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 고개로 나를 넘겨 주게.'로 시작되는 정선아라리(정선아리랑). 오랜 세월에 걸쳐서 만들어진 그 정선아라리의 원류를 찾아서 정선(旌善)으로 여행을 떠나는 날이다. 낯선 곳으로 떠나는 여행은 언제나 설레임과 기대감으로 가벼운 흥분마저 느끼게 한다. 차창밖으로 끊임없이 스치고 지나가는 높고 낮은 산과 산줄기 사이를 가르는 계곡, 산자락을 구비구비 돌아서 흐르는 시내와 강, 추수를 마친 텅빈 들판, 양지바른 곳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작은 마을이 정겹다.
조양강(朝陽江) 강가에 자리잡은 정선 재래시장으로 들어서니 마침 장날이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전국 최대규모의 민속장이라는 정선 오일장을 보게 된 것은 행운이다. 재래시장터 길 양쪽으로 빈틈없이 들어찬 노점과 좌판마다 정선의 토산물인 각종 농산물과 한약재들이 풍성하게 쌓여 있다. 생활용품과 농기구, 건어물 좌판도 보이고..... 찐빵과 옥수수를 쪄서 파는 좌판에서는 구수한 냄새와 함께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다. 노점들 사이로 시장을 보러온 사람들의 행렬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주로 관광객들이 대부분인 듯하다. 나도 사람들의 행렬속으로 들어가 흥겨운 마음으로 장터축제에 참가한다.
할머니가 메밀전병과 밀가루 부치기(부침개, 전), 옥수수술을 파는 좌판 앞에서 발걸음을 멈춘다. 좌판 주위로 사람들이 빙 둘러서서 전병과 부치기를 맛있게 먹고 있다. 참새가 어디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있으랴! 나도 자리 한구석을 차지하고 앉은 채 메밀전병과 김치부치기를 안주삼아 옥수수막걸리 한사발을 들이킨다. 막걸리의 특유한 맛이 목줄기를 타고 전해진다. 막걸리는 왁자지껄한 이런 시장터에서 마셔야 제맛이 나는 법이다. 꼭 맛보고 싶었던 수수노치라는 음식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
시장터를 돌다가 순대국밥집이 눈에 들어온다. 안으로 들어가자 손님들로 이미 만원이다. 조금 기다리니 탁자 하나가 난다. 돼지머리고기와 순대 한 접시를 놓고 옥수수술을 마시기로 한다. 이집에서 직접 담갔다는 술이라는데 가히 그 맛이 일품이다. 콧등치기국수라는 처음 들어보는 메뉴가 있기에 주문을 하니 오늘은 바빠서 안된다고 한다. 여행을 할 때 그 지방의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곳에서만 맛볼 수 있는 향토음식을 먹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기본적이고도 중요한 먹거리문화야말로 모든 문화의 기본인 까닭이다.
어린 시절 나의 고향에서도 오일장이 섰었다. 오일장터는 시골사람들이 토산물을 내다팔거나 필요한 물건들을 사는 교역의 장이었으며, 이 고을 저 고을 사람들이 서로 소식을 주고받던 만남과 정보교류의 장이었다. 장터를 구경하다가 어머니가 국화빵이나 순대국밥을 사주기라도 하는 날은 운수대통한 날이었다. 어머니는 가끔 눈깔사탕을 사주기도 하셨다. 눈깔사탕을 입에 넣고 한쪽 볼이 툭 불어나도록 물고 있으면 만족감에 마음이 다 흐믓해지곤 했다. 유년의 추억을 막걸리 잔에 띄워 넘긴다.
정선 오일장은 2와 7이 들어가는 날에 선다. 애초에는 다른 지방의 오일장과 마찬가지로 규모가 작았으나 정선군이 철도와 연계하여 '정선오일장관광열차'를 운행하게 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관광열차를 이용하면 정선의 여러 관광지와 오일장터를 두루 돌아볼 수 있다. 오늘 장터에는 도처에서 몰려든 관광객들이 주를 이루고 있어서 옛날 시골장터의 모습을 많이 잃은 것이 좀 아쉽다. 특히 요즘은 각 지방자치단체들이 경제발전과 경기진작을 목적으로 행사나 축제를 벌이고 있어 볼거리와 재미가 반감되고 있다. 그래서 전국적으로 축제는 많으나 볼 만한 것은 별로 없다.
