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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나의 문화유산 답사 원문보기 글쓴이: ▦ 칸텔리
요즘 끊이지 않고, 우리나라 역사를 고루고루 다루고 있네요~~ ㅎㅎㅎ
이제는 드라마 '천추태후'가 또, 역사의 변방, 고려초기, 성종-목종-현종 대를 정면으로 다루기 시작했네요^^;;
희대의 스캔들이든, 고려의 쟌다르크이든, 분명 관심을 가질만한 고려사 대목이긴 한데, 그 스캔들을 어떻게 다룰지^^;;;
일단 고려조 황실에 대한 정사인 고려사에 남아있는 천추태후, 김치양, 강조에 관한 기록을 함 정리해봄이 어떨까 해서리, 잠깐 갈무리함다~~ ^^
주요 출처는 고려사와, 여기저기 번역본들을 발췌 정리했슴다^^
高麗史88卷 列傳1 后妃1 獻哀王太后皇甫氏
천추태후(=헌애황후) (고려사 권88, 후비열전)
○獻哀王太后皇甫氏 戴宗之女 生穆宗
헌애 왕태후 황보씨는 대종(광종의 배다른 동생이며 성종의 아버지)의 딸이니 목종을 낳았다.
穆宗卽位冊上尊號曰: "應天啓聖靜德王太后.
목종이 즉위하여 조서를 올려 존호(尊號)를 응천계성정덕왕태후(應天啓聖靜德王太后)라 하였다.
穆宗年已十八 太后攝政居千秋殿 世號千秋太后.
목종의 나이 이미 18세나 되었으나 태후가 섭정하여 천추전에 거처하였으므로 세상에서 그를 천추태후라고 불렀다.
與金致陽通而生子 欲以其子嗣王位
그가 김치양과 간통하여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을 왕위계승자로 정하려고 하였다.
時顯宗爲大良院君太后忌之强令出家寓居三角山神穴寺
당시 현종은 대량원군으로 있었는데 태후가 그를 꺼려 억지로 승려로 만들어 삼각산 신혈사에 나가 있게 하였다.
時稱神穴小君太后屢遣人謀害.
그래서 당시 사람들이 '신혈소군'이라고 불렀는데, 태후는 누차 사람을 보내 그를 죽이려고 하였다.
一日使內人遺以酒
하루는 나인(內人)에게 술에 독약을 타도록 시켰다.
皆和毒藥內人到寺求見小君欲親勸食
나인은 절에 도착하여 소군(小君 : 현종)을 찾아뵈어 친하고자 하며 먹을 것을 권하고자 하였다.
寺有僧輒匿小君於地穴中 之曰: "小君出遊山中安知去處耶?"
절에 있던 스님이 갑자기 소군을 땅굴 속에 숨기고 말하기를 "소군은 산중으로 놀러 나가셨으니 가신 곳을 어찌 알겠습니까?"라고 하였다.
及內人還散之庭中烏雀食而卽斃.
이에 나인은 돌아와 그것(독을 탄 술)을 흩뿌렸는데, 뜰 안의 까마귀와 참새들이 먹자 마자 곧 죽었다.
凡忠臣義士尤所忌憚多以非罪陷之穆宗不能禁.
또 태후는 충신과 의로운 사람들을 꺼렸으므로 죄없는 신하들을 많이 모함하였으나 목종은 금하지 못했다.
十二年正月千秋殿 太后入長生殿
12년 정월 천추전에 화재가 나서 태후는 장생전으로 옮겨 거처했으며
後康兆殺致陽父子 流太后親屬于海島 又使人弑穆宗.
후에 강조가 김치양 부자를 죽이고 태후의 친척들을 섬에 귀양 보냈으며 또 사람을 시켜 목종을 죽였다.
於是太后歸居黃州者二十一年 顯宗二十年正月薨于崇德宮 壽六十六 葬幽陵.
그래서 태후는 황주에 12년간 있다가 현종20년(1029) 정월에 숭덕궁에서 죽었는데 향년 66세였고 유릉에 매장하였다.
高麗史127卷 列傳40 叛逆1 金致陽
○金致陽洞州人千秋太后皇甫氏外族性姦巧陰能關輪.
김치양은 동주 사람이며 천추태후 황보씨의 외족이었는데 성정이 간교하고 성욕이 몹시 강했다.
嘗詐祝髮出入千秋宮頗有醜聲成宗認之杖配遠地.
김치양은 일찍이 머리털을 깍고 가짜중이 되어 천추궁에 출입하면서 추악한 소문이 자자하였으므로 성종이 그것을 확인하고 곤장쳐서 먼곳으로 귀양 보냈다.
穆宗卽位召授閤門通事舍人不數年貴寵無比驟遷至右僕射兼三司事
목종이 즉위한 후 김치양을 불러들여 합문통사사인 벼슬을 주었고, 이후 몇해 안 되어 왕의 존중과 총애가 비길 바가 없어 우복야겸삼사사로 되었다.
百官與奪皆出其手親黨布列勢傾中外賄賂公行起第至三百餘*閒臺
백관의 인사가 모두 그의 수중에 달려 있었으며 친척과 도당을 늘려 세워 세력을 과시했으며 뇌물을 공공연히 받고, 자택을 300여간이나 되게 지었다.
園池窮極美麗日夜與太后遊戱無所忌.
대와 정자, 정원, 연못 등을 지극히 아름답고 화려하게 꾸며 밤낮으로 태후와 함께 놀면서 꺼리는 바가 없었다.
又役農民立祠洞州額曰星宿寺又於宮城西北隅立十王寺
또 농민을 부역해서 동주에 사당을 건축하고 성숙사란 간판을 붙였으며 궁성 서부 모퉁이에 십왕사를 세웠다.
其圖像奇怪難狀潛懷異志以求陰助 凡器皿皆銘其意鍾銘曰: "當生東國之時同修善種後往西方之日共證菩提."
그 절에 그린 화상이 기괴망측하니 남몰래 반역의 뜻을 품고 이런 것으로 신명의 도움을 구하였던 것이니 기명마다 모두 그런 뜻으로 글을 새겼다.
穆宗常欲黜之恐傷母志不敢也
목종이 항상 그를 내보내고자 하였으나 모친을 마음을 상하게 할까 염려하여 단행하지 못했다.
後太后生子是私致陽所生也
그 후 태후가 아들을 낳았는데 김치양과 간통하여 낳은 것이었다.
致陽與太后謀爲王後忌大良君逼令爲僧屢欲害之.
그래서 김치양은 태후와 함께 그를 왕의 후계자로 만들려고 기도하면서 대량군을 꺼려 강제로 중이 되게 하고 여러번 죽이려 하였다.
乘王寢疾欲謀變劉忠正上書告變王召蔡忠順密議令迎大良君
그 후 김치양은 왕이 병석에 누워 있는 틈을 타 정변을 일으키려 하였는데 류충정이 상소하여 고발하므로 왕이 채충순을 불러 밀의한 후 갑자기 대량군을 맞아 오게 하였다.
致陽知之無如之何首鼠數日及康兆廢立遣兵殺致陽幷其兒流其黨于海島.
김치양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며칠동안 망설이고 있었는데 강조가 왕을 폐위하면서 군사를 파견하여 김치양과 그 아들을 죽이고 그 도당을 섬으로 귀양 보냈다.
有長淵縣人文仁渭者 無華久爲千秋宮使
장연현(長淵縣) 사람 문인위(文仁渭)란 자는 오랫동안 성실하게 천추 궁사(千秋宮使)로 복무했는데
及致陽誅宮僚多連坐誅竄獨仁渭以兆之庇獲免官至尙書左僕射.
