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 푸른 글씨를 누르면 노래를 들을 수 있습니다,
돌아가자 남해고향 1964년 손인호노래 - YouTube
"돌아가자 南海 故鄕"(1964)
韓山島(野人草) 작사/ 白映湖 작곡/ 노래 孫仁鎬
(1964년 지구레코드사 발매)
= 사진/ 남해포구 낙조 (쉬다가게) =
< 1 >
너 나이 쯤 되며는
누구나 한 번
봄 바람에 마음 달뜬
都會地 病이 못된 사람 꼬임에
속는 法이다 하모 하모 하 하모
오빠가 크는 말은
너 將來를 위해서
크는 말이다
돌아가자 南海 故鄕
오빠와 둘이~
< 2 >
南海 浦口 뱃 沙工
머석이 아들
거석이와 너 사이가
머석이 된 줄
아버지도 아시고
거석 하신데
하모 하모 하 하모
오빠가 크는 말은
너 將來를 위해서
크는 말이다 돌아가자 南海 故鄕
오빠와 둘이~
------------------------------------
* 달뜬 : 들뜬
* 하모 : 그래, 아무렴
* 크는 : 말하는, 그렇게 말하는
* 거석이 : 거식이, 그 사람, 그렇게
* 머석이 : 무슨, 누구의, 무엇의
(모두 경상도 토박이의 축약식 사투리다)
남해군[南海郡]
정의
경상남도 남서단에 위치한 군.
개관
동쪽은 통영시, 서쪽은 전라남도의 광양시·여수시, 남쪽은 남해, 북쪽은 하동군·사천시와 접하고 있다. 동경 127°48′∼128°51′, 북위 34°04′∼34°56′에 위치한다. 면적은 357.52㎢이고, 인구는 4만 5865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1개 읍, 9개 면, 222개 행정리(79개 법정리)가 있다. 군청은 경상남도 남해군 남해읍 서변리에 있다.
자연환경
남해도는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큰 섬이며, 남북 약30㎞, 동서 약 26㎞이다. 망운산(786m)·금산(681m)·원산(627m)등 다소 높은 산지는 많은 반면 하천은 모두 짧고 평야도 매우 협소한 편이다. 해안선 연장은 302㎞이며 육지부인 하동군 금남면과 연결되는 육계도(陸繫島)에 해당한다. 지세는 소백산맥의 말단부가 거창·산청·함양·하동을 거쳐 내려와 바다에 함몰했다가 다시 본 섬에서 솟아올라 일부의 산악지역을 형성하고 있어서 기복은 낮지만 적지 않은 산들이 분포하고 있다. 평야지대는 전체면적의 약 25%를 점유하며, 대부분이 해안이나 산곡을 따라 형성된 분지에 분포한다. 군 관내에는 또한 68개의 섬이 있는데, 3개의 유인도(큰섬·범섬·노도)와 65개의 무인도로 이루어져 있다. 해안선은 대단히 굴곡이 심하며, 군 동쪽으로 강진·동대·미조·앵강 등의 만과 작은 포구들이 형성되어 있다. 서반부의 북쪽에서 남쪽으로 전개되는 녹두산(鹿頭山, 451m)·사학산(四鶴山, 340m)·삼봉산(三峰山, 422m)·망운산(望雲山, 786m)·관대봉(冠帶峰, 469m)·천황산(天皇山, 395m)·망기산(望崎山, 340m)·응봉산(鷹峰山, 473m) 등이 있다. 또한, 동반부의 북쪽에서 남쪽으로는 산성산(山城山, 371m)·금음산(金音山, 481m)·대국산(大局山, 375m)·괴음산(槐陰山, 604m)·송등산(松登山, 617m)·노구뒷산(501m)·금산(錦山, 701m) 등이 펼쳐져 있다. 이 군에 부속된 전국 제9위의 큰 섬 창선도(昌善島)에도 연대산(蓮臺山, 339m)·동금산(東錦山, 358m)·대방산(臺芳山, 468m)·망치산(268m) 등이 있다.