*정선 재래시장 문화마당에서 정선아라리를 공연하고 있는 정선아라리전수회원들 *정선아라리 가락에 맞춰 춤을 추는 사람들
재래시장터 문화마당에서는 정선아라리전수회원들이 정선아라리 공연을 펼치고 있다. 정선아라리의 구성진 가락이 스피커를 타고 장터마당에 울려 퍼진다. 공연을 보다가 흥이 나는 사람들은 앞으로 나와 덩실덩실 춤을 춘다. 장터마당은 공연에 참가한 모든 사람들의 흥겨운 마당놀이 축제판으로 변한다. 북을 잡은 회원의 북사위에 신명이 실려 있다. 악기라고는 장구와 북, 밥상, 항아리에 물을 채우고 바가지를 엎어서 띄운 것, 소 구영(여물통, 구유)이 전부다. 북과 장구를 제외하고는 일상생활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그릇이나 기구들을 악기로 사용하고 있다.
정선아라리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져 있고 또 가장 많이 불리는 것은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질라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로 시작되는 노래다. 오늘 전수회원들이 들려주는 정선아라리의 가사를 가만히 들어보니 '긴 아라리'와 '엮음 아라리'로 보인다. 두 아라리의 가사는 매우 긴 것이 특징이다. 긴 아라리는 정선의 첩첩산중의 산세를 떠올리며 소리를 길게 끌어가면서 구성지게 불러야 한다. 아라리를 부르다가 가사가 막히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를 부른다. 정선아라리에서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는 서양음악의 후렴과는 달리 덧붙임 소리다. 엮음 아라리는 서양음악의 랩처럼 빠르게 부른다. 되도록 호흡을 멈추지 않고 한번에 계속 이어서 부르는데, 마지막 두 소절의 가사는 긴 아라리 가락으로 불러야 한다. 긴 아라리 가사를 들어보자.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아리랑 고개 고개로 나를 넘겨 주게//
출전:'함께하는 아리랑'(1999, 정선아리랑학교)
가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정선아라리는 결코 흥겹고 신나는 노래가 아니다. 심심 두메산골의 고달프고 힘든 삶을 이어가야 했던 정선사람들은 풍자와 해학을 실은 아라리가락에 삶의 애환을 달래면서 살아왔다. 그러기에 정선아라리는 기본적으로 한(恨)의 노래라고 볼 수 있다. 거기에는 남녀간의 사랑과 이별 그리고 그리움, 남편에 대한 원망, 시집살이의 서러움, 고부간의 갈등, 두메산골의 고달픈 삶, 떼꾼들의 고단함 등 민중들의 한과 애환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또한 일제강점기의 나라를 잃은 민족의 설움과 울분, 한국전쟁과 민족분단의 비극으로 인한 상처와 고통, 통일에 대한 간절한 염원과 같은 시대를 넘나드는 내용도 같은 노래에 들어 있다. 이것은 정선아라리가 어느 한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그 시대상을 반영하는 사연들이 계속 첨가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정선아라리는 정선을 중심으로 강원도와 경북 북부, 충북, 경기도 동부에서 오래 전부터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온 민요로 그 기원은 여말선초(麗末鮮初)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가 망하자 조선에 대한 충성을 거부한 선비들 중 일곱 사람이 정선 그러니까 지금의 남면 거칠현동(居七賢洞)으로 숨어 들어오게 된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들은 고려왕조에 대한 지조와 지난 날의 회상, 그리고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한시율창(漢詩律唱)에 담아 부르곤 했다. 몰락한 고려유민들이었기에 그들의 시는 비통하면서도 한이 맺혔을 것이고, 율창의 가락은 슬프고도 구성졌을 것이다. 이들의 시는 마을사람들이 부르던 소리에 실리면서 그 애절함을 더해갔다. 정선아리랑이 '‘아리랑' 또는 '아라리'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조선후기 이후부터이다.