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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는사람 |
: <gccc@gccc.or.kr> | ||
보낸날짜 |
: 2010년 6월 15일 화요일, 10시 11분 53초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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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과천시와 과천문화원의 무궁한 발전을 바랍니다. 추사 김정희의 발차취를 추적하고 그에서 얻어지는 교훈이 우리나라의 밝은 미래를 열어나가는데 온 힘을 다하시는 과천시와 귀 문화원을 존경합니다. 저는 귀 문화원에서 운영하는 추사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 2009, 12, 24 영영백운도에 대하여, 그 다음 날 지란병분에 대하여, 그리고 2010년 6월 추수백운속도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렸던 김철동입니다. 처음부터 본란에 글을 올려야 했는데 깊이 있는 생각 없이 위 자유게시판에 글을 올리고 공개하여 죄송합니다. 이는 제 무지 때문으로 넓으신 마음으로 이해 있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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題秋樹白雲圖와 英英白雲圖
그간 제가 올린 글을 통해서 어느 정도의 이해는 있으셨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때 題秋樹白雲圖(추사의 英英白雲圖로 알려진)는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가 그림을 그리고 그 안에 글은 황산 김유근(黃山 金逌根 1785~1840)이 쓴 것이라고 저의 생각을 피력한 바 있습니다. 이 글을 쓴지가 여러 날이 흘렀는데 아직 아무런 답변과 조치가 없으셔서 이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저로서는 가름할 수 없습니다. 제가 올린 글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이미 올린 글이지만 다시 한 번 정리하겠습니다.
귀 추사 홈페이지 추사의 작품세계<추사의 그림>에는 영영백운도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를 양평군 발행 황산유고의 추수백운도를 보고 아래와 같이 정리하였습니다.
귀 추사홈페이지의 「英英白雲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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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양평군 발행 안동김씨 문정공파 기증유물 도록의 황산유고 속에「題秋樹白雲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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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속에 글
英英白雲 繞彼秋樹 從子衡門 伊誰之故
山川悠邈 昔不我顧 今者何如 庶幾朝暮 |
英英白雲 繞彼秋樹 從子衡門 伊誰之故
山川悠邈 昔不我顧 何如今者 庶幾朝暮 |
소개한 글
제주유배 시절 살던 집을 그린 것으로 생각되는 작품으로 남종화풍의 산수화이다. 김정희는 “매화․대나무․연꽃․국화는 어디에나 있지만, 귤만은 오직 제주 고을의 전유물”이라면서 제주시절 살던 집의 당호(堂號)를 귤중옥(橘中屋)이라 하였다. 이 그림은 고담한 문기(文氣)가 살아있는 작품으로 멀리 있는 벗을 그리워하는 시를 덧붙였다. --------------------
‘산천이 멀어서 옛적에는 나를 찾아 주지 않더니, 이제는 어떠한가. 아침저녁으로 서로 대하기를 바란다’ |
해제(윗글, 위에서부터 차례로)
가볍고 투명한 흰 구름이 저 가을 나무를 감싸네 누추한 집에 그대 따르니 그 누구 때문인가
산은 멀리 있고 내는 아득히 흘러가 예전엔 나를 돌아보지 않더니 어째서 지금은 밤낮으로 돌아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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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원문에서 그림 속에 今者何如가 何如今者로 되었을 뿐 나머지는 같습니다. 이는 옮기는 과정에서 황산 김유근, 또는 1867년 황산유고를 초선(抄選)하신 남병길(南秉吉 1820~1869)의 작은 실수(?)인듯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진실이 바뀌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이 글이 있게 된 동기를 추리(推理)합니다.
많은 사람이 추수백운도를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 유배기간에 그린 영영백운도(英英白雲圖)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추사가 그린 추수백운도(秋樹白雲圖)로 그 안에 글은 황산 김유근이 쓴 것입니다. 그러면 위 추수백운도는 무엇인가? 이를 추적합니다. 양평군에서 2009년 발행한 안동김씨 기증유물 도록에 실린 황산유고(黃山遺稿)를 보면(p481~482) 위 題秋樹白雲圖의 글이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단짝 친구이던 두 분은 한때 소원(疎遠)한 때가 있었던가 봅니다. 그런 마음을 추사가 그린 그림 속에서 황산이 글로 표현한 것입니다. 때는 추사가 제주도 유배되기 전인, 추정하면 1833~1836년이라고 판단합니다. (특히 1833년 가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무렵에는 황산과 추사의 우정이 다시 꽃 피어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고 이는 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참고 : 아래
1)http://blog.joins.com/media/folderListSlide.asp?uid=mulim1672&folder=33&list_id=7593397&page
2) http://blog.paran.com/isomis/10071279의 3번의 끝 부분
그리고 이 추수백운도(추사의 영영백운도로 알려진)는 황산유고에 나와 있고 이로써 황산의 글임이 입증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림 속에 필체가 황산의 필체임은 제 연산도 등의 글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추사가 제주도 유배 시절에 그린 그림이 아님은 1840년 12, 17일 운명하신 황산이, 추사가 제주도 유배 시절(1840, 9~1848, 12) 에 그린 위 그림을 보지 못하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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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기란찬(心芝氣蘭贊)과 지란병분(芝蘭並芬)
귀 지란병분을 소개한 글 |
황산유고의 심지기란찬(心芝氣蘭贊) |
김정희는 부채의 중심에 난초를 엷은 먹으로 그리고, 오른 쪽에는 진하게 영지를 그려 넣었다. 추사가 “지초와 난초가 향기를 함께 하다. 남은 먹으로 장난하다.”라고 관서(款書)하고,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과 이재 권돈인(權敦仁)이 발문을 썼다. 권돈인은 “백년이 지난다 해도 도(道)는 끊어지지 않고, 만 가지 풀이 모두 꺾인다 해도 향기는 사라지지 않는다.”라고 썼다. 지초와 난초는 친구를 상징하는 그림이다. |
並心爲芝 내 마음과 같은 것이 지초(芝草)이고 同氣日蘭 내 기운과 같은 것이 난초(蘭草)이네 芳馥維聞 그윽한 향기 풍겨오고 秀色可餐 어여쁜 꽃 먹을 만 하네
寫此兩美 이 두 가지 아름다움 그려 配于歲寒 늘그막에 짝하네 凡百君子 모든 군자들은 作如是觀 이와같이 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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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유고"속의 題秋樹白雲圖 다음으로 이어지는 글 몇 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心芝氣蘭贊」「秋樹白雲續圖」「畵蘭贊」이 있습니다. 이 글들도 황산 김유근이 기록한 것으로 추사 김정희와 관련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특히「心芝氣蘭贊」은 귀 「芝蘭並芬」과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이외에도 「묵소거사자찬」등 몇 편의 추사 관련 글이 더 보이고 있음을 말씀드립니다.
