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로 보는 중동 이야기] 역사 속의 기독교 이야기 -나바테 왕국과 헤롯왕
붉은 장밋빛 암벽의 도시, 페트라
이야기는 헤롯 왕 시절의 유대 왕국으로 이어진다. 먼저 나바테아 왕국과 그 수도였던 페트라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페트라는 요르단 남부 아카바 만 인근의 아라바 계곡에 위치한다. 페트라란 글자 그대로 ‘바위’를 의미하는 암벽 도시다. 페트라는 바위를 깎아 만든 놀라운 고대 도시의 유적이며, 그 형태는 아직도 거의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다.
줄리언 헉슬리가 페트라에서 촬영한 <고대의 토지에서>를 본 뒤 페트라는 나에게 동경의 땅이었다 그러나 내가 맨 처음 요르단에서 생활하던 당시 요르단의 정세, 특히 수도 암만의 치안은 상당히 어수선해 좀처럼 자동차 여행을 할 상황이 아니었다. 상황이 조금 나아진 틈을 타 자동차로 페트라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1969년 12월, 아침 일찍 베이루트를 떠나 시리아 국경을 넘어 요르단에 들어갔다. 사막 너머로 붉은 태양이 천천히 질 무렵 드디어 페트라를 가리키는 표지판을 발견했고, 요르단의 수도 암만에서 아카바로 내려가는 사막 고속도로를 벗어났다 차는 큰 협곡을 몇 개나 가로질러 내려갔다. 그 일대에는 지구의 균열이라는 표현이 딱 어울릴 만한 거대한 계곡이 사해에서 홍해를 향해 펼쳐져 있었다. 이곳이 그 유명한 아라바 계곡으로, 페트라는 그 안에 있었다. 우리는 그날 밤, 중간에 길이 끊긴 곳에 자리한 정부 직영의 작은 휴게소에서 묵었다.
다음 날 아침, 해가 뜨자마자 가이드를 앞세워 당나귀를 타고 출발했다 앞으로 갈 길은 ‘시크’라고 불리는 돌길이었다. 아마 우기에는 개천으로 바뀔 것 같은 와디(마른 골짜기) 길을 조금씩 내려갔다. 길은 점차 좁아지고 길 양쪽으로 암벽이 험준하게 솟아올라 있었다. 위를 쳐다보니 수직으로 치솟은 암벽이 100미터는 돼 보였다. 이 거대한 바위를 큰 도끼로 절단한 것 같은 좁은 길이 3킬로미터나 이어졌다.
30-40분쯤 걸었을까. 갑자기 눈앞에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는 장밋빛 신전이 나타났다. 볕이 닿지 않는 양쪽의 검은 암벽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이었다. 앞쪽의 총천연색 바위는 붉은 색과 주황색, 노란색, 갈색, 녹색이 뒤섞여 있었고, 바퀴 모양이 새겨져 있었다. 신전풍의 거대한 건물은 2층 구조였다. 아래층은 아케이드 같은 커다란 입구가 있는 큰 방이었는데 6개의 기둥이 있었다. 위층에는 4개의 둥근 기둥에 둘러싸인 원형 조각이 한가운데 있고, 좌우에도 역시 4개의 기둥에 둘러싸인 조각이 대칭을 이루고 있었다. 폭 30미터, 높이는 43미터 였다.
이것이 바로 페트라 유적 가운데 가장 유명한 엘카즈네 신전이다. 이 신전 앞 광장부터 길은 넓어졌고, 오른쪽 암벽에는 바위를 몇 단이나 긁어내 만든 오벨리스크가 있는 신전, 파사드가 달린 무덤과 건물 등이 차례로 나타났다. 원형극장도 있었는데, 이것도 바위를 긁어내 만든 것이었다.
이윽고 길은 집회장(포럼), 시장, 목욕탕, 궁전 등이 밀집해 있는 넓은 광장으로 이어졌다.
나는 그 후에도 수차례 페트라를 방문했다. 예전에 우리가 묵었던 정부 직영 휴게소는 없어졌고 지금은 시크 입구 광장에 근사한 출입구가 들어서 티켓 판매소로 변해 있었다. 주위에는 다양한 기념품 가게들이 즐비하고, 근처에는 수영장이 있는 근사한 호텔도 들어섰다. 첫 여행 때 탔던 당나귀 대신 말과 마차가 여행객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2005년 8월, 다시 페트라를 찾았을 때는 항상 시간에 쫓겨 가지 못했던 구석배기 산꼭대기에 있는 아드다이르까지 가 보았다. 아드다이르는 엘카즈네봗 크고 아름다운 신전 건축물로, 기원전 100년에 지어졌다고 하는데 아직 거의 원형 그대로 보전돼 있었다 그곳에서 내려다본 아라바 계곡과 아인무사 마을의 광경은 훌륭했다.