김치양이 처단되자 많은 궁료(宮僚)들이 연루되어 죽거나 귀양 갔으나 문인위만은 강조의 비호를 받아서 무사했으며 벼슬이 상서(尙書) 좌복야(左僕射)까지 오랐다.
高麗史123卷-列傳36-嬖幸1-庾行簡
○庾行簡父 廉衛尉少卿
유행간의 부친 유품렴(庾稟廉)은 위위소경(衛尉小卿)이라는 벼슬을 지냈다.
行簡姿美麗穆宗嬖愛有龍陽之寵.
유행간은 용모가 미려하여 목종(穆宗)의 사랑을 받은 남색(男色)의 대상이었다.
驟遷閣門舍人每宣旨必先問行簡然後行
벼슬이 합문 사인(閤門舍人)으로 뛰어올라갔으며 매양 임금이 지시할 일이 있으면 먼저 유행간에게 문의한 다음에 명령하였다.
由是 寵驕蹇輕蔑百僚 指氣使
이런 데로부터 그는 왕의 총애를 믿고 매우 오만하였으며 백관들을 경멸하고 그들을 턱과 낯빛으로 지시하였다.
近侍視之如王
이리하여 왕의 측근 신하들은 그를 왕과 다름없이 보았다.
知銀臺事左司郞中劉忠正本渤海人無他技能亦甚寵於王.
지은대사 좌사랑중(知銀臺事左司郞中) 유충정(劉忠正)은 본래 발해(渤海) 사람으로 별다른 기능이 없으면서 역시 왕의 대단한 총애를 받고 있었다.
王嘗以水房人吏分屬二人出入騶從僭擬無極
왕이 일찍이 수방(水房) 인원을 이 두 사람에게 나누어 소속시켰으므로 출입 때의 추종(騶從)이 참월하게도 왕처럼 의장을 차리고 다니었다.
王不豫行簡忠正 直宿於內宰臣請入寢問疾
어느 때 왕이 병환이 났을 때 유행간과 유충정이 안에서 수직하고 있었는데 대신들이 침전에 들어가서 병 문안할 것을 청하니
行簡傳旨曰: "體氣漸平取別日召見." 宰相再請不許.
유행간이 왕의 명령을 전하여 말하기를 “몸이 점차 편안하여 가니 다른 날 부르겠다”라고 하고 대신들이 재삼 청해도 듣지 않았다.
王欲迎大良院君爲後行簡不欲迎立
왕은 대량원군(大良院君)을 맞이하여 후계자로 삼으려 하였으나 유행간이 그를 맞아 세우려 하지 않았으므로
王慮事洩戒蔡忠順勿令行簡知之.
왕은 일이 누설될까 두려워하여 채충순(蔡忠順)에게 유행간이 알지 못하게 하도록 주의시켰다.
及康兆作亂殺行簡等七人.
그 후 강조(康兆)가 반란(亂)을 일으켰을 때 유행간 등 7명을 죽였다.
高麗史93卷-列傳6-蔡忠順
○蔡忠順史失世系. 穆宗朝累遷中樞院副使王寢疾.
채충순의 가계(世系)는 사료(史料)가 유실되어 알 수 없으며 목종 때에 누차 승진하여 중추원부사(副使)에 이르렀으며 이때에 왕이 병석에 누워 있었다.
忠順與劉瑨崔沆直宿銀臺一日王召忠順入臥內 左右語曰:
채충순은 유진(劉瑨), 최항(崔沆)과 함께 은대(銀臺)에서 당직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왕이 채충순을 침실로 불러다 놓고 측근자들을 피석시킨후 말하기를
"寡人疾漸就平聞外*閒有窺 者卿知之乎?"
“나의 병은 점차 회복되어 가고 있다. 그런데 듣건대 외부에서 나의 자리를 엿보는 자가 있다 하는데 그대는 이것을 아는가”라고 하니
對曰: "臣試聞之未得其實."
그가 대답하기를 “저는 말을 들은 바는 있으나 그런 사실을 확인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王取枕上封書與之乃劉忠正所上也云:
왕이 베개 위에 있는 봉서(封書)를 그에게 주었는데 그것은 유충정(劉忠正)이 올린 글이었으며 그 글의 내용은
"右僕射金致陽 非望遣人致遺深布腹心仍求內援臣曉譬拒之不敢不奏."
“우복야 김치양이 왕위를 엿보고 있으며 사람을 보내 선물을 주면서 심복을 널리 포치하고 저에게도 은근히 원조해달라고 요구하므로 저는 그에게 알아듣도록 타이르고 거절하였습니다마는 이 일은 감히 아뢰지 않을 수 없는 일입니다.”라고 하였으며
又取書一封與之乃大良院君詢所上也云:
또 다른 편지 한 통을 보여 주는데 이것은 대량원군(大良院君) 왕순(王詢)이 올린 글이었고 편지 내용은
"姦黨遣人圍逼遺酒食臣疑毒不食與烏雀烏雀斃.
“악당들이 사람을 보내 저를 포위 핍박하며 술과 음식을 보냈는데 저는 독약을 넣었을까 의심하고 먹지 않고 까마귀와 참새들에게 주었더니 먹은 새들이 모두 죽었습니다.
謀危若此願聖上憐救." 謀危若此願聖上憐救."
그 음모의 위험이 이러하니 원컨대 전하께서는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忠順見畢奏曰: "勢急矣宜早圖之."
채충순이 편지를 보고 나서 아뢰기를 ”사세가 급박하였으니 빨리 손을 써야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王曰: "朕疾漸危篤朝夕入地太祖之孫唯大良院君在
왕이 말하기를 “나의 병이 점차 위독하여 가니 조석간에 땅 속에 들어 갈 것 같고 태조의 후손은 오직 대량원군 뿐이다.
卿與崔沆素懷忠義宜盡心匡扶使社稷不屬異姓."
그대와 최항은 평소부터 충의로운 마음을 품고 있었으니 마땅히 성의를 다하여 그를 도와 사직이 타성에게 속하지 않도록 하라!”고 하니
忠順出以語沆沆曰: "臣常以爲憂今上意如此社稷之福也."
채충순이 나와서 최항과 상의하였다. 최항은 말하기를 “나는 항상 이 일에 대하여 근심하고 있었는데 이제 주상의 뜻이 이러하시니 국가의 행복이다.”라고 하였다.
忠正遣監察御史高英起謂忠順沆曰:
유충정(劉忠正)이 감찰 어사 고영기(高英起)를 보내 채충순과 최항에게 전달하기를
"今上寢疾姦黨伺隙恐社稷將屬異姓疾如大漸宜以太祖之孫爲嗣."
“지금 상왕께서 병석에 누워 계신데 악당들은 기회를 엿보고 있으므로 사직이 타성에 넘어 갈 염려가 있으니 만약 병환이 위독하시거든 태조의 손자로 하여금 후계자로 삼아야 하겠습니다.”라고 하니
忠順等陽驚曰: "太祖之孫安在?" 曰大良院君是也可以主
채충순 등은 거짓 놀라면서 묻기를 “태조의 손자가 어디 계시오?”라고 하니 또 말하기를 “바로 대량원군입니다. 그는 왕위 계승자로 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忠順等* 曰: "吾等亦聞此久矣當聽天所命."
이에 채충순 등이 대답하기를 “우리들도 역시 이런 말을 들은지 오래 되었습니다. 마땅히 하늘이 시키는대로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忠正更遣英起曰: "我欲躬往議之騶從繁恐爲旁人所疑冀兩君見枉."
충정은 또다시 고영기를 보내 전하기를 “내가 친히 가서 의논하고 싶으나 추종하는 호위병이 많아서 다른 사람들의 의혹을 살까 두려우니 두 분이 왕림하여 주시오.” 라고 하였다.
忠順與沆議曰: "此非私事實關宗社可往見之." 遂詣定議.