이들 산악에서 발원한 입현천(笠峴川)·동산천(東山川)·초음천(草陰川)·무림천(茂林川)·다천천(茶川川)·화천천(花川川) 등 15개의 하천들이 산지를 개석하여 곳곳에 작은 분지와 평지를 형성하고 각 방향으로 흐른다. 기후는 동한난류의 영향을 받아 온화한 해양성기후이며, 연평균기온 14.6℃, 1월평균기온 3.1℃, 8월평균기온 26.6℃이다. 연강수량은 1,780㎜로 우리나라 3대 다우지역에 속하고 강수의 대부분이 여름철에 집중된다. 평균습도는 66%이다.(2007년 현재) 지질구조는 중생대 백악기 경상계 지층이 대부분이며, 불국사화강암층이 지배적이다. 토양은 대부분 표층이 얕은 산지 암설토이나 해안지역에는 충적토가 분포한다. 식생으로는 비자나무·편자꽃·유자나무·난음비자림 등이 자생하고 있다.
역사
청동기시대의 고인돌이 이동면 다정리, 남해읍 남변리·평현리·심천리를 비롯해 군내 각지의 해안평야와 창선도에까지 밀도 높게 분포되어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 이 섬이 내륙지방 못지않게 일찍부터 사람들이 살았던 곳임을 알 수 있다. 삼한시대의 역사에 대해서는 자료가 없으나 690년(신문왕 10)에 신라가 전야산군(轉也山郡)을 두었고, 757년(경덕왕 16)에 남해군으로 개칭했다는 기록이 있다. 영현(領縣)으로 설치했던 난포현(蘭浦縣)은 본래 내포현(內浦縣)이고, 평산현(平山縣)은 본래 평서산현(平西山縣, 혹은 西平)으로 모두 이때 개칭한 것이다. 1018년(현종 9)남해현으로 강등되었다. 이때 영현인 난포·평산 양현은 왜구의 침범이 심하여 사람이 살지 못했다. 남해현도 1358년(공민왕 7)진주목의 대야천부곡(大也川部曲, 일명 鐥川 : 지금의 하동군 북천면)에 피란하였다. 창선도는 고려시대에 유질부곡(有疾部曲)이라고 했다가 뒤에 창선현(彰善縣)으로 고쳐서 진주목의 영현으로 삼았다. 충선왕 때 흥선현(興宣縣)으로 개칭했으나 왜구 때문에 역시 살기는 힘들었다. 1269년(원종 10) 일본이 변경을 침범하려 한다는 소문이 있어, 창선도에 수장했던 국사(國史)를 진도로 옮겼다. 고려 말 왜구의 침범이 날로 심해지자 1384년(우왕 10) 해도도원수(海道都元帥) 정지(鄭地)가 관음포(觀音浦)에서 왜구를 크게 물리쳤다.
1404년(태종 4) 왜구 때문에 진주 땅으로 피란한 지 46년 만에 남해현을 복구하였다. 이때 구라량(仇羅梁 : 지금의 사천) 만호 임덕수(任德秀)가 현령을 겸임하여 남해읍성을 축성하였다. 1414년하동현과 합쳐져 하남현(河南縣)이 되었다가 이듬해 다시 하동과 분리되면서 진주목의 금양부곡(金陽部曲)을 편입, 해양현(海陽縣)이 되었다. 2년 뒤에는 다시 남해현으로 환원하고 현령을 두었다. 1419년(세종 1) 곤명현(昆明縣)과 합쳐져 곤남군(昆南郡)이 되었다가 1437년 다시 남해현으로 환원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당시 호구수는 61호 271명이었다. 1469년에 편찬된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에 남해현의 민호가 738호라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불과 15년 동안에 남해가 급속도로 회복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무렵 흥선도는 진주목 소속의 목장으로서 말 737두를 방목하고 있었다. 세조 때의 진관체제 성립에 따라 남해현은 진주진관 휘하에 들어갔으며, 현령이 절제도위를 겸임하였다. 수군은 제포진관(齊浦鎭管) 휘하의 평산포만호(平山浦萬戶)가 통제하였다.
