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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11 - 2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는 시라쿠사를 점령하고 카르타고의 항복을 받다!
기원전 216년 8월 2일 이탈리아 남부 풀리아주 칸나이 평원에서 9만 로마군과 4만이 좀 넘는 카르타고군
이 격돌했으니 역사상 유명한 “칸나이 전투” 로 이 전투에서 로마군은 5만이 죽고 3만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두 집정관 중 바로는 도주했고 파울루스는 전사했으니 역사상 유례가 없는 처참한 패배입니다.
B.C 218년에 발발한 2차 포에니 전쟁의 3년차인 B.C 216년에 로마의 누적 병력손실은 15 ~ 16만에
달했으니 이는 당시 로마 인구의 4% 가량에 해당하는 것이며 또한 시민군과 동맹군을 1:1
비율로 동원하는 로마군 특성상 8만명의 로마인, 즉 현역 해당자 20만의 40% 를 잃어버린 셈입니다.
한니발은 천재적인 전술적 능력은 알렉산드로스 3세의 망치와 모루 전술을 발전시켜 양익 포위 전술
(double pincer movement tactic)을 고안했으니 군사전술사에서 중대한 진보였고 칸나이에서
보여준 양익 포위는 고대 전쟁사를 통틀어 가장 정석적이고 완벽한 형태의 망치와 모루 전술 이었습니다.
한니발이 포로로 잡은 3만 로마군의 몸값을 요구하자 원로원은 자금이 바닥난 상태인데다가
몸값의 지불이 한니발에게 전비까지 제공하는 꼴이므로 의견이 분분하였는데, 한
원로원 의원이 포로들이 2개 군단이나 달하는데도 겁먹고 진영에 머물러 그대로 포로로
잡힌 용기없는 모습을 지적한뒤, 이런 겁쟁이들을 구하는데 돈 쓰기가 아깝다고 반대합니다.
몇백년에 걸쳐 전쟁을 수행한 로마인들은 고위층, 민간인 할것 없이 남자들이 프로 전사들에 가까웠으니,
전장에서 용기없는 모습은 심각한 인간성 결여로 간주하였기 때문이며 거기에 몸값을 주고 포로
들을 돌려받으면 한니발이 그 돈으로 다시 용병을 사들여 전력을 강화하리란 점도 반대하는 이유였습니다.
로마인들은 패배는 신벌(神罰) 이라며 여사제인 헤스티아 처녀들 중 불륜을 저지른 일이 밝혀진
여자들을 생매장하고, 그리스인 두명등 남성 4명을 포룸에 생매장하는등 인신공양을
벌이기도 했는데, 본래 로마인들이 인신공양을 나쁜 것으로 여겨 금기시했던
것을 감안하면..... 이는 정상적인 판단이 불가능할 만큼 충격을 받았다고 볼수 있는 장면 입니다.
이 패배로 삼니움족이 지배하던 중부, 그리스계가 지배하던 남부 지역이 일시적으로나마 로마
에서 이탈했는데 특히, 카푸아가 한니발 편으로 돌아선 것은 뼈아팠으니 카푸아는
캄파니아 지방의 맹주이자 로마 다음으로 인구가 많고 번영한 도시였기 때문기도 했습니다.
동맹이 균열되다 보니 로마는 본토의 자원을 카르타고와의 전쟁에 충분히 동원할 수 없었으며
게다가 로마의 정예 병력 다수가 카르타고와의 전장이 아닌 이탈리아 본토에
묶여 있어야 했으니..... 사실상 로마는 반신불수가 되었고 로마의 해외 병력은 고립되었습니다.
신은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주지는 않는 모양이야. 아무래도 한니발 자네는 승리하는 법은
알지만 승리를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는 모르는 것 같네! 전투후 마하르발이 한니발
에게 로마를 공격하자고 진언하였으나..... 대승리에도 불구하고 한니발은 견고한
성채를 가진 로마 공성전은 무리라고 보고 이탈한 도시들을 받아들이는데 집중하였습니다.
로마를 포위하는 것은, 점령은 무리라 해도 동맹세력에게 심리적 영향을 주어 더 많이 이탈시킬수도 있는
가능성도 있으며 로마시를 포위해 놓으면 시민들이 심하게 패닉에 빠질 가능성과 칸나이 손실에서
회복이 더뎌질 가능성이 높았으므로 당대 로마인들은 전부 한결같이 한니발이 실수한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현대에서조차 한니발이 일단 포위를 하면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견해가 있으니, 이후
한니발은 이탈리아 제 2의 도시 카푸아와 마그나 그라이키아라 불리는 남부 이탈리아의
맹주 타렌툼, 시칠리아의 대도시 시라쿠사를 이탈시키는 등 로마에게 타격을 입히는데는 성공합니다.
로마는 칸나이 전투때 발생한 치명적 인력 손실과, 장기 소모전으로 인한 자영농 파산이
일으킨 대규모 면세토지 집적 (라티푼디움) 은 결과적으로 공화정 로마의
경제를 파탄냈으며.... 이후 로마는 제정으로 나아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도 합니다.
전투 직후 한니발은 동생 마고를 카르타고 본국으로 보내 원로원에 전투의 승전을
보고함과 동시에 본국에 원조를 요청하자, 한니발의 승전에 열광한 카르타고
원로원은 압도적인 찬성으로 한니발에게 추가적인 원조를 보내기로 결의 합니다.
