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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5월 19일 평화목교회 주일예배 설교
홍지훈 목사
로마서 8:14-27
영적인 연대(solidarity)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PTSD)라는 진단명을 아실 것입니다. 심각한 사고나 테러 가운에서 극심한 고통을 겪다가 살아남은 사람들이 겪는 정신적 질병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 말을 줄여서 보통 <큰 상처>를 의미하는 라틴어 Trauma라고 부릅니다. 설명하면, 트라우마는 너무도 상처가 큰 나머지 그 기억을 지우고 싶어도 지울 수 없어 늘 반복해서 자신을 괴롭히는 상처를 의미합니다.
1979년 3월에 개봉했던 Deer Hunter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유명한 로버트 드 니로가 주인공을 맡았습니다. 펜실바니아주의 작은 마을에 살던 세 친구가 월남전에 참전하면서 겪은 트라우마를 주제로 한 영화입니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 겪은 고통도 버거운데, 포로로 잡혀서 겪은 극심한 죽음의 공포는 탈출하고 귀국하고 나서도 정상적인 삶을 하지 못하게 하는 영원한 트라우마가 되어 인생을 비틀어댄다는 내용의 3시간 넘는 긴 영화입니다. 저에게는 이 영화가 “자발적으로 극장에 가서 처음 본 영화”이기에 기억에 크게 남아 있습니다.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러시안 룰렛”이라는 죽음의 게임장면입니다. 포로생활 속에서 그리고 그 이후에도 도박장에서도 계속되는 살인적 게임입니다. 6개의 회전탄창에 총알을 한 발만 넣고 탄창을 돌려서 그 총알의 위치를 모른 채 번갈아 가며 자기 머리에 대고 격발하는 아주 잔인한 내기게임입니다. 이기면 큰돈을 벌고, 지면 목숨을 잃는 것입니다. 엄청나게 무섭지 않겠습니까? 이런 게임을 실제로 해본 사람과 해보지 않은 사람은 같은 사람일까요? 아니면 다른 사람일까요? 이 극단적인 경험이 그 사람 속에는 <큰 상처> 트라우마로 남습니다. 우리 민족이 겪은 전쟁의 경험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전쟁을 몸으로 겪은 사람과 이야기로 듣기만 한 사람은 다릅니다.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폭풍은 지나갔지만 <폭풍 이후>는 늘 여기에 있습니다”(줄리어스 리). 전쟁과 테러, 폭력과 사고에서 천신만고 끝에 살아남은 사람의 트라우마는 그리 쉽게 타인에게 전달되는 것이 아닙니다. 미국에는 심각한 살인죄를 저질러서 사형판결을 앞둔 중죄인에게 마지막으로 정신과 의사가 그의 삶을 전체적으로 평가하여 탄원서를 제출하게 하는 제도가 있다고 합니다. 이 일은 담당한 정신과 의사에게 몇 박스 분량의 서류가 전달되는데, 거기에는 이 살인자의 모든 기록이 담겨있습니다. 의사는 몇 달 동안 이 서류를 면밀하게 검토합니다. 가족관계에서 사회적 관계까지, 초등학교 성적표에서부터 중죄를 저지른 일까지 그의 삶의 기록을 다 평가하고, 판사 앞에서 증언합니다.
정신과 의사가 하는 증언은 그 살인자가 살면서 겪은 트라우마가 어떤 것인지를 증언하는 것입니다. 학교에서 집단 따돌림을 당했는지, 학교와 가정에서 폭력에 노출됐는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경험한 적은 없는지 등등, 정신과 의사가 이를 증언하여 받아들여지면 그 죄수는 사형에서 종신형으로 감형될 수 있다고 합니다.
이 정신과 의사에게 심리상담학자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그런 엄청난 일을 맡아서 할 수 있습니까?” 힘든 작업과 그 작업에 대한 소명을 물은 것입니다. 그 정신과 의사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 일을 시작하기 전의 저와 지금의 저는 전혀 다른 사람입니다.” 무슨 대답입니까? 타인의 트라우마에 대한 공감능력이 생겼다는 말입니다. 이 공감은 쉽게 생기는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말입니다.