1486년(성종 17)에는 미조항(彌助項)에 수군첨사진을 설치했다. 그러나 왜구 때문에 한때 폐쇄했다가 1522년(중종 17)에 복구하였다. 이 무렵 기묘사화로 김구(金絿)가 남해도에 유배되었으며, 이때 「화전별곡(花田別曲)」을 남겼다. 1598년(선조 31) 임진왜란 막바지에 노량 앞바다에서 대해전이 벌어졌다. 이순신(李舜臣)은 왜군의 퇴로를 가로막아 병선 400척을 섬멸하는 대전과를 올렸으나, 관음포에서 적의 유탄에 맞아 순국하였다. 1633년(인조 11) 고을 사람들이 초사를 세워 제사를 모시다가, 1658년(효종 9) 통제사 정익(鄭榏)의 명으로 사당을 크게 중수하였다. 이 사당은 1663년(현종 4)통영 충렬사와 같이 ‘충렬사(忠烈祠)’로 사액되었다. 근년에 남해군민들의 정성으로 충렬사·관음포 등 충무공의 유적이 정비, 정화되었다. 임진왜란 후 흥선도는 창선도라는 옛 이름을 되찾고, 진주목 소속의 말문리(末文里 : 지금의 사천)에 합쳐졌다. 1759년(영조 35) 남해현의 호구수는 4,491호 2만 1,737명이었다. 1863년(철종 14)에는 진주민란에 호응해 농민 수천 명이 민란을 일으켜서 관아와 창고를 파괴하고 문서를 불태우는 사건이 있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관제 개정으로 남해군으로 개편하였다. 1905년에는 진주목에 속해 있던 창선도가 남해군으로 편입되었으며, 1906년창선도를 창선면으로 승격하여 남해군에 편입하였다. 1919년 3·1운동 당시에는 이예모(李禮模)의 주도하에 3월 3일 남해시장에서 1,000여 명의 군중이 시위를 벌였다.
1964년 1월 20일삼동면 미조출장소와 서면 중현출장소가 설치되었으며, 1968년한려수도가 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1970년 4월 1일이동면 상주출장소가 설치되었고, 1973년 7월 1일에는 이동면 상주리의 갈도(葛島)가 통영군 욕지면으로 편입되었다. 1973년 남해고속도로와 남해대교가 완공, 개통되었다. 이로써 남해군은 완전히 육지와 연결되어, 본래의 농·수산업 이외에 관광지로도 각광받게 되었다. 1979년 5월 1일남해면은 읍으로 승격하였다. 1980년에는 창선교가 개통되어 남해도와 창선도가 연결되었다. 1983년삼동면 난음리가 이동면에, 서면 연죽리 일부가 남해읍에 편입되었다. 1986년 4월 1일에는 상주·미조 출장소가 각각 면으로 승격하였다. 1988년 동이 리(里)로 개칭되었으며, 1989년 1월 1일상주면 상주리 일부가 미조면 송정리로 편입되었다.
교육·문화
1404년(태종 4) 현령을 둘 무렵에 함께 창건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남해향교가 이 지역 최초의 교육기관이다. 그러나 고려 말인 1339년(충숙왕 8)남해로 퇴거한 백이정(白頤正)이 이곳 지방 자제를 훈도했다고도 전해진다. 임진왜란 뒤에는 이순신의 공훈을 기리는 충렬사가 주민의 발의로 건립되어 1663년 사액됨으로써, 향교와 함께 향리 자제의 교육이 정착되었다. 또한, 김구가 남해로 정배될 때 학도들이 그를 따라와서 배웠다. 1721년(경종 1)에는 이이명이 오늘날의 북변리으로 정배되어 와서 학사를 짓고 학문을 강론하였다. 1828년(순조 28) 그의 후학들은 그 자리에다 봉천사를 세워 학생들을 가르쳤다. 백이정의 유적지에는 난곡사(蘭谷祠)가 세워졌고, 1853년서면 중현리에는 운곡사가 건립되어 선비를 양성하였다. 근대교육기관으로는 1912년 지금의 남해초등학교가 개교한 것을 비롯해 창선·성명·설천 초등학교 등이 개교, 점차 1면 1교의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1932년 개교한 남해농업실수학교는 1941년남해공립농업전수학교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1938년에는 남해공립수산실수학교가 개교하였다.
2015년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3개교, 중학교 11개교, 고등학교 6개교가 있으며, 남해전문대학이 있다. 남해읍 북변리에는 남해도서관이 있다. 문화행사로 11월 8일은 군민의 날로서 종합문화예술행사가 거행된다.
