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한 번쯤은 사랑을 한다. 김현식의 노래 가사처럼 사랑은 특별한 재능이 아니라 소소한 사건이다. 그런데 그 소소한 사건을 겪는 순간 삶은 특별해진다. 평범하고 별 볼일 없던 하루하루가 나만의 전유물로 받아들여지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이 나를 주인공으로 한 엑스트라로 물러서준다. 그렇게 사랑은 ‘나’라는 존재를 값어치 있게 만들어준다. 한편 사랑은 숨어 있던 감성을 표면으로 이끌어내준다. 덤덤하던 사람도 삼라만상의 움직임이라든지 세상의 변화에 조금씩 예민해지기 시작한다. 가을이면 단풍이 지는 이유도, 아침이면 해가 뜨는 것도 우연이 아닌 듯싶다. 그 사람과 나, 우주 간의 특별한 인연이 생성되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사랑을 한다. 예술가도 사랑을 한다. 감성이 예민한 예술가에게 사랑은 자극이자 모험이다. 영화가 즐겨 실존 예술가의 사랑을 기록하고 재해석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들은 사랑의 충동과 열정, 파멸을 거의 끝까지 밀고 나간다. 감성의 프리즘처럼 예술가는 사랑의 진폭을 처음부터 끝까지 체현하고자 한다. 흥미로운 사실 중 하나는 예술가의 연대기에서 뜨겁고 격렬했던 사랑이 훗날 위대한 역사적 작품으로 기록될 그 작업과 함께 등장한다는 것이다. 사랑만큼 감성과 직관을 뜨겁게 달구는 용광로도 드물다.
가장 아름다운 작품에는 에로스가 충만하다. 서로를 향하는 욕망과 갈구가 넘쳐날 때 그 에너지는 작품 너머 관객에게까지 이입된다. 지독한 사랑에 빠져 역사적 작품을 남겼지만 광기와 외로움 속에서 서서히 말소되어간 이름들, 그 예술가들의 이름을 사랑과 함께 불러보는 이유이기도 하다.
▼ 카미유 클로델-경계를 넘어버린 열정, 광기와 사랑 사이
프랑스 영화 ‘카미유 클로델’은 실존했던 조각가 카미유 클로델의 삶을 그려낸 작품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카미유 클로델의 전 생애를 그렸다기보다는 그녀의 삶에서 가장 큰 사건이라고 할 수 있을 연애기간에 한정되어 그 삶을 재조명한다. 그 연애 사건은 희대의 스캔들이기도 했던 스승 로댕과의 염문이다.
로댕의 제자였지만 로댕의 여자로 더 잘 알려진 카미유 클로델. 이 호명(呼名)의 모순 속에 이미 그녀, 예술가로서 지독한 자아를 지닌 한 여성의 파멸은 예견되어 있다. 자신의 재능마저 불태워 한 남자를 사랑한 여자. 하지만 끝끝내 열정 너머 존재하는 예술에 대한 욕망에 사로잡힌 여인을 그린 ‘카미유 클로델’은 어느덧 역사 속에서 희미해진 한 예술가의 삶을 사랑을 통해 제시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영화는 한밤중 묘지의 흙을 주워 담는 한 여자로부터 시작한다. 여자는 이미 미쳐 있다. 조각이라는 것,
미술이라는 것, 자신의 손으로 다른 한 세계를 만들어낸다는 것에 대해 말이다. 광기라는 말이 더 적합할 정도로 그녀는 자신의 재능과 열정에 빠져 있다. 좋은 흙을 발견하기 위해 이미 그녀는 무덤이나 시체 따위에 대한 두려움을 버렸다. 그녀는 바로 카미유 클로델, 그녀의 열정은 젊음과 어울려 형형색색의 빛을 발한다.
