요로 한다. 현재 자신의 삶을 객관화하여야 하고, 더 나아가 좀처럼 개념화를 용인하지 않는 미정형의 기억을 정형화시켜야 한다. 그렇다고 후자의 길이 간단한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과거의 막연한 기억보다는 훨씬 권위적인 개념틀과 맞설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창훈은 후자의 길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이로 인해 한창훈 소설에 있어서 글쓰기의 원천은 과거의 기억, 그리고 어떠한 개념틀도 지워내지 못한 자연적인 질서이다. 한창훈은 자신의 설정한 대상을 형상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에 대한 섬광과도 같은 느낌을 기억하고 표현할 뿐이다.
한창훈 소설의 주인공은 어떤 특정한 인물이 아니다. 자연과 인간의 조화가 가능한 주변부(개념화하자면 농렙狙?)와 영원한 파괴와 쇄신이라는 역동적인 기차가 질주하는 중심부, 즉 근대화된 도시, 이 두 시럭彭@? 한창훈 소설의 구조를 결정짓는 동력이다. 한창훈 소설의 주인공들은 보이지 않는 본질 그러나 엄연히 존재하는 본질을 찾아, 여행을 시작했다가도 길이 보이면 의미없는 여행을 떠나지 않는다. 한창훈 소설의 인물들이 하는 일이란 자연의 곁에서는 도시를 동경하고(결국은 도시를 향해 길을 나선다), 도시라는 문명 속에서는 과거를, 바다를, 그리고 자연을 기억하고 추억하는 정도이다. 근대화된 도시 앞에 서면 각각의 인물은 자신이 활동할 공간도, 생의 윤기도 상실한다("까치마을" "닻" "바다가 아름다운 이유"). 그러다 푸른 파도에 밀려 몸이 출렁이는 순간, 각각의 인물들은 생동성을 회복한다(앞서의 작품뿐만 아니라 "증인" "오늘의 운세"도 마찬가지 경향을 보인다. 돈을 위해서 분명하지 않은 사실을 증언하려던 "증인"의 소라댁은 남편이 남성적인 힘(자연적인 힘)을 되찾아 부부관계를 회복하는 순간 생의 윤기를 찾으며, 장사꾼이므로 어쩔 수 없이 상품화폐경제의 논리 중심에서 살아가는 "오늘의 운세"의 용표는 오누이 관계라는 자연적 질서를 떠올림으로써 활력에 넘친다.
예컨대 한창훈은 과거와 현재, 근대와 전근대, 도시와 자연이라는 시럭彭?“? 인간의 운명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소로 설정하는 반면 인간존재의 주체성이나 자기활동성에 대해서는 최소한의 자리만을 내주고 있는 셈이다. 작가는 물론 이러한 문제틀을 절대화시키지는 않는다. 작가는 도시에서 온 자들(자본주의적 생의 감각을 지닌 자들)은 자연의 곁에서도 그들의 불순한 욕망을 채우기에 급급하고("까치마을" "마리아가 사는 마을"), 주변부에도 이미 중심부의 논리가 빠르게 혹은 느리게 끼어들어와 있다는 사실에도 눈을 떼지 않는다. 이러한 부분에 있어서는 한창훈은 누구보다도 충실한 리얼리스트이며, 따라서 한창훈의 소설에 등장하는 시럭彭@? 현재라는 시간성으로부터 절연된 고도(孤島)는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현재성이 한창훈의 대전제를 변화시키지는 않는다. 한창훈이 중심부의 논리와 맞서는 혹은 넘어서는 어떠한 삶의 방식을 찾아내는 대신에 더욱더 주변부에 위치해 있는 삶의 방식을 의미있는 것으로 제시("마리아가 사는 마을"에서는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즉 자본주의적 삶의 경험 모두를 잃은 인물이 주인공으로 설정되어 있기도 하다)하기 때문이다.