이들 유적은 1812년 8월, 스위스의 탐험가 요한 루트비히 부르크하르트가 발견해 서구에 알려지게 됐다. 아랍인 순례객으로 가장하고 시리아에서 사막도로를 남하하던 중 필라델피아(지금의 암만)에서 아라바 계곡에 들러 숙소에 묵었던 그는 베두인 사람으로부터 ‘잃어버린 도시’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혼자서는 페트라로 들어갈 수 없었으므로 그는 현지 베두인 부족에게 페트라 안쪽에 있는 아론 산에 가 번제를 드리고 싶다고 간청해, 부족의 안내를 받아 페트라에 들어갔다. 기원전 4세기경 나바테아인이 건설한 페트라는 기원전 100년에서 기원후 100년에 걸쳐 가장 번영했던 대상도시로 알려졌으나 이후 2000년 동안 베일에 싸여 있었다.
나바테아인들은 모세 일행의 영내 통과를 거부한 것으로 유명한 에돔 사람들의 후예다. <구약성서>에 종종 등장하는 ‘아라비아인’이란 이 나바테아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들 역시 셈계 민족으로, 처음에는 아람어가 주 언어였으나 그 후 아라비아어의 강한 영향을 받아 초기 아라비아어를 사용했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는 아랍계 민족의 후손이라 할 수 있다.
페트라로 가는 도중에 ‘아인 무사(모세의 샘)’라는 장소가 있는데, 샘과 바위는 둥근 돔 모양을 한 작은 모스크 안에 모셔져 있다. 지금도 그곳에서 물이 펑펑 솟아 나오고 있다. 창세기에 모세가 지팡이로 바위를 치자 물이 나왔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나바테아 사람들은 이곳에서 바위를 파내 수도를 만들고 페트라로 물을 공급했다. 물론 이 정도의 양으로 페트라 전역에 충분한 물을 댈 수 없어 산에서 우기 때 떨어지는 물을 가둬두는 댐, 그리고 그 물을 시내로 운반하는 토관을 만들기도 했다. 전성기 때는 페트라 인구가 2-3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나바테아 왕국과 이스라엘 민족
페트라의 유적 중에 ‘하이 플레이스(높은 곳)’이라 불리는 곳이 있다. 중앙 광장 부근의 원형극장 앞에서 이정표를 따라 1시간 정도 오르면 바위산의 정상에 직사각형의 평평한 공간이 나타난다. 길이는 약 65미터, 폭은 30미터의 넓이로 둘로 나누어져 있다. 깎아 떨어진 듯한 직사각형의 서쪽 부지 한가운데에는 제단이 있고, 그 왼쪽에도 또 하나의 조금 작은 제단이 있다. 왼쪽 제단에는 큰 구멍이 있어 아래쪽 도랑과 이어져 있다. 제물로 바치는 동물의 피를 모아 이곳으로 흘려보낸 것 같다.
중앙 제단에 서면 이곳이 이 주변에서 가장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야말로 ‘하이 플레이스’로 전망이 최고다. 정면에는 아론을 모신다는 아론 산이 보이고 바로 밑에는 광장이 내려다보인다. 사람들이 개미처럼 보인다. 지성소를 의미하는 이 ‘신성한 제단’은 <구약성서>에 종종 등장하는데, 페트라의 ‘신성한 제단’은 그 당시 원형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다. 대표적인 기록은 이스라엘 통일왕국의 솔로몬 왕이 이 ‘신성한 제단’에서 번제를 올리고 기도를 드리는 모습이다.
“백성은 아직 야훼의 이름으로 부를 진전이 지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산당에서 제사를 드렸다. 솔로몬은 야훼를 사랑하였고 그의 아버지 다윗의 법도를 따라 살았다. 다만 한 가지, 그는 산당에서 제사하고 향을 피웠다. 기브온에는 큰 산당이 하나 있었는데 솔로몬은 늘 그리로 가서 제물을 드렸다.”(열왕기상 3:2-4)
성경에서 말하는 ‘산당’은 <구약성서>에 여러 차례 나온다. 예컨대 “그 하느님의 사람이 야훼의 말씀을 받아 벧엘의 제단과 사마리아의 모든 산당을 두고 예언한 말씀이 모두 그대로 이루어지리라”(열왕기상 13:32)과 같이 가나안 사람이 막강한 영향을 행사했을 것으로 보이는 북왕국을 묘사하는 내용이 종종 등장한다. 그러나 북이스라엘 왕국은 여로보암 왕이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북이스라엘 왕국의 북방 한계)에 두었다’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 ‘산당’은 가나안의 이방 신들에 대한 우상 숭배와 관련된 것이었다.
다음과 같은 기록도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정착해 왕국이 형성되기까지 활약한 이른바 사사(카리스마적 지도자)의 한 사람인 기드온에게 하느님은 “네 아비의 일곱 살 된 살진 소를 끌고, 네 부하 열 사람을 데리고 가서 네 아비의 바알 제단을 허물고 곁에 있는 아세라를 찍어라. 그리고 이 산성 꼭대기에 너의 하나님 야훼께 바칠 제단을 차곡차곡 쌓아라. 그리고 그 살진 소를 잦ㅂ고 찍어낸 아세라 목상을 태워 번제를 드려라”(사사기 6:25-26)고 말씀하셨다.
