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작년에 난민 혐오 정서가 있었다고 하지만, 환대의 정서가 그보다 몇십 배는 더 많았어요. 다만 그 환대가 정돈되지 않았던 거죠. 물론 정부의 정책 실패를 제일 먼저 지적해야겠지만, 우리의 정돈되지 않은 환대가 개입되면서 혼란을 가중시켰어요." ⓒ복음과상황 이범진 |
지난해 제주 예멘 난민이 큰 이슈가 되었을 때, 제주의 39개 시민단체는 ‘제주 난민 인권을 위한 범도민위원회’(범도위)를 구성했다. 제주도 안팎에서 거세게 불어온 난민 혐오로부터 울타리를 치고 체계적으로 난민을 조력하기 위해서였다. 그때부터 범도위는 제주 난민 지원을 위한 지휘소(control tower) 역할을 하고 있다. 그간의 이야기를 듣고자 5월 중순, 서울의 한 카페에서 범도위 김성인 공동대표를 만났다. 지친 기색의 그는 우리 사회의 난민 혐오도 문제지만, ‘성찰 없는 환대’가 낳는 혼란을 더 힘들어했다.
― 2011년도 ‘복상이 주목한 젊은 그리스도인’ 중 한 명이셨습니다. 그 기사(249호)를 찾아보니 1999년에 캐나다에 건너가 난민단체에서 활동하며 난민들과 인연을 맺었습니다. 2009년에는 한국에 난민인권센터(난센)를 창립하셨고요. 올해가 난민 활동 20년째를 맞는 해인데요. 20년 동안 난민 분야 활동만 한 것은 아닙니다. 중간에 지역에서 시민운동을 했기 때문에, 난민 관련 활동은 만 10년이 좀 넘는 정도입니다.
— 묻고 싶은 게 많지만, 일단은 지난해 제주 예멘 난민이 이슈가 된 시점으로 범위를 좁혀야 할 것 같습니다. 현재 ‘제주 난민 인권을 위한 범도민위원회’(범도위) 공동대표로 계시지요? 그렇습니다. 지난해 제주에 가기 전에는 광주에 있었습니다. 광주에서 새로운 난민단체를 준비 중이었어요. 거의 모든 영역이 그렇지만, 난민단체도 서울에만 집중되어 있거든요. 저는 사각지대를 찾아 메우고 싶었어요. 지역에는 난민 관련 인프라가 비어 있는 곳이 많거든요. 성경에서 말하는 ‘땅끝’의 개념이 그런 사각지대라고 생각해서 광주에 있었는데, 제주도에서 예멘 난민 상황이 발생했죠. 1년 전 이맘때인데, 솔직히 금방 해결될 줄 알았어요. 왜냐하면 500명이면 큰 숫자가 아니거든요. 작년에만 16,173명이 우리 정부에 난민 신청을 했어요. 그중 500명이면 큰 비중은 아니죠. 당시 문제의 핵심은 정부가 예멘 난민을 제주도에서 나가지 못하도록 출도 제한을 한 거였으니까, 그것만 풀면 해결될 일이라 생각했는데 오판이었어요. 출도 제한이 끝까지 안 풀렸잖아요. 법무부에 가서 설득을 하고, 그 상위기관에도 설득을 했는데….
― 결국 민간 영역에서 부담을 떠안았는데요. 워낙 큰 이슈였는데 제주에서 타지 사람이 ‘대표’를 맡는다는 게 쉽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어떤 논리로 설득을 시도하셨어요? 제주도의 예멘 난민을 난민 문제로만 보고 접근하면 안 된다, 이 분들이 외딴 난민 캠프에 있는 게 아니라 이미 제주 사회에서 함께 존재하고 있다. 해서 ‘난민’이라는 단일한 차원으로 다룰 문제가 아니라 갈등 조정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었죠. 제주도가 난민 경험도, 난민단체도 없어 충격을 흡수하기 어려울 거고, 따라서 필요 이상의 사회적 갈등이 예견되었거든요. 그래서 출도 해제를 요구하면서 이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말했죠. 정부가 염려한 건 출도 해제로 난민들이 육지로 나가면 새로운 루트가 개척되는 거고, 그러면 이 방법으로 더 많은 난민이 들어올 거라는 거였어요. 하지만 작년 6월 1일 자로 정부에서 제주도 무사증 입국불허국에 예멘을 추가하면서 입국이 차단되었기 때문에 출도 제한을 해제했어도 되는데 끝까지 풀지 않았어요. 그 결과 정말 많은 사회적 비용을 치렀죠.
