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답한 마음을 책으로 달래고 있다.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을 읽었고 오랜만에 시집 몇 권을 손에 잡고 일독했다. 이장욱의 <정오의 희망곡>, 한강의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황동규의 <사는 기쁨>과 <황동규 시전집2> 등이 그것이다. 이장욱의 시는 비유하자면 수세미의 과육이 다 빠지고 섬유질 그물망만 남은 것과 같은 느낌을 준다. 시에서 모더니즘이라는 이름으로 아주 익숙하게 반복적으로 볼 수 있는 시들이다. 시에 있어서의 추상화 같은 것이라 할까. 아무튼 시를 통해 삶을 성찰하기를 희망하는 독자에게는 쉽지 않겠다. 한강의 시집은 한강의 작품들이 왜 비교적 호흡이 짧게 느껴지는지 혹은 시적인지를 알게 한다. 이번에 그녀의 작품을 전체적으로 한 번 정독해 보고자 한다. 그리고 나서 나름대로의 인상을 정리해 볼 수 있기를 희망한다. 시집을 일독한 느낌만 간단히 짚자면 한강 시집의 화자는 언어적 무병을 앓고 있는 것처럼 내게는 느껴진다. 고통의 체감 역치를 넘나드는 지점에서 집요하게 맴돌고 있다. 다만 차라리 그것이 정직하게 느껴져서 이장욱의 시보다는 내게 울림이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나 역시 고통에 익숙한 편이니까. 그렇지만 이 시집에서는 그 고통을 뚫고 나갈 긍정적인 전망을 암시할 만한 부분은 잘 보이지 않는다. 아마 십여 년 이전의 시집이기 때문이리라 생각해 볼 수도 있겠다. <소년이 온다>나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그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인가. <소년이 온다>는 한 번 읽은 적이 있다. 기억하는 것 자체가 망각을 요구하는 생리적, 사회적 요구에 대한 저항일 수 있다면 그것은 일단 태도적인 측면에서는 연결될 수 있는 바가 있을 터이다. 하지만 아직도 목소리가 역사의 감응 차원에 머물고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을 갖게 된다. 길게 스스로의 목소리로 뽑아내는 사자후와 같은 목소리를 기대하는 것은 지나친 것일까. 아무튼 아직 젊은 편이니 기다려 보자.
황동규 시인은 소설가인 고 황순원 씨의 아들이라는 관계성 속에서 다가오는 시인이고 수필가 피천득과 같이 대학 영문과 교수라는 생업과 관련하여 이해할 자전적인 요소를 많이 시 속에 담고 있다는 점에서 서정시의 사적 감수성을 잘 드러내고 있는 작품들을 써 왔다고 본다.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와 같은 시집을 전에 읽은 적도 있었고 이번에 몰아서 읽은 시집들에서는 38년 생인 시인의 생애 후반기의 삶이 많이 녹아 있다. 이장욱의 시와도 다르고 한강의 시와도 다른 시적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비교하자면 옛 사대부 문인들의 한시적 창작 태도를 재현하고 있는 듯하다. 소시민적 삶에서 생업에 종사하면서 매여 살면서 그의 시적 창작을 자극하는 것은 도시 내의 동료 문인과의 만남과 여가에 감행하는 다양한 여행과 자연과의 교감 등이다. 어쩌면 역마살이 있지나 않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니까. 그런 다양한 나들이의 경험과 음주와 문인적 사귐 등이 어우러져 일정한 영역을 형성하고 있다. 사람 사는 측면에서 이렇게 한 생을 살아가는 것을 인간적으로는 부러워할 만한 복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세상의 다양한 모습 중에서 잘 가꾸어진 부분이라는 아쉬움 또한 있을 것이다. 세상에는 또 다른 목소리들과 삶이 존재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