산업·교통
임야면적이 67%로 우리나라 섬 중 산의 비율이 가장 많은 지역이어서 농지는 22.3%에 불과하다. 총 경지면적은 79.9㎢로서 전체면적 중 경지면적이 점유하는 비율은 23.1%이다. 도시적 토지이용이 나타나는 남해읍의 면적도 27.13㎢에 불과해 나머지 239.6㎢가 지목상 임야나 기타 지구로 되어 있다. 시가구역에 해당되는 남해읍의 면적 중 도시계획이 적용되는 용도지역면적은 주거지역 1.14㎢, 상업지역 0.15㎢, 공업지역 0.06㎢이며, 잔여면적은 농촌적 성격의 토지로 되어 있다. 경지이용 상황을 보면 논이 48.68㎢, 밭이 31.18㎢로서 각각의 점유비는 논이 60.9%, 밭이 39.1%로 되어 논이 밭보다 절반 이상이나 넓은 규모를 지니고 있다. 이는 도서지방에 해당되며 평야의 비중이 극히 협소한 가운데서도 산곡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이용해 가능한 주곡의 경작에 역점을 두는 주민들의 집착을 엿볼 수 있다. 이동면·창선면 지구는 수리안전답의 비중이 80%를 상회한다.
농가호수는 8,481호이며, 농가인구는 1만 9280명으로서 농가인구율은 38%에 해당된다. 이는 도내 총 농가인구율 16.4%보다 높아서 농업에의 의존도가 아직 높은 지역에 속한다. 주요 농산물로는 주곡인 쌀 외에도 보리·잡곡·콩·고구마 등이 주로 생산된다. 소채 및 특용작물의 재배와 목축은 자급자족적 의미의 미미한 수준에 놓여 있다. 해안은 굴곡이 심하고 302㎞에 달하는 긴 해안선이 있어, 어족 자원이 풍부하고 연근해 어업의 전진 기지로서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우럭, 광어, 전복, 우렁쉥이, 피조개, 굴, 미역, 바지락, 보리새우 등의 양식적지이며, 연안 바다에는 감성돔, 삼치, 멸치, 도다리 등이 많이 잡히고 있다. 선박의 출어와 수산물 가공 등을 뒷받침하기 위해 1986년미조항을 어업전진기지로 삼고 제빙공장, 수산물 판매장, 냉동설비 등을 갖추어 수산 남해의 소득 증대에 힘쓰고 있다. 또한 상주에는 국립수산진흥원에서 설치한 수산종묘배양장이 있어 종묘생산과 기술보급에 힘쓰고 있다. 공업의 비중은 상대적으로 적으나 음료·화학·의복·비금속 제품 등이 생산되며 특히 고현농공단지의 동은산업은 세계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보유한 업체로서 남해군의 경제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산업구조를 요약하면 농수산업 등 1차 산업의 비율은 전체 산업의 68%이며 도내의 타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높다. 광공업 등 2차 산업은 전체 산업의 3%로서 대단히 미약한 편인 데 비해 판매 및 서비스업을 위주로 하는 3차 산업의 비중은 29%로서 다소 큰 편이다.