사실 그게 이 인터뷰를 꺼려한 이유 중 하나입니다. 저도 10년 이상 지역운동 경험이 있고 제주에 오기 전 타지인 광주에 있었기 때문에 외지인이 활동하려면 굉장한 지혜가 필요하다는 걸 알아요. 고향이 어디냐는 질문 하나로 정말 많은 게 정리되기도 하니까요. 외지에서 온 활동가가 주인공이 되어서는 그 지역의 어떤 운동도 결코 성공할 수 없다는 현실 인식이 있어요. 전 언젠가 떠날 사람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작년에 제주에 올 때부터 스스로 세운 원칙이 ‘최대한 드러나지 않게 일하자’는 거였습니다. 일체의 개인 인터뷰와 방송 출연을 하지 않았어요. 제가 겸손한 사람이라서 이러는 게 아니에요. 이 활동이 성공하려면 그래야만 된다고 생각했어요. 아무튼 작년에 제주에 와 보니 이주민 단체는 있었지만, 난민단체와 전문가가 전혀 없었어요. 어쩔 수 없이 난민단체 경험이 있고 마침 얽매인 단체가 없던 제가 제주에 상주하면서 지역 단체들과 연대하게 된 거였죠.
― 범도위에는 39개 단체가 연대하고 있는데요. 의견을 조율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제주에는 굵직한 사안들이 많았죠. 강정, 제2공항, 영리병원, 4.3, 관함식 등… 복잡한 이슈들에 대응하면서 제주의 시민단체들이 이미 굉장히 끈끈하고 투철한 저항정신으로 연대하고 있었어요. 난민이 무엇인지 알기도 전에, 이 단체들은 이미 난민을 흔쾌히 받아들일 만한 준비가 되어 있었죠. 서로 의견이 좀 다르더라도 ‘난민을 대상화하지 말자’라는 대전제 하나만으로도 대화가 되고 대부분의 사안에서 조율이 되더라고요. 오히려 외부 육지에서 오신 분들, 특히 개신교 쪽 사람들하고 갈등이 많았어요.
― 끝까지 인터뷰를 고민하신 이유이기도 합니다. 인터뷰를 요청했을 때, 교회와 목사에 대한 분노가 너무 크다고 하셨어요.
인터뷰하려고 많이 가라앉히고 왔어요. 지금은 많이 안정을 찾아가고 있어요. 제가 모태신앙인입니다. 보수적인 교단에서 자랐고요. 그런데 ‘교회’가 보이기만 해도, ‘목사’ ‘선교사’를 만나기만 해도 분노가 치밀어 올랐었어요. 당시 용납할 수 없는 모습을 너무 많이 봤거든요.
―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요? 너무 많아서 그 이야기를 일일이 다 할 수는 없을 겁니다. 한마디로 그분들은 선교의 개념과 환대의 개념을 중첩시켜서 난민을 찾아와요. 신앙적인 확신으로 계시를 받고 왔다면서, 다른 종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없어요. 전도한다고 다른 종교 영역에 아무렇지도 않게 침범한다거나, 다는 아니지만 집을 얻어놓고 난민들을 무작정 데려가요. 집에 난민을 들이고 숙식을 해결해주는 걸 환대의 전형으로 생각하는 거 같았어요. 그러면 안 된다고 아무리 설명을 해줘도 안 들어요. 어떤 목사와는 얼굴을 붉히면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싸우기도 했어요. 스스로 신앙의 확신을 갖고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니까 어찌할 도리가 없어요. 그건 결국 선교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난민들을 이용하는 거죠.
― 교회나 개신교인들이 제주 난민 지원에 큰 혼선을 빚은 주역이 된 것인데요. 제주도 내 교회와 외지 교회의 분위기는 여러 면에서 많이 달랐어요. 지금까지도 꾸준히 협력하고 있는 목사님도 물론 계시고요. 다만 개신교 일부의 무례이긴 하지만, (다른 단체보다) 더 잘해야 하고 또 잘할 거라는 기대가 있어서인지 더 가슴 아팠던 것 같아요. 처음에 39개 단체 안에서도 천주교가 주된 역할을 하다 보니 개신교가 함께하지 못한 측면도 있지 않나 싶어요. 천주교가 주요한 일들을 많이 하다 보니 외부 교회에서 보기에는 ‘범도민위원회=천주교’라고 인식한 게 아닌가 개인적으로 판단하고 있어요. 결국엔 개신교가 천주교를 상대로 경쟁하는 분위기가 된 겁니다. 결국 난민 지원의 큰 줄기는 범도위와 일부 개신교, 이렇게 이원화돼버린 거예요. 그러면서 ‘예멘 사태는 예멘을 복음화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라든가, 예비 중동 파송 선교사들이 예멘 난민들을 상대로 체험 학습 기회로 삼는 일들이 벌어지기도 했어요. 기독교의 본질은 사라져버렸어요. 선교를 위해서 난민을 도구로 활용하고, 그걸 또 미담으로 선전하고, 자원이 몰리고… 악순환이죠. ‘선교’나 ‘환대’라는 용어만 들어가면 검증 없이, 무비판적으로 지지해주고 손뼉 쳐주는 태도를 바꿔야만 합니다. 지금 돌아보지 않으면, 언제 어느 영역에서든 반복될 일이에요.