즉 이런 ‘산당’이라 여겨지던 곳은 왕국 형성 이전의 이스라엘에서는 상당히 일반적인 존재였으며, 어떻게 보면 매우 흔한 장소였을지 모른다. 참고로 앞서 언급한 아세라 상이란 페니키아의 풍요 신 바알의 아내이고, 가나안 사람들은 바알과 아세라를 하나로 믿고 있었다. 거꾸로 말하면 이런 ‘산당’은 가나안 사람들의 토착신앙 습관과 연관이 있으며, 이스라엘 백성도 이런 습관을 선조에게서 물려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은 에돔 사람에게도 해당한다. 이스라엘 민족의 남쪽 지역에 살고 있었던 에돔 사람들도 당연히 이스라엘 백성보다 선대 사람들이다. 그러나 에돔 사람은 이스라엘 백성에 더 직접적이고,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다.
다시 나바테아 사람들 이야기로 돌아가자. 나바테아 사람들은 두샤라 신을 섬겼고, 그 다음으로는 알 우자를 섬겼다. 두샤라는 오벨리스크 등 바위귀신의 상징이고, 알 우자는 물과 관련된 신으로 알려져 있다. 두샤라(Dushara)는 아라비아어 ‘Shu-esh-Shera’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Shera의 주인’dmf dmlalgksek. ‘Shera’란 페트라 남부 아라바 계곡 동쪽에 있는 산악지대로, <구약성서>에서는 세일이라고 불리는 지역이다. 즉 두샤라의 원래 의미는 ‘세일의 주인’이다.(G. L. 하딩, <요르단 상고사>)
세일은 원래 에돔 사람들이 모여 살던 곳이다. 야훼 신앙은 애초 에돔 사람의 신앙이기도 했고, 돌이나 높은 곳에 존재한다고 여겨졌다. <구약성서>에서 모세는 죽음에 이르러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음과 같은 축복의 말을 남겼다.
“야훼께서 시나이에서 오신다. 동트듯 세일에서 솟아올라, 바란 산 마루에서 비추신다.”(신명기 33:2)
바란이란 아라바 계곡의 서안에서 페트라까지 약 80킬로미터 서쪽에 위치한 지금의 제벨 파란으로 보인다. 즉 야훼는 세일에서 내려와 이 바란 산에 나타났다는 이야기다.
또한 여자 예언자인 드보라는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야훼여, 임께서 세일에서 나오실 때 임께서 에돔 땅에서 진군하실 때, 땅은 흔들리고 하늘은 진동하여 구름이 비를 쏟았습니다.”(사사기 5:4)
놀라운 일이다. 에돔 사람들, 또 그 후손인 나바테아 사람들은 유대인보다 먼저 야훼를 숭배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야훼 신앙과 함께 종교적 관습을 에돔 사람으로부터 이어받았다는 말이 된다.
에돔 사람은 기원전 13세기 말경,아라바 계곡 남족에 정착해 아카바만에 이르는 지대를 지배해왔다. 이스라엘 왕국의 동쪽에는 당시 요르단 강 동쪽 기슭 일대에 오래전 정착한 모아브 사람들과 그 북방에 거주하는 암몬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성서에서 이들과 에돔 사람에 대한 대우는 전혀 달랐다. <구약성서> 신명기에는 ‘총회 참가 자격’이 열거되 있는데, 그 모두에 “고환이 터진 사람이나 성기가 잘린 사람은 야훼의 대회에 참석하지 못한다. 사생아는 야훼의 대회에 참석하지 못한다. 그 후손은 십대에 이르기까지도 야훼의 대회에 참석하지 못한다. 암몬 사람과 모아브 사람은 야훼의 대회에 참석하지 못한다.” (신명기 23:2-4)고 적혀 있다. 유대교는 매우 배타적이어서 이 내용만 봐도 암몬 사람과 모아브 사람은 이스라엘 백성과 원래부터 적대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성서에는 “에돔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신명기 23:8)고 적혀 있다. 즉 이스라엘 백성과 에돔 사람은 원래 우호적인 관계였으며 처음에는 형제 관계였다.
그러나 유대인과 에돔 사람들은 그 후 대립하게 됐다. 이스라엘 왕국은 영토확장정책을 폈다. 이스라엘 왕국은 홍해 연안의 아카바 주변 에지온게베르 지방의 구리 광산과 홍해로 나가는 출구를 손에 넣고 싶어 했기 때문에 이스라엘과 에돔은 이 지역을 놓고 격렬하게 싸우게 됐다. 다윗 왕 시절, 에돔은 일단 이스라엘의 지배하에 있었으나 이후에도 양자의 관계는 안정되지 못하고 왕국이 분열된 후 유대 왕국이 멸망(기원전 587)함과 동시에 에돔 사람들은 차례로 남유다로 이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