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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의 갑옷을 입고 보시의 창을 들어라
전국에 비가 내리고, 부산에도 이슬비가 살짝 내렸다.
‘나는 나다’ 라는 책을 큰스님께 보내셨었다는 스님이 1시부터 도착해서 큰스님을 기다리셨다. 스님은 출가한지 3년이 되었는데 나이제한 때문에 조계종이 아니라 태고종으로 출가를 하셨다고 했다.
“요즘은 종파가 무슨 상관있는가. 공부가 중요한 거지. 보내 준 책 살뜰히 읽어봤어요. 어째 그런 글을 쓰게 됐어요?”
하고 큰스님이 물으셨다.
“제가 출가하기 전에 금강경을 처음 봤거든요. 선불교에서 외계인 같은 말을 하면 되느냐 도대체 뭔 얘길 하려고 하느냐 하신 큰스님 말씀이 와닿았습니다. 스님들이 품어야 할 화두 같습니다.”
“염화실에서 봐요?”“텔레비전에서만 봤습니다.”
스님은 최근에 큰스님을 친견하러 오기로 결심하면서 <다음까페 염화실>을 알았다고 하셨다.
“시절인연이 도래해야 돼.”
하시면서 큰스님은 <다음까페 염화실>에 들어가면 언제든지 큰스님이 하신 모든 강의를 다 볼 수 있다고 하셨다.
“이왕 왔으니 한 시간이라도 공부하는 인연을 짓고 가요. 내가 보니까 화엄경이 세상에 나와있는 책들 중에서는 최고의 책이라고 할 수가 있어.”
“스님께서 늘 강조하시죠. 저는 금강경이나 겨우 보고 있었습니다.”
“금강경도 좋죠. 우리나라 소의경전이고 대승경전에서 빼놓을 수 없잖아. 언젠가 화엄경도 열심히 공부하셔야지. 법화경 열심히 공부하고 화엄경 하고 그 다음에 유마경, 속이 툭 터지는.” 하고 큰스님이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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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기차고 즐거운 표정으로 비구니 스님 두 분이 들어오셨다.
“전에 사찰음식이 궁중에서 하던 음식이다 말씀하셨잖아요. 제가 그 때 그 말씀이 마음에 와 닿아서 왔잖아요.”
하고 본인소개를 하신 스님은 ‘11호 자가용을 타고’ 큰스님 드릴 곶감을 가져왔다고 하셨다. 앞으로 계속 공부하러 오실 거라고 했다.
“열심히 다니세요.”
하고 큰스님이 웃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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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방광불화엄경 강설 57권의 사인지에 ‘피혜지갑(被慧智甲)’이라고 써주셨다.
“지혜의 갑옷을 입고 이 험한 세상에 한바탕 가서 싸워야지.”
하고 숨을 한 번 고르신 다음에 힘 있게 다시 말씀하셨다.
“지혜의 갑옷을 입고 보시의 창을 들고 세상에 나가서 한바탕 싸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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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만 하고 가려는 각명스님을 불러서 큰스님이 오랜만에 손 한 번 잡아보자고 하셨다.
“먼데서 이렇게 안 빠지고 와서 고마워.” 하셨다.
이윽고 상강례
법회의 시작
이세간품 57권이 나왔다. 점안을 하고 본 강의에 들어가도록 하겠다.
서문
불자여,
보살마하살은 열 가지 불법을 잃어버리는 일이 있으니
마땅히 멀리 여의어야 하느니라. 무엇이 열인가.
이른바 선지식을 가벼이 여기어 불법을 잃어버리느니라.
생사의 괴로움을 두려워하여 불법을 잃어버리느니라.
보살행 닦기를 싫어하여 불법을 잃어버리느니라.
세간에 있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여 불법을 잃어버리느니라.
선정과 삼매에 탐착하여 불법을 잃어버리느니라.
선근에 집착하여 불법을 잃어버리느니라.
정법을 비방하여 불법을 잃어버리느니라.
보살의 행을 끊어서 불법을 잃어버리느니라.
성문이나 독각의 도(道)를 즐기어 불법을 잃어버리느니라.
모든 보살들을 싫어하여 불법을 잃어버리느니라.
이것이 열이니라.
만일 모든 보살이 이 열 가지 법을 멀리 여의면
곧 보살의 생명을 떠난 길[離生道]에 들어가느니라.
2017년 3월 15일
신라 화엄종찰 금정산 범어사
如天 無比
불교는 여러 가지 양상이 있어서 처음 공부하는 사람들은 많이 헷갈린다.