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하면서 대량의 목재가 필요해지자 원목을 운반하던 정선의 뗏목꾼들에 의해 아리랑은 전국적으로 널리 퍼져나가게 된다. 이때 정선의 소리에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라는 가사가 덧붙임 소리로 자리잡게 되면서 '아라리' 또는 '정선아리랑'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오늘날 정선아라리는 강원도의 대표적인 문화유산(1971년 12월 16일 강원도 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일 뿐만 아니라 한국의 수많은 아리랑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아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정선아라리는 오랜 세월을 두고 정선에서 다른 지방으로 출가한 남녀나 떼꾼, 소리꾼, 여러 지방을 떠돌면서 장사를 하던 장돌뱅이, 화전민 등과 같은 사람들에 의해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가 그곳의 문화적인 특성이 더해진 또 다른 이름의 수많은 아리랑을 생겨나게 했다. 특히 정선의 아우라지에서 출발해서 영월과 단양, 충주를 거쳐 광나루와 마포나루에 이르는 뗏목의 이동로였던 남한강(南漢江)은 정성아라리가 전국적으로 퍼져 나가는데 크나큰 역할을 했다. 장장 보름동안이나 천이백 리 남한강 물길을 따라 뗏목을 저어가야만 했던 뗏군들은 무료함을 달래거나 떼몰이의 고달픔을 잊으려고 정선아라리를 불렀으며, 지친 몸을 쉬기 위해 뗏목을 댄 강가의 주막에 들러 걸판진 술판을 벌일 때마다 부르던 소리도 정선아라리였다. 정선아라리는 그렇게 남한강 물길을 따라서 퍼져나가 남으로는 경북 구미의 '구미아리랑'에 반영되기도 했으며, 북으로는 만주 흑룡강성의 '아리랑련곡'의 밑바탕이 되기도 하였다.
정선아라리를 누구나 쉽게 부를 수 있었던 것은 이 노래가 두 줄짜리의 짧은 형식을 가진 가사 중심의 노래였기 때문이다. 즉 이 노래는 음폭의 높낮이가 크지 않고 가락이 길게 늘어지면서 단조롭기에 형식과 내용에 구애받지 않고 즉흥적으로 노랫말을 지어 붙여서 부르면 된다. 정선아라리는 아무 말이나 찍어다 붙이면 되는 노래다. 그래서 정선사람은 저마다 자신만의 정선아라리를 갖고 있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지금까지 채록된 가사만 해도 천오백여 수에 이른다는 사실에서 정선아라리는 정선사람들의 삶 자체였음을 알 수 있다. 그 노랫말 하나하나에는 시대와 공간을 달리한 정선사람들의 서로 다른 정서와 삶의 흔적이 담겨져 있다. 하나의 민요에 이렇게 가사가 많은 것은 전세계적으로도 그 유래가 없다. 그것은 바이블이 형성된 역사와 마찬가지로 정선아라리가 민중에 의한, 민중을 위한, 민중의 노래였음을 말해준다.
정선아라리전수회원들의 공연이 끝나자 관중들의 박수가 쏟아진다. 오늘 공연은 전문적인 국악가수가 부르는 노래에서 찾기 어려운 정선아라리의 원형과 토속적 정서가 살아 있어서 좋았다. 정선에서도 더 깊은 산골의 할머니나 할아버지에게 이 노래를 들었다면 느낌이 더 좋았을 것이다. 정선아라리의 여운을 따라서 아우라지로 가는 길에 오른다.
*정선군 북면 여량리에 있는 아우라지 *아우라지에서 합류하는 골지천(骨只川)과 송천(松川) *송천(구절천, 九切川이라고도 함) *아우라지 나룻배
정선읍에서 조양강을 따라서 가다가 보면 북평면 나전과 임계면 임계 중간쯤에 산간의 강마을인 북면 여량리(餘糧里)가 나온다. 첩첩산중 뿐인 정선에서도 이곳은 비록 하늘만 빠꼼히 보이지만 그래도 들을 가지고 있어서 양식이 남아돈다는 뜻의 여량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아우라지는 바로 이 북면 여량리에 있다. 아우라지는 태백의 금대봉 기슭 검룡소에서 발원한 골지천과 평창의 황병산에서 발원한 송천이 합류하는 물목이다. 송천천과 골지천이 이곳에서 합류하여 흐르다가 오대산 우통수에서 발원한 오대천(五臺川)이 북평면 나전리에서 합류하여 조양강이 되면서 남한강은 비로소 강다운 모습을 갖춘다. 조양강은 영월로 흘러들어가 동강(東江)이 되고 단양, 충주를 지나면서 마침내 남한강이 된다. 아우라지는 두 물줄기가 합쳐서 어우러지는 곳이라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풍수지리에서 송천은 양수, 골지천은 음수에 해당되는데, 여름 장마철에 양수가 많으면 대홍수가 나고 음수가 많으면 장마가 그친다는 옛말이 전해진다.
