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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급실] 김철중 의학전문기자 체험 르포 <4>
암 진단 받고 무작정 달려와 "CT·MRI 찍어달라" 평소 가족에 불성실했던 사람들이 더 큰소리 쳐 "VIP 홀대하면 피곤" 전문의가 특별룸으로 안내 응급실에는 생로병사와 관련된 희로애락이 곳곳에 묻어 있다. 아들이 교통사고를 당해 생명이 위급하다고 연락받고 달려온 어머니의 참담한 모습, 이미 숨을 거둔 남편이나 아버지를 바라보는 가족들의 허망한 얼굴, 때론 가슴을 쓸어내리며 희망을 다지는 환자들…. 결국 모두가 환자가 돼 숨을 거두는 우리 삶의 자화상이 고스란히 펼쳐져 있다.
야간 응급실은 술만 없으면 조용하다. 심야 119 앰뷸런스 출동의 70%는 술 먹다 싸워 다친 환자 또는 구토·실신 등 소위 ‘술병’ 난 환자 때문이다. 음주에 관대한 우리 사회의 단면이 응급실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특히 금·토요일에는 병원 인근 유흥가에서 술 먹고 넘어져 찢어지거나, 싸우다 다쳐서 응급실을 찾는 환자들이 많다. 대입 수능시험이 끝난 요즘에는 고등학교 3년생들의 음주 상해 사고도 잦다. 최근에는 젊은 여성 ‘술병’ 환자가 부쩍 늘었다는 게 응급실 의료진들의 말이다. ‘술병’ 난 사람 중에는 새벽에 술이 깨면서 지난밤의 ‘행패’를 기억하지 못하거나, 창피해서 몰래 도망가는 경우도 적지 않다. 상습적으로 술에 취해 응급실에 실려오는 환자들도 종종 있는데, 이런 환자들의 보호자에게 연락을 하면 “그 인간 얘기는 꺼내지도 말라”며 병원에 찾아오지도 않는 경우도 흔하다. 술 먹고 다친 사람들은 대개 큰 소리로 진료를 재촉하고, 개중에는 의료진에게 폭력을 행사해 응급실을 공포 분위기로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 응급실 의료진은 최근 경찰이 추진 중인 ‘주취자(酒醉者) 보호 등에 관한 법률’ 제정에 절대 찬성이다. 술에 취해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을 가족이나 이웃이 신고할 경우 경찰이 강제 연행할 수 있기 때문에 음주로 인한 소란이 줄어들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순간들 지난달 14일 낮 12시쯤 68세 할아버지가 가슴이 아프다며 서울아산병원 응급실에 걸어 들어왔다. 아침 7시쯤부터 아팠는데 괜찮겠지 하고 참았다는 것이다. 환자는 오자마자 경련을 하면서 의식을 잃었다. 급성 심근경색증으로 인한 심정지였다. 이른바 ‘걸어 들어오는 폭탄’(Walking Bomb)이다. 심폐소생술도 하고 전기 쇼크도 줬지만 환자는 끝내 숨을 거뒀다. 증상 발생 후 너무 늦게 온 것이다. 8~9명의 가족들이 문안 아닌 문상을 왔다. 하지만 막내 아들이 아직 도착하지 못해, 환자는 비록 숨을 거뒀지만 인공호흡기를 달아놔야 했다. 오후 4시쯤 온 가족이 다 모인 가운데, 인공호흡기를 떼면서 사망이 선언됐다. 그렇게 해서 모든 가족들이 아버지의 마지막을 지켜봤다.
◆몸보다 마음이 급한 사람들 지방 병원에서 암(癌) 진단을 받으면, 급한 마음에 무작정 서울의 대형병원 응급실로 오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응급실로 와야 할 신체 증상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면 응급실 차트에는 환자의 주된 증상이 ‘암 진단’이라고 쓰이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진다. 외래에서 CT나 MRI 검사를 예약했는데, 그보다 빨리 찍게 해달라고 응급실에 오는 환자들도 종종 있다. 응급실에 오는 보호자들도 마음이 급하기는 마찬가지다. 100명의 보호자들이 따라오면, 100개의 휴대전화가 열린다.
◆응급실에도 'VIP룸'이 A대학병원 응급실 한편에는 소위 ‘VIP룸’이 있다. 국회의원이나 정부 고위 관리 또는 병원 고위층 관련 인사들이 오면 이곳에 모셔진다. 1주일에 4~5번 이용된다. 2평 남짓의 조용한 방에 침대와 전화기가 있다. 이들 환자는 처음부터 전문의가 진찰한다. 이렇게 접대(?)를 안 하면 ‘홀대’했다는 말이 나와 피곤해진다는 것이다. 정작 ‘초특급 VIP’는 야간에도 응급실을 거치지 않고 병실로 직행한다. 가끔 유명 여자 연예인이 응급실에 오면 남자 레지던트(전공의)들이 알아서 이 방으로 모신다.
아이가 열이 펄펄나는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 코피가 난다 등등 온갖 건강 상담이나 환자 병세를 묻는 전화가 많이 온다. 주로 외래가 끝난 야간에 많으며 하루에 약 50여통이다. 병원 대표전화 ARS(자동응답 시스템)가 싫어서 응급실로 진료 문의하는 경우도 있고, 술 먹다가 맹장이 오른쪽이냐 왼쪽이냐를 놓고 내기했다고 물어보는 사람도 있다(맹장은 오른쪽에 있다). 데메롤 등 마약성 진통제를 찾는 만성 통증 환자들도 응급실로 와서 의료진에게 처방을 조른다. 매일 와서 그런지 자기네들끼리도 친하다는 것이다. 의료진은 이들에게 해당 진료과 허락을 받고 주사제를 놓아주기도 한다. (김철중의학전문기자 doctor@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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