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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도(竹刀)는 흔한 섬이다. 인터넷에서 죽도를 치면 경북, 충남, 경남, 전남 등지에 6곳의 섬이 등장한다. 이중 맨 상단에 올라 있는 섬이 충남 보령시 남포면에 있는 죽도다. 참 작은 섬이다. 면적이 고작 0.06㎢ 밖에 안된다.
섬 전체에 올곧은 대나무가 울창해 죽도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변했다. 대나무가 숨은 건지 보이지 않는다, 이젠 죽도보다 섬을 정원으로 만든 상화원(尙花園)이 더 유명하다. 하긴 지금은 연육교가 생기면서 섬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하다.
상화원은 '조화를 숭상한다(崇尙)'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여기서 조화는 자연과 자연, 자연과 공간의 조화다. 물과 나무와 바람과 하나가 되고 돌담과 회랑, 전통 한옥과 빌라 등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 그래서 볼거리가 많다,
섬을 걷다보면 하늘높이 늠름한 해송의 숲, 돌담과 회랑, 해변연못, 그리고 복원하는데 만 20년이 걸렸다는 한옥마을 등이 산책의 즐거움을 만끽하게 한다. 무엇보다 석양정원에서 바라본 햇볕에 반짝이는 가을바다의 은빛 물비늘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 지극히 단순한 조형미를 바라보면 시간이 정지된다. 그래서 상화원을 품고있는 죽도는 작지만 존재감이 큰 섬이다.
상화원은 시계반대 방향으로 돌게 돼있다. 제대로 된 순서다. 섬 전체를 둘러싼 2km 산책길에 지붕형 '회랑'이 있어 눈비가 내려도 해변 일주를 하는 데 불편이 없다.
처음엔 밋밋한 풍경이 걸을수록 시청각적으로 감흥을 일으킨다. 해송과 죽림에 둘러싸인 사이사이로 서해 바다가 시원하게 펼쳐지고 바위에 부서지는 파도 소리가 경쾌하다.
회랑 산책길의 중간에 위치한 '석양정원'은 마음을 움직이는 '포토존'이다. 오전보다 해가 중천에 뜬 오후가 좋다. 양떼구름사이로 햇살이 직각으로 쏟아지는 가을바다는 온통 눈부신 은빛 물비늘처럼 빛을 발하면서 황홀한 풍경을 연출한다. 한동안 눈을 뗄 수 없다. 어디선가 가벼운 탄성이 터진다.
태양이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면 피빛보다 붉고 진한 저녁노을을 감상할 수 있을 터다.
석양정원을 벗어나면 천년세월의 지혜가 깃든 한옥이 서해바다를 향해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원래부터 이곳에 터를 잡고 있던 한옥이 아니다. 요즘은 수백년된 한옥을 이전해 테마관광지를 만드는 것이 트랜드다.
전북 완주의 '아원고택'처럼 지난 십여 년간 전남 고청, 충남 청양과 홍성등 전국 각지의 보존 가치가 있는 한옥을 이 곳으로 이전해 복원했다.
사대부가의 품격있고 고풍스런 한옥은 물론 평민 가옥과 관리들이 사용하던 동헌과 객사를 계단식으로 아늑하게 배치했다. 또 안채에서 문간채, 행랑채, 정자까지 한옥의 다양한 형태를 볼 수 있다. 사대부집 문간채 마루에 걸터앉으면 멀리 무창포 해변이 보인다.
한옥마을 아래엔 푸른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정자와 온갖 수생물이 숨 쉬는 연못, 그리고 주변
해송들이 한데 어우러져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런 곳에선 '한옥스테이'를 하며 하룻밤 머물고 싶다.
우수수 쏟아질 별빛을 보고, 바닷바람이 퍼트린 솔 내음도 맡고, 파도소리를 들으며 잠을 청한다면 몸도, 마음도 개운할 것이다.
상화원측은 "지난 20여 년간 한국식 정원에 대한 밑그림을 그려오면서 가능한 한 아름다운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나무 한 그루, 돌 한 조각까지 소중히 여기는 마음으로 조성했다"고 소개했다.
하지만 자연을 그대로 간직하면서 훌륭한 정원이 만들긴 어렵다. 전남 담양 소쇄원이나 보길도 고산원림도 자연친화적인 정원이지만 인공적인 요소가 가미됐다.
상화원은 길고 긴 회랑과 33개의 연못, 한옥마을을 만들면서 사람의 손길이 유독 많이 간 정원이지만 나름 개성 있고 독특한 풍광으로 눈이 호강하는 섬이다.
다만 아쉬운 점도 눈에 들어왔다. 회랑 주변과 바닷가의 조잡한 조형물은 도대체 왜 설치했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멀쩡한 자연경관만 해치고 있다. 회랑 일부 구간의 그림전시도 산만해 보인다. 상화원은 있는 그대로의 자연만 보여줘도 힐링이 되는 곳이다. 굳이 인위적인 설정으로 격을 떨어트릴 이유가 없다.
산책을 끝내고 나가는 길에 뒤돌아보니 해송숲 아래 작은 꽃무릇 군락이 보였다. 늦은 오후 해송사이로 부드러운 햇살이 조명처럼 비추자 꽃무릇의 고운 때깔에 생기가 감돌았다. 꽃이 자꾸 붙잡는 느낌을 떨치고 다시 먼 길을 향해 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