채충순은 최항과 의논하기를 “이것은 개인의 일이 아니라 실로 국가 대사이니 찾아 가서 만나야 한다.”라고 하였다.이리 하여 드디어 그를 방문하고 일을 결정하였다.
時大良院君在三角山神穴寺.
당시 대량원군은 삼각산 신혈사에 있었다.
忠順入奏王曰: "宜擇文武各一人率軍校往迎之."
채충순이 궁중에 들어 가서 이 사유를 왕에게 아뢰니 왕은 말하기를 “마땅히 문관, 무관을 각 한 명씩 선택하여 군교들을 거느리고 가서 영접하라.”고 하므로
忠順與沆及英起等議遂擧宣徽判官皇甫兪義以聞忠順等又議奏:
채충순과 최항 및 고영기 등이 의논하고 선휘 판관(宣徽判官) 황보유의(黃甫兪義)를 왕에게 천거하고 채충순 등이 또 의논한 후 왕에게 아뢰기를
"軍校多則行必遲恐姦黨先 宜遣十餘人徑往迎來."
“군교들이 많으면 행동이 반드시 지연되어 악당들이 먼저 손을 쓸 우려가 있으니 10여 명 정도를 파견하되 지름길로 가서 영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라고 하니
王然之曰: "予欲親禪可 遣不可緩也.
왕도 그 의견이 옳다고 말하고 계속하여 말하기를 “내가 친히 왕위를 선위(禪位)하고 싶으니 빨리 사람들을 보내고 지체하지 말도록 하라.
若疾 如成宗封朕故事. 早定名分則無窺伺之人矣.
만약 내 병이 쾌복되면 성종이 나를 책봉하던 옛일과 같이 하겠다. 명분을 일찍 정하면 틈을 엿보는 사람이 없어질 것이다.
朕無子而繼嗣未定衆心搖動是吾過也.
내가 자식이 없고 계승자가 미정으로 있으므로 뭇사람의 마음이 동요되는데 이것은 나의 허물이다.
宗社大計無過於此卿等其各盡心." 王遂泣下忠順亦泣
국가 대계로서 이보다 더 큰 일은 없으니 그대들은 각기 충심을 다하라!”고 하면서 왕이 드디어 눈물을 흘리니 채충순도 울었다.
王命忠順草與大良君書親自硏墨
왕은 채충순에게 명령하여 대량원군에게 주는 글의 초안을 지으라고 하면서 친히 먹을 갈아 주니
忠順曰: "臣自硏以書請勿勞聖體."
채충순이 사양하기를 “제가 스스로 갈아서 쓰겠사오니 청컨대 성체(聖體)를 수고롭게 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王曰: "意甚忙不覺勞也."
왕이 대답하기를 “나의 마음이 심이 조급해지니 피로도 느껴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其書曰: "自古國家大事素定於前則人心乃安.
채충순이 초안한 글은 다음과 같다. “옛날부터 국가 대사는 미리 결정하면 민심이 안정되는 법이라.
今予寢疾姦邪窺 以寡人不豫爲之所名分未定故爾.
이제 내가 병석에 누워 있으니 간신들이 기회만 엿보고 있으며 명분을 정하여 두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엿보고 있다.
卿太祖嫡孫宜速上道. 寡人未至大期得面付宗社沒無遺恨
그대는 태조의 적손이니 빨리 길을 떠나 오라! 내가 죽기전에 면대하여 종묘, 사직을 그대에게 맡기면 죽어도 한이 없겠고
若有餘齡則使處東宮以定群心."
만약 내가 더 살게 되면 그대는 동궁에 거처하여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안정시키도록 하라.”
王又令書其尾曰: "道路險阻恐姦人潛伏變起不虞可戒愼而來."
왕이 또 이 편지 끝에 다음과 같이 첨가하게 하였다. “길이 험하여 악당이 잠복하였다가 불의의 변을 일으킬 수도 있을 터이니 경계하고 조심하여 오라!”
時閤門舍人庾行簡不欲迎立王慮事泄戒忠順:
당시 합문 사인 유행간(庾行簡)은 그를 맞아 들여 세우는 것을 좋아 하지 않았으므로 왕은 일이 누설될까 염려하여 채충순에게 당부하기를
"勿令行簡知之." 以書授兪義等往迎于神穴寺.
“유행간이 알지 못하게끔 하라.”고 하고 편지를 황보유의 등에게 주어 신혈사로 가서 맞아 오게 하였다.
遂卽位是爲顯宗.
이리 하여 왕위에 오르니 이가 현종이다.
顯宗以忠順直中臺俄遷吏部侍郞兼左諫議大夫.
현종은 채충순을 직중대(直中臺)로 임명하였다가 곧 이부시랑 겸 좌간의대부로 승진시켰다.
王避契丹南行忠順扈駕王次廣州從行諸臣聞河拱辰等被執皆驚懼散走
왕이 거란을 피하여 남녘 땅으로 갔을 때 채충순은 왕을 호위하였는데 왕이 광주에 체류하니 수종하던 여러 신하들이 하공진 등이 잡혀 갔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다 놀라서 흩어져 도망갔고
唯忠順與侍郞忠肅張延祐周佇柳宗金應仁不去.
다만 채충순과 시랑 충숙(忠肅), 장연우(張延祐), 주저(周佇), 유종(柳宗), 김응인(金應仁) 등이 가지 않고 있었다.
累轉吏部尙書 知政事賜推忠盡節衛社功臣號封濟陽縣開國男食邑三百戶.
채충순은 누차 승진 되어 이부 상서 참지정사로 되었으며 유충 진절 위사 공신(惟忠盡節衛社功臣) 칭호를 받았고 제양현 개국남으로 책봉되고 식읍 300호를 받았다.
忠順奏: "軍士有父母年八十已上者免軍就養諸文武員僚父母年七十已上無他兄弟者不許補外
채충순이 왕에게 아뢰기를 “병사들에게 80세 이상 노령의 부모가 있으면 병역을 면제시켜 부모를 공양하게 하고 여러 문무 관원들로서 70 세 이상의 부모가 있고 다른 형제가 없는 자는 지방관으로 임명하지 말며
其父母有疾給告二百日護視." 王從之.
그 부모가 병중에 있을 때는 200일간 휴가를 주어 간호하게 하십시오.”라고 하였더니 왕은 이 건의대로 시행하게 하였다.
十二年檢校太尉濟陽縣開國子食邑五百戶加輔國功臣號.
현종 12년에 검교 태위로 임명되고 제양현(濟陽縣) 개국자(開國子)로 책봉하였으며 식읍 5백 호를 주고 보국 공신 호를 더 주었다.
尋拜內史侍郞平章事兼西京留守加太子少師.
얼마 후에 내사시랑평장사 겸 서경 유수로 임명하고 태자 태사 벼슬을 더 주었다.
十八年遷門下侍郞平章事二十一年判西京留守事
현종 18년에 문하시랑, 평장사로 전임되었다가 21년에 판 서경 유수사로 되었는데
以疾表請解職不允明年致仕靖宗二年卒謚貞簡.
병 때문에 글을 올려 해직을 청원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고 이듬해에 치사하였으며 정종 2년에 죽었는데 시호는 정간(貞簡)이라 하였다.
高麗史94卷-列傳7-皇甫兪義
○皇甫兪義史失其世系穆宗朝歷官至宣徽判官.
황보유의의 가계(世系)는 사료(史料)가 유실되어 알 수 없으며 목종 때에 벼슬이 여러 번 승차되어 선휘 판관(宣徽判官)으로 되었다.
王寢疾金致陽謀變王知之命選文武各一人率軍校往迎顯宗
당시 목종이 병석에 눕게 되자 김치양(金致陽)이 반란을 꾸미고 있는 것을 왕이 알고 문관, 무관 각 한 명씩 선발하여 그들에게 군교(軍校)를 인솔시켜 현종을 맞이하러 갈 것을 명령하였다.