채워도 차지 않는 욕망의 항아리
카미유 클로델은 당대 최고의 예술가이자 정치가이기도 했던 로댕의 제자로 들어간다. 로댕은 그녀의 재능과 열정을 한눈에 알아보고 둘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사랑에 빠진다. 문제는 로댕에게는 본처라고 부를 만한 오래된 연인이 존재한다는 것. 그녀는 로댕이 벌인 수많은 치정 사건에도 언제나 되돌아갈 수 있을 어머니처럼 존재한다. 하지만 카미유는 한밤중 무덤의 흙을 파내듯이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 로댕에게 빠져든다. 그리고 잠시 이 사랑은 아름다운 로맨스로 카미유의 삶을 빛나게 한다.
하지만 어떤 경우라 할지라도 유부남과의 사랑은 위험하다. 게다가 그 유부남이 실력자일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카미유는 그의 사랑이 절정에 달하는 순간 예술적 직관의 최고를 경험하지만 또한 에너지의 누수를 경험하기도 한다. 카미유는 점점 로댕에게 집착한다. 하지만 로댕에게 카미유는 아름다운 여성이자 자신의 예술적 에로스를 자극해주는 색다른 소재이기도 하다. 카미유가 총기 넘치는 여자를 넘어서 그저 자신을 사랑하고 집착하는 여자로 변해가자 로댕의 애정은 급격히 식어간다. 로댕에게는 돌아가야 할 고향 같은 여자가 있기 때문이다.
로댕이 자신에 대한 애정을 거두자 카미유의 사랑은 집착과 분노, 증오로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심지어 그녀는 로댕의 몇몇 작품을 두고 자신의 모작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로댕의 공공연한 애인이던 카미유의 이러한 주장은 세간의 주목을 받기도 한다.
그런데 오히려 이러한 관심 속에서 광대처럼 카미유는 점점 더 스러져간다. 로댕을 모함할수록 로댕은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아예 진저리를 친다. 고장 난 사랑기계처럼 카미유는 로댕을 저주하고, 미워하고, 매달리지만 이미 그녀는 로댕이 사랑했던 카미유가 아니다. 버려진 광대가 되어버린 카미유, 참혹하게 훼손된 채 정신병원에서 세상을 마치는 그녀는 예술적 광기가 한 사람에 대한 집착과 융해되었을 때의 파괴력을 보여준다.
영화 ‘카미유 클로델’에서 가장 눈을 사로잡는 장면들은 바로 사랑에 빠진 두 연인, 로댕과 카미유 클로델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작품들이다. 영화에는 ‘다나이드’와 ‘키스’ ‘칼레의 시민들’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소개된다. 이 중 특히 ‘다나이드’를 만드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로댕은 카미유를 모델로 삼아 신화 속, 불운한 그녀들을 창조해낸다. ‘다나이드’는 첫날밤 남편을 죽인 죄목으로 평생토록 밑이 뚫린 항아리에 물을 채워야만 하는 벌을 받은 님프들이다. 영화 속에서 로댕은 자신을 열망하는 카미유를 모델로 삼아 그녀의 목을 꺾고 근육을 도드라지게 해 조각품을 만들어낸다. 로댕의 작품 ‘다나이드’는 채워질 수 없는 욕망을 가진 카미유 그 자체에 대한 비유에 가깝다. 달빛을 받아 풍만해진 카미유의 육체는 마치 항아리처럼 둥글고 완만해 보인다.
아무리 채워도 차지 않는 항아리는 그녀의 욕망과 열정, 육체, 그러니까 카미유 자신이라는 편이 옳다. 사랑의 속살은 삼켜지지만 그 가시가 남아 목에 걸리듯이 그렇게 사랑은 이율배반적인 흔적을 남긴다. 그 사랑 때문에 우리는 아름다운 예술작품을 얻었지만 그것은 한편 무참히 훼손된 한 젊은 예술가의 영혼이기도 하다. 폐허가 될 것을 알면서도, 카미유 클로델은 자신의 열망을 단속하지 못한다. 그래서 때론 실패한 사랑이 더 아름다운 열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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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카미유 클로델’
▼ 제인 오스틴-소설로 완성된 해피엔딩
제인 오스틴의 사랑과 실패를 영화화한 작품 ‘비커밍 제인’은 이런 지문으로 끝난다. “제인 오스틴과 그녀의 언니 카산드라 오스틴은 평생토록 미혼으로 살았다.” 이 짤막한 구절은 그녀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잘 알다시피 제인 오스틴은 결혼으로 성사되는 수많은 연애담을 써냈다. 선량하고 성실한 남자에게 다정한 청혼을 받는 여인. 게다가 제인 오스틴의 소설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마치 제인 오스틴처럼 가난하지만 지혜로우며 총명하다. 가난한 집안의 딸과 명망 있는 상속남의 만남, 여기까지는 소설이나 생애나 다를 바 없다. 문제는 결말이 다르다는 사실이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은 늘 청혼과 결혼으로 끝났지만 실제 제인 오스틴은 단 한 번도 결혼해본 적이 없다. 그녀는 말 그대로 평생 혼자 살다가 죽었다.