― 예멘 난민 상황이 발생한 초반에 혼선이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이제는 좀 정리가 된 건가요? 멀리서 보면 정리된 것 같고 단순해 보이는데, 사실 안에서 보면 아직도 복잡합니다. 난민 불인정자들과 인도적 체류자들 중 이의신청하신 분들의 절차가 완전히 끝나려면 앞으로도 1년 반 정도가 남았고요. 작년 예멘 난민 상황으로 우리나라 난민 정책의 문제가 드러나기도 했고, 다른 면에선 ‘환대’에 대해 더 성찰해야 하는 과제가 던져졌다는 생각이 듭니다. 작년에 난민 혐오 정서가 있었다고 하지만, 환대의 정서가 그보다 몇십 배는 더 많았어요. 다만 그 환대가 정돈되지 않았던 거죠. 물론 정부의 정책 실패를 제일 먼저 지적해야겠지만, 우리의 정돈되지 않은 환대가 개입되면서 혼란을 가중시켰어요.
― ‘정돈되지 않은 환대’라는 말의 의미를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세요. 대다수는 환대가 옳다는 걸 알아요. 해야 한다는 것도요. 특히 교회에서 ‘무조건적 환대’를 말하죠. 근데 이 말은 ‘환대의 대상에 차별을 두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라고 생각해요. 여기에 환대의 방법은 제시되지 않았어요. 우리가 구체적으로 어떤 방법으로 난민을 환대할 것인지는 각자의 몫으로 남겨져 있죠. 그러다 보니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해요. 작년에 정말 많은 분들이 제주에 왔다 갔어요. 교회는 물론이고 단체, 예술가, 작가, 학자들이 다녀갔습니다. 개인적으론 영광이라 할 만큼 이름만 말하면 누구나 알 만한 저명인사들도 왔었죠. 그런데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환대하고 갔어요. 환대와 환대가 충돌하는 경우도 있었고, 서로 경쟁이 되기도 하고, 한 곳으로 몰리기도 하고. 그분들이 행한 환대의 순수성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법적 권위를 가진 컨트롤 타워의 부재를 가장 큰 원인이라고 전제하곤 있지만, 난민에게 누구나 접근이 가능한 상황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환대를 행한 결과라고 생각해요.
― 작년에는 환대/혐오 프레임이 워낙 강해서 언론도 ‘어떻게’ 환대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깊이 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환대의 문화를 어떻게 정착시킬 것인지 이제는 고민할 때가 되었어요. 제가 작년에 가장 많이 했던 말이 “제발 아무것도 하지 말아 주세요”였어요. 제각각의 환대가 너무 많은 혼란을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큰 그림을 그린 뒤 역할을 분담하자는 게 기본 원칙이었어요. 그런데 많은 단체나 개인들이 직접 하고 싶어 했고, 자기 단체 이름을 내걸고 싶어 했어요. 의식했든 안 했든, 이때를 기회 삼아 주인공이 되거나 단체의 영향력을 확장하고 싶었을 수 있어요. 그 탓에 성찰적 환대가 이뤄지지 못했어요. 난민의 유익이 아니라 자기의 유익과 이미지를 위해 난민들이 이용된 면이 강했다고 봐요, 결과적으로 보면요. 전혀 전략적이지 않은 환대가 돼버렸어요.
― 20년 넘게 시민운동을 해오셨는데요. 활동가로서 개인적으로도 지난 1년이 고민이 증폭된 특별한 시기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저도 이렇게 현장 깊숙한 곳에서 복잡 미묘한 상황을 마주하며 활동한 적이 없었어요. 그래서 지난 1년을 계기로 정말 많이 반성했어요. 인생을 돌아보게도 되고요. 앞으로의 활동 방향성을 설정하게 만든 전환점이라고 할까요. 무엇보다도 지난날의 활동을 돌아보며, ‘나도 내 목적을 위해 난민을 수단화하지는 않았나?’ 점검하게 되더라고요. ‘내가 몸담았던 단체의 활동과 홍보를 위해서 난민의 상황을 이용하지는 않았나?’라는 질문에서 저도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나름 자부해오던 경력과 성과들도 사실은 단체의 이익과 생존을 위해서 ‘인권팔이’를 한 건 아닌가 반성하게 된 거죠. 절대적인 순수성을 유지하는 건 불가능해요. 그래서 냉철하고 세심한 성찰이 없으면 그 순간 나는 인권팔이가 되는 거죠.