於是蔡忠順崔沆等議曰: "皇甫兪義志存宗社且其父祖有勳勞於國
이때 채충순(蔡忠順), 최항(崔沆) 등이 의논하기를 “황보유의는 애국자이고 또 그의 조상들도 국가에 공로가 있었은즉 그의 자손으로서
當不墜家業以盡心力 遣此人幷擧武班郞將文演."
응당 가문의 명예를 회손치 않기 위하여 전심전력을 다 바치어 사명을 완수할 것이니 이 사람을 어찌 보내지 않겠는가? 그리고 무관으로는 낭장(郞將) 문연(文演)이 적당하다고 인정된다”고 아울러 추천하니
以聞乃命忠順草與顯宗書授兪義文演及別將李成彦高積等十人往迎于三角山神穴寺
왕이 채충순에게 명령하여 현종에게 보낼 교서의 초안을 작성시켜서 황보유의와 문연에게 주고 그와 함께 별장(別場) 이성언(李成彦), 고적(高積) 등 열 명을 삼각산 신혈사(三角山神穴寺)로 보내 현종을 맞이 해 오게 하고
又命開城府 軍金延慶領卒一百郊迎.
한편 개성부 참군(開城府參軍) 김연경(金延慶)에게 병사 1백 명을 영솔하고 교외까지 마중하게 하였다.
兪義等至寺僧疑爲姦黨所遣匿不出
황보유의 등이 신혈사에 이르니 그 절의 중들이 간당들이 보낸 자나 아닌가 의심하여 현종을 숨기고 내놓지 않았다.
兪義等具道所以迎立之意遂奉以還.
황보유의 등이 그 분을 왕으로 맞이하러 온 사유을 자세히 설명하고 마침내 그를 모시고 돌아 왔다.
顯宗卽位授殿中侍御史進吏部侍郞改內史舍人尋爲中樞院日直員.
현종이 왕위에 오른 후 그를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로 임명하였다가 이부시랑(吏部侍郞)으로, 다시 내사사인(內史舍人)으로 임용하고 또 미구에 중추원 일직원(中樞院日直員)으로 임명하였다.
自庚戌用兵以來增置軍額由是百官祿俸不足
경술년(庚戌) 전쟁 이후 군사비 지출이 증대되어 일반 관리들의 봉급 지출이 부족되었다.
兪義與中樞院使張延祐建議奪京軍永業田以充祿俸武官頗懷不平
그래서 황보유의가 중추원사(中樞院使) 장연우(長延祐)와 함께 건의하여 서울 군사들에게 주었던 영업전(永業田)을 회수하여 그 수입을 관리 봉급 지출에 충당하였으므로 이런 처사에 대하여 무관들이 자못 불만을 품게 되었고
上將軍崔質又以邊功累拜武職而不得爲文官居常怏怏
또 상장군(上將軍) 최질(崔質)이 변방에서 군공을 세웠으므로 여러 번 무관직은 겪었으나 문관으로 되지 못하여 언제나 불만을 품고 있던 차이라
遂與上將軍金訓朴成李 李翔李暹石邦賢崔可貞恭文林猛等以奪田
드디어 상장군 김훈(金訓), 박성(朴成), 이협(李協), 이상(李翔), 이섬(李暹), 석방현(石邦賢), 최가정(崔可貞), 공문(恭文), 임맹(林猛) 등과 공모하고 영업전을 빼앗긴 것을 구실로 삼고
激衆怒誘諸衛軍士鼓 入禁中縛兪義及延祐 撻垂死詣閤中面訴云:
여러 사람의 분노를 격발시킴으로써 호위군을 반란에로 유도하니 군대들이 아우성을 치면서 대궐로 달려 들어 황보유의와 장연우를 결박한 후 죽게 매질하고 왕의 거처로 나가서 왕을 면대하고 신소하기를
"兪義等占奪我輩田實謀自利殊非公家之利若截趾適 柰四體何?
“황보유의 등이 우리의 영업전을 강탈한 것은 공가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실은 자기 이익을 위한 것입니다. 마치 발가락을 잘라서 신에 마추는 격이니 그러면 그 몸체는 어찌 되겠습니까?
諸軍洶洶不勝憤怨請除國 用快群情."
지금 군대들이 분하고 억울함을 참지 못하여 기세가 험악하니 이렇게 나라를 해롭게 하는 무리를 제거하여 여러 사람의 마음을 풀어 주기를 바랍니다!”라고 하니
王重違衆志除兪義延祐名流配.
왕이 대중의 의사를 무시하기가 어려워서 황보유의와 정연우를 제명(除名)시키고 귀양 보냈다.
後起授給事中累轉御史大夫與 知政事王可道築開京羅城
그 후에 황보유의를 다시 급사중(給事中)으로 임용하였다가 어사대부(御事大夫)로 임명하여 참지정사(參知政事) 왕가도(王可道)와 함께 개성의 외성(羅城)을 축조하게 하였다.
拜中樞使歷 知政事吏部尙書陞內史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判戶部事
그는 중추사(中樞使)를 거쳐 참지정사 이부 상서(參知政事吏部尙書)를 역임하고 내사시랑 동 내사문하 평장사 판 호부사(內史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判戶部事)로 승진되었다가
靖宗二年改門下侍郞八年卒.
정종(靖宗) 2년에 문하시랑(門下侍郞)으로 임명되었고 정종 8년(1042)에 죽었다.
高麗史3卷-世家3-穆宗
穆宗宣讓大王諱誦字孝伸景宗長子母曰獻哀太后皇甫氏. 景宗五年庚辰五月壬戌生
목종 선양대왕의 휘는 송이요 자는 효신이니 경종의 장자이며 모는 헌애태후 황보씨로 경종 5년 경진 5월 임술에 탄생하였다.
成宗卽位養于宮中九年六月封開寧君. 十六年十月戊午受內禪卽位.
성종이 즉위하매 궁중에 수양하여 9년 6월에는 개녕군을 봉하고 16년 10월 무오에 내선을 받아 즉위하였다.
十一月遣閤門使王同穎如契丹告嗣位.
11월에 합문사 왕동영을 거란에 보내어 사위를 고하였다.
十二月 尊母皇甫氏爲王太后.
모 황보씨를 높혀서 왕태후로 삼았다.
是月契丹遣千牛衛大將軍耶律迪烈來賀千秋節. 王迎命告于成宗柩前.
이 달에 거란이 오우위대장군 야율적열을 보내어 천추절을 축하하니 왕이 명을 맞이하고 성종의 추전에 고하였다.
○(戊戌)元年秋七月庚午太保內史令徐熙卒.
추 7월 경오에 태보 내사령(내사령) 서희가 졸하였다.
癸未改西京爲鎬京.
계미에 서경을 고쳐 호경이라 하였다.
○(己亥)二年秋七月作眞觀寺于城南爲太后願刹.
기해 2년 추 7월에 진관사를 성남에 지어 태후의 원찰로 삼았다.
○(癸卯)六年年太后皇甫氏與金致陽通生子. 謀爲王後逼大良君詢爲僧.
○(己酉)十二年春正月庚午幸崇敎寺及還中路暴風折傘盖柄.
기유 12년(1009) 봄 정월 경오일에 왕이 숭교사에 갔다 돌아 오는 중에 갑자기 폭풍이 일어 일산대를 꺾었다.
壬申御詳政殿觀燈大府油庫延燒千秋殿
임오일에 왕이 상고전에 나와서 관등을 하던 중 대부의 기름창고에 불이 나 천추전이 연소되었다.
王見殿宇府庫燼 悲嘆成疾不聽政.