한창훈은 거듭거듭 자본주의적 시장원리에 물들지 않는 소박한 인간상을, 그리고 자본제적 계산가능성으로부터 절연된 인간적 덕성에 주목한다. 그에게 시장의 논리, 혹은 문명은 억압이며 질곡이며 궁극적으로 인간적 생동성을 빼내가는 첨병이다. 그는 아직은 합목적성 혹은 계산가능성의 원리가 언제부터, 그리고 왜 모든 인간을 장악하기 시작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또 합리성(이 합리성은 도구적 합리성으로 변질되어 인간적 삶의 가능성을 제약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이 인류의 삶에 기여한 점은 없는지에 대한 관심도, 아직은 없다. 그리고 자연과 조화된 인간의 삶이 우리가 도달해야 할 목적이라면 그 목적을 위해 어떠한 수단을 선택해야 하는지에 대한 관심도 지금은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한창훈의 표현처럼 지금, 이곳은 그가 동경하는 주변부가 ‘발톱 끝’에 위치해 있지 않은가. 지금, 이곳은 자연에 대한 기억마저 없는 인공낙원의 삶, 밀실을 통해서만 익명의 광장으로 들어설 수 있는, 그러므로 공동체적인 삶에 대한 동경도 향수도 없는 삶, 전쟁의 공포와 분단의 상처, 아귀(餓鬼)와도 같은 가난, 독재의 서슬로부터 멀리 떨어진, 그 결과 개체보존의 욕망마저 강렬하지 않은 삶으로 뒤덮이고 있지 않은가. 이런 시대에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한창훈의 구호는 어딘지 모르게 공허한 감이 없지 않다. 구호가 의미가 없어서가 아니라,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중심부를 넘어서는 풍부한 개념틀로 완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한창훈 소설이 뿜어내는 미적 환기력은 근대 사회의 희생양이자 타자인 자연, 그 자체가 만들어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즉 한창훈 소설의 미적 환기력은 필연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우연적이며, 작가의 의도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대상 자체가 지니는 문제성에 기인한다는 것인데, 때문에 한창훈 소설을 읽고 감동을 느끼기 위해서는 독자의 적극적인 준비작업 혹은 의미부여가 필요하다. 즉 한창훈의 소설은 자연이 지니는 중요성에 동의하는 소수의 독자들에게만 큰 울림을 준다.
쉴러는 “이제 인간의 문화는 인간을, 이성과 자유를 통해 자연으로 되돌 려보내야 한다”고 말한 후 “그런데 근대시인이 걸어가는 이 길은 인간 누구나가 각자, 또 전체로서 가야 하는 길이다”라고 덧붙인 바 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 누구나가 각자, 또 전체로서 가야 자연과 인간의 조화상태가 가능하다면, 한창훈은 도구적 합리성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어떤 특수한 내용을 부정하려는 정신, 그리하여 도구적 합리성보다 보다 풍부하고도 고차의 개념틀을 확립하려는 의지를 다지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래야만 ‘중심에서 더 멀리 떨어져나와 발톱 끝 같은 주변부에 또 하나의 중심을 세우는 것’이 가능할 것이며, 새롭게 세워진 중심부에 동시대인들을 끌어모을 수 있을 터이다.
그러나 "입덧"(한창훈의 가장 최근의 작품이며, 무언가 변화를 타진하고 있는 작품임에 분명하다)처럼 계산가능성이라는 중심부의 논리에 계산가능성의 논리로 맞서 비판하고 어떤 가능성을 찾아보는 것은 도구적 합리성을 지양, 극복하여 풍부한 개념틀로 나아가기보다는 오히려 작가 자신(한창훈 소설의 고유한 질, 즉 개성)을 망각한 상태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의료보험마저도 일반 직장근로자나 공무원보다 배는 더 내야 하는 농민들. 월 소득산출을 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기본보험료에 능력비례 보험료라 하여 재산 소득 자동차는 물론 농업시설물, 소 돼지 수와 그것들이 먹는 사료까지 계산에 넣어 나오는 보험료를 내야 하는 농민들. 아프더라도 쓰러지기 전까지는 병원 가볼 염두도, 시간도 못 내는 사람들. 결국 병을 키워 병원에 실려가면 보험 혜택이 안 되는 비싼 의료기기 신세를 져야 하는(한창훈, "입덧", 『창작과 비평』 1996년 가을호, 166쪽)
앞서 지적했듯 한창훈이 줄곧 관심을 기울였던 민중적, 토속적 세계에 근원을 두고 있는 순박한 인물들이 미적 환기력을 발산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들이 자본주의적 시장원리의 희생양이자 동시에 초월자로 설정되었기 때문이며, 이로 인해 한창훈의 소설은 그만의 아우라와 특질을 확보할 수 있었다. 즉 서민층을 한편으로는 전근대적이며 또 한편으로는 탈근대적인, 그리고 과거적이면서도 미래적이라는 모순적인 통일체로 설정했다는 것, 그것이 권위주의적 담론과 내적 설득의 담론이 서로 대화할 수 있었던 힘이며, 한창훈 소설이 설득력을 지닐 수 있었던 근거였던 것이다. 그러나 "입덧"은 내적 설득의 담론을 작가 자신이 스스로 철회함으로써 권위주의적 담론이 질주하는 양상을 보인다. 자신의 감성이나 감정을 외화시키는 가운데에서도 자기를 재인식하지 않으면, 한 개인은 정신의 보다 높은 상태로 나아가기 힘들다. 어떻게 자기를 유지하면서 자기의식의 발전을 꾀하느냐는, 따라서 한창훈 소설의 새로운 화두이다.