특히 요즘 한국에는 남방불교가 들어와서 위빠사나와 간화선(看話禪)이 엄청난 차이가 있는 데도 비빔밥처럼 같이 설명하는 사람들도 있고 각양각색이다.
그런데 분명한 사실이 있다.
내가 무엇을 가까이 했느냐,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경제적으로든 어떤 불교에 투자를 했고 공을 많이 들였느냐 하는 것에 그 사람의 주장이 좌우된다. 그 불법의 견해가 높고 깊고는 별 의미가 없다. 순전히 어느 만치 자기가 인연을 깊이 맺었으냐 하는 것을 가지고 그 불교를 주장한다.
예를 들어서 한국불교에서 대승불교라든지 간화선을 공부 열심히 했음에도 불구하고 남방에 가서 한 일 이 년 공부하고 오면 과거에 한국 불교에서 익힌 것은 다 잊어버리고 남방 불교만 이야기 한다.
왜 그럴까?
한국에서는 10년을 공부했어도 자기 공이 하나도 안들고, 애를 안쓰면서 흐르는 물에 쉽게 흘러가듯이 공부했다. 열심히 알려고도 하지 않고 세월만 보냈다.
그런데 남방에 가서는 음식도 안맞고 말도 제대로 안통한다. 예를 들어 태국에 갔다면 최소한 태국말과 영어 두 가지는 할 줄 알아야 되고 빨리어라든지 범어까지도 겸해야 된다. 그렇게 하려니 우리나라에서 10년, 20년 공부한 것보다 거기서 1년 공부한 것에 훨씬 공이 많이 들고 힘이 많이 들었다. 그렇게 공 들이고 힘을 들여서 공부해 오니 거기에서 배운 불교가 더 가치있게 보이는 것이다.
자기가 업을 그렇게 깊이 쌓은 줄은 모른다. 순전히 어떤 불교와 내가 인연을 깊이 맺어놓았느냐 하는 것에 좌우될 뿐이다. 남방에서 공부하고 온 사람들을 보면 전부 그렇다. 여기서는 공부를 해도 쉽게 살았는데 남방에 가서는 언어도 음식도 다 어려운 조건에서 공부를 하고 힘이 많이 들고 공이 많이 들었으니 무조건 그 불교가 옳다는 것이다.
중생에게는 그런 약점이 있다.
무엇과 인연을 깊이 쌓아놓았느냐에 따라 그냥 그 길로 가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어린아이가 태어나 보니 자기 어머니가 제일 좋다. 그런데 성장해서 보니 다른 이웃집 어머니가 더 학벌도 좋고 인물도 잘났고 여러 인품도 좋다. 그래도 그것이 눈에 안들어온다. 못나도 자기 어머니와의 인연을 깊이 맺었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그런 약점이 있다. 인연을 깊이 맺은 것이 제일 옳다는 생각이 든다. 무조건 옳고 죽어도 옳다고 생각이 드는 것이다.
내가 ‘저 사람들이 강원도 나오고 선방도 다니고 대승불교 익히고 또 간화선 불교도 익혔는데도 남방에 가서 며칠 있다 오더니 그만 남방 불교 이야기 하는 것이 왜 그럴까?’ 깊이 생각해 보다가 그 문제를 하나 해결했다.
자기도 어쩔 수가 없을 것이다. 어떻게 되어서 그렇게 돌아갔는지를 본인도 잘 모른다. 내가 ‘왜 저럴까’ 깊이 곰곰이 생각해보니 순전히 인연을 깊이 쌓은 것이 그쪽 불교이기 때문이다. 다만 인연을 깊이 쌓았다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시간이 문제가 아니다. 하루를 쌓아도 상당한 공을 들이고 어려움을 겪어서 그쪽 불교가 좋게 보이는 것이다. 순전히 그 뿐이다. 모든 것이 다 해당되는 것은 아니지만, 예를들어서 객관적으로 봐도 이 화엄경 불교 같은 것은 궁극의 불교이고 최고의 불교임에 틀림이 없다. 그런데 인연을 깊이 못 쌓았다 보니까 화엄경 불교를 제대로 이해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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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화엄경 중에서도 이세간품을 자주 거론한다. 여기에 ‘10가지 불법을 잃어버리는 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대승불교와 소승불교의 차이를 아주 명확하게 짚고 넘어간다.
‘이른 바 선지식을 가지고 불법을 잃어버린다.’
늘 말씀드리지만 이 시대에는 선지식하면 무조건 경을 떠올려야 된다. 특히 화엄경 법화경 유마경 같은 대승경을 떠올려서 그 대승경을 선지식으로 생각해야 된다. 지금은 절대로 사람을 선지식으로 생각하면 안된다.