이때 원로원 내 전쟁 반대파였던 대(大) 한노 2세가 로마가 속한 라티움의 동맹시들 중 로마를
배반한 도시가 있는지, 로마의 35개 부족 중에 로마를 배신한 자들이 있는지 마고에게
물었고 마고는 모두 아니라고 대답하자 한노는 이렇게 말했다는데.... “그렇다면,
이 전쟁의 승패는 아직 결정나지 않았다. 그러니 이 시점에서 로마와 강화협상을 하는게 좋다.”
기원전 215년 한비발 측으로 넘어온 카푸아에 거점을 둔 한니발은 캄파냐 지방에서 아폴리나, 포추올리
쿠마등의 항구를 얻어 카르타고 본국과 연결되는 항로를 갖고자 했는데.... 로마는 집정관 파비우스는
2개군단을 카푸아 북서쪽 20킬로미터에 포진하고 남동쪽 20킬로미터에는 전직 집정관 마르켈루스
가 2개 군단을 지휘하며 카푸아 남서쪽은 집정관 그리쿠스의 2개 군단이 한니발을 포위한 형태였습니다.
카푸아에서 출동한 한니발이 싸움을 걸었지만 로마군은 요새에 틀어박혀 수비만 할뿐 전투에 응한 군대는
없었으며 한니발은 병력의 절반을 이미 이탈리아 남부를 점령하기 위해 보냈기 때문에 절반으로
로마 6개 군단을 상대하는게 무리가 있었으니.... 세곳 중에 한곳 요새를 공격하자니 전투가
길어지면 나머지 2개 로마군이 배후를 기습할 것이라 겨울이 오자 그만 남부 풀리아지방으로 돌아갑니다.
기원전 264년 시라쿠사가 북진하자 메시나는 로마에 구원을 청하니 시라쿠사는 카르타고와
동맹해 맞서니 제1차 포에니 전쟁인데 시라쿠사 참주 히에로 2세는 로마군에 패한 뒤,
동맹국이 되기로 했으니..... 그의 통치 기간에는 평화를 유지하며 번영을 구가했는데
기원전 215년 히에로 2세가 죽은뒤 손자 히에로니무스가 이으면서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합니다.
히에로니무스는 아버지가 물려준 중신들을 해임하고 자기 뜻대로 정국을 주관하는데 로마는 한니발 바르카의
침략으로 절체절명의 위기에 봉착했으니 기원전 216년 8월 2일 칸나이 전투에서 사상 최악의 패배를
당한후 카푸아등 이탈리아 남부 도시들이 대거 카르타고 편으로 들어갔고 기원전 215년 보밀카르
의 카르타고군은 시칠리아에 상륙해서 로마군 아피우스 풀케르의 반격을 막아내고는 거점을 마련합니다.
그러자 시라쿠사의 히에로니무스는 로마와 동맹을 단절하고 한니발과 손을 잡기로 했으니 로마군
풀케르에게는 시라쿠사가 히메라강으로 확장하는걸 동의하고, 히에로 2세가 로마에 바쳤던
공물을 돌려달라는등 무리한 요구를 하면서 15,000명의 군대를 소집해 카르타고군과
연합하여 시칠리아 섬을 공략하려 했지만, 기원전 214년 데이노메네스등의 습격을 받고 피살됩니다.
이후 아드라노도로스가 암살당하는등 격렬한 권력분쟁이 이어진 끝에, 히포크라테스와 에피키데스
형제가 최종적으로 집권했는데 두 형제는 로마와 싸우면 승산이 없다고 보고, 그해 봄에
시칠리아에 상륙한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에게 사절을 보내
평화 협약을 맺자고 제안하니 마르켈루스도 한니발군에 전념하고 싶기에 긍정적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카르타고가 원군을 보낼거라는 소식이 전해지자, 히포크라테스와 에피키데스는 마음을 고쳐 영토를
약탈하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않아 로마 수비대를 공격해 살육하자 마르켈루스는 시라쿠사에 두 사람을
넘기지 않으면 전쟁 뿐이라고 경고하자 두 형제는 로마에 적대적인 입장을 취하는 레온티니시로 도피합니다.
로마군 마르켈루스는 레온티니시를 공격했고, 히포크라테스와 에피키데스는 성문이 파괴되고 성벽
이 공략당하자 아크로폴리스와 에르베소로 피신했는데 출진한 8,000명의 시라쿠사군은
도중에 레온티니시 주민과 군인들이 전부 도륙당했다는 잘못된 소식을 전해듣고는 심한
충격을 받고 행군을 멈추니...... 히포크라테스와 에피키데스가 찾아와 보호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로마군은 언젠가는 시라쿠사도 레온티니시 처럼 만들거라고 덧붙이니 시라쿠사 지휘관들은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시라쿠사 원로원에 조언을 구하기 위해 편지를 썼는데, 이때 히포크라테스는 편지를 가로채어
큰 소리로 읽었으니 그 편지에는 두 사령관이 마르켈루스에게 모든 용병 민병대를 넘겨서 가혹하게
다루도록 하는 대가로 시라쿠사가 독립과 자유를 보장하도록 하는게 어떠냐는 내용이 들어 있었습니다.