― 어쩌면 지난 1년의 활동은 소위 ‘인권팔이적’ 요소들을 차단하는 데 집중될 수밖에 없었겠습니다. 제가 비난을 받는 이유가 그거예요. 사람들에게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난민을 독점하려고 하느냐’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마음은 쓰리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이런 때일수록 컨트롤 타워가 필요해요. 범도위가 법적인 권위를 인정받은 건 아니지만요. 일부 ‘공급자 중심의 환대’를 차단하려고 하면서 싸우기도 많이 싸웠습니다. 그런데 앞서 말했듯, 난민을 도구화하고 대상화하는 것은 우리 활동가들이나 시민단체도 마찬가지예요. 자칫하면 사업의 아이템으로 활용하고픈 유혹에 빠집니다. 아무리 난민 반대 여론이 심하다 해도 아이템으로서 통하는 면도 있으니까요. 난민 지원 활동은 아주 좁은 경계 위에 있다고 생각해요. 환대에는 인권감수성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하는데, 그게 부족하면 여지없이 인권팔이로 전락하고 말아요.
― 앞에서 말한 전략적인 환대란 어떤 모습일까요? 환대의 목표를 먼저 설정해야 합니다. 저는 난민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립’이라고 봐요. 환대라는 이름으로 자립 의지를 파괴하는 것은 오히려 인권을 침해하는 겁니다. 사실 지난 예멘 난민들은 다른 난민들에 비해서 특혜를 받은 면이 있어요. 취업 허가를 한 달여 만에 받았잖아요. 보통 국내의 다른 난민들은 6개월 이상 걸려야 취업 허가를 받을 수 있어요. 그런데 일할 자격이 있는 난민들을 데려다가 ‘환대’와 ‘선교’라는 이름으로 공짜로 먹여주고 공짜로 재워주고 공짜로 입혀줘요. 이것은 자기 중심의 환대를 완성하기 위해서 넘지 말아야 하는 선을 넘는 거예요. 그 자체로 치명적인 인권침해라 할 수 있어요. 한 인간의 자립 의지를 감소시키는 것이잖아요. 범도위 입장은 ‘일할 수 있으면 스스로 일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거였어요.
― 단계별로, 유형별로 다르게 접근하는 환대가 필요하겠네요. 상황마다 환대의 전략이 달라져야죠. 생존수단이 전혀 없을 때의 환대, 취업 자격이 있을 때의 환대가 달라야 하는 거죠. 반면에 한국에서 환대라는 말은 시혜나 온정의 세련된 형태 정도로만 여겨지는 것 같아요. 교회에서는 ‘아브라함의 환대’죠. 집에 맞아들이고 먹이는. 현대 사회에서 외국인 난민을 환대하는 전략은 더 정교해져야 해요. 타성에 젖은 환대는 오히려 난민들의 인권을 파괴할 수 있어요. 실제로 작년에 너도나도 만났고 주목받았던 난민 가정이 지금 다른 난민들보다 더 자립에 어려움을 겪고 있어요. 어쩌면 우리가 그들을 의존적으로 만든 면도 있는 거예요. 우리의 환대가 항상 좋은 결과로 이어질 거라는 착각에서 벗어났으면 해요. 그리고 반드시 고려해야 할 난민만의 특수성도 있어요. 신분 노출과 개인 스토리 공개는 주의해야 하거든요. 본인이 동의한다 해도요. 고국에 남은 가족이 노출될 수도 있고, 만에 하나 난민 인정을 받지 못하고 돌아가야 할 경우 위험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죠. 난민을 알리기 위한 공익적인 명분이라 하더라도 개인의 안전과 인생보다 앞설 순 없어요.
| | | ▲ "법무부가 그동안 견지한 편협성에 비추어 볼 때 정책적 실패는 어쩔 수 없다고 해도, 문재인 대통령이 ‘혐오는 안 된다’ 한마디는 할 줄 알았어요." ⓒ복음과상황 |
― 환대에도 전문성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전체 판을 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흔히 환대를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라고 표현하잖아요. 그런데 난민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일은 현재 정부의 영역입니다. 권력의 영역이에요. 법과 제도로 난민으로 인정받고 체류하게 해야 하는데 그 부분은 전적으로 정부가 키를 쥐고 있어요. 그럼 정부와 싸우든지 제도를 변화시키는 게 가장 시급한 일이죠. 그런데 이런 구조는 도외시한 채, 내 방식대로 자기가 하기 편한 환대만을 하려고 해요. 그러면서 자기 할 일은 다 했다고 부채감을 털어내죠. 물론 순수한 마음으로 접근하는 분들도 계시죠. 그러나 외국인 소수자를 대할 때는 특히 총체적인 틀에서 개인의 역할을 찾아야 한다고 봐요. 아브라함 때는 국경도 비자도 없던 시대였지만 지금은 아니거든요.