왕은 궁전과 창고들이 다 타버린 것을 보고 슬프고 한심하게 생각하던 끝에 병을 얻어 정무를 보지 않았다.
王國師二僧* 大醫奇貞業 *大卜晉含祚 *大史潘希渥 宰臣 知政事劉瑨 中樞院使崔沆 給事中蔡忠順等 直宿銀臺
왕사와 국사 이승과 대의 기정업 대복 진함조 대사 반희악 재신 참지정사 유진 중추원사 최항 급사중 채충순 등이 은대에 직숙하고
知銀臺事李周禎 右承宣李作仁 嬖臣左司郞中劉忠正 閤門舍人庾行簡等 直宿於內
지은대사 이주정과 우승선 이작인 폐신 좌사랑중 유충정 합문사인 유행간 등은 궐내에 직숙하고
親從將軍庾方 中郞將柳琮 卓思政河拱辰常直 近殿門
친종장군 유방과 중랑장 유종 탁사정 하공진은 근전문에 상직하고
刑部尙書陳亦入內直宿 戶部侍郞崔士威爲大定門別監閉諸宮門戒嚴唯開長春大定門.
형부상서 진적도 또한 입내하여 직숙하고 호부시랑 최사위는 대정문 별감이 되어 모든 궁문을 폐쇄하고 계엄하였는데 다만 장춘 대정문만 열었다.
仍設救命道場於長春乾化二殿.
인하여 구명도장을 장춘 건화 이전에 베풀었다.
王累日不豫常居於內厭見群臣.
왕은 여러날 편치 않아 항상 궁내에만 있고 신하들을 만나기 싫어했다.
宰臣震恐請入寢問疾不許.
신하들이 두려워 하여 침실에 들어가 문병을 하려고 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王與蔡忠順崔沆密議立嗣遣皇甫兪義 迎大良院君(현종) 于神穴寺.
왕이 채충순, 최항 등과 함께 후계자에 대한 일을 밀의하고, 황보유의를 신혈사에 보내 대량원군을 맞아 오게 하였다.
西京都巡* {檢}使康兆領甲卒而至遂謀廢立.
서경 도순검사 강조가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드디어 왕을 몰아 내고 새임금을 세울 음모를 꾸몄다.
二月戊子請王出御龍興歸法寺.
2월 무자에 왕을 청하여 용흥(황주)의 귀법사에 출어하게 하였다.
己丑日色如張紅幕.
기축에 햇빛이 붉은 장막을 친듯 하였다.
兆兵入宮門 王知不免與太后號泣出 御法王寺.
강조의 병이 궁문에 난입하매 왕이 면치 못할 것을 알고 태후와 더불어 호읍(號泣 목놓아 소리 높여 우는 것)하며 법왕사에 출어하였다.
俄而兪義等 奉院君而至遂卽位.
이윽고 황보유의 등이 대량원군을 받들고 이르러 드디어 즉위케 하였다.
兆廢王爲讓國公遣兵殺金致陽父子及庾行簡 等七人.
강조는 왕을 폐하여 양국공을 삼고 병졸을 보내어 김치양 부자와 유행간 등 칠인을 죽였다.
王出自宣仁門侍臣. 初皆步從至是始有騎而從者.
왕이 선인문으로부터 나올새 시신들이 처음 도보로 따르다가 이에 이르러 비로소 말을 타고 따르는 자가 있었다.
至歸法寺解御衣換食而進.
귀법사에 이르러 어의를 풀고 어식을 바꾸어서 올렸다.
兆召還沆等供職王謂沆曰:
강조가 최항 등을 소환하여 공직(公直 사사롭거나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이 정직하게)하게 하니 왕이 항에게 말하기를
"頃府庫而變起所忽皆由予不德夫復何怨.
저번에 부고가 불타고 변이 소홀히 한 데에서 일어난 것은 다 나의 부덕에서 녹유됨이니 다시 무엇을 원망하리오.
但願歸老于鄕. 卿可奏新君且善輔佐."
다만 원하는 바는 시골에 귀로하고자 하니 경은 신군에게 이 뜻을 상주하고 또 잘 보좌하도록 하라
遂向忠州.
하고 드디어 충주로 향하였다.
太后欲食王親奉盤盂*大后欲御馬王親執.
태후가 식사하고자 하면 왕이 친히 반우를 받들고 태후가 말을 타고자 하면 왕이 친히 말 고삐를 잡았다.
行至積城縣兆使人弑之以王自刎
강조가 사람을 시켜 왕을 죽이고 새임금에게는 왕이 자살한 것으로 보고했다.
聞取門扇爲棺權于館
문짝을 취하여 관으로 삼고 객관에 권조하였다.
王在位十二年壽三十性沈毅少有人君之度.
왕의 재위는 십이년이요 수는 삼십이니 천성이 침의하여 어려서부터 인군의 풍도가 있었으며
善射御嗜酒好獵
활쏘기 말타기를 잘하고 술을 좋아하고 사냥을 즐기며
不留意政事信狎嬖倖以及於禍.
정사에 뜻을 두지않았으며 폐행을 믿고 가까이 하여 화를 미치게 되었다.
踰月火葬縣南.
달을 지나 현의 남쪽에서 화장하였다.
陵曰恭陵謚宣靈廟號愍宗皆康兆所撰定.
능을 공능이라 하고 시호는 선령이라 하며 묘호는 민종이라고 하니 모두 강조가 찬정한 바이다.
臣民莫不痛憤.
관리와 평민을 막론하고 통분히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而顯宗未之知至契丹問罪始知之.
그러나 현종은 그것을 모르고 있다가 거란이 침입하여 문죄를 하였을 때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顯宗三年移葬城東改陵曰義謚曰宣讓廟號穆宗
현종 3년 성동에 이장하고 능을 고쳐 의릉이라 하고 시호를 선양이라고 하였으며 묘호를 목종이라 하였다.
五年加謚孝思十八年加威惠文宗十年加克英高宗四十年加靖恭.
5년 효사를 가시하고 18년 위혜를 가하고 문종 10년 극영을 가하고 고종 40년 정공을 가하였다.
○李齊賢贊曰:
이재현의 찬에 이르기를
慶父犯禮於魯不韋嫁禍於秦
경부가 노에서 예를 범하고 불위가 진에서 화를 전가하니
齊桓尸姜始皇 *毒{ }何救萬世之恥哉?
제환공이 강씨를 죽이고 진시황이 애씨를 거열한들 어찌 만세의 치욕을 구할 수 있으랴.
穆宗不戒覆車之轍防閑於初子母俱罹其殃社稷幾至於亡. 嗚呼!
목종이 복거의 전철을 경계하여 처음에 방지하지 못하고 자모가 함께 그 재앙에 걸려 사직을 거의 망침에 이르렀으니 슬프다.
宣讓之不幸也抑非不幸也.
목종(선양)의 불행이 또한 불행이 아니로다]고 하였다.
高麗史4卷-世家4-顯宗
顯宗元文大王諱詢字安世安宗之子母曰孝肅王后皇甫氏.
현종 원문대왕의 휘는 순이며 자는 안세니 안종(추존)의 아들이요 모는 효숙왕후 황보씨이다.
成宗十一年壬辰七月壬辰生. 稍長封大良院君
성종 11년 임진 7월 임진에 탄생하여 조금 자람에 대량원군으로 봉했다.
年十二. 千秋太后忌之逼令祝髮. 初寓崇敎寺
나이 12에 천추태후가 꺼려하고 핍박하여 중이 되게 하니 처음에 숭교사에 머물렀다.
有僧夢見大星隕寺庭變爲龍又變爲人卽王也.
한 중이 꿈을 꾸니 큰 별이 절 뜰에 떨어져서는 변하여 용이 되었다가 또 변하여 사람이 되니 곧 왕이었다.