3성석제의 혈관에는 ‘너무도 많은 19세기의 엄숙한 도덕성의 피가, 위협하듯이 흐르고’ 있다. 성석제는 시대착오적이라 불려질 만한 엄숙한 도덕성을 위장하기 위하여 여러 다양한 포즈를 취하는, 아니 취할 수밖에 없는 작가이다. 하여, 성석제가 취하는 포즈는, 암만 해도 한국문학사에 뚜렷한 흔적을 남긴 작가 이상(李箱)을 연상시킨다.
암만 해도 나는 19세기와 20세기 틈사구니에 끼여 졸도하려 드는 무뢰한인 모양이오. 완전히 20세기 사람이 되기에는 내 혈관에는 너무도 많은 19세기의 엄숙한 도덕성의 피가 위협하듯이 흐르고 있소그려.
이곳 34년대의 영웅들(『34문학』 동인들을 지칭하는 듯함―인용자)은 과연 추호의 오점도 없는 20세기 정신의 영웅들입디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그들에게는 선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들은 생리를 가지고 생리하면서 완벽하게 살으오.
그들은 이상도 역시 20세기의 스포츠맨이거니 하고 오해하는 모양인데 나는 그들에게 낙망을(아니 환멸) 주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들과 만날 때 오직 20세기를 근근히 포즈를 써 유지해 보일 수 있을 따름이구려! 아! 이 마음의 아픈 갈등이어. (이상, "사신(7)", 김윤식 편, 『이상전집 3―수필』, 문학사상사, 1993, 235쪽)
성석제는, 유년시절, 어떤 황홀경을 맛보았다.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 선과 악, 아버지와 아들, 할아버지와 손자, 개인적 모험과 사회의 발전 등이 그야말로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는, 저 인류의 유년기인 서사시의 시대를 연상시키는 황홀경을.
성석제는 가야 할 길을 훤히 밝혀주던, 그리고 모든 것을 새로우면서도 친숙하게 했던 별빛을 이미 보아버렸다. 그 별빛은 다름아닌 할아버지였으며(신수정, "우리 시대 만가(輓歌)의 존재방식", 『문학사상』, 1996. 10월호, 126∼127쪽), 그 할아버지로 인해 유년 시절 작가의 영혼의 모든 행위는 그야말로 의미로, 활력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밥먹는 행위의 전범을 나는 할아버지에게서 보고 배웠다. 할아버지의 상은 대개 겸상으로 차려지는데 마주 앉는 사람은 집안의 장자이다. 그가 그릇의 뚜껑을 열면서 소리 내는 것을 들은 적이 없다. 국을 마실 때나 수저를 놓을 때도 마찬가지다. 그가 식사를 하는 것은 정물처럼 고요하다. (……) 반찬 그릇의 가장자리는 새처럼 가벼운 존재가 다녀간 듯 보일 듯 말 듯한 흔적이 남아 있다. 어린 대중의 환호하는 특정한 반찬―계란찜이나 굴비구이 등등―은 아이들을 위해 남겨진다. 할아버지가 자리를 뜨면 아이들은 숟가락을 움켜쥐고 승냥이처럼, 때로는 노한 파도처럼 남은 것들을 쓸어간다. 그것이 아름다운 광경은 아니므로 피해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을 은연중 용인하여 아이들의 갈구를 채워줄 줄 아는 것이 할아버지의 원칙이다. (성석제, 『위대한 거짓말』, 문예마당, 1995, 112쪽)
성석제가 할아버지에게서 배운 것은 단지 ‘밥먹는 행위’의 전범은 아닐 것이다. 할아버지란 성석제에 있어서 욕망의 매개자이다. 금기와 허용, 위엄과 관대, 낡은 것과 새로운 것, 당위와 욕망이 미묘하게 어우러져 만들어냈던 화음을 성석제는 잊지 못한다. 성석제의 유년기에 형성된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잣대이며, 거울이다.