― 환대보다 투쟁이 중요할 수도 있다는 얘긴가요? 정부의 잘못된 정책에 강하게 문제를 제기할 수 있어야죠. 제가 캐나다에서 일할 때 제일 기억에 남았던 말이 “평화를 원하는가? 그러면 정의를 위해 투쟁하라”였어요. 우리 사회가 민주화되고 실제로 어느 분야는 높은 수준의 인권감수성과 민주화를 보여주고 있지만, 난민 영역은 아직 아니에요. 환대의 순수성, 개인의 온정주의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영역입니다.
― 예멘 난민 상황과 관련해 정부의 대응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을 것 같습니다. 그때만 해도 제가 참 순진한 기대를 했어요. 법무부가 그동안 견지한 편협성에 비추어 볼 때 정책적 실패는 어쩔 수 없다고 해도, 문재인 대통령이 ‘혐오는 안 된다’ 한마디는 할 줄 알았어요. 2017년 5.18 기념식 때 눈물 흘렸잖아요. 이 정부가 표방하는 평화와 민주화에 걸맞은 말을 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안 했죠. 이런 소극적인 행동은 곧 혐오 주장을 인정하는 것과 같아요. 결과적으로 난민을 향한 혐오, 낙인을 추인해주는 역할을 한 겁니다. 지난 3월에 뉴질랜드에서 혐오로 인한 총기 난사 테러가 났을 때, 총리가 “혐오 범죄자들이 이 땅에 설 자리는 없다”고 아주 단호하게 이야기했어요. 반면, 우리는 혐오 문제에 있어서 너무 소극적입니다. 정치적으로 불리한 이슈라는 생각을 한 것 같은데요. 5.18 눈물의 의미를 왜 확장하지 못할까요? 예멘의 5.18, 시리아의 4.3에는 왜 침묵하는 걸까요? 이런 정부의 모습은 ‘배타적 환대’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안타까워요. 앞으로는 한국에서 특정 국가 사람이 난민 신청하러 한꺼번에 입국하는 일은 두 번 다시 없을 겁니다. 작년에 예멘을 비롯한 주요 난민 발생 국가를 무사증 입국 불허국으로 지정해버렸거든요. 그래서 제주도는 작년 8월 이후 난민 신청자가 급감했어요. 정부는 대량 난민이 발생한다 싶으면 비자를 통해 국경을 통제할 겁니다. 트럼프가 캐러밴 행렬을 막고 유럽연합(EU)이 지중해를 통제하면서 난민 유입을 막는 거나 다를 바 없는 거죠.
― 작년에 여론이 정말 안 좋았어요. 가짜뉴스에 따른 공포감 때문이었는데요. 현장은 어땠나요? 처음엔 직접 만나지 않은 사람들은 다들 무덤덤했었어요. 언론에서 빅이슈가 되면서 분위기가 정말 험악해졌어요. ‘난민들이 강간한다, 테러한다’ 해서 도민들도 겁을 많이 먹었어요. 숙소를 구하러 가서 계약하기 전에 예멘 사람들이 올 거라 말하면 ‘그 예멘 사람들이냐’ 하면서 계약을 파기할 정도였어요. 그때 그런 부정적인 여론의 주장들을 모아서 지금의 현실과 비교하고 싶어요. 그렇게 우려한 일들은 벌어지지 않았거든요. 제가 난민이 무조건 선하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난민 운동할 때 자칫 범할 수 있는 실수가 난민을 항상 선하고 이상적인 인간의 모습으로 정당화하는 건데요. 매우 위험하다고 봐요. 그들도 우리와 같은 인간입니다. 테러를 하거나 강간을 하지는 않았지만, 자잘한 갈등을 일으켜요. 술 마시고 실수도 하고, 우리 기준으로는 게을러요. 삶의 영역에서 난민을 만나면, 다양한 측면에서 인간으로서 이해하게 되는 거죠. 이론적으로 난민을 보게 되면 인권적 의미를 부여하면서 다 영웅이고 정당성이 있다고 해석해요. 하지만 제주도에서 주민들은 삶의 일상을 통해서 난민을 바라봅니다. 이건 엄청난 차이예요. 멀리서 보는 사람들은 ‘인권’으로 보지만, 여기서 같이 지내는 사람들은 ‘인성’을 봐요. 법적인 신분으로는 난민이지만, 여기서는 그냥 인간입니다. 사실 작년에 제가 걱정한 것은 언론보다는 평범한 제주도 도민들의 평가였어요. 그건 직접 경험이니까 설득이 힘들어요. 한 마디로, 간증이니까요. 그래서 더 두려웠어요. 그렇지만 동시에, 이 사태를 바라보는 그 혐오/환대의 공허한 공중전을 깰 수 있는 방책을 찾아야 한다면 현장성, 지역성, 일상성에서 나온다고 봤어요.