由是衆多奇之
이것으로 말미암아 여러사람이 퍽 기이하게 생각하였다.
穆宗九年移寓三角山*神 寺{神穴寺}. 太后屢遣人謀害.
목종 9년 삼각산 신혈사에 이우하였던 바 태후가 자주 사람을 보내어 해치고자 하였으나
寺有老僧* {穴}地於室而匿之上置臥榻以防不測.
절에 노승이 있어 방밑에 구멍을 파 숨겨두고 그 위에 와탑을 두어 예기치 못한 변을 막았다.
一日王偶題溪水詩曰: "一條流出白雲峯萬里滄溟去路通莫道潺湲巖下在不多時日到龍宮."
하루는 왕이 우연히 계수를 두고 시를 지어 「한가닥 유수가 백운봉으로부터 흘러나니 만리창명으로 갈 길이 통했도다 졸졸 흘러 바위 밑에만 있다고 말하지 말라 얼마 지나지 않아 용궁에 이를 것이다」고 하고
詠小蛇曰: "小小蛇兒 藥欄滿身紅錦自斑 莫言長在花林下一旦成龍也不難."
「 소사를 두고 읊어 「작고 작은 배암이 약란에 감도니 온 몸에 붉은 비단이 저절로 아롱지도다 길이 꽃숲풀 밑에만 있으리라고 말하지 말라 하루 아침에 용되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로다」고 하였다.
又夢聞 聲砧響問於術士以方言解之曰: " 鳴高貴位砧響御近當是卽位之兆也."
또 꿈에 닭 소리와 다듬이 소리를 들고 술사에게 물으니 방언으로써 해석하여 말하기를 「닭 소리는 고귀위(고귀위)하고 다듬이 소리는 어근당(어근당)이니 이것은 즉위할 징조라」고 하였다.
十二年二月己丑奉迎卽位於延寵殿.
12년 2월 기축에 봉앙되어 연총전에서 즉위하였다.
庚寅以康兆爲中臺使李鉉雲爲中臺副使蔡忠順爲直中臺尹餘爲尙書右丞兼直中臺.
경인에 강조로 중대사를 삼고 이현운으로 중대부사를 삼고 채충순으로 직중대를 삼고 윤여로 상서우승겸 직중대를 삼았다.
三月以柳允孚爲門下侍中柳邦憲爲門下侍郞平章事康兆爲吏部尙書
3월에 유윤부로 문하시중을 삼고 유방헌으로 문하시랑 평장사를 삼고 강조로 이부상서참지정사를 삼고
知政事陳 爲刑部尙書 知政事劉瑨王同穎爲尙書左右僕射崔沆金審言爲左右散騎常侍
진적로 형부상서참지정사를 삼고 유진과 왕동영으로 상서 좌우복사를 삼고 최항과 김심언으로 좌우산기상시를 삼고
蔡忠順爲吏部侍郞左*鍊{諫}議大夫金勵爲兵部尙書文仁渭爲工部尙書.
채충순으로 이부시랑 좌간의대부를 삼고 김려로 병부상서를 삼고 문인위로 공부상서를 삼았다.
○(己巳)二十年春正月癸巳千秋太后皇甫氏薨于崇德宮.
기사 20년 춘 정월 계사에 천추태후 황보씨가 숭덕궁에서 훙하였다.
○史臣崔 贊曰:
사신 최충이 찬하기를
"傳稱: '天將興之誰能廢之.'
[전에 일컫기를 하늘이 장차 일어나게 함에 뉘 능히 이것을 폐하리요라 하였거니와
千秋太后自縱* {淫}荒潛圖傾奪.
천추태후가 제마음대로 음황하여 가만이 경탈을 도모하매
穆宗知百姓之屬望排千秋之惡黨遠馳使命以授神器 固本支所謂:
목종께서 백성의 촉망을 알아차려 천추의 악당을 배제하고 멀리 사명을 달려 써 신기를 전수하여 근본과 기엽을 굳게 하였으니
'天之將興誰能廢之者,' 不信歟.
이른바 하늘이 장차 일어나게 함에 뉘 능히 이것을 폐하리요 라는 말을 어찌 믿지 아니하랴.
然以姨母貽 戎臣構逆强 伺 京闕俱燼乘輿播遷艱否極矣
그러나 고모의 끼친 화근으로 말미암아 융신(강조)이 반역을 꾸미고 강린이 틈을 타게 되매 경궐이 다 재가 되고 승여가 파천하여 간난비운이 극도에 달하였도다.
反正之後和戎結好偃革修文薄賦輕 登崇俊良修政公平
반정한 후에 융장과 화호하여 병혁을 쉬고 문덕을 닦으며 부세를 엷게 하고 요역을 가볍게 하며 준량한 인재를 등용하고 정사를 수행함이 공평하여
民安輯內外底寧農桑屢稔*北{比}之周之成康漢之文景亦無愧矣."
백성을 안도하게 하니 내외가 안정되고 농상이 자주 등풍하여 주의 성왕 강왕과 한의 문제 경제에 비하여도 또한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李齊賢曰: "崔 之言世所謂命也
이제현이 말하기를 [최충의 말은 세상에서 이른바 천명이라 하는 것이다.
句踐嘗膽雪恥會稽小白忘遺患於齊.
구천은 쓸개를 씹어 회계의 치욕을 씻었고 소백은 거의 고난을 잊었기 때문에 화를 제인에게 남기었다.
人君恃有天命縱欲敗度雖得之必失之
인군이 천명만 믿고 욕심을 함부로 하고 법도를 어기면 비록 얻었을지라도 반드시 잃는 것이니
是故君子理思亂安思危愼終如始以對天休如
이러므로 군자는 치세에도 난을 생각하고 평안할 때에도 위태함을 생각하며 끝을 조심함을 처음과 같이하여 천휴를 기다리는 것이니
顯宗所謂吾無*閒然者乎."
현종과 같은 이는 이른바 나는 간연함이 없다하리라]고 하였다.
高麗史127卷-列傳40-叛逆1-康兆
○康兆穆宗時累官中樞使右常侍出爲西北面都巡檢使.
강조는 목종때 여러 관직을 거쳐 중추사 우상시로 있었으며 외직으로 나가 서북면도순검사가 되었다.
穆宗寢疾知金致陽謀變遣皇甫兪義往迎顯宗
목종이 병석에 누워 있으면서 김치양의 반역 음모를 알고 황보유의를 파견하여 현종을 맞아 오게 하고
又知殿中監李周楨附致陽權授西北面都巡檢副使卽日發遣仍徵兆入衛
또 전중감 이주정이 김치양에게 아부하는 것을 알고 임시로 그를 서북면 도순검부사로 임명하여 보내면서 즉일로 강조를 불러 들여 숙위 하도록 하게 했다.
兆聞命行至洞州龍川驛
그래서 강조가 명령을 듣고 출발해서 동주 용천역에 도착했다.
內史主書魏從正安北都護掌書記崔昌曾坐事被黜深怨朝廷常欲構亂二人俱謁兆
이때 어떤 사건에 걸려 좌천되어 조정을 원망하면서 반란을 모의하던 내사주서 위종정과 안북도호장서기 최장 두사람이 강조를 찾아 와서 거짓말로 아뢰었다.
言: "主上疾篤命在頃刻太后與致陽謀奪社稷
"임금의 병세는 위독해서 목숨이 경각에 있다. 태후는 김치양과 함께 사직을 탈취하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는데,
以公在外*(??){手}握重兵恐或不從矯命徵召.
당신이 외방에서 중병을 장악하고 있으므로 혹시 복종치 않을까 염려하여 왕의 명령이라 날조하여 소환한 것이다.
足下當速還本道大擧義兵保國全身時不可失."
