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과학계는 우울한 소식으로 시작했다. 황우석 전 서울대 교수의 줄기세포 연구 성과가 가짜라는 사실이 최종 확인되면서 한국 과학계의 신뢰에 찬물을 끼얹은 것이다. 그러나 재미동포로 미국 과학계에 우뚝 선 서남표 MIT대 교수가 7월 KAIST 총장으로 돌아와 한국 대학가에 새 바람을 일으켰다. 그런가 하면 미 스탠퍼드대 김상배(박사 과정)씨 같은 새 희망의 싹도 확인됐다. 그가 개발한 로봇은 미 시사주간지 타임이 선정한 '올해의 발명'에 뽑혔다.
'소리 없는 개혁'으로 KAIST 제2 도약 서남표 총장
서남표 KAIST 총장의 7월 취임은 세간의 큰 관심을 모았다. 세계적 학자이자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로버트 로플린 총장이 교수들의 끈질긴 연임 반대 운동으로 물러나면서 누가 그 자리를 맡게 될지 하마평이 무성했기 때문이다.
서 총장은 새로운 학문 영역을 개척한 것은 물론이고 수조원의 연구비를 다루는 미 과학재단의 부총재를 역임하는 등 업적과 사회적 지위 양면에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교수들을 효과적으로 응집하지 못한 로플린의 단점을 보완하면서 KAIST를 발전시킬 최적임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고학으로 미 MIT대를 졸업한 험난한 이력도 강인한 이미지를 부각하는 데 일조했다. 그는 취임하자마자 KAIST 비전을 세우고 거기에 걸맞은 체제로 조직개편을 했다. 그가 제시한 개혁안과 실천 계획은 한국 대학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연구 성과의 품질을 더욱 따지는 평가 방식 ▶영어 수업 ▶외국 대학과 제휴한 복수 학위제 ▶교수 연봉 조정 ▶학교 발전 기금 1조원 모금 목표 ▶교수 연구실의 개인 명패 없애기 등 국내 대학에서 과감히 추진하지 못한 아이디어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서 총장의 이런 개혁 드라이브 속에서 로플린 총장 때 시끄럽던 교수들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숨을 죽였다. 워낙 주도면밀하게 계획을 밀어붙이기 때문이라는 게 주변의 평이다. 개혁 성향이 강하지만 막상 만나보면 친근감을 주는 인상이다.
그의 국적은 미국이다. 연봉은 36만 달러(약 3억3000만원)에 달하지만 미국에서 있을 때 수입의 3분의 1 정도로 알려져 있다. 서울사대부고 2학년을 마치고 미국으로 이민한 그가 50여 년 만에 한국에 돌아와 어떤 업적을 남기고 돌아갈지 많은 이가 지켜보고 있다.
유리벽에 달라붙는 도마뱀 로봇 타임 '올해의 발명'에 김상배 스탠퍼드대 박사과정
흔히 한국 사람은 창의력이 떨어진다고 한다. 어릴 적부터 암기 위주의 교육을 받다 보니 타고난 개성이 달아난 때문일까. 그러나 지난달 미 타임지가 선정한 '올해의 발명'에 도마뱀 로봇 '스티키봇(Stickybot)'이 44개 발명품의 하나를 차지해 이런 통념을 무색하게 했다.
스티키봇은 도마뱀처럼 생긴 로봇이 유리벽을 수직으로 올라가는 모습에 착안해 '달라붙는 로봇'이란 뜻으로 붙인 이름이다. 이를 발명한 김상배(31.사진)씨는 연세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하고 미 스탠퍼드대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청년 공학도다. 그의 로봇이 유리벽을 타고 올라가는 동영상이 미국의 세계 최대 UCC(사용자 제작 콘텐트) 사이트인 '유튜브'에 소개되면서 큰 인기를 모았고 결국 타임지의 눈에 들었던 것이다. 스티키봇 아이디어는 도마뱀 발바닥의 미세한 조직 연구에서 나왔다. 이 로봇 발바닥에 있는 섬모를 도마뱀처럼 한 방향만 보게끔 경사지게 잘라냈더니, 특정 방향으로는 아무리 세게 잡아당겨도 커진 마찰력 때문에 유리벽에서 떨어지지 않고 지탱할 수 있었다. 대신 반대편으로 잡아당기면 손쉽게 떼어낼 수 있어 로봇의 발바닥은 계속 위로 이동할 수 있었다. 그는 이런 현상을 '방향성 접착성'으로 불렀다. 그의 연구에 돈을 댄 미 국방부는 스티키봇의 크기를 대폭 줄여 스파이 로봇으로 개발할 움직임까지 보이고 있다.
그는 학창시절부터 뭔가 만드는 데 재미를 붙였다. 무선조종 자동차와 고무동력기 등을 만들어 여러 발명대회를 휩쓸었다.
대한민국 최고과학기술인상 2인 암 억제.당뇨병 예방단백질 규명 1인자 김성훈 서울대 교수
서울대 약대 김성훈(48.사진) 교수에게 올해는 기억에 남는 한 해였다. 해외 저명한 학술저널에 논문이 쏙쏙 들어가고, 게다가 상금 3억원의 대한민국 최고과학기술인상까지 받았으니 말이다.