병사들은 이에 분노했고 사령관들은 시라쿠사로 달아났으니 군대는 히포크라테스와 에피키데스를
새 사령관으로 추대한뒤 시라쿠사로 돌아왔으며 시라쿠사는 잔혹행위를 자행한 로마와 싸우기로
결의하고, 친로마 인사들을 모조리 숙청하자 로마 원로원도 시라쿠사를 응징하기로 대응하고
마르켈루스에게 도시 정벌을 맡겼으니..... 이리하여 2년에 걸친 시라쿠사 공방전의 막이 올랐습니다.
시칠리아에는 칸나이 전투 때 패잔병인 2개 군단이 주둔했고,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가 지휘하는
퀸퀘레메 갤리선 100척이 있었으니 기원전 213년 봄 시칠리아에 도착한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는 칸나이의 패잔병과 2개 군단을 이끌었고, 티투스 퀸크티우스 크리스피누스가 함대
사령관을 맡아 시라쿠사를 해상에서 포위하니 로마군 규모는 2만~3만 명에 100척의 갤리선이었습니다.
시라쿠사는 15,000명의 병력을 동원할수 있었으며, 로마 함대에 필적한 함선들도 보유했으며 또한 바다 쪽과
육지 쪽 모두 완전한 방어를 보장하는 27km 의 성벽을 보유했으며, 해안 성벽 아래에는 절벽이 펼쳐져
있어서 접근이 매우 힘들었고 게다가 아르키메데스가 발명한 최신식 방어무기를 충실히 갖추고
있었으니 로마군은 압도적인 전투력을 갖췄지만 아르키메데스가 고안한 무기 때문에 심한 곤경에 처합니다.
마르켈루스는 성벽 가까이 진영을 세우고 참호를 파서 도시를 완전히 포위한 뒤, 육지와 해상에서 동시에
공격하기로 결정했으니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가 엑사필론 성문 쪽으로 돌격했고,
마르켈루스는 활, 슬링, 창으로 무장한 병사들을 이끌고 아크라디나 아크라디나 성문 쪽으로 이동합니다.
이와 동시에, 티투스 퀸크티우스 크리스피누스가 이끄는 함대가 해안 성벽 쪽으로
이동하여 삼부카(Sambuca) 를 활용하여 성벽 위로 기어오르기
시작했으니.... 훗날 역사가 폴리비오스는 삼부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마르켈루스는 모든 배를 8척의 겔리선마다 밧줄로 서로 묶게 하니 각각의 쌍은 그들의 노를 하나는
좌현에, 다른 하나는 우현 쪽으로 몰아놓고, 남겨진 측면마다 밧줄로 고정했으니
선원들은 남은 노를 바삐 저어 성벽 아래로 접근하였고, 뒤이어 '삼부카' 라고 하는 기계를 들어올렸다.
사다리는 4피트 너비 높이로 만들어졌고, 양쪽은 난간으로 보호되었으며 머리 위는 덮개로 보호되었다. 발이
묶인 배의 측면을 가로질러 놓이도록 놓았고, 다른쪽 끝은 뱃머리 너머로 상당히 돌출되어 닿았다. 돛대
꼭대기에는 도르래를 밧줄로 고정하고, 사다리를 사용하려할때 배의 고물 위에 서있는 선원이 사다리
머리에 묶인 밧줄을 당기고 다른 이들은 들어올리는 걸 도왔으며 긴 막대기로 기계가 안정되도록 유지했다.
두 선박의 바깥쪽 노를 사용하여 배를 해안 가까이에 놓은후 기계를 성벽에 떨어뜨리니
사다리 꼭대기에는 4명의 병사가 배치되어 삼부카가 성벽 위에 놓이는 걸
막으려는 적군과 싸웠으며 삼면이 고리버들 방패로 고정된 나무 바닥 위에 서 있었다.
사다리가 벽의 꼭대기 높이 보다 높아지면, 네 사람은 고리 버들 방패를 풀고 성벽이나 담 위로 걸어 나왔고
뒤이어 동료들이 삼부카를 타고 올라가 성벽에 이르렀다. 이 기계는 자연적인 이유로 '삼부카' 또는
'하프' 라는 이름을 얻었는데, 들어 올릴때 배와 사다리의 조합이 악기의 모양과 매우 흡사하기 때문이다.
아르키메데스가 최대 발사 범위 내에서 모든 적을 공격할 수 있는 투석기들을 성벽에 배치해둔 바람에,
로마 함대는 곧 위기에 직면했으니 투석기들은 접근해오는 적 함대를 향해 바위를 정확하게
날렸고, 성벽 가까이 접근해오면 더 작은 기계를 사용해 적을 향해 돌을 발사하여 모조리 파괴했습니다.
또 '철제 손' 을 사용하여 성벽에 가까이 접근하여 삼부카를 성벽 위에 걸려던 적 함선의 뱃머리를
들어 올려서 전복시켰으니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배들은 철제 손에 걸려 공중으로
떠오르기도 했고, 매달려 있는동안 이리저리 빙글빙글 돌기도 했으며, 선원들은
모조리 내동댕이쳐졌고 몇몇은 어떻게든 밧줄을 붙들었다가 속절없이 추락했다고 합니다.