― 일상 영역에서 난민들과 부딪힌 도민들의 평가는 어땠나요? 처음엔 부정적이었지만 직접 만나는 사람들은 ‘여론과 다르네?’라는 반응이 그래도 많았어요. ‘내 자식 같고 손자 같네’ 하는 사람도 있었고요. 물론 상상도 못했던 갈등도 많았어요. 좋고 나쁜 수많은 사례가 있어요.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요. 아무리 난민에 대한 탁월한 글을 써도, 이성적이고 정밀한 토론으로도 난민 혐오를 설득하긴 힘들다고 봐요. 난민 혐오는 안전이라는 인간의 본성을 건드리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우리의 일상에서 평범한 사람들의 선한 의지가, 사방으로 난사되는 혐오를 무력화할 방패가 될 수 있어요. 저는 그걸 봤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큰 희망인데요. 속을 확 뒤집고 손톱으로 긁어 파헤치는 상처를 받기도 하지만, 우리 안에 그 어려운 걸 회복해내는 사회적인 건강성이 있어요.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그것이 문화가 되고요. 이걸 지식인들은 뭐라고 부를까요? ‘세계시민’이라는 개념이랑 비슷하겠죠. 그런데 난민들과 어울리는 이분들은 정작 세계시민 담론을 몰라요. 난민이랑 인권 개념은 알까요? 모르더라도 스스로 교류하고 교감하면서 갈등을 해결해가면서 문화로 정착해가는 겁니다. 제주도민이 보여준 저력이에요. 환대의 일상성, 다문화의 일상성인데요. 이것은 단기간에는 절대 불가능해요. 긴 안목에서 지금의 상황을 찬찬히 바라보고 견뎌내면서 함께 살아내는 거죠. 이때 긴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국가나 단체가 과도하게 개입하는 경우가 많죠, 불행히도.
―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희망을 지니고 계시네요. 20년 전 처음 난민단체 활동을 할 때부터 가졌던 생각이 ‘난민에게 필요한 건 집단 수용이 아닌 지역에 분산하는 방식으로 보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어요. 제주도 상황 초기만 해도 사람들이 ‘500명을 한꺼번에 수용하는 난민 캠프’를 자연스럽게 떠올릴 때, 그것만은 안 된다고 설득했어요. 각 지역에 소규모로 흩어지게 해야 한다고요. 그렇게 해서 난민과 제주 도민이 서로 일상적 삶으로 부딪히게 맡겨야 한다고요. 천만다행으로 대규모 시설이 없어 자연스럽게 무산되었고, 천주교의 전폭적인 도움으로 분산된 숙소를 어느 정도 마련할 수 있었어요. 분명히 밝히지만 항상 좋은 일만 있었던 건 아니었어요. 그래도 그러기를 정말 잘했다고 생각해요. 긴 호흡으로 보는 게 중요해요. 갈등과 상처가 아무는 경험들이 축적되어야죠. 그렇게 축적된 것이 문화이고요. 다문화도 문화라는 일상의 축적 그 자체로 두면 되는데, 우리는 기다리지 못하고 성급하게 개입해서 망치는 경우가 많죠.