할아버지로 표상되는 금기와 허용이 의미 있게 병존하는 세계는 떠올리기만 해도 그를 단숨에 황홀하게 하는 기억인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더할 나위 없는 질곡인지도 모른다. 그는 20세기의 인간이기 때문이며, 성석제의 기억이 보편적인 경험이 아닐 뿐더러 자신의 기억 속에서도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20세기는 할아버지로 표상되는 세계에 전근대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여놓았을 뿐 아니라 전근대적이라는 수식어 외에도 인간의 삶의 가능성을 철저하게 훼손한, 하여 넘어서야 할 어떤 세계라는 역사적 평가까지를 내려놓은 상태이다. 작가는 이것을 잘 알고 있다. 성석제는, 할아버지라는 전범을 좇아 자신의 삶을 영위할 가능성이란 애초부터 없으며, 또한 할아버지로 표상되는 질서를 사회적 목표로 제시할 경우 그에게는 ‘시대착오적’이라는 명칭이 붙여질 것이라는 사실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감지하고 있는 것이다.
한 시대의 주류적 흐름으로부터 이탈하거나 한 시대를 예외적인 존재로 살아간다는 것(예컨대 시대의 흐름을 역행하는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시대의 흐름을 너무 빨리 읽어낸다는 것)은, 그 존재를 ‘마음의 아픈 갈등’의 상태로, 즉 불행의 상태로 밀어넣기 마련이다. ‘나’만의 기억이나 목표가 아닌 ‘우리’의 기억이나 목표를 갖는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가. 그저 ‘나’만의 기억이나 목표를 그려내더라도 그 작품은 보편성을 지닐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나 성석제가 지니고 있는 내용은 그렇지 못하다. 자신의 기억을 존중하면 보편성을 확보할 수 없으며, 또한 ‘우리’의 기억을 존중하면 ‘나’의 기억이 설 자리가 없다. 이러한 ‘마음의 아픈 갈등’을 결국 그는 언어유희, 이야기체의 구현으로 해결하고 있다. 성석제는 ‘마음의 아픈 갈등’을, 이상과 마찬가지로, 포즈를 취하는 것으로 해결한다. 구분되는 점이 있다면 이상은 시대의 흐름을 너무 앞서 나갔고 성석제는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성석제가 취하는 포즈는 두 가지 형식충동으로 구체화된다. 하나는 기호놀이, 혹은 말장난 pun(성석제 소설에 나타나는 기호놀이의 구체적인 양상에 대해서는 신수정, 앞의 글, 참조)이며, 다른 하나는 이야기체의 도입이다.