골지천과 송천이 만나는 양지바른 산기슭에는 여송정(餘松亭)이라는 이름의 정자가 세워져 있다. 여송정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아우라지 처녀상은 슬픈 사연을 간직한 채 푸르른 강물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다. 전에 왔을 때는 송천에 섶다리가 놓여져 있어 정자로 건너갈 수 있었는데 지금은 사라지고 흔적도 없다. 아마 지난 여름 큰 장마가 졌을 때 떠내려간 모양이다. 징검다리가 있었지만 유속이 빠른 곳에 있던 바위가 떠내려가 버려서 건널 수가 없다. 상류에서 떠내려와 강변에 쌓여 있는 커다란 바위와 돌들을 보니 지난 여름에 얼마나 큰 장마가 졌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옛날부터 있던 아우라지의 나룻배는 지금도 여전히 사람들을 태우고 강을 오고간다. 다만 요즘은 삿대를 쓰지 않고 강의 양쪽에 고정시킨 쇠줄을 잡아당겨서 오가고 있다.
여송정 뒤에는 아름드리 소나무숲이 있는데, 그 아래에는 정선아라리의 발상지를 기리기 위한 아우라지비가 세워져 있다. 빗돌에는 아우라지 처녀의 애닯은 사연이 서려 있는 아라리 노랫말이 새겨져 있다. 기억을 더듬어 노랫말을 떠올려 본다. 아라리 노래가락의 처연한 노랫말이 심금을 울린다.
아우라지 뱃사공아 나 좀 건네주오
아우라지 처녀 총각의 슬프고도 안타까운 사연..... 1910년대라던가..... 아우라지를 사이에 두고 여량리에 사는 처녀와 구절리(혹은 유천리)에 사는 총각이 서로 사랑을 했다. 그들은 남몰래 싸리골에서 만나 사랑을 나누곤 했다. 이런 사실을 아는 이는 뱃사공 지서방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들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싸리골에 올동백을 따러 가기로 했다. 그런데 밤 사이에 내린 소나기로 인해 물이 크게 불어나서 그만 배가 떠내려가 버리고 말았다. 이튿날 강가로 나온 처녀 총각은 그저 서로 안타까운 눈길만 주고받으며 애만 태웠다. 그런 일이 있고나서 무슨 까닭인지 두 사람의 사랑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 후 소리를 잘했던 뱃사공이 노를 저으며 두 사람의 애닯은 사연을 구성진 아라리 가락에 실어서 부른 것이 바로 이 노래였다. 그리고 올동백을 따러가기로 했던 처녀가 바로 저 아우라지 처녀상의 주인공이다.
아우라지에는 처녀 총각을 태워주던 뱃사공도, 뗏목을 몰던 뗏군도 흔적조차 없고 슬픈 정선아라리 가락의 여운만이 감돌고 있다. 수많은 정선사람들의 사연을 담고 또 담았을 세월의 강은 애틋한 전설만을 남기고 무심히 흘러흘러만 간다.
아우라지를 나와 송천을 거슬러 전설속의 총각이 살았다는 구절리로 향한다. 상류로 올라갈수록 첩첩산중이다. 깊고 긴 협곡을 따라 아우라지에서 구절리를 잇는 협궤철로가 놓여져 있다. 몇년 전부터 승객이 없어서 기차는 끊어지고 관광객들이 레일바이크를 타는 관광코스로 변했다. 아우라지 처녀 총각이 사랑을 나누었다던 싸리골은 저 심심산골 어디메쯤 있으리라. *오장산 기슭에 있는 오장폭포(五藏瀑布) *좀더 가까이서 본 오장폭포
구절리를 지난다. 구절리는 이곳에서 캐낸 석탄을 실어내기 위해 놓여진 협궤철도인 정선선의 종점이다. 노추산(魯鄒山, 1,322m) 남서쪽 산줄기인 오장산(733m) 기슭에 이르면 오장폭포를 만난다. 인공폭포인 이 폭포의 물줄기는 경사길이 209m, 수직높이 127m의 까마득한 낭떠러지를 타고 송천으로 떨어진다. 수량이 많을 때는 가파른 암벽을 타고 떨어지는 낙차가 큰 물줄기의 장관을 볼 수 있다고 하던데, 오늘은 한동안 비가 오지 않은 탓인지 물줄기가 가늘다. 초여름에는 폭포주위의 구절천변에 철쭉이 만발하여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고 한다.