제가 <디어 헌터>를 보고 월남전의 참상을 들여다보았지만, 그 참전자들이 겪은 트라우마를 똑같이 가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개인적 트라우마 외에도 우리 사회에는 집단적 트라우마를 일으키는 사건들이 많이 벌어졌습니다. 어제 39주년을 지낸 5.18이 그렇고, 지난 4월 5주년을 보낸 세월호가 그렇습니다. 얼마전 강원도 고성 산불 속에서 겨우 살아난 사람들이 겪은 공포도 뉴스로만 접한 사람들은 이해하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로마서 8장의 분위기를 가장 잘 표현해주는 구절이 22-23절입니다. “모든 피조물이 이제까지 함께 신음하며 함께 해산의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뿐만 아니라 첫 열매로서 성령을 받은 우리도 자녀로 삼아주실 것을 고대하면서 속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무슨 고난과 무슨 고통 때문에 모든 피조물이 신음하고 있다고 바울은 말했을까요?
제국의 수도인 로마에 생겨난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점증하는 유대인 공동체의 아류로 취급받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로마교회 역사 유대인과 이방인이 섞여있는 작은 가정공동체였을 것이고, 네로 황제의 치하에서 언제나 위기의식과 불안에 사로잡혀 살았을 것입니다. 그 작은 공동체에게는 그리스도 신앙으로 산다는 것은 매일 매일이 위험 속에 사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14절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현재 우리가 겪는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견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나는 생각합니다.”라고 말입니다.
로마서를 기록한 바울은 자신이 살던 세계에 대한 경험과 통찰력으로 그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교훈을 남겨주었지만, 로마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전달되어서 이렇게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물론 이해하기가 쉽지 않기만 말입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할 때에 하나님께서 영감을 불어넣어 주셨다면, 이 말씀 속에는 우리들 현대 그리스도인을 향한 교훈도 담겨있음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 평화롭게 잘 유지되기를 바라는 세상에 살고 있으면서, 예수의 재림을 기대하는 종말적 성격이 강한 성경 속에서 어떤 가르침을 찾아낼 수 있을까요? 이것이 우리 모두의 고민인 것입니다.
오늘 로마서의 본문은 그 당시의 고통 가운에게서 성령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알려주고 있습니다. 16절에 보면, “바로 그때에 성령이 우리의 영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언하십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26절에 보면,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우리의 약함을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알지 못하지만, 성령께서 친히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여주십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에 나오는 성령은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으로 표현됩니다. 저와 여러분의 안에 그리고 우리가 모인 이 공동체 안에 성령이 내주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성령체험은 어떤 특별한 현상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지나친 해석입니다. 성령은 사람을 열광적으로 만들 수도 있지만, 반대로 성령은 사람은 침착하고 분별력 있게 만들기도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성령은 그 사람 안에서 드러나게 활동 할 수도 있지만, 그냥 감추어져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성령이 우리의 영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언할 그때까지”(16절) 많은 사람들은 지금 성령이 나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사는 경우가 많다는 말입니다.
성령의 활동이 드러나는 “그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바로 우리가 고난과 고통을 당하는 “그때”입니다. 서두의 말씀으로 돌아가면 우리가 <큰 상처>를 입고 신음할 바로 그때 성령은 우리 속에서 활동하십니다.
그동안 교회가 고난과 고통을 당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너무 쉽게 말했던 것을 반성해야 합니다. 잘 견디면 끝에 가서 하나님께서 선한 길로 인도하신다고 말해주는 것이나, 이런 고통도 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말로 위로하는 이야기는, 죽음 앞에 서있는 처절한 마음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지 못합니다.