이는 이 지역이 한려해상의 경관이 아름다운 도서지역에 속하여 여름철에 외부의 관광객이 남해대교·상주해수욕장 등의 피서 및 관광을 위해 적지 않게 이 지역을 방문함으로써 서비스 경제에 대한 의존도가 상당히 높아진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시장은 10개의 정기시장이 있었으나 지금은 남해읍의 남해상설시장이 1·7일, 남면장과 지족장이 4·9일, 이동면 무림장이 5·10일에 열리고, 지족장과 고현장이 4·9일 열린다. 요즈음에는 대중교통의 발달로 주민의 대부분이 남해읍의 상설시장을 이용하고 있다. 1973년 남해대교가 개통해 하동군과 육로가 연결되었으며, 1980년 창선교가 놓여 본 섬과 창선도가 연결되었다. 2003년 창선·삼천포대교가 개통되어 사통팔달의 육지와 상호 교통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공용터미널이 1997년에 완공되었으며, 각 면소재지에 점차적으로 외곽도로를 신설, 확장하고 있다. 해상교통은 부산·여수·통영 등으로 연결되어 있다
관광
남해도는 예로부터 산과 바다가 아름다운데다 물과 공기가 맑고 깨끗한 고장으로 이름나 있다. 특히, 섬의 남단에 있는 금산과 상주해수욕장은 산과 바다가 절묘하게 조화되어 절경을 이룬다. 산 전체가 기암괴석으로 얽혀 있고 난대림이 울창한 금산은 예로부터 소금강산으로 불릴 정도로 남해안 최고의 명승지이다. 일출의 장관을 맛볼 수 있는 망대(望臺)를 비롯해 산정의 보리암·문장암(文章巖)·대장봉(大將峰)·삼불암(三佛巖)·쌍홍문(雙虹門)·팔선대 등은 ‘금산 38경’으로 불리는 자연조각품이다. 한려수도를 굽어보면서 등산로를 따라 내려가면 반달 모양의 포구를 이루는 상주해수욕장에 이르게 된다. 이곳은 모래가 곱고 수심이 얕기로 유명해 여름철 피서객이 끊이지 않는다. 한편,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전적지인 노량에는 1657년(효종 8)에 건립한 충렬사와 1952년에 건립한 이순신공덕기념비 등이 있다. 또한, 한려수도의 명물인 구름다리가 가설되어 있어서 이 다리 위에서 바라다보면 한려수도가 한 폭의 그림과도 같다. 1973년설천면 노량리와 하동군 금남면 노량리를 잇는 남해대교의 개통으로 육지와의 교통이 편리해졌고, 숙박시설도 잘 갖추어져 있는 편이다. 이 고장에는 연간 10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찾고 있으며, 해마다 그 수가 증가하고 있다.
미조항의 해산물축제에서는 미조항의 대표적인 먹거리인 갈치회를 맛볼 수 있다. 남해군 전역에서 매년 정초에 이루어지는 보물섬해맞이축제와 상부정월대보름달맞이축제는 이 고장의 안녕을 기원하는 대표적인 민속예술행사이다. 2년마다 개최되는 화전문화제는 민속놀이와 예술행사, 체육대회 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이루어진다. 문화 시설로 공공공연장 1개소와 향토역사관 1개소가 있다. 2003년에 완공된 서면 서상리의 스포츠파크는 남해군의 대표적인 체육시설로서 축구장, 야구장, 테니스장, 풋살경기장, 중앙공원, 야외공연장, 대한야구캠프, 스포츠파크호텔, 아천문화관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참고문헌
『남해군통계연보』(남해군, 2008)
『지방행정구역요람』(행정자치부, 2000)
『남해군지』(남해군지편찬위원회, 1994)
『부일연감·부산·경남편·』(부산일보사, 1986)
『경남교육통계연보』(경상남도교육위원회, 1985)
『교남지』(오성사, 1985)
『한국의 민속음악·경상남도 민요편·』(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5)
『사향록』(남해향토문화연구회, 1984)
『남해의 얼』(남해군문화공보실, 1983)
『경남교육사』(경상남도교육위원회, 1980)
『한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경상남도·』(문화재관리국, 1972)
『언문조선구전민요집』(김소운, 제일서방, 1933)
남해군(www.namhae.go.kr)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남해 섬초=시금치
겨울에 맞는 봄의 맛
시금치는 이른 봄에 먹는 채소였다. 가을에 순이 돋고 겨우내 겨우겨우 살아가다가 땅이 녹고 봄바람이 살랑 불 때에야 먹을 수 있는 크기가 된다. 그러다, 재배기술과 품종개발 덕에 사철 시금치를 먹게 되었다. 비닐하우스 등 시설에서 재배하여 가을에 일찍 거두기도 하고 봄이 지나서도 거둔다. 고랭지에서는 여름에도 재배한다. 제철이 아닌 시금치이니 가격이 좋아 이런 재배법이 크게 번졌다. 그러나 소비자들이 사철 먹게 되는 시금치 맛에 뭔가 비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시금치 맛은 단맛이 큰 특징인데 그 단맛이 오간 데가 없이 그냥 풀내만 나는 시금치에 만족하지 못한 것이다. 그렇게 하여 다시 등장한 것이 겨울 시금치이다. 경북 포항, 전남 신안, 경남 남해 등지의 겨울 노지 시금치이다. 이들 시금치는 각각 포항초, 섬초, 남해초 등 지역의 이름을 달고 있다.