한 때 소원(疎遠)한 때가 있었던 황산과 추사의 우정은 1833년부터 더 아름답게 꽃 피어나고 있었음을 위 추수백운도에서 추적한 바와 같습니다. 위 황산유고 속의 추수백운속도와 심지기란찬 그리고 귀 추사의 영영백운도와 지란병분을 읽고 저는 이 작품이 같은 때에 탄생한 같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이 심지기란찬(지란병분)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추리(推理)합니다.
위 題秋樹白雲圖와 英英白雲圖 에서 밝힌 바와 같이 황산과 추사, 이재(彛齋 權敦仁 1783~1859)의 우정이 더 아름답게 꽃 피어나던 1833년(순조 33) 가을 어느 날, 세 분은 황산의 집인 삼청동의 백련사(또는 추사나 이재의 집)에서 만났습니다.
석교(石交) 사이임을 확인하고 세 분은 각자 그림을 그렸습니다. 추사는 秋樹白雲圖(추사의 영영백운도)를 황산은 心芝氣蘭贊(추사의 芝蘭並芬)을 그렸습니다. 그리고 황산은 추수백운도에 추사와 이재는 황산의 그림인 심지기란찬에 글을 썼습니다.
글을 쓰고 나서 황산은 추사와 이재를 바라보면서 지나온 일이 주마등처럼 머리에 스칩니다. 서로 석교(石交) 사이임을 확인하고 눈물이 흐르도록 감회에 졌어 들었습니다. 그리고 추수백운도에 글을 더 쓰고 싶었는데 그림이 있는 종이의 크기가 제한되어 있으므로 별도의 종이에 쓰고 秋樹白雲續圖라고 명하였습니다. 저는 심지기란찬이 지란병분이고 이는 황산 김유근이 그리고 그 안에 글은 추사와 이재가 쓴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이는 같은 친구의 상징인 지초와 난초를 같이 쓰고 있고 황산의 심지기란찬의 글인 寫此兩美는 이 그림이 황산의 그림임을 입증한다고 생각합니다.
2006년에는 추사 서거 150주년 기념전이 국립중앙박물관 등 여러 곳에서 열리고 있었습니다. 이때 추사 해서체의 백미로 유명한 묵소거사자찬은 황산 김유근이 지은 글로 추사 김정희가 써 준 것임이 밝혀진 바 있습니다. 참고로 황산유고에 나오는 다음의 글을 추가합니다.
한가한 사람 몇몇과 매일 경전과 역사를 연구하며 옛 시대와 지금 시대를 비교하여 토론하고 우주와 인간관계를 논의하며 본성(本性)과 천명(天命)의 근원을 탐구하였다. - 2009년 양평군 발행 안동김씨 문정공파 기증유물 도록 p48~49. 또는, p470~471의 閒居隨筆).
나와 이재(彛齋). 추사(秋史)는 세상에서 말하는 석교(石交) 사이이다. 서로 만나면 조정의 잘잘못이나 인물의 시시비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또 세속의 부귀영화나 재물 축적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는다. 오직 고금의 역사를 토론하고 글씨와 그림을 품평할 뿐이다.』
- 위 도록 p486~487 書畵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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맺는 말
저도 추사 김정희를 흠모하고 사랑하는 많은 사람 중 한 사람입니다. 추사 김정희는 제가 양평군에 조상유물을 기증하기 전까지는 황산 김유근과는 벗으로서 특히 천주교의 역사를 통해서 관련 있는 분 정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참고 : http://gregorykorean.org/library/saint/103/yoojk.htm
저는 2006년 양평군에서 건립 중인 친환경농업박물관<역사관>에 물려받은 조상 유물을 기증하였습니다. 그때부터 조상님과 그 행적에 관한 관심이 더 커졌습니다. 저는 역사학자도 아니고 이 분야를 전문적으로 공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위와 같은 글을 쓰는 것은 세상에 알려진 내용이 진실과 다르게 표현될 때 이는 바로 잡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추사 김정희를 흠모하고 나라 사랑하는 바른길이 될 것입니다. 추사께서 남기신 교훈이 우리나라 문화계에서 찬란히 빛나고 나아갈 길을 밝혀주는 등댓불이 되어주기를 바랍니다. 제 글이 논리적이지 못하여 살피시는데 어려움이 따르더라도 깊이 생각하시고 바로 잡아 주시기 바랍니다. 답변을 기다리면서 글을 마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