영화 ‘비커밍 제인’은 오스틴가의 막내딸이자 파과기(破瓜期)의 결혼 적령기 여성인 ‘제인’이 어떻게 대문호 제인 오스틴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는지, 그 과정에 대한 상상력으로 구축된 작품이다. 처녀로 죽은 제인 오스틴, 그녀에게는 과연 자신의 작품 속 로맨스 같은 것이 없었을까, 라는 상상 말이다.
그리워하고 의심하다 결국 고백하는…
뛰어난 로맨스 소설가이자 심리 묘사가인 제인 오스틴에 대한 기대에 부응하듯이 ‘비커밍 제인’은 제인 오스틴의 첫 연애담에서 시작된다. 도회지에서 온 세련된 청년이 시골 마을의 한 처녀와 만나게 된다. 남자는 친구를 데리고 온다. 한 남자는 부유하지만 어딘가 고지식하며 지나치게 순진하고 다른 한 남자는 야성적이며 지적이지만 불행히도 가난해 보인다.
자랑할 것이라고는 알량한 가문밖에 없는 남자와 가난한 시골 처녀의 만남. 눈치 챘다시피 제인 오스틴의 삶을 다룬 영화 ‘비커밍 제인’의 설정은 그녀의 소설 ‘오만과 편견’과 닮아 있다. 오스틴의 소설 ‘오만과 편견’이나 ‘센스 앤 센서빌러티’에서 본 익숙한 구도가 영화 전반에 자리 잡고 있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오만과 편견’ ‘센스 앤 센서빌러티’는 낭만적 연애결혼의 꿈을 말랑말랑하게 직조해낸 격조 있는 로맨스라고 할 수 있다. 이안 감독이 연출한 ‘센스 앤 센서빌러티’는 오스틴의 작품이 지닌 섬세한 매력을 싱그러운 사랑의 두근거림으로 그려낸 수작이다. 격정적 사랑을 꿈꾸는 여동생과 봄날 오후의 때늦은 비처럼 감정을 다스리는 언니의 사랑, 대조적 인물들의 연애담은 섬세한 뉘앙스와 오묘한 표현으로 넘실댄다. 사랑하는 연인을 부르며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외치는 여동생의 모습은 영화를 보고 난 이후에도 오랫동안 잊히지 않는다.
한편 로맨틱 코미디의 명가인 워킹 타이틀사에서 만든 ‘오만과 편견’은 누군가를 발견하고, 그리워하고, 의심하다, 결국 고백하고 마는 난해한 감정의 흐름을 보여주는 데 주력한다. 엘리자베스의 손을 스친 다아시의 떨림은 클로즈업된 다아시의 손가락으로 묘사되고 다아시에 대한 엘리자베스의 그리움은 엘리자베스의 흔들리는 동공으로 표현된다.
사랑하는 여자의 집안을 모욕하는 ‘오만’과 남자의 주변에 떠도는 험담을 무조건 믿어버린 ‘편견’ 때문에 우회로를 거쳐야 했던 엘리자베스와 다아시는 결국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게 된다. 형편없는 재산과 단정치 못한 동생을 지닌 엘리자베스이지만 그녀의 교양과 재치는 낭만적 사랑이라는 환상을 가능케 한다.