‘생사의 괴로움을 두려워하여 불법을 잃어버린다.’
보살은 고통받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생사 괴로움은 안중에도 없다. 보살은 죽을 때 죽고 살 때 살더라도 무조건 중생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고 보살행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생사가 괴롭고 두렵다고 하면 바람직한 불법과는 거리가 멀다. 스님들 중에도 내 몸만 사리는 스님들, 나만 이익하게 하려는 스님들이나 불자들이 많다. 화엄경 기준으로 생각하면 그것은 전부 불법을 잃어버리는 일이다.
‘보살행 닦기를 싫어하여 불법을 잃어버린다.’ 이것은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세간에 있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여 불법을 잃어버린다.’ 깊은 산중에 가 있다든지 또는 수행을 해서 열반에 들어 영원히 이 땅에 오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세상과 거리를 두고 세상을 싫어하는 자세는 불교가 아니다. 그것은 전혀 불교도 아닌데 그런 가르침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세속을 멀리하는 가르침이 많다. 그러나 세간에 있기를 즐겨해야 된다. 세상에는 고통받는 중생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 고통 받는 중생들이 전부 나의 논, 밭이다. 고통 받는 중생에게 내가 불법을 심어서 이치를 알게 하고 도와 줄 수 있어서 도와준다면 거기에서 불법의 싹이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고통받는 세간이 그야말로 불법의 논, 밭이다.
‘선정과 삼매에 탐착하여 불법을 잃어버린다.’ 삼매에 가만히 있는다든지 삼매의 근처에 가지도 못했다 하더라도 산중에서 삼매에 든 것 같이 멍청하게 조용하게 세월만 보내는 경우도 불법과는 전부 거리가 먼 일이다.
‘선근에 집착해서 불법을 잃어버린다.’ 선근만 생각하는 것이다. 진짜 불교의 깊은 이치는 생각하지 않고 ‘아 착한 일 하면 되지’라고만 생각하는 경우도 불법과는 거리가 먼 일다.
‘정법을 비방하여 불법을 잃어버린다.’ 이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법화경이나 화엄경 같은 경전의 가르침을 비방한다면 불법과는 거리가 멀다.
‘보살행을 끊어서 불법을 잃어버린다.’ 결국 보살행을 하자는 것이다. 성불해서도 보살행을 하자는 것이다. 선방에서는 한 철을 나면 3개월간 만행을 하면서 육환장을 짚도록 되어 있다. 6환장은 6바라밀의 실천을 의미한다. 그래서 해제중에는 나가서 사람들을 돕는 것이 정상적인 선방생활이다. 그런데 그렇게 안한다.
‘성문이나 독각의 도를 즐기어 불법을 잃어버린다.’ 이것은 총결론에 해당된다.
‘모든 보살을 싫어하여 불법을 잃어버린다.’ 보살을 무조건 싫어한다. 관세음보살이니 지장보살이니 하는 것이 남방불교 체계에는 없기 때문이다. 그것을 근본 경전이라고 생각하는데 거기에 그런 불보살의 이름이 없으니까 싫어하면서 외도의 경전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 것은 두 말할 나위 없이 불법을 잃어버리는 일이다.
이것이 열이다. 아주 명확하게 잘 표현 되었다. 본문에는 그 외에 다른 것 까지도 자세하게 소승불교와 대승불교의 차이점을 이야기 하고 있다.
이런 문제는 내가 진부할 정도로 여러 번 말씀 드렸다. 이것이 우리들 가슴에 콱 박혀야 된다. 실천을 하느냐 못하느냐는 것은 다음 문제이고 각자의 몫이지만 그러나 알고는 있어야 된다.
화엄경을 앞에 놓고 우리가 이런 공부를 하면서 ‘나는 실천은 못한다. 그렇지만 분명히 불법의 바른 이치는 이런 것이다’ 라고 알고는 있어야 되는 것이다.
그래서 누차 말씀을 드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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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십회향품 마지막 권을 공부할 차례다. 그동안 십회향품이 길고 길었다. 오늘과 다음 시간을 더 공부하면 십회향품이 끝나고 드디어 십지품에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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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회향의 열 번째는 등법계무량회향(等法界無量廻向) 법계와 동등한 한량없는 회향이다. 화엄경에서 법계라는 말을 잘 쓴다.
법계는 모든 것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미세먼지에서부터 태양의 수백 배 수천 배 되는 큰 별들의 세계, 수많은 은하수 그 많고 많은 넓은 세계에 있는 모든 것들까지도 다 포함된다. 지옥 아귀 축생 인도 천도 아수라에서 부터 성문 연각 보살 불(佛)의 세계까지도 법계라는 말 속에 다 포함된다. 의보(依報)니 정보(正報)니 일체 것도 전부 법계라는 말 속에 포함된다.