성벽 위에 거대한 거울을 배치해 로마 함선에 태양 빛울 집중시켜 불을 지르기도 했다고 하며 육상에서도
아르키메데스가 개발한 투석기와 철제 손의 대활약으로 로마군이 만든 공성 무기는 모조리 파괴
되었으니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마르켈루스는 이 상황을 멍하니 지켜보다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아르키메데스는 유리잔에 물을 길어 올리는 것 처럼 배를 끌어올리고 있고,
내 삼부카는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연회장에서 쫓겨나는 것처럼 두들겨 맞는구나."
결국 마르켈루스는 직접적인 공격 보다는 모든 보급로를 차단해 적을 굶겨죽이기로 마음먹었으니
그는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에게 3분의 2의 병력을 맡겨 도시를 계속 포위하게 한뒤,
자신은 나머지 3분의 1을 이끌고 카르타고인들에게 넘어간 시칠리아 도시들 중 일부를 공략합니다.
카르타고 사령관 히밀코가 25,000명의 보병, 3,000명의 기병, 12마리의 코끼리를 이끌고 헤라클레아 미노아에
상륙해 아그리젠토의 항복을 받아낸뒤 시라쿠사로 진군하자, 그는 일단 시라쿠사로 돌아오다가 도중에
히포크라테스의 시칠리아 기병대와 조우해 격파했으며 얼마후 히밀코가 도시에서 12km 떨어진
아나포강 근처에 숙영지를 세웠고 보밀카르가 이끄는 55척의 카르타고 함대도 시라쿠사 항구 앞에 도착합니다.
히밀코는 로마군의 방비가 굳건한걸 보고, 섣불리 마르켈루스를 치지 않았으니 보밀카르의
함대와 시칠리아 수비대와 함께 로마군을 협공한다면 충분히 승산 있었지만, 그는 끝내
공세를 취하지 않았으며 그 대신 마르켈루스와 합류하러 오는 로마군을 공격하려
했지만, 로마군이 해안 도로로 진군하는 동안 내륙 산간 길에서 헤매는 바람에 놓쳐버립니다.
추가 병력이 마르켈루스와 합류하자, 히밀코는 병력을 철수시킨뒤 로마에 복종하는 이웃 도시들을
공략하기로 했으니 카르타고군이 무르간티아의 항복을 받아내어 많은 양의 곡식과 보급품을
확보하자.... 여러 도시가 뒤따라 로마 수비대를 추방하거나 제압하여 카르타고군에 귀순했습니다.
에나시에 주둔하고 있던 루키우스 피나리우스 휘하 로마 수비대는 시민들이 자신들을 카르타고군
에게 넘겨주려 한다는 걸 눈치채고, 야밤에 시민들을 습격하여 학살을 자행한 뒤
마르켈루스와 합류했으니 시칠리아인들은 이 학살에 분노하여 카르타고 편에
대거 가담했지만 정작 카르타고의 히밀코는 여전히 싸우길 주저하며 아그리겐툼으로 돌아갑니다.
로마군은 시라쿠사를 18개월간 포위했고, 카르타고군은 대치만 하자.... 시라쿠사 주민들은 갈등이
일어났으니 친로마 성향 인사들은 로마에 귀순하자고 주장했고, 나머지는 끝까지 항전하자고
했는데 시라쿠사 귀족들이 마르켈루스와 접촉해 성문을 열어주려 했지만, 곧 발각되어
처형되었지만 마르켈루스 역시 카르타고군과 시라쿠사 중 어느 한쪽을 섣불리 꺾지 못합니다.
시라쿠사인들이 마케도니아 왕국의 필리포스 5세에게 구원을 청하기 위해 보낸 사절인 다미포가
로마군에 붙들렸는데 그는 스파르타 출신의 지식인으로, 마르켈루스의 회유에 넘어가
시라쿠사의 약점을 알렸으니 그는 시라쿠사인들이 아르테미스 여신을
기리기 위해 사흘간 기념행사를 개최할 예정이며, 이때 포도주를 많이 마실 거라고 밝혔습니다.
또한 갈레아그라 라고 불리는 탑 인근의 트로길로 만 쪽이 성벽의 높이가 가장 낮아서 공략하기 쉬운
편이라 하니, 마르켈루스는 시민들이 축제를 즐기고 술에 취해 곯아 떨어졌을 새벽에 1,000
명의 특공대를 보내어 다미포가 알려준 갈레아그라 탑 부근의 절벽을 기어올라
성벽을 넘게 하자 보초병들은 살해되었고, 특공대는 성문을 열어 아군이 진입할수있게 합니다.
외곽 도시는 공략되었고, 시민과 수비대가 도주한 오르티야와 아카디나등 내부 성채를 재외한 도시
대부분이 로마군의 손에 넘어갔으니, 히밀코는 급히 시라쿠사를 구하러 출정했지만 마르켈루스
의 역공으로 격파되었고, 뒤이은 전염병으로 인해 목숨을 잃었는데 전쟁 초기에 히밀코가
로마군을 공격했다면 로마군이 패배했을 가능성이 높았으니 공격을 주저한게 천추의 한이 됩니다.
한번 전투에 모든 것을 걸지 못하는 우유부단한 지휘관들의 한계라.... 당시 카르타고군과 함께
있던 히포크라테스 역시 전염병으로 사망했고, 에피키데스는 8개월간 내부 성채에서
항전하다가 희망이 없다는 걸 깨닫고 시라쿠사를 버리고 카르타고로 망명했으며 결국
수비대가 최종적으로 항복하면서 시라쿠사는 2년간 공성전 끝에 로마군의 손아귀에 넘어갑니다.