암 억제 단백질과 혈관 생성 상처 치료 신물질을 개발한 공로가 그를 이런 영예로 인도했다.
신기능 암 억제 단백질(P18rhk P38), 혈관 생성 상처 치료 신물질(P43), 새로운 염증 유발 물질(KRS) 등을 발견하고, 새로운 혈관 억제 물질(WRS)의 구조를 규명하는 등 국제학술지에 84편의 논문을 게재했다.
올 들어서는 대표적인 암 억제 유전자 P53의 작동에 관여하는 단백질의 존재를 처음 밝혀내 7월 미 암학회가 발행하는 '캔서 리서치'에 관련 논문을 실었다. 9월에는 혈당을 조절하는 당뇨병 예방 단백질까지 발견해 미 국립학술원회보(PNAS)에 이 사실을 실었다.
'라자스펠트 예상' 푼 수학계 '국가 석학' 황준묵 고등과학원 교수
황준묵(43.사진) 고등과학원 교수는 올해 상복을 타고났다. 4월 대한민국 최고과학기술인상을 받은 데 이어 12일에는 교육인적자원부와 한국학술진흥재단이 선정하는 '국가 석학' 10명 가운데 한 명으로 뽑혔다.
그의 명성은 해외에서 더 자자하다. 세계 수학계가 1997년까지 10년 넘게 풀지 못한 '라자스펠트 예상'을 명쾌하게 풀어낸 것이다.
이는 미 미시간대 라자스펠트 교수가 84년 이론적으로 가능하다고 예상한 이후 그 어떤 수학자도 증명하지 못했던 난제였다. 그가 자신의 문제를 황 교수가 풀었다는 소식을 듣고 뛸 듯이 기뻐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96년 서울대 수학과 교수로 부임한 그는 이 문제를 푸는데 몰두하려고 자리를 3년 만에 내놓고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이직하면서 "잡무가 너무 많다"는 말을 남겼다. 부친은 가야금 명인인 황병기 전 이화여대 교수다.
'바이오 신약'으로 벤처기업 창업 김선영 서울대 교수
한 사람이 두 가지 일을 제대로 해내기 어렵다지만 김선영(51.사진)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에게는 남 얘기다.
그는 올해 누구보다 바쁜 한 해를 보냈다. 서울대에서 교수직을 수행하면서, 한편으론 벤처 기업가로 남다른 성취욕을 맛봤다.
그가 설립해 대표를 맡은 바이오벤처기업 바이로메드를 지난해 코스닥에 상장시킨 데 이어 자체 개발한 바이오 신약 다섯 가지가 미국과 중국.한국 등지에서 임상시험 허가를 따낸 것이다. 그는 "국내 어느 업체에서도 해보지 않은 바이오 신약 임상허가를 미국에서 받았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또 하나의 바이오벤처 기업을 야심차게 키우고 있다. 야생식물이나 약초 등 천연물을 재료로 신약을 개발하는 '헬릭서'라는 회사다.
연초 일본의 투자전문 회사 소프트뱅크인베스트먼트(SBI)는 500만 달러를 이 회사에 투자하기로 했다.
'한반도의 눈' 아리랑 2호 개발 주도 항공우주연 이주진 박사
7월 28일 오후 4시5분 러시아 플레세츠크 우주발사 기지에서 우리나라 아리랑 위성 2호가 발사됐다. 거대한 화염을 내뿜으며 솟구치는 로켓 위에 있는 위성을 바라보며 가슴을 가장 졸였던 사람이 있다. 한국항공우주연구원 이주진(54.위성기술사업단장.사진)박사다.
아리랑 2호 개발의 총책으로 이날 그 누구보다 성공적인 발사를 기원했을 것이다. 그와 연구팀의 노력으로 지금 '한반도의 눈'은 날마다 지구를 돌며 우리나라 주변뿐만 아니라 지구촌 곳곳의 지표면을 촬영하고 있다.
위성 개발은 한두 사람의 힘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국내 기관들의 공동 연구는 물론이고 외국과의 제휴 없이는 어렵다. 국내 기술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 박사는 성공적인 위성 발사라는 목표를 위해 수많은 연구팀의 힘을 모았다. 그의 다음 표적은 2008년 발사할 아리랑 위성 5호 개발이다.
손으로 깎는 반사거울 '무결점' 장인 표준과학연 이재협씨
위성이나 천체 망원경 중 단일 부품으로 가장 큰 게 반사거울이다. 7월 발사한 아리랑 위성 2호에 탑재한 반사거울은 지름 60㎝다. 그 구경은 갈수록 커지는 추세다.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이재협(42.사진)씨는 반사거울 제작의 장인이다. 한국에서 이런 큰 구경의 반사거울을 만드는 능력을 보유한 사람은 이씨가 유일하다. 거울 표면을 일일이 손으로 갈아 거울처럼 빛이 잘 반사되게 만든다. 핵심 기술은 초정밀도 유지. 지름 90㎝ 반사거울이라면 곡면 중 가장 많이 튀어나온 부분과 가장 많이 파인 부분의 높이 차이가 성인 머리카락 굵기의 4000분의 1 정도밖에 나지 않아야 한다. 이런 정밀도가 그의 손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씨가 지금까지 제작한 대구경 반사거울은 20개 가까이 된다. 앞으로 아리랑 위성에 들어갈 반사거울을 제작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