― 기다려주는 것 자체도 환대일 수 있겠어요. 그렇죠. 교회나 단체들이 난민들 환대(선교)한다면서 현장을 찾아오는데요. 길게 있어야 2주입니다. 보통은 3박 4일이고요. 길게 보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 식으로 환대를 기획합니다. 교회에 보고하고 자기 페이스북에 올리려면 뭔가 가시적인 게 필요한데, 그때 할 수 있는 게 행사입니다. 이벤트지요. 결과적으로 환대를 내세워 난민을 이벤트의 소재로 소환하고 동원하는 겁니다. 환대도 하고 싶고, 홍보도 하고 싶고, 고귀한 결실도 보고 싶은 마음이 왜곡된 환대를 하게 하는 거죠. 그러면서도 환대라는 도덕적 정당성에 선교라는 종교적 확신까지 있기 때문에 이런 식의 환대가 지닌 폭력성을 간과하기 쉽습니다. 덧붙이고 싶은 말은, 환대의 에너지는 샘솟듯 솟아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한계가 있어요. 우리가 선언적으로 좋게 말해서 난민을 ‘이웃’이라고 하지만, 그것도 하루이틀이지요. 삶의 영역으로 오면 솔직히 ‘남’이에요. 부모님이 집에 방문해도 3일 지나면 힘들어요. 언어와 가치관이 다른 남과 함께 살다보면 어쩔 수 없이 충돌은 생겨요. 그 충돌의 단면만 보고 성급하게 난민을 평가하지 말고 방법을 달리하면서 타협점을 찾아보자는 겁니다. 그중 하나가 길게 보자는 거예요. 이게 가능하려면 환대도 체계적으로 관리할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 환대의 체계적 관리라는 건 어떤 의미인지요? 우리의 환대 에너지가 유한하기 때문에 더더욱 관리가 되어야 합니다. 특히 개인의 환대 에너지는 한계가 있어요. 길게 가려면 환대의 시스템을 만들고 체계를 갖춰야 한다는 거죠. 울컥하는 마음에 난민 데려갔던 사람들 얼마 못 견디고 울면서 전화가 와요. 제발 데려가 달라고요. 이게 현실이에요. 그래서 난민에게 주거를 제공하는 개인에겐 문서를 만들라고 조언해요. 생활 수칙을 아주 구체적으로 합의해서 정하고 서로 사인하라고요. 경제적 지원의 한계와 어떤 경우에 집에서 나가야 하는지까지 세세하게 문서로 합의하라고요. 환대를 길게 지속하려면 잘 정비된 시스템이 필요해요. 국가 차원에서는 난민이나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지 않도록 제도적 장치를 만들어야죠. 차별금지법이 필요한 이유죠. 단체는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갈등 상황에 중재자 역할을 기본으로 하고 사적 영역에 필요 이상으로 개입하는 것은 자제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외국인은 처음 본 사람도 ‘프렌드’고 ‘브라더’이다 보니 공사 관계의 경계가 모호해지더라고요. 저는 그랬어요.
| | | ▲ 2011년에 ‘복상이 주목한 젊은 그리스도인’에 선정된 바 있는 그는 "활동가를 키워야 합니다. 현장에서 일하는 활동가들이 정말 많이 고생하고 있어요. 활동가만이 할 수 있는 영역이 있어요."라고 말했다. ⓒ복음과상황 |
― 난민 분야에서 가장 시급한 문제는 무엇인가요? 활동가를 키워야 합니다. 현장에서 일하는 활동가들이 정말 많이 고생하고 있어요. 활동가만이 할 수 있는 영역이 있어요. 1만 명이 넘는 신청자를 다 커버하는 건 불가능해요. 적은 수의 활동가가 선택과 집중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조력을 포기해야 대상이 생겨납니다. 이 경우의 죄책감과 중압감은 말도 못해요. 거기다 난민 중에는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어요. 줄기차게 말하지만 그들도 인간이니까요. 그 현장 스트레스를 난민 활동가들이 흡수하고 불가피하게 대상을 줄여주기 때문에 이후에 난민 인정을 위해 변호사들이 나설 때에도 한층 수월해지는 거거든요. 이 협업 시스템이 안정적으로 잘 돌아가야 해요. 현장 단체에 활동가가 점점 줄어들면서 법률지원을 해주는 변호사들, 특히 공익법센터 어필에도 신청자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해요. 소송을 수행할 변호사도 몇 없는데요. 난민단체 활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게 초기 상담인데, 혐오 이슈에 대응하느라 지금 그걸 할 여력이 없어요. 하지만 상담에 손을 놓아서는 안 되거든요. 지금 상담을 담당하는 단체가 하나밖에 없어요. 염려가 좀 많이 됩니다.