마르켈루스는 장병들이 도시를 약탈하는 것은 허용했지만, 시민들에게 신체적 피해는 입히지는
말라고 했으며 아르키메데스를 로마에 쓸모 있는 인재라 여겼기에 꼭 살려두라고
명령했는데, 그때 아르키메데스는 모래가 깔린 바닥에서 원을 그리는데 몰두하고
있었으니 그를 알아보지 못한 로마 병사가 따라오라고 명령하자, 다음과 같이 답했다고 합니다.
μην μου τους κύκλους τάραττε. 내 원을 망치지 마라. 그러자 병사는 자신의 명령을 무시하는
수학자에게 분노하여 그를 단칼에 베어버렸으니 정작 마르켈루스는 아르키메데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애석해 했으며, 명령에 따르지 않은 병사는 엄벌에 처했다고 전해집니다.
500여년간 시칠리아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그리스 도시국가 시라쿠사는 2년간의 공성전 끝에
로마에 정복되었고 시칠리아에 들어왔던 카르타고군은 로마군의 연이은 공세를 버티지 못하고
본국으로 축출되었으며 카르타고는 시칠리아에 두번 다시 발판을 마련할수 없었고,
이탈리아 본토에서 로마군과 처절한 항전을 벌이고 있는 한니발 바르카에게 지원한 길이 막막해집니다.
반면 로마는 이베리아와 이탈리아 전선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으니 기원전 205년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아프리카를 침공할 때, 시칠리아 섬은 원정군의 중요한 집결지로
사용되었으며 한편 시라쿠사는 로마의 식민도시로 전환된 뒤 전쟁으로 인한 참상
을 극복하고 인구가 다시 늘어나서, 5세기까지 로마 제국의 중요한 도시로서 기능했습니다.
로마군은 한니발과의 추가적인 회전을 철저히 회피하면서 산발적인 게릴라전만을 벌였으며 그렇게 로마군은
한니발의 보급을 방해하고 피로스왕 때처럼 그의 병력을 조금씩 갉아먹어 갔으니 로마군은 한니발의
본대와는 싸우지 않으면서 한니발이 떠난 지역들을 공격하는 방식으로 한니발의 거점도 하나씩 제거
하자 한니발은 추가적인 결정타를 가할 수 없고, 로마도 지구전만을 하다보니 전황은 교착상태에 빠집니다.
결국, 전쟁은 소모전의 양상으로 바뀌었고, 한니발은 파비우스의 지구전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는데 이는 한니발 개인의 역량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카르타고 본국의
지원이 미비했던 탓이었으니 카르타고도 한니발에게 지원을 해주지 않으려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한니발은 칸나이 전투 이후 동생 마고를 보내 본국에 지원을 요청했고, 카르타고 정부도 이에 응했으니
특히 카르타고는 마고에게 보병 1만5천 명에 기병 1,200명, 전투 코끼리 20마리로 구성된
지원군을 맡겼는데 이 병력은 전투함 60척에게 호위를 받으며 이탈리아에 상륙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지원군과 물자가 한니발에게 도달하지 못했으니 사르데냐 섬에서는 로마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원주민이 카르타고 본국에 원조를 요청했고 반면, 히스파니아에서는
카르타고의 남부 영토에서 대대적인 원주민 반란이 일어났으니 이는
하스드루발 바르카 함대가 에브로강 전투에서 그나이우스 스키피오에게 대패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카르타고 정부는 일단 보병 1만 5천명과 기병 1500명을 포함한 새로운 군대를 일으켜
사르데냐로 파견해야 했으며 하스드루발에게도 보병 4천명과 기병 5백명을 보내
주었으니 각 군대에는 임무를 마치면 이탈리아로 가라는 명령이 내려졌으니
카르타고군은 우선 사르데냐를 노렸는데 사르데냐는 로마군의 중요한 식량 보급지 였습니다.
한니발로 인해 이탈리아 본토에서 식량 수급을 할수 없었기 때문인데 그렇기에 카르타고가 이곳을 점령
하면 로마 본국을 더더욱 궁지로 몰아넣을 수 있었으니 물론, 로마군도 이를 모를리가 없어
사르데냐에 대한 방비를 철저히 했고 특히 제해권을 장악한 로마군은 인근 해역을 철통같이 감시했습니다.
그래도 운이 따라준 덕분에 카르타고군은 무사히 사르데냐에 상륙했지만 그러나 상륙한
카르타고군은 고작 2만 5천여 병력이라 로마군에 숫적 우위를 가지지 못했으며
게다가 로마군의 지휘관들과 병력들이 전반적으로 카르타고군에 비해 우수했으니
그래서 로마군은 코르누스 전투로 사르데냐에 상륙한 카르타고군을 손쉽게 격파합니다.