『왕을 찾아서』는 성석제의 기호놀이가 어디에서 연원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왕을 찾아서』는 한때 뒷골목의 세계를 평정했던 ‘마사오’에 대한 추억담이다. ‘마사오’는 금기와 허용, 위엄과 관대, 낡은 것과 새로운 것, 당위와 욕망을 조절할 줄 아는 능력을 지닌 인물이다. 그가 맨주먹으로 한 세계를 평정하는 동안, 그곳은 모든 것이 빈틈없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마사오는 발차기, 주먹치기, 박치기, 손으로 잡고 찌르고 뜯기, 물어뜯기 등등 천 년 전 삼국 시대부터 내려온 무술을 두루 사용하여 지역을 평정한 다음, 뒤탈 없는 놈, 성질 급한 놈, 툭하면 치받는 놈, 잘 훔치고 잘 웃기고 잘 먹고 잘 사는 놈, 독한 놈, 속없는 놈을 고루 사귀고 그들을 움직여 똑같은 놈들을 다스렸다. 고루 쓰고 두루 사귄다는 점에서 그는 싸움꾼을 벗어났고 수십 년을 왕으로 군림하는 동안 어느 한 분야의 천재에 의해 거덜나는 낭패를 당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 그들은 무엇을 했는가. 물보다 잉어가 차지하는 부피가 더 많은 못에서 잉어를 잡았다. 회쳐 먹고 지져 먹고 볶아 먹고 삶아 먹고 고아 먹었다. (……) 그들은 한 번은 낚시로, 한 번은 밧데리로, 한 번은 꽝으로, 한 번은 직접 못에 뛰어들어 당수와 뒷발차기로 때려잡는 등 각자의 취미껏 놀면서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한 시절을 장식했다. (성석제, 『왕을 찾아서』, 웅진출판, 1996, 111쪽)
그러나 이 조화는 깨져 나간다. ‘마사오’의 시대가 끝나면서부터이다. ‘마사오’는 거대도시의 조직과 연계를 가졌으며, 동시에 칼을 사용하고 교묘한 술책으로 영향력을 넓혀오던 ‘창용’의 속임수에 그 권좌에서 물러나는 것이다. 이때부터 진정한 왕은 존재하지 못하고, 대신에 ‘어느 한 분야의 천재’들에 의한 불화, 그것도 금속성 무기와 교묘한 술책으로 가득한 불화상태 즉 추악한 시절이 펼쳐진다.
『왕을 찾아서』는 마사오에 대한 헌사이다. 금기와 허용, 위엄과 관대, 낡은 것과 새로운 것, 당위와 욕망을 조절할 줄 아는 능력을 지닌 권위자에 대한 만가이다. 성석제는 이 권위자를 숭고하게 그리지도 않으며, 그에 대한 만가를 장엄하게 울려대지도 않는다. 이런 점에서 그는 이상주의자가 아니라 리얼리스트이다. 성석제는 ‘마사오’로 표상되는 어떤 세계를 동경하지만 ‘마사오’로 표상되는 세계가 전지전능한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러한 세계가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잘 안다. 때문에 작가는 ‘마사오’를 신격화하고 싶으면서도 그를 신격화하지 않으며, ‘마사오’가 부재한 세상을 경멸하지만 극단적으로 경멸하지는 않는다. 작가로 하여금 그것을 차단하는 어떤 제어장치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기억과 현실의 갈등을 그는 언어유희라는 형식으로 표출하며, 어쩔 수 없이 기억 쪽으로 기우는 마음을 마사오에게는 호의적인 웃음을, 그리고 ‘창용’ 등에게는 냉소와 경멸을 실어보내는 것으로 은밀하게 관철시킬 뿐이다.
성석제는 새롭게 중심을 찾으려는 아들들의 논리보다 한때 중심을 이루고 있었던 세계를 동경하는 작가이다. 성석제에 따르면, 근대화의 논리를 추종하는 아들들이란, 모두 집을 나간 탕아들이다. 성석제는 그 아들들이 집에 돌아오면, 아니면 집 나간 아들들에게 삶의 교훈을 주고 싶어한다. 이야기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라는 프리즘으로 바라보자면, 아버지의 언어이며, 소설은 아들의 언어이다. 인류의 역사가 말할 수 없이 고요하여 동일한 삶의 방식이 누대에 걸쳐 지속되었던 시대, 삶의 지혜를 전수할 매개체를 지니고 있지 못했던 시대에, 아버지들은 이야기를 통하여 삶의 지혜를 아들들에게 전수해왔다. 아버지(할아버지)라는 길잡이가 아들의 삶을 충일하게 하는 데 손색이 없었던 까닭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시대 이후로 인류의 역사는 그야말로 전면적이고도 걷잡을 수 없이 빠른 변화를 보이고 있다. 지나간 역사적 경험이나 사실을 기초로 추상화된 아비세대의 논리는 새롭게 변화하는 현실을 따라잡기 힘들며, 뿐만 아니라 변화한 현실을 따라잡지 못하면 못할수록 회의의 정신을 상실하고 굳어진 자기확신에 빠진다. 이때 아버지라는 존재, 그리고 아비가 행하는 교훈은 길잡이가 아니라 오히려 아들의 삶을 제약하는 질곡으로 작용한다. 이때 소설이 개화한다. 소설이 인간의 모든 가치를 계산가능성의 가치로 환원하는 타락한 시대(자본주의)의 반영물이자 그 시대에 대한 반항의지의 소산이라면, 그리고 모든 인간을 기호화럽騈珉?쳔객? 사회질서에 대한 반영이자 부정의식의 산물이라고 한다면, 닫힌 세계의 조그마한 틈을 열고 나오려는 자(곧 아들)들이 소설에 매달리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성석제는 아비를 거부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아비의 입에서 풀려나오는 삶의 지혜를 경탄의 눈으로 바라본다. 아비 논리에 대한 동경은 성석제로 하여금 이야기체에 매혹 당하도록 한다. 성석제의 많은 소설이 이야기체의 구성방식에 접근해 있다는 것, 또 가장 최근의 소설인 "어린 도둑과 40마리의 염소"에서 성석제가 소설형식을 버리고 이야기체로 나아간 것 등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아비의 세계를 동경하는 까닭이다.