― 앞서 난민 분야의 전체 틀을 설명해주셨는데요. 여전히 갈 길이 멀어 보입니다. 크게 난민 분야의 활동을 ‘난민 지위 인정’(인정)과 ‘정착 지원’(지원)으로 나눌 수 있겠죠. 재정착 난민을 많이 받아들이는 선진국들은 입국하는 순간 난민 지위를 받고 오기 때문에 난민단체의 활동이 난민의 정착과 통합에 초점을 맞춰요. 반면에 우리나라는 난민으로 ‘인정’받는 것 자체가 어려우니까 지위 인정 활동에 초점을 맞춰야 하죠. 그런데 이를 조력해줄 단체나 활동가가 태부족이에요. 변호사 숫자도 부족하고, 경제적 후원도요. 조력 시스템을 확충하는 것이 큰 과제예요. 앞서 말했듯이, 인정 못 받으면 출국할 게 뻔 한데 난민 인정을 위한 조력 없이 임시 체류자에게 단기적으로 시혜를 베푸는 것은 사실 좀 공허한 면이 있어요. 이것도 분명 귀하고 의미는 있지만, 한 발 더 나갔으면 해요. 요즘 복음의 공공성을 말하잖아요. 난민을 지원하는 환대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요.
― 일정 역할을 교회가 감당할 수 있을까요?
교회들에게 ‘난민 자립을 위해 일거리를 주는 게 제일 중요하고, 시킬 일이 없으면 교회 마당의 풀이라도 뽑게 하고 그 노동의 대가로 돈을 지급하자’고 얘기했었어요. 작년에 교회 후원과 관련하여 계획도 있었어요. 모금해서 난민들 일자리를 만들려고요. 처음엔 자신감이 있었죠. 해줄 만한 대형 교회를 많이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기대가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몇몇 대형 교회에 사업 내용을 설명하고 제안했는데, 한 곳도 안 했어요. 제 판단으로 교회는 결국 선교의 관점에만 매몰돼 있구나 싶어요. 난민 영역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선교, 즉 포교의 관점으로 접근하는 걸 저는 절대 반대합니다. 난민이 된 사유 중 하나가 종교 박해거든요. 난민을 제대로 조력하려는 난민단체라면 선교를 목적으로 한 특정 종교성을 띠면 안 되는 거예요. 교회는 앞서 말한 지역성이나 현장성에 이미 기반을 두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래서 마음만 먹으면 할 일이 많아요. 하지만 선교의 관점을 재정립하는 게 먼저라고 봐요.
― 단체 없이 홀로 활동하는 건데, 거기에서 오는 어려움은 없나요? 제주도에 와서 두 번 눈물을 삼켰어요. 한 번은 교회와 목사들에게 분노했을 때였죠.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어요. 창피하기도 했고요. 두 번째는 범도위 분들과 일하면서였어요. 행복해서요. 범도위에서 회의를 하다 보면 난민을 잘 모른다고 하면서도 난민을 대상화하지 말자는 인권감수성 하나로 서로 맘이 통할 때 느껴지는 행복감이 있었어요. 그리고 그동안 저도 모르는 억눌림이 있었나 봐요. 이전 단체들에서 활동하면서 본능적으로 ‘단체 후원을 늘려야 하고 영향력을 키워야 한다’는 부담 같은 것들 말이죠. 제주에서는 이런 것에서 자유롭게 본질에만 집중할 수 있었거든요. 그게 행복했어요.
― 척박한 이 영역에 계속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이것밖에 없어요. 20대 때 이런 질문을 받았다면 뭔가 멋있게 말을 했겠지만, 지금 대답은 이렇습니다. 제멋에 취해서 일했던 적도 있었어요. 그런데 솔직하게 돌아보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지금은 이것밖에 없더라고요. 난민인권센터를 8년 여 만에 나오면서 많은 고민을 했어요. 이제 가장(家長) 역할을 제대로 하라는 주변의 조언도 많이 들었고요. 지금도 고민은 진행 중이긴 해요.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니, 난민들과 정교하게 소통할 수 있는 연륜이 그래도 좀 쌓인 거 같아요. 그리고 판이 보여요. 자꾸 눈앞에 어른거리는 거죠. 판이 보이고 역할이 보이니까 아직 활동을 하는 거예요. 저라고 왜 다른 생각 안 했겠어요. 유학을 다녀와 학위가 있었으면, 변호사가 되었다면, 몇 가지 외국어를 할 수 있다면 더 효과적으로 일할 수 있었을 텐데…, 생각 많이 했죠. 그런데 그 정도 스펙이었다면 절대 여기서 일 안 했겠죠. 이 분야에 남았더라도 스펙에 걸맞은 자리와 대우를 받으려 했겠죠. 여기에 있을 수밖에 없는 제 삶의 궤적이 보여요. 농담으로 그냥 이게 내 팔자구나, 하고 말하기도 하지만, 누군가가 소명이라고 말해주면 영광이죠.
■ 제주 난민 인권 범도민위원회 후원계좌 : 농협 301-0234-6354-31(예금주: 제주난민인권 범도민)
정리 이범진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