소설 속에서는 해피엔딩이지만…
‘비커밍 제인’의 스토리는 ‘오만과 편견’이나 ‘센스 앤 센서빌러티’의 서사를 고스란히 따라간다. 이지적 여성 제인과 사랑에 빠진 한 남자가 있고 제인 오스틴은 그와 함께 사랑의 도피를 할 준비까지 되어 있다. 하지만 그 결혼은 남자의 후견인이 허락하지 않는 잘못된 만남이다. 제인 오스틴은 사랑을 포기하고 포기한 사랑을 소설로 써내는 데 열중한다. 그러니까 제인 오스틴의 소설은 모두 ‘그 후로도 오랫동안 행복했습니다’라는 해피엔딩인 데 반해 ‘비커밍 제인’이 선택한 결말은 좀 다르다.
영화 속 제인 오스틴이 맞는 결말은 실제 제인의 삶과 닮아 있다. 제인은 연인과 모든 것을 버리고 도피하려고 하지만 결국 현실 앞에서 발길을 돌리게 된다. 소설 속에서야 도피가 가능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렇게 만만한 선택이 아니기 때문이다. 환상은 소설의 엔딩으로 적합하지만 현실은 환상에 관대하지 않다. 소설과는 달리 제인 오스틴은 낭만적 사랑에서 점점 멀어진다. 그녀의 소설은 사실 그녀가 영원히 이루지 못했던, 실패한 삶에 대한 복구에 가까웠던 셈이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들을 보면 대부분 낭만적 연애 끝에 결혼에 도달하지만, 당대 현실은 정반대였다. 결혼하지 못한 여자들은 부모의 재산을 상속받을 수도 없었기에 고스란히 부모의 짐이 되거나 형편없는 임금을 받는 가정교사로 일생을 마쳐야 했다. 결혼은 낭만보다 조건, 사랑보다 금전에 따라 결정되었고 연애는 이후의 문제였다. 낭만이라고는 눈 씻고도 찾아볼 수 없을 것 같은 19세기 영국의 결혼! 제인 오스틴의 소설에 나타난 낭만적 연애 서사들은 현실이라기보다 환상이자 꿈이라고 보는 편이 옳다.
영화 속에서 제인은 언니에게 이렇게 말한다. “소설의 시작은 그래. 자신의 능력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가진 남자. 그리고 상속받게 될 남자. 그리고 가난한 여자가 등장해. 상황은 나빠. 그리고 더 나빠져. 하지만 결론은 해피엔딩이야. 성대한 결혼으로 끝나지.” 이 대사는 제인 오스틴의 소설이 갖는 구조를 압축해준다.
사람들은 행복한 결혼으로 마무리되는 제인의 소설을 좋아한다. 재산과 명망을 따지며 결혼이라는 사업을 추진하는 오스틴 시대의 사람들, 결혼을 하지 못하면 평생 가난하게 살아야만 했던 여자들. 바로크풍의 의상과 경쾌한 무도회가 펼쳐짐에도 ‘비커밍 제인’은 ‘오만과 편견’처럼 가볍지만은 않다. 그것은 아마도 영화가 그려낸 것이 현실을 위장할 환상이 아니라 당대에 두 발을 딛고 살아야 했던 실제 삶이기 때문일 것이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은 현실이 아니라 그녀의 생애에 결여되어 있던 욕망이자 바람이었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이 현실의 모사가 아니라 결핍된 환상의 무대로 받아들여지는 것도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환상은 달콤하지만 현실은 냉혹하다. 웃음을 띠며 다가오는 잔혹한 인생의 진실처럼, 그렇게 현실은 소설보다 지독하다. |
▼ 황진이 - 사랑, 언어의 화신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허리 버혀 내어
춘풍이불 아레 서리서리 넣었다가
고운님 오신날 밤이면 굽이굽이 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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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센스 앤 센서빌러티’의 한장면.
‘송도 3절’이라 불리는 황진이는 유교의 가부장제와 도덕률이 완강한 우리 문화에서 유례없는 예술가의 한 형태를 제공한다. 황진이의 유명한 시조는 이러한 그녀의 기품 있는 정념의 면모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임 없는 동짓달의 긴 밤을 잘라내어 고운님과 함께하는 밤에 모두 꺼내고 싶다는 이 말은 밤의 에로스에 대한 품위 있는 유혹이자 고백이다.
