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일본으로 선교를 위해 떠났던 페레이라 신부에 대한 보고서가 로마 바티칸에 전달된다.
30년 가까이 카톨릭 신부로서 일본에서 선교에 힘쓰던 사람이 배교해서 일본에서 여자와 살고 있으며 현재 세속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는 보고서다.
로마와 포르투칼에서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면서 그 신부의 제자들3명이 일본을 향해서 출항한다. 그 진실을 알고 싶고 또 유럽과 서양의 자존심과 그 존재 가치를 회복하고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로드리고를 비롯한 3명의 신부가 나가사끼에 도착하기 위해서 포르투칼을 출발 희망봉을 거쳐 마카오로 진출 거기서 힘들게 일본으로 도항한다.
일본은 카톨릭교를 처음에는 수락을 했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덕천은 인정하지 않고 믿는 사람들을 처형한다. 일본 사람들과 함께 많은 카톨릭 신부들은 목숨을 잃어간다. 특히 신부를 죽여서 그 뿌리를 제거하면 그 줄기나 잎은 자연히 죽을 것이라면서 일본의 늪은 그 그리스도교의 뿌리가 살아나가기 힘든 장소로 묘사한다.
로드리고의 각고의 노력으로 배교하지 않고 오로지 주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는 그 피땀을 느끼면서 유다가 자신을 배반하는 그 모습까지도 마음속에 그리면서 그와 비슷한 경험을 자신이 가지게 된다. 믿는 일본 사람들은 배교하지 않으면 바다 가운데 나무를 세우고 꽁꽁 묶어서 파도가 들고 나면서 그 사람은 자연히 생명을 잃어간다. 그리고 구멍에 거꾸로 매달리게 해서 서서히 죽어나가게 하면서 또 더운 물로서 바가지에 구멍을 뚫어 물을 서서히 적시면서 고문을 한다. 배교를 강요하면서...
결국은 그의 스승을 만나 대면하면서 그는 자연히 마음이 누그러져서 예수가 그려진 성화를 밟게된다.
그 순간까지 심리묘사가 너무나 진솔하고 뛰어나다. 마치 하나도 믿음이 없는 사람처럼 그려져서 예수를 배반하게 되는 순간 이렇게 말을 하는 예수를 느낀다.
" 밟아도 좋다 네발은 지금 아플것이다.오늘까지 내 얼굴을 밟았던 인간들과 똑 같이 아플거이다. 하지만 그 발의 아픔만으로 이제는 충분하다. 나는 너희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겠다. 그것 때문에 내가 존재하니까"
" 주여 당신이 어넺나 침묵하고 계시는 것을 원망하고 있었습니다."
" 나는 침묵하고 있었던 게 아니다. 함께 고통을 나누고 있었을 뿐"
그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그들을 배반했을지 모르나 결코 그분을 배반하지는 않았다.지금까지와는 아주 다른 형태로 그분을 사랑하고 있다. 내가 그 사랑을 알기위해서 오늘까지의 모든 시련이 필요했던 것이다. 나는 이 나라에서 아직도 최후의 카톨릭 신부이다. 그리고 그 분은 결코 침묵하고 있었던 게 아니다. 비록 그분이 침묵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나의 오늘까지의 인생은 그분과 함께있었다.그분의 말씀을 , 그분의 행위를 따르며 배우며 그리고 말하고 있었다.
이 종교 소설은 아주 진실하게 인간의 심리를 극한 환경속에서 아주 잘 묘사하고 있다.
신도들을 위해서 신도의 목숨을 위해서 예수가 그려진 성화를 밟으면 살릴 수 있는데 그것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자신이 믿고 있는 종교를 위해서 신도의 목숨을 희생하는가 ! 아니면 배교해서 신도의 목숨을 살릴 것인가 ! 양단기로에 놓인 결정이 그 신부의 목을 조르고 있다.
종교란 무엇인가 생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