족하(足下)는 마땅히 속히 본도(本道)에 돌아가서 크게 의병(義兵)을 들어 나라를 보존하고 일신을 보존하여야 할 것이다. 기회를 잃지 마시오.
兆深然之以爲王已薨朝廷悉被致陽 誤便歸本營.
강조가 그 말을 옳게 여겨 왕이 이미 죽고 조정은 모조리 김치양에 의해 잘못된 것으로 생각하고 본영으로 돌아갔다.
太后忌兆來遣內臣守 嶺使行人
한편 태후는 강조가 오는 것을 꺼려 내신을 파견하여 절령을 수비하고 행인들을 단속케 하였다.
兆父患之爲書納竹杖中令奴剃髮爲僧詭言妙香山僧報兆云:
강조의 부친이 그것을 근심하여 편지를 강조에게 전달하게 하여쓴데 그 편지에 이르길,
"王已賓天姦兇用事可擧兵來以靖國難!"
"왕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간신이 국정을 잡고 있으니 병사를 거느리고 와서 국난을 안정시켜라."라고 하였다.
奴晝夜急走至兆處氣竭而斃.
종[奴]이 주야로 급히 달려 강조(康兆)가 있는 곳에 이르렀으나 기력이 다하여 죽었다.
兆探得杖書愈信王薨
강조가 죽장 속의 편지를 찾아 보고는 더욱 왕이 죽은 것으로 믿었다.
遂與副使吏部侍郞李鉉雲等領甲卒五千至平州知王未薨兆喪氣垂頭
드디어 부사인 이부시랑 이현운 등과 함께 5천을 인솔하고 평주에 와서야 왕이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알고 기가 꺾여 오랫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良久諸將曰: "業已來矣不可止?" 兆曰: "然" 遂決意廢立
이때 여러 장수들이 "이미 왔으니 그칠 수 없지 않습니까?"라고 하니 강조도 "그렇다."하면서 드디어 왕의 폐위를 결심했다.
不知王已迎顯宗乃遣分司監察金應仁率兵往迎
그는 왕이 벌써 현종(顯宗)을 맞으려고 사람을 보낸 것을 모르고 분사 감찰(分司監察) 김응인(金應仁)에게 병정을 거느리고 가서 맞아 오게 하였다.
先奏王曰: "上疾彌留國本未定姦黨窺
또 왕에게 먼저 통고하기를 “상감의 병환은 중한데 후계할 태자를 아직 세우지 않았으니 악당들이 왕위를 엿보고 있는데
又偏信庾行簡等讒諛賞罰不明致此危亂
유행간(庾行簡) 등의 아첨과 참소만을 곧이 듣고 상벌이 공정하지 못하여 이런 위험한 혼란을 초래하였습니다.
今欲定分以係人心除惡以快衆憤已迎大良君
이제 명분(名分)을 바로잡음으로써 민심을 수습하고 악당을 제거하여 뭇사람의 분노를 풀어 주기 위하여 이미 대량군을 맞이하였습니다.
詣闕恐聖情驚動請出御龍興歸法寺卽掃 姦黨然後迎入."
궁중에 들어갈 때 상감을 경동케 할 염려가 있으니 용흥(龍興) 귀법사(歸法寺)로 나가 있으면 즉시 악당들을 숙청한 후 맞아들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王曰: "已知所奏."
왕은 말하기를 “이미 그 말하는 바를 알고 있다”라고 하였다.
是日應仁與兪義到神穴寺奉顯宗還
이날 김응인과 황보유의가 신혈사(神穴寺)에 도착하여 현종을 데리고 돌아왔다.
翼日鉉雲率兵入迎秋門大 穆宗驚懼執行簡送兆所
다음날 이현운이 군사를 데리고 영추문(迎秋門)으로 들어가면서 일제히 떠들어 대니 목종이 놀라고 겁이 나서 유행간을 찾아서 강조에게로 보냈다.
給事中卓思政郞中河拱辰皆奔于兆.
급사중(給事中) 탁사정(卓思政)과 낭중 하공진(河拱辰)은 모두 강조에게로 달아났다.
兆至大初門據胡床崔沆出自省兆起揖
강조는 대초문(大抄門)까지 와서 호상(胡床)에 걸터앉았는데 최항(崔沆)이 성(省)에서 나오니 강조가 일어나 읍(揖)하였다.
沆曰: "古有如此事乎?" 兆不應
최항이 말하기를 “옛날에 이런 일이 있었는가?”라고 했으나 강조는 응대하지 않았다.
於是兵士入穆宗知不免與太后仰天號泣率宮人小竪及蔡忠順劉忠正等出御法王寺.
이때에 병사들이 마구 밀고 들어가니 목종은 폐위를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태후와 함께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면서 궁인, 내수들과 채충순(蔡忠順), 유충정(劉忠正) 등을 데리고 법왕사(法王寺)로 나갔다.
兆坐乾德殿御 下軍士呼萬歲兆驚起 曰: "嗣君未至是何聲耶?"
강조가 건덕전(乾德殿)에서 왕이 앉는 탑(榻) 아래에 앉아 있으니 군사들이 “만세”를 불렀으므로 강조는 놀라 일어나서 무릎을 꿇고 앉으면서 말하기를 “후계 임금이 아직 오지 않았는데 이것이 무슨 소리인가?”라고 하였다.
俄而兪義等奉顯宗而至遂卽位於延寵殿.
그 후 곧 황보유의 등이 현종을 받들고 와서 연총전(延寵殿)에서 즉위하게 하였다.
兆廢穆宗爲讓國公
강조는 목종을 폐위시키고 양국공(讓國公)으로 삼았다.
使閤門通事舍人傅巖等守之遣兵殺致陽父子及行簡等七人
합문 통사 사인(閤門通事舍人) 부암(傅巖) 등을 시켜 궁성을 경비하게 하였고 병사를 파견하여 김치양 부자(父子)와 유행간 등 7명을 죽였다.
流其黨及太后親屬周禎等三十餘人于海島.
그리고 그 도당과 태후의 친속 이주정(李周楨) 등 30여 명을 섬(島)으로 귀양 보냈다.
穆宗使沆請馬於兆送一匹又於人家取一匹穆宗及太后乘之出自宣仁門向忠州行至積城縣
목종이 최항을 시켜서 강조에게 말(馬)을 청구하니 강조가 말 한 필을 보내서 민가에서 또 한 필을 얻어서 목종과 태후가 타고 선인문(宣仁門)으로 나가 충주(忠州)로 향하여 적성현(積城縣)까지 갔다.
兆遣尙藥直長金光甫進毒穆宗不肯飮光甫謂隨從中禁安覇等曰:
그때 강조가 파견한 상약 직장(尙藥直長) 김광보(金光甫)가 목종에게 독약을 주었으나 거절하고 마시지 않았다. 그래서 김광보가 수행원 중금(中禁) 안패(安覇) 등에게 말하기를
"兆言: '若不能進毒可令中禁軍士行大事報以自刃.' 不爾吾與若等俱族矣."
“‘만약 독약을 먹일 수 없거든 중금(中禁) 군사(軍士)를 시켜 큰 일을 수행하여 놓고 자결했다고 보고하라!’고 강조는 말했으니 그렇게 안 하면 나와 너희들은 모두 멸족(滅族) 당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夜覇等弑之以自刎聞取門扇爲棺權于館
그날 밤에 안패 등이 왕을 죽이고 자살했다고 보고하고 문짝으로 관을 짜고 시체를 우선 관(館)에 두었다.
兆使人以縣倉米作飯祭之.
강조는 사람을 시켜 겨우 현(縣) 창고 쌀로 밥을 지어서 제사 지내게 하였다.
顯宗以兆爲中臺使鉉雲爲副使
현종이 강조를 중대사(中臺使)로, 이현운을 그 부사(副使)로 임명하였으며
尋授兆吏部尙書 知政事.