히스파니아에 보낸 카르타고군의 병력 역시 로마군에 격파당했으니 하스드루발은 데르토사의 전투에서
로마군에 격파당했고 이 패배로 이탈리아로 향할 예정이던 마고 바르카의 원군은 스페인으로
항로를 바꾸어야 했으며 다만 코르누스 전투 이후 카르타고 본국의 함대 일부가 이탈리아 로크리에
도착하기는 했으니 한니발은 그나마 누미디아 기병 4천 명과 전투 코끼리 40마리를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카르타고는 누미디아 시팍스의 반란에 직면했는데 이를 진압하기 위해서 히스파니아
에서 스키피오 형제를 상대하던 하스드루발 바르카가 아프리카로 소환당했으니 카르타고
본국이 위험에 처하니 더욱 한니발에게 보급을 해줄 여유가 없어졌고 그나마 마고 바르카
와 하스드루발 기스코의 대규모 원군이 도착하여 누미디아의 반란을 진압할 수는 있었습니다.
히스파니아에서 로마군 스키피오 형제들은 계속 세력을 확장하자 하스드루발 바르카는 엄청난 돈을
들여서 스키피오 형제와 동맹을 맺고있던 현지 부족들을 매수했으니 그리하여 현지 부족
들의 배신으로 약화된 로마군을 베티스 고지의 전투에서 격파하는데 성공했으며 심지어 두
스키피오 형제도 전사했는데 한니발 없이 카르타고군이 로마군을 상대로 승리한 유일한 전투였습니다.
다음해에 곧바로 스키피오 형제 중 동생의 아들이자 형의 조카인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가 침입해 카르타고 노바를 점령했으니 젊은 스키피오는 후대의 명성대로 엄청난 명장이었는데
그와 맞선 하스드루발 바르카, 마고 바르카, 하스드루발 기스코가 모두 패배하자 히스파니아
주둔군을 돕기 위해 카르타고 본국은 마지막 이탈리아 원정 병력까지 모두 히스파니아에 파견합니다.
카르타고에서 지원을 받지 못하는 와중에도 한니발만은 로마군을 회전에서 연파했지만, 전황을
뒤집을수는 없었는데 칸나이 전투 이후에도 한니발은 이탈리아 중부를 초토화하고 6개 군단
을 연이어 전멸시키는 대활약을 했으니 기원전 212년 실라루스 전투에서는 매복으로 3개
군단에 해당되는 1만 5천여 병력을 전멸시키고 그 뒤 헤르도니아에서 3개 군단을 더 괴멸시킵니다.
그러나 한니발이 이탈리아 남부의 타렌툼 근처로 내려가자 로마는 그 틈을 노려 한니발이
휩쓸고 간 지역들을 수복했으며 더욱이 두 명의 집정관들이 5만에 달하는
6개 로마 군단병과 6개의 동맹시 군단을 동원해 북부의 맹주였던 도시 카푸아를 포위합니다.
한니발은 로마군과의 결전을 노리고 북상했지만 로마군은 역시나 회전을 피했으니 그래서 한니발은 코끼리를
앞세워 로마군의 카푸아 포위망을 와해시키려고 했지만 로마군이 필사적으로 포위망을 지켜 난관에
부딪혔으니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던지 지휘관인 두 로마 집정관 중 한명이 창에 관통상을 입을 정도였습니다.
끝내 카푸아는 로마에게 함락됐고 카푸아의 배신을 주도한 원로원 의원들은 다수가 자살했으며, 살아남은
의원들도 로마군에 의해 처형되었는데 그리고 배신을 한 대가로 카푸아는 로마의 동맹국에서 속주로
격하되자 타렌툼도 친로마계 정치가들이 반란을 일으켜 로마의 동맹에 복귀했으며 시라쿠사도
로마군의 포위 공격을 받아 점령당했고 시라쿠사를 구원하기 위해 상륙한 카르타고군도 전멸했습니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가 히스파니아의 카르타고군을 궤멸시켰으니.... 한니발의 막냇동생
마고와 하스드루발 기스코는 7만이 넘는 카르타고군 병력을 보유했는데 스키피오의 4만 8천
로마군과 회전을 벌였으나 일리파 전투에서 전멸했으니 이로써 히스파니아의 카르타고군은
일소되었고 스키피오가 일리파 전투에서 거둔 군사적 성과는 칸나이 전투와 비견될 정도로 대단했습니다.
하스드루발은 한니발을 지원하기 위해 한니발 처럼 갈리아를 거쳐 알프스 산맥을 넘었는데 알프스
를 넘는 것은 한니발에 비해 매우 수월했으니 일단 겨울이 아니었고, 한니발이 주변의
갈리아족들을 대부분 우군으로 포섭해놓았던 결과였으니 오히려 하스드루발은
우호적인 갈리아인들로 부터 추가로 병력 지원까지 받아 하스드루발의 병력은 5만으로 늘었습니다.
그러나 한니발은 여기서 마지막 지원 기회를 잃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으니 자신의 경험으로 미뤄
하스드루발이 합류하는데 오래 걸릴 것이라고 생각해 북상을 늦춘 것인데 그 바람에
하스드루발의 전령이 한니발에게 가다가 로마군에 의해 잡혔고 하스드루발의 편지를 입수한
클라우디우스 네로는 보병 6천명과 기병 1천기를 이끌고 신속히 하스드루발의 진격로를 막았습니다.
리비우스의 로마군 3만여명까지 합류해 대군이 하스드루발을 저지했으니 양군은 북이탈리아의 메타우루스
강변에서 격전을 벌였는데 네로에 의해 카르타고군은 궤멸당하고 하스드루발도 전사했으니, 마지막
보급과 지원군도 한니발에 당도하지 못했으며 전황이 불리해지자 한니발을 지지하던 많은 이탈리아
도시들이 배신하고 로마 지지로 돌아서니 결국 한니발은 이탈리아 장화 발끝인 브루티움으로 몰립니다.