<큰 상처>에 처한 사람에게는 이 트라우마가 반복해서 다시 등장합니다. 이것을 플래시백(flashback)이라고 합니다. 생각을 안 하고 있는 데에도, 몸이 먼저 트라우마를 떠올리면서, 갑자기 과거의 고통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입니다. “신앙으로 극복하십시오.”라고 아무리 말해주어도 당사자는 말처럼 쉽게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성령으로 인도받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입니다(14절) 이 말은 성령에 의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종이 아니라 아들, 즉 자유인으로서 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내주하시는 성령이 우리에게 증언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우리에게 오셔서 자신을 십자가에서 희생하신 것이 이 일을 가능하게 만든 것입니다. 즉, 이런 과정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관계가 설정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은 하나님과 내가 이제부터 연대(solidarity)하였다는 것을 증언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겪는 고통과 고난은 그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주님의 고통과 고난과 연대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써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다면, 외아들 그리스도 예수가 부활 하는 기쁨에만 선택적으로 참여할 수 없습니다. 부활의 기쁨에 참여한다면, 십자가 죽음의 고통에도 함께 참여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겪는 이 모든 <큰 상처>는 예수의 십자가의 고통과 고난이 흘러넘친 것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골1:24) 그리스도와 함께 고통을 겪는 사람만이 그의 영광에 함께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함께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의 고통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를 대신하여 친히 간구해주신다는 말(26절)은 고통에 처한 우리가 무엇을 하나님께 기도해야할지 모르고 방황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도하도록 인도하시는 분입니다.(27절)
모든 사람이 살면서 고난과 고통을 겪지만,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처럼 큰 트라우마를 모두 경험하지는 않습니다. 같은 시대를 경험했어도 그 시대의 아픔을 아주 크게 경험한 사람도 있고, 그다지 크게 느끼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극복하면 치유될 만한 고통과 고난을 겪은 사람은 많지만, 죽는 날까지 잊을 수 없는 상처를 받고 사는 날 동안 지속적으로 그 고통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때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큰 상처>를 입은 사람들과 연대(solidarity)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우리의 큰 상처와 연대하여 함께 탄식하고 하나님께 대신 간구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와 연대하시는 것을 수직적 연결이라고 하면, 우리가 다른 이들과 연대하는 것을 수평적 연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고통과 함께 동행 하시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타인의 고통과 동행하면서 그가 <큰 상처>로 인하여 당하는 지속적인 고통에 연결되어 있어야합니다. <큰 상처>로 인하여 아픔을 호소하는 사람에게, 나는 그 아픔을 잘 모른다고 “아프다는 소리 그만하라”고 말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정말로 그러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사형수의 모든 과거를 읽고 평가하여 탄원서를 제출하는 역할을 맡은 정신과 의사가 자신을 “이 일을 하기 전과 지금의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한 말의 의미가 그런 것입니다. 사형수의 트라우마에 아주 가까이 갔다는 의미입니다. 가까이 다가가기 전에는 그의 행동을 결과에서만 보았겠지만, 그의 트라우마를 다 들여다보고 나니, 그의 삶과 연대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중범죄를 저지는 범죄자에게도 연대가 필요하다면,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도 당한 피해로 인해 잊혀지지 않는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다가가 연대하는 일은 그리스도인에게는 “책임”(responsibility)과도 같을 것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인들은 서로를 책임지고 삽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서로에게 아무 것도 아닌 게 되고 맙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가 사는 동안 겪는 고통 앞에서 우리와 함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탄식으로 대신 간구해 주시는 성령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무어라고 기도할 수 없을 때에, 하나님께 우리를 대신하여 기도할 바를 빌어주시는 성령을 느끼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성령체험입니다. 그러고 나서는 다른 사람들이 당하는 고통에 성령의 마음을 가지고 연대하십시오. 비록 우리가 그들과 똑같이 느낄 수는 없지만 그들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고 고통을 이해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셔서 우리와 동행하며 우리의 고통과 함께 탄식하도록 하신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며, 이제는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여 세상을 하나님의 뜻으로 채우시려는 마음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우리는 그런 세상에서 살아야하지 않겠습니까?
죽음에서 부활의 길을 향하는 여정 속에 언제나 동행하며 우리를 위해 대신 간구해주시는 성령의 손길을 느끼는 평화목 교회가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