뽀빠이와 시금치
시금치의 원산지는 아프카니스탄 주변의 중앙아시아이다. 7세기경에 중국 등 아시아 지역으로, 11∼16세기에 유럽으로 전파되었다. 우리 땅에는 조선 초기에 전래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서양에서는 생으로 먹는 것이 일반적이고 우리나라에서는 살짝 데쳐서 나물로 먹는다. 시금치는 우리 민족에게 아주 친숙한 채소이다. 차례상에 '가채(家菜)'로 오르고 한국의 대표 음식인 비빔밥, 김밥 등에도 반드시 들어간다. 서민의 상차림에는 콩나물 옆에 이 시금치나물이 오르지 않으면 서운할 지경이다. 시금치가 일상의 식단에 크게 번진 데에는 철분이 많아 아이들의 성장발육에 도움이 된다는 '소문'이 일정 역할을 하였다. 밥상 위 시금치나물에는 우리 아이가 만화영화 주인공 뽀빠이처럼 시금치 먹고 튼튼해지길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시금치의 철분 '신화'는 1870년 독일의 한 과학자가 시금치의 영양성분 중 철분에 대해 소수점을 한 칸 뒤에 잘못 찍는 바람에 생겨난 일이었다. 수십 년 후 이 수치는 바로잡혔지만 일상에 퍼진 '시금치 철분 신화'는 뽀빠이와 함께 아직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잘못된 정보도 크게 번지면 바로잡기 어려운 것이다.
1 입자루가 붉은 시금치가 반드시 재배종인 것은 아니다. 붉은 개량종도 많다.
2 경남 남해군은 섬이다. 겨우내 따스하고 눈을 보기도 어렵다. 겨울 시금치 재배 적지이다.
3 시금치는 대부분 소규모 농가에서 재배한다. 한나절 거두고 한나절 포장하여 다음날 경매에 낸다.
포항초, 섬초, 남해초
겨울 시금치를 전국적인 브랜드로 만든 최초의 지역은 포항이다. 1980년대에 포항초라는 이름이 생겼다. 처음에는 재래종의 시금치였으나 요즘은 개량종을 주로 심는다. 1990년대 중반부터 신안의 섬초가 소비지에서 인기를 끌었다. 역시 지역의 재래종으로 시작하여 요즘은 개량종도 제법 심고 있다. 최근 10여 년 사이에는 남해의 남해초가 제법 크게 알려지고 있다. 재래종도 있으나 역시 개량종을 주로 심는다. 이 세 지역의 시금치는 포항의 일부 비닐하우스 재배 시금치 빼고는 다 노지의 시금치이다. 시장에 나오는 시기도 10월 말에서 3월 말까지로 비슷하다. 재배 환경도 '바다 옆의 밭'이라는 특징에서 비슷하다. 맛도 그닥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러니 이 캐스트의 제목을 '남해 시금치'라 하였지만 포항초나 섬초와 큰 차이가 나는 것이 아님을 밝혀둔다. 또, 남해 옆의 경남 고성 해안가에서도 시금치 재배를 많이 한다.