한니발에 대한 로마의 감정은 증오와 경의가 얽혀있으니 한니발은 이탈리아 반도를 떠나면서 헤라
신전의 제단에 자신의 전과를 새겨놓고 갔는데 즉, 로마를 코너로 몰아붙인 전적들을 로마인들
보라고 써놓은 것이니... 50년이 지난후 폴리비우스가 역사서를 쓰면서 그 기록을 참고했다고 합니다.
로마인들은 그들의 적이 자신들 영토에 남겨둔 승전비를 그대로 보관해 놨다는 소리이며... 심지어 후대에
가면 한니발의 이름을 딴 '한니발리아누스' 라는 이름을 왕족에게 붙여줄 정도가 되는데 전쟁사
연구자로 유명한 역사학자 임용한 인문경영연구원 소장이 한니발의 전략을 비지니스 측면
에서 분석한 글도 있으니 양파껍질 벗기듯 로마 학살, 명장 한니발의 천재적 전략이라고 평합니다.
한니발은 일관되게 부하를 감화시키는 인품과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한니발이 젊은 나이에 히스파니아의 지배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도 그곳의
주둔군과 주민이 그를 적극적으로 지지했기 때문이니 이탈리아 원정 때도
한니발의 용병들은 보급도 받지 못하는 극한의 상황에서도 그를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전세가 불리하거나 대우가 안 좋을 때 불만을 품은 부하들에게 목이 따인 장수가 한
둘이 아닌 것을 감안하면 이런 충성심은 이례적일 정도인데 그것도 금전적
인 관계 외에는 전혀 혈연이라곤 없던 용병과 고용주의 관계였는데도 말입니다!
용병술의 천재라고 불렸던 알렉산드로스나 카이사르 조차도 병사들의 파업 및 종군거부를
당했는데도, 열악한 적지 한가운데서 싸우던 한니발은 이런 기록이 없으니 애초에
그런 일이 있었거나 그의 리더십이 조금이라도 부족했다면 진작에 로마가 줄 보상에
눈이 먼 불평분자에게 밤중에 머리를 도둑질당해서 2차 포에니 전쟁은 끝이 났을 것입니다.
용병들로 부터 이런 충성심과 복종을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한니발의 지도력은 고금을 넘어 매우
드문 케이스로 순전히 잔혹함만으로는 급료도 제때 지급하지 못하는 용병들을
적지에서 이끌고 한두해도 아닌 무려 17년을 싸우는 리더십을 발휘하기는 힘들며
따라서 한니발은 최소한 같은 편은 인간적인 대우를 넘어 깊게 감화시켰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전세가 크게 호전되자 로마는 카르타고 본토 공격을 계획했지만 원로원은 '적지 한가운데 쳐들어가서
패배하면 어떻게 하느냐' 라고 회의적이었으니 제1차 포에니 전쟁에서 집정관 레굴루스
가 카르타고 원정에서 실패한 사례도 있었는데 하지만 스키피오는 자신만만히
공격 의사를 타진했고 이를 뒷받침할만한 전공을 히스파니아에서 쌓은 상태이기도 했습니다.
스키피오의 침공이 임박하자 카르타고는 적극적으로 한니발에게 물자 보급을 시도했지만 번번히
실패했으니 카르타고군은 로마 해군의 해상봉쇄를 뚫을 수 없었고 간신히 감시를 피해
한니발의 동생 마고가 이탈리아 북부 제노바에 상륙한 적도 있지만 마고도 한니발에게
향하지 못하고 그곳 주둔 로마군과 싸워야 했으며 결국 마고도 패배하고 제노바에 고립되었습니다.
스키피오는 아프리카에 상륙해 카르타고 침공을 본격적으로 개시했으니 그는 마사에실리족의
왕자 마시니사와 과거 카르타고에 반란을 일으킨 전력이 있었던 마실리 부족의 왕
시팍스를 동맹군으로 회유했는데 시팍스는 처음에는 스키피오와 동맹을 맺었으나
카르타고의 공작으로 카르타고인 미녀를 아내로 맞은 뒤에는 카르타고 편으로 돌아섭니다.
바로 하스드루발 기스코의 딸 소포니스바인데 그녀는 원래 마사에실리 부족의
왕자였던 마시니사의 약혼녀였으나 정치적 이유로 마시니사와의
약혼을 강제로 파기하고 마실리 부족의 왕 시팍스에게 아내로 보낸 것입니다.
이후 스키피오는 도망쳐나온 마시니사와 동맹을 맺고 우티카에서 시팍스, 카르타고 연합군을
격파했으니....하스드루발 기스코는 시팍스와 함께 바그라데스에서 다시 한번 대군을
이끌고 스키피오와 마시니사 연합군 상대로 복수전을 시도했으나 역시 참패를 당하고 맙니다.
시팍스를 유혹해서 카르타고 편을 들게 했던 소포니스바는 스키피오와 마시니사의 승리 후 마시니사
와 재혼했지만..... 그러나 이내 마시니사는 소포니스바에게 독약을 주면서
자살을 종용했고 소포니스바는 마시니사에게 감사를 표시한 후 독약을 먹고 자살하였다고 합니다.