한마디로 성석제는 흔히 제반 영역의 분화로 설명되는 근대 사회 전반을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작가이다. 성석제는 근대란 ‘어느 한 분야의 천재’들만을 양산했을 뿐 모든 사회적 질서를 관류하는 중심적인 가치체계를 설정하는 데 실패했다고 규정하며, 근대를 인류 역사의 발전계기로 읽어내는 모든 담론에 맞서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성석제의 개념틀은 전근대라는 중심을 해체했을 뿐 그 해체작업을 통해 또 하나의 중심을 건설하는 데 실패한 한국의 근, 현대사를 되돌아보게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그러나 성석제의 이러한 진단과 이에 따른 형식 충동들은, 이전의 문학적 체계를 넘어서서 풍부한 개념으로 완성된 상태는 아닌 듯하다. 성석제는 어쩌면 장자(長子)의 입장에서 할아버지의 세계를 바라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성석제의 진단에는 할아버지라는 중심이 과연 할머니와 며느리, 손녀의 삶까지를 조화롭게 만들었으며, 또한 서자나 하인 등까지를 풍요롭게 했는지에 대한 검토가 없다. 마찬가지로 할아버지라는 존재가 만약 어떤 전범이 됨직하다 하더라도 이 할아버지의 세계를 전근대적 질서 전반으로 일반화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근대적 질서가 그토록 전면적으로 부정해버릴 요소로만 가득 찼는지, 또 설령 할아버지의 세계를 전근대적 질서의 상징물임에 틀림없으며 그리하여 그 세계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이 의미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할아버지의 지혜’를 들려주는 것만으로 가능한 것인지 등등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성석제는 아직 답변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성석제가 앞으로 이러한 문제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만약 성석제가 이러한 질문에 나름대로 설득력 있는 답변을 마련한다면, 우리는 또하나의 위대한 작가를 만날 수도 있으리라.
490년대 한국문학의 흐름은, 한 선전광고의 문구를 빌자면, ‘새로운 것만이 세상을 바꾼다’로 집약되는 감수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표현에는 어떤 것이 새로운지, 또 바꾸고자 하는 세상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이 빠져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변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도 세상은 바뀌어야 하며 그것은 새로운 것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굳게 믿는 것, 이것이 90년대 문학의 주류적 흐름이다. 90년대의 한국문학은 기존의 것에 대한 환멸과 전복의지(그러나 이 전복의지는 사회적 모순의 내용을 찾아내어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문학을 부정하는 데 모아지는 것이 특징이다)로 충일하며 그 의지를 실현하기 위한 모험적 행동으로 점철되어 있다. 어쩌면 90년대의 문학은 영원한 파괴와 쇄신이라는 자본주의적 역동성이 인간의 삶에서 무엇을 앗아가는가에 대한 고민 없이, 영원한 파괴와 쇄신이라는 역동성에 보조를 맞추고 있다.