황진이는 1957년 처음 영화로 만들어진 이후 1986년 배창호 감독에 의해, 2007년 장윤현 감독에 의해 리메이크되었다. 드라마로도 여러 번 제작됐다. 각종 서사 장르 안에서 황진이는 당대의 억압으로부터 자유롭게 놓여난 희대의 여성이자 예술가로 그려지고 있다.
2007년에는 드라마와 영화에서 모두 황진이라는 인물을 그려냈다. 2008년 신윤복이 드라마와 영화, 양쪽에서 주목받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장윤현 감독의 2007년판 ‘황진이’ 예고편에서 그녀는 내뱉는다. “기생년을 이렇게 어렵게 품는 양반이 어딨답니까?”라고. 대사의 질감보다 먼저 그녀의 야멸찬 시선이 관객의 뇌리에 꽂힌다. 설시를 내뱉는 그녀는 한 마디 한 마디를 또박또박 앞의 남정네에게 꽂아둔다. 만만치 않다. 시선의 농도와 입술의 맵시, 이 한 장면만으로 관객은 이미 새로운 ‘황진이’를 만난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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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현 감독의 영화 ‘황진이’의 주인공은 송혜교가 맡았다.
사랑 때문에 좌절하고 변모하고 떠도는 여성들
드라마와 영화 모두 황진이가 사랑했던 익명의 한 남자를 주축으로 그려진다. 서경덕과의 일화 같은 잘 알려진 사실이 아니라 황진이가 역사적 인물로 기억되기 이전 그녀의 소녀 시절 첫사랑에 상상력을 도입한 것이다. 아직 예술가이거나 한 여성이기 전의 미완성 상태의 사춘기 소녀, 황진이. 새로운 이야기들 속에서 이 사랑은 황진이가 평생 가슴속에 품고 살았던 예술혼의 원본이자 트라우마로 제공된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사랑에 빠진 황진이가 16세기에 태어난 21세기 여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세상의 편견과 관념 아래 허덕이는 여성처럼 그려졌다는 것일 테다. 세상을 발 아래 두겠다는 선언이나 당당한 시조로 남은 그녀의 모습과 달리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황진이는 당대 사회의 지배적 질서를 힘겹게 관통하는 피해자로 그려진다. 세상을 호령해야 할 황진이가 세상의 흐름에 갇혀 조선조 가부장제의 주변을 맴돈다. TV 드라마 속 황진이가 사랑의 실패를 예술로 승화해냈다면 영화 속 황진이는 박탈된 신분을 사랑으로 초월하고자 하는 셈이다.
16세기라는 부표 위를 떠도는 아름다운 꽃잎처럼 그렇게 황진이는 그곳에 갇혀 있다. 그 어떤 욕망도 그녀의 내면 깊은 곳에서 비롯된 바는 없다. 왜 모든 여성 인물은 그토록 사랑 때문에 좌절하고 변모하고 떠돌아야 하는 것일까? 여성적 자아에 대한 발견도 세상과의 대면도 모두 사랑의 좌절과 실패에서 찾는 그들, 21세기에 호명된 16세기 여인들의 형편은 이 지점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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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정 ● 1975년 서울 출생 ● 고려대 국어교육과 졸업, 동 대학원 석·박사(국문학) ● 동아일보 신춘문예 입선(영화평론),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문학평론),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문학평론) ● 現 고려대·한국종합예술대 강사 | |
이러한 접근법은 신윤복을 여성으로 상상해 제공한 러브 스토리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무릇 사랑과 예술, 사랑과 삶은 이원론적 대상이 아니다. 그들의 작품 속에 담긴 에로스적 에너지의 깊은 속내에 바로 사랑을 향한 맹목적 투신이 숨어 있다. ‘황진이’의 삶에 대한 기대도 그런 것이 아닐까? 뇌리에 깊이 남을 예술작품을 남긴 한 여성, 그녀의 내면에 대한 궁금증과 그 열정에의 동참 같은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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