스키피오는 누미디아 수도 키르타를 공격해 함락시킨후 시팍스를 잡아가두고 마시니사를 누미디아 왕으로
앉혔으니 이로써 스키피오는 누미디아를 확실히 자기 편으로 만들었고, 누미디아 기병대까지 공급
받을 수 있게 되었으며 스키피오가 연이어 승리를 거두자 카르타고는 스키피오와 강화를 맺었는데
이때의 강화 조건은 온건했으니..... 다른 식민지 손실없이 제해권만을 로마에 양도하는 조약이었습니다.
그런데 한니발이 건재하다는 소식을 듣자 카르타고 원로원의 과격파가 일방적으로 다시 전쟁을 결정했고
그것도 강화를 체결하고 돌아가던 로마 사절단을 기습해 살해하기까지 했으니 카르타고 온건파 총수
한노는 이들을 비겁하고 어리석다며 크게 질책했지만 과격파는 한니발이 돌아오니까 걱정이
없다며 큰소리만 쳤는데 그들은 감정적이었고 지나치게 한니발만 믿었으며 전략적인 식견도 없었습니다.
기원전 203년 한니발은 마고와 함께 귀국했으니 전쟁의 승패는 이미 났고 강화를 맺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원로원으로 부터 소식을 듣자 조약을 복구해야겠다고 생각했으니 그는 로마군과 본격적
으로 싸우기 전에 스키피오에게 회담을 요청하여 다시 한번 강화를 제안했지만 스키피오는
한니발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는데 이전의 강화를 일방적으로 파기한 것은 카르타고였기 때문 입니다.
스키피오는 한니발이 진심으로 강화를 원한다는 것과 카르타고 내부의 파벌 싸움 때문에 불가피하게 일이
틀어진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러나 스키피오는 독단적으로 조약을 맺을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으니 이미 로마 원로원이 전쟁 명령을 내린 뒤였고 결국 자마에서 양국의 최종 결전이 벌어집니다.
카르타고는 가용 병력을 긁어모아 군을 편성했는데 카르타고 용병들과 시민병들은 질적으로 열악했지만,
한니발의 직속부대 15,000명은 지중해 최강의 보병대였으니 한니발이 귀환할때 선박이 부족해서
병력을 가려 뽑아야 했으므로, 결과적으로 15,000명은 한니발의 병력 중 가장 우수한 병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카르타고에 기병은 부족했는데 당시 카르타고의 주요 동맹국이었던 누미디아가
배반을 해서 더이상 누미디아 기병대도 제공받지 못했고, 카르타고에 신성 기병대가
있었지만 정치적 이유로 투입되지 못했다는 얘기는 사실이 아니며 당시
카르타고 원로원은 한니발을 적극 지지하고 있었고 전쟁 승리에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기원전 202년 한니발의 카르타고군과 스키피오의 로마군은 자마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였지만, 기병대
의 부족으로 인해 중과부적으로 끝내 한니발은 패했는데 패배 요인 중의 하나로
지급하기로 한 전쟁보수의 연체와 로마군의 자금 매수로 인해 일어난 누미디아 기병의 배신이었습니다.
기병이 부족한데다가 꼬끼리도 훈련 부족으로 활용을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2차 포에니 전쟁 내내
따르던 고참병 1만 5천은 자마 전투에서 단 한명의 포로 없이 그를 위해 싸우다 전멸했으니... 이는
로마군이 한니발에게 과거 굴욕을 완벽히 되갚은 것이었으니 이 전투로 카르타고의 패전은 확정되었습니다.
자마 전투에서 한니발이 패배한뒤, 카르타고는 가혹한 조건으로 강화해야 했으니 카르타고는 로마에 50년에
걸쳐 1만탈렌트의 거액을 전쟁배상금으로 납부해야 하며 모든 식민지를 포기하고 또한 카르타고는
해양 국가임에도 3단층 갤리선 10척만 남기고 모든 함선과 해군 병력을 해체하라고 까지 강요받았습니다.
또한 모든 전투 코끼리를 로마에 압수당하고, 함대도 로마군이 확실히 다 탔는지 감시하는 가운데
불태워야 하며 아프리카 밖의 모든 나라와 동맹체결 금지 및, 로마의 허락 없이는 어떤 전쟁을
벌이는 것도 금지당했으며 심지어 외침이 임박해도 로마의 허락없이는 군대를 소집할수 없었습니다.
로마가 카르타고의 생사여탈권을 완전히 손에 넣은 것이니 결국 이 조항은 제3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
가 멸망하는 빌미가 되는데, 한니발은 조국의 생존을 위해 혹한 조건을 카르타고 대표로서 순순히
받아 들였으며 그러자 로마는 의외로..... 한니발의 신병을 로마 측에 넘기라는 요구는 하지 않았습니다.
다른나라와 전쟁에서 로마가 승리를 거두면, 패배한 적장은 개선식 최대의 구경거리로서 퍼레이드에 끌려
나와 사슬에 묶인채 로마시내에서 조리돌림당하는게 국률이었다는걸 생각하면 이례적인 일이었는데,
로마를 멸망위기까지 몰아넣으며 뼛속깊이 원한을 샀던 한니발이 의외로 관대한 대우를 받은데에는
한니발을 패배시킨 젊은 맞수, 로마의 영웅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의중이 반영되었으리라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