자기를 찾고자 하면 ‘우리’에게서 멀어지고, ‘우리’라는 공감대를 유지하고자 하면 ‘자기’가 무(無)가 되어 버리는 사회, 이것이 현재의 인간이 살고 있는 공간일 터이다. 또 단자의 삶을 부정하기 위해 ‘나’의 진실한 모습을 드러내고자 하면 세상으로부터 더욱 고립된 단자가 되는 곳, 이곳이 우리의 현주소이기도 하다. 하여 영원한 파괴와 쇄신의 논리에 전율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영원한 파괴와 쇄신을 감행해야 하는 것, 이 고통에 찬 모습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작가의 운명이다. 이를 두고 이상은 “절망은 기교를 낳고 기교는 또다른 절망을 부른다”고 표현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현재 한국문학 전반은, 새로움의 추구(영원한 파괴와 수신)에 온몸을 맡기며 더 나아가 이 행위 자체가 마치 모순된 사회를 바로잡는, 즉 ‘세상을 바꾸는’ 행위로만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 결과 현재의 한국문학은 새롭게 나타난 삶의 방식, 첨단의 문화적 양식을 찾아내야만 위대한 문학이 가능한 것 같은 허위의식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나 기존의 질서를 보다 높은 수준에서 행하지 않는 새로운 지향들과 전위적인 운동은 분명 기존의 질서를 더욱 공고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기존의 질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사회를 새롭게 기획하려는 의지가 그 의지의 불충분함으로 실패할 경우, 기존의 질서는 번번이 실패하는 새로운 기획들을 빌미 삼아 더욱 확고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켜낸다. 즉 구두선으로 내건 새로움이 이전 체계의 어떤 특수한 내용에 대한 부정을 통한 높은 체계로까지 정립되지 않을 경우, 이 새로움은 역사를 퇴행시키는 방향으로 변화를 일으킬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뿐만 아니라 첨단의 문화적 양식에 대한 관심은, 동시대 인간의 삶을 심각하게 왜곡할 위험성도 동시에 지니고 있다. 한 인간이 평생 동안 사회규범을 거부하는 전위적인 삶을 살고 또 첨단의 문화적 양식을 좇을 가능성은 그리 많지 않다. 또 전체의 사회성원 중 전위적 삶을 사는 존재란 소수일 뿐이다. 그렇다면 현재 대대적으로 수행되는 첨단의 문화 양식에 대한 담론화는, 한 개인의 삶 중에서 아주 작은 부분을 한 개인의 삶 전체, 또는 세대 전체, 더 나아가 시대 전체로 환원하는 오류에 빠져 있는지도 모른다. 인간의 삶이 영원한 것과 일시적인 것의 매우 다양한 결합에 의해 영위된다면, 영원한 것이라는 요소가 이들의 담론 속에는 자리하고 있지 않은 까닭이다.
파괴와 쇄신이라는 원리를 가장 중요한 미적 전범으로 설정하고 있는 현재의 한국문학의 조건은 이처럼 불길하다. 자기를 망각한 상태에서 자신의 실천이 발생시킨 결과를 수용하고 이를 통해 보다 높은 자기를 확립하는 노력이 쌓일 때 한 작가의 발전이 가능하고, 또 이러한 작가들이 양적으로 축적될 때 질적인 비약이 가능하다면, 현재의 한국문학은 자기확신을 위해 소여적 현실을 단선화시키는 데 그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한창훈과 성석제의 소설은, 문제적이다.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영역을 찾아나서서 그것을 의미화하려는 노력은 이 시대에 이루어진 어떠한 소설적 모험보다도 값지다. 그들은 이렇게 묻고 있다. 지금은 과연 탈근대적 징후만이 존재하는 시대인가? 이 땅에서 근대적인 기획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모든 담론들이 과연 전근대적인 질서보다 고차의 개념이었던가? 한창훈과 성석제의 질문에 이제는 우리가 대답할 차례이다. 그러나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이에 답할 준비가 아직 되어 있지 않다. 다만 이것 하나만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만약 이 질문에 답하지 않는다면, 어떠한 근대적 기획, 탈근대적인 노력도 의미없는 것이 될 것이라는 사실. 이처럼 한창훈과 성석제는 90년대의 한국문학 전반에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고 할 수 있거니와, 이것이 바로 한창훈과 성석제 소설에 스며 있는 문제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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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문학동네 1996년 겨울/제3권 제4호/통권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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