그 후 얼마 안 가서 강조에게 이부 상서 참지정사(吏部尙書參知政事) 벼슬을 주었다.
元年五月契丹主以兆弑君欲發兵問罪
원년 5월에 거란(契丹)의 임금이 강조가 임금을 죽였다는 이유로 군대를 보내 문죄(問罪)하려 하였다.
王聞之以兆爲行營都統使鉉雲及兵部侍郞張延祐副之起居舍人郭元侍御史尹徵古都官員外郞盧 爲判官
왕이 그 소문을 듣고 강조를 행영 도통사(行營都統使)로, 이현운과 병부시랑 장연우(張延祐)를 행영 도통 부사(副使)로, 기거사인(起居舍人) 곽원시(郭元侍), 어사(御史) 윤징고(尹徵古)와 도관 원외랑(都官員外郞) 노전을 판관(判官)으로,
右拾遺乘里仁西京掌書記崔 爲修製官檢校尙書右僕射上將軍安紹光爲行營都兵馬使御史中丞盧 副之
우습유(右拾遺) 승리인(承里仁)과 서경 장서기(西京掌書記) 최충병을 수제관(修製官)으로, 검교 상서 우복야 상장군(檢校尙書右僕射上將軍) 안소광을 행영 도병마사(行營都兵馬使)로, 어사 중승(御史中丞) 노정을 그 부사(副使)로,
兵部郞中金爵賢及皇甫兪義爲判官少府監崔賢敏爲左軍兵馬使少府少監崔輔成副之
병부 낭중(兵部郞中) 김작현(金爵賢)과 황보유의(皇甫兪義)를 판관(判官)으로, 소부감(少府監) 최현민(崔賢敏)을 좌군 병마사(左軍兵馬使)로, 소부소감(少府少監) 최보성(崔輔成)을 그 부사로,
興威衛錄事高幹*大樂丞金在鎔爲判官刑部侍郞李昉爲右軍兵馬使刑部郞中金丁夢副之
흥위위 녹사(興威衛錄事) 고간(高幹)과 대악승(大樂丞) 김재용(金在鎔)을 그 판관으로, 형부 시랑(刑部侍郞) 이방(李昉)을 우군 병마사(右軍兵馬使)로, 형부 낭중(刑部郞中) 김정몽(金丁夢)을 그 부사로,
內謁者柳莊爲判官禮賓卿朴忠淑爲中軍兵馬使禮賓少卿李良弼副之
내알자(內謁者) 유장(柳莊)을 그 판관으로, 예빈경(禮賓卿) 박충숙(朴忠淑)을 중군 병마사(中軍兵馬使)로, 예빈소경(禮賓少卿) 이양필(李良弼)을 그 부사로,
尙書都事高延慶司宰注簿庾伯符爲判官刑部尙書崔士威爲統軍使戶部侍郞宋隣副之
상서 도사(尙書都事) 고연경(高延慶)과, 사재주부(司宰注簿) 유백부(庾伯符)를 그 판관으로, 형부상서(刑部尙書), 최사위(崔士威)를 통군사(統軍使)로, 호부 시랑(戶部侍郞) 송린(宋隣)을 그 부사로,
左司員外郞皇甫申試兵部員外郞元穎爲判官率兵三十萬軍于通州以備之.
좌사 원외랑(左司員外郞) 황보신시(皇甫申試)와 병부 원외랑(兵部員外郞) 원영(元穎)을 그 판관으로 임명하여 30만 병력을 통솔하고 통주(通州)에서 방어케 하였다.
十一月契丹主自將步騎四十萬號義軍天兵渡鴨綠江圍興化鎭
거란의 군주가 친히 기병과 보병 40만을 거느리고 의군천병(義軍天兵)이라 칭하며 압록강을 건너 흥화진(興化鎭)을 포위하였다.
兆引兵出通州城南分軍爲三隔水而陣
강조가 병령을 이동시켜 통주 성(通州城) 남녘으로 나가서 전군을 삼분(三分)해서 강을 격해 진을 쳤는바
一營于州西據三水之會兆居其中一營于近州之山一附城而營
하나는 통주 서방에 집결하여 삼수(三水)의 요소(要所)에 거점(據点)을 두고 강조가 그곳에 있었으며 또 하나는 통주 근방 산에 진 치고 마지막 하나는 통주 성을 의지하여 배치하였다.
兆以劒車排陣契丹兵入則劒車合攻之無不 靡契丹兵屢却兆遂有輕敵之心與人彈 .
그리고 검차(劒車)를 배열했다가 거란병이 들어오면 검차들이 일제히 공격하니 적병은 걸음마다 좌절되었다. 이렇게 거란병을 누차 물리치니 강조에게는 드디어 적을 경시하는 마음이 생겨 사람을 데리고 바둑을 두었다.
契丹先鋒耶律盆奴率詳穩耶律敵魯擊破三水砦鎭主告契丹兵至
거란의 선봉 야율분노(耶律盆奴)가 상온(詳穩) 야율적로(耶律敵魯)를 데리고 삼수의 보루를 공격하였으므로 그 진주(鎭主)가 거란병의 내습을 급보했으나
兆不信曰: "如口中之食少則不可宜使多入!" 再告曰: "契丹兵已多入." 兆驚起曰: "信乎?"
강조는 곧이 듣지 않고 말하기를 “입안의 음식과 같다. 적으면 안 되니 많이 들어오게 하라!”라고 하였다. 이어 또 급보하기를 “거란병이 이미 많이 들어왔다”라고 하니 강조는 놀라서 “정말인가?”라고 하면서 일어섰는데
恍惚若見穆宗立于其後叱之曰: "汝奴休矣天伐 可逃耶?" 兆卽脫 牟長 曰: "死罪死罪."
이때 강조는 정신이 황홀(恍惚)해져 목종이 눈에 어리더니 이어 후면에서 목종이 “네 놈도 그만이다. 천벌을 면할 수 있느냐?”고 꾸짖는 말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그만 투구를 벗고 펄썩 꿇어앉았다. 그리고는 “죽을 죄를 졌습니다”고 하였는데
言未訖契丹兵已至縛兆 以氈載之而去鉉雲亦被執.
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거란병이 닥쳐 와서 강조를 결박하여 전(氈)으로 싸서 메고 갔다. 이현운도 역시 포로되었다.
契丹主解兆縛問曰: "汝爲我臣乎?" 對曰: "我是高麗人何更爲汝臣乎?"
거란의 군주(君主)가 강조의 포박을 풀어 주고 묻기를 “나의 신하가 되겠는가?”라고 하니 강조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나는 고려 사람인데 어찌 너의 신하로 고쳐 될 수 있는가!”라고 하였다.
再問對如初又而問對亦如初問
또다시 물어도 그 대답이 여전하였다. 또 칼로 살을 베어 내면서 물어도 대답은 역시 처음과 같았다.
鉉雲對曰: "兩眼已瞻新日月一心何憶舊山川."
그런데 이현운에게 물으니 이현운은 대답하여 이르기를 “두 눈으로 이미 새 일월을 보았거니 어찌 한 마음으로 옛산천만을 생각하랴! (兩眼已瞻新日月, 一心何憶舊山川)”라고 하였으므로
兆怒蹴鉉雲曰: "汝是高麗人何有此言?" 契丹遂誅兆.
강조가 노하여 발길로 이현운을 걷어 차면서 “너는 고려 사람인데 어째서 이런 말을 하는가?”라고 하였다. 거란은 드디어 강조를 죽였다.
첫댓글 같은분의 자료입니다 역사서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이니 계보도와 비교하면서 사실과 드라마상의 전개에 대해 공부하시면서 보세요....머리 아프시면 그냥 드라마만 보셔도 좋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