구절천을 따라서 송량동을 지나 강릉시 왕산면쪽 계곡으로 더 들어가보고 싶었지만 도로사정이 좋지 않아 차를 돌려 구절리로 도로 내려가기로 한다. 지난 여름 큰 장마로 파손된 도로가 아직도 그대로 방치되어 있는 곳이 많다. 도로 곳곳에는 보수공사가 한창이다. *구절리역의 정선아라리 유람열차 *구절리역 플랫폼에 있는 '여치의 꿈'이라는 이름의 열차카페
구절리로 내려오니 해는 벌써 서산에 기울고 있다. 산골의 해는 다른 곳보다 더 일찍 진다. 구절리는 앞을 봐도 산뿐이요, 뒤를 봐도 산뿐이다. 오로지 위로 하늘만 빠꼼히 뚫려 있다. 구절리는 상원산(上院山, 1,421m)과 다락산(1018m), 오장산, 노추산, 왕재산(997m)이 사방을 둘러싼 그야말로 산간오지에 자리잡고 있다.
구절리역에는 관광객들을 태우고 아우라지역까지 7.2km를 오가는 정선아라리 유람열차가 들어와 있다. 철로자전거 즉 레일바이크를 탄 한 무리의 관광객들이 막 구절리역을 출발해서 아우라지역을 향해 페달을 밟는다. 20리가 조금 안되는 철길을 네 개의 바퀴가 달린 레일바이크를 타고 송천계곡의 아름다운 풍광을 감상하면서 달려보는 것도 멋진 추억이 될 것 같다. 레일바이크를 한번 타보려고 직원에게 물어보니 주말이나 휴가철에는 한달쯤 전에 미리 예약을 해야만 탈 수 있다고 한다. 플랫폼에는 '여치의 꿈'이라는 열차카페가 있는데, 그 모양이 꼭 여치의 모습을 닮았다.
정선아라리 유람열차가 아우라지역을 향해서 떠나는 것을 보고 구절리를 떠난다. 오늘 여행의 마지막 목적지는 임계면 가목리에 있다는 '메주와 첼리스트'라는 된장공장이다. 여량에서 42번 국도를 따라 임계방면으로 가려면 왕치산(900m)의 작은너그재(645m)와 큰너그재(760m)를 넘어야 한다. 두 너그재를 넘으면 곧 임계면이다. 임계사거리에서 백봉령쪽으로 가다가 가목리로 들어가는 길로 우회전한다. 우회전한 뒤 그 길을 죽 따라서 올라가자 바로 길가에 된장공장이 나타난다. *된장항아리들 *된장공장 앞에 있는 잣나무숲 *잣나무숲의 일몰
메주와 첼리스트 된장공장에 도착하니 서산에 해가 반팔길이 정도 남아 있다. 서녘하늘이 서서히 붉게 물들기 시작한다. 된장공장에 가려는 사람들은 거기에 무언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버리고 가는 것이 좋다.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다. 다만 된장공장과 판매장만 있을 뿐..... 나는 본래 이런 곳을 찾아다니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돈연이라는 스님이 명문대학교 음대 출신의 도완녀라는 여류 첼리스트를 만나 파계하고 결혼을 한 뒤 된장공장을 차렸다는 사실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나는 된장공장 마당 건너편에 있는 잣나무숲이 마음에 든다. 잣나무숲으로 들어가자 청청한 기운이 온몸으로 전해진다. 고요가 감도는 숲속에서 석양을 받아서 생긴 빛과 그리고 그림자에 마음을 빼앗긴다. 서녘으로 점점 기울어지던 태양이 마침내 된장공장 건물 처마끝으로 진다.
밤이 되면 둥지를 찾아서 날아가는 새들처럼 이제는 정선을 떠나야 할 시간이다. 정선아라리 가락의 여운을 가슴에 안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오른다.
2006년 11월 12일 |
출처: 댓잎에 스치는 바람 원문보기 글쓴이: 林 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