재래종이 밀리는 이유
재래종이 귀해지고 개량종이 늘고 있는 것은, 첫째는 재배 기간 때문이다. 재래종은 파종 후 90일 정도 자라야 먹을 만한 크기가 된다. 가을에 심으면 이른 봄에나 먹을 수 있는 것이다. 개량종은 40일 정도만 거둘 수 있다. 또, 재래종은 크기가 작아 단위면적당 수확량이 적다. 개량종의 한 품종인 '무스탕'과 비교하면 포기당 무게가 서너 배는 차이가 난다. 농가에서는 이 재래종과 개량종을 적절히 배합하여 심는다. 일찍 거두는 것은 개량종을, 늦게 거두는 것은 재래종을 심는 식이다. 그래서 한 밭에 여러 품종의 시금치가 자라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기도 한다. 재래종의 재배 장점도 있다. 재래종은 씨앗을 직접 받아서 파종을 한다. 종자 값이 안 드는 것이다. 개량종은 해마다 종묘회사에서 종자를 사야 한다. 개량종은 자가채종을 하여서는 시금치가 잘 나오지 않는 것이다. 개량종 중에서는 일본에서 유래한 것이 많은데, 시금치에서조차 '입맛의 식민'이 진행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설탕 뿌린 것 같은 단맛
남해의 시금치 농사는 대면적이 드물다. 대부분 늙은 농부 한두 명이 생계를 위해 유지하는 손바닥만한 논밭에서 시금치를 키운다. 오전에는 시금치를 거두고 오후에는 이를 다듬어 단을 묶는다. 다음날 아침에 지역 농협의 공판장에 가지고 나가 산지경매를 한다. 농협에서 수거하여 가락시장 등 대도시 도매시장에 내어 경매를 부치는 일반의 농산물 거래와는 조금 다른 방식이다. 상인이 산지로 내려와 사간다고 보면 된다. 농민 입장에서는 시세를 바로 알 수 있고 상인들에게 다른 지역의 작황과 가격 정보를 들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농민들을 만나면서 어떤 품종의 시금치가 맛있는지 내내 물었는데, 답은 항상 같았다. "품종보다는 언제 나는 것인가가 중요하다. 1월 말부터는 어떤 품종이든 설탕 뿌린 것같이 달다." 과연 그랬다.
출처:(팔도식후경, 황교익)
남해 가천마을 다랭이논 [南海加川─]
정의
경상남도 남해군 남면 홍현리에 있는 명승.
개설
남해군 서남단 남면 홍현리 바닷가에 위치해 있다. 다랑이논은 농경시대 사람들의 전통적인 삶과 자연이 조화를 이룬 농업경관이다. 논은 설흘산과 응봉산 아래 바다를 향한 산비탈 급경사지에 조성되어 있다. 산의 지형을 따라 곡선 형태의 계단식 논이 100여 층 형성되어 있다. 다랑이란 매우 규모가 작은 논을 지칭하는 단어이다. 특히 경사가 심한 지형에 만들어 폭이 좁고 규모가 작게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다랑이논은 삿갓을 덮어 놓으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논배미가 작다고 하여 ‘삿갓배미’라고도 한다.
내용
논은 한 뼘이라도 넓히기 위해 석축을 가능한 수직으로 축조했다. 석축은 위 부분이 수평으로 길게 중복된 선형을 이루고 있다. 다랑이논의 석축에 공급된 돌들은 배후의 산록에서 채취한 것으로서, 현재도 산의 급사면에 풍부하게 있다. 다랭이마을의 형성에 대한 정확한 사실은 알 수 없다. 다만 마을에 전해지는 미륵과 육조문 전설을 통해 유추해보면 고려시대 이전에 다랭이마을에서 거주가 시작된 것으로 추측된다. 임진왜란 때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설흘산 봉수대는 이미 그전부터 다랭이마을에 주민이 집단적으로 거주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다랑이논은 농업을 바탕으로 하는 문화경관으로서 농업경관은 농경행위의 지속에 의해서만 경관의 영속성이 유지될 수 있다. 논의 뒤로는 설흘산과 응봉산이 병풍처럼 둘러쳐 있고, 앞으로는 넓게 트인 바다가 논과 어울려 탁월한 농촌문화경관을 형성한다. 주요 경작물은 벼와 마늘이며, 1년에 2모작을 하고 있다. 마을을 중심으로 기계화가 가능한 곳은 현재도 경작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나 비탈이 심한 지역 등 경작 여건이 어려운 곳은 휴경지로 남아있다.
계곡을 중심으로 하나의 위요경관을 형성하고 있는데, 다랭이마을은 이 위요경관 아래 부분의 한가운데를 점하고 있다. 마을에는 가천암수바위가 위치하고 있다. 암수바위는 숫바위가 높이 5.8m, 둘레 2.5m이고, 암바위가 높이 3.9m, 둘레 2.3m로 선돌 형태를 지니고 있다.
참고문헌
『(문화재대관)천연기념물·명승』(문화재청, 2009)
『2005년 국가지정문화재 지정조사보고서: 천연기념물·명승』(문화재청, 2005)
문화재청(www.cha.go.kr)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달리는 차창밖의 겨울산 풍경
2023-11-22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