청량스님은 화엄경 소초 처음에 ‘왕복(往復)이 무제(無際)나 동정(動靜)은 일원(一源)이라. 함중묘이유여(含衆妙而有餘)하고 초언사이형출자(超言思而迥出者)는 기유법계여(其唯法界歟) 그것을 법계라고 한다’고 하였다.
길게 설명을 못해서 그렇지 이 세상 모든 것이 이 법계라는 말에 다 포함된다.
중생도 부처도 지구도 별도 태양도 달도 일체 것이 법계에 포함되고, 선과 악 생노병사 희노애락 생주입멸 춘하추동 이 모든 것들도 법계라는 말 속에 다 포함되어 있다.
大方廣佛華嚴經 卷第三十三
十廻向品 第二十五之十一
다, 依報果의 圓滿
ㄱ, 願의 相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復以法施의 所修善根으로 如是廻向호대 願一切佛刹이 皆悉淸淨하며 以不可說不可說莊嚴具로 而莊嚴之하며 一一佛刹이 其量廣大하야 同於法界하며 純善無礙하며 淸淨光明하며 諸佛이 於中에 現成正覺하며 一佛刹中에 淸淨境界가 悉能顯現一切佛刹하며 如一佛刹하야 一切佛刹도 亦復如是하니라
“불자들이여, 보살마하살이 다시 법을 보시하여 수행한 선근으로 이와 같이 회향하느니라.
‘원컨대 모든 부처님의 세계가 청정하여 말할 수 없이 말할 수 없는 장엄거리로 장엄하며, 낱낱 세계가 넓고 커서 법계와 같으며, 순일하게 선(善)하고 걸림이 없으며 청정하고 광명하여지이다.’라고 하느니라.
‘모든 부처님께서 그 가운데서 정각(正覺) 이룸을 나타내며, 한 부처님 세계의 청정한 경계에 능히 일체 부처님 세계를 나타내며, 한 부처님 세계와 같이 일체 부처님의 세계도 또한 다시 이와 같아지이다.’라고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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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보과(依報果)의 원만(圓滿) : 의보의 과가 원만하기를 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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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願)의 상(相) : 원의 상을 밝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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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 불자야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 보살마하살이
부이법시(復以法施)의 : 법을 보시해서
소수선근(所修善根)으로 : 닦은 선근으로, 수백 번 말씀드렸지만 불교에서 법, 불법하면 참 애매모호하고 상당히 광범위하다. 그래서 불법에 대해 무엇을 말해야할지 얼른 떠오르지 않으면 인과의 이치, 연기의 이치 하나만 이야기해도 된다.
초기불교에서 마승비구와 사리불존자가 만났을 때도 부처님이 자주 말씀하셨다고 하면서 마승비구가 사리불에게 인과의 법칙을 알려주었다.
법을 보시하는데 인과의 법칙을 이야기했다면 90점은 된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도 지옥을 사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나라에 형무소가 몇 개나 되는가? 이루 다 셀 수가 없다. 큰 도시마다 형무소가 있고 수 백명 수 천 명씩이 그곳에 수용되어 있다. 높은 자리에 있던 사람들, 중간자리에 있던 사람들, 낮은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거기에 가 있다. 요행스럽게 법망을 피해서 산다손 치더라도 가슴에는 지옥을 품고 사는 사람들도 많다. 왜 그 사람들이 형무소에 있는가? 인과 법칙을 몰라서 그렇다. 인과를 안지켜서 그렇다. 지켰다면 지옥 생활을 할 까닭이 없다. 간단하게 그렇게 정리할 수가 있다.
여기 법시(法施)가 나올 때, 신도들에게나 우리들 자신에게라도 설득해야할 내용은 인과의 법칙이다.
불교의 목적이 이고득락(離苦得樂)이다. 그것은 초등학생도 다 아는 사실이고 근본불교를 가지고 이야기 하더라도 고멸(苦滅)이다. 근본 불교로도 그렇고 보통 불교의 목적이 고통을 떠나서 행복을 누리자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 세상이 괴롭고 괴로움을 겪는 사람들이 많으며 고를 소멸하고 편안한 낙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인과의 법칙을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들도 이렇게 말은 하지만 일상생활에서 쉽게 적용을 못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하도 많이 들어와서 인과의 법칙은 어느 정도 지키고 산다. 법시가 곧 인과의 법칙이라고 생각하라는 것이다. 그것으로써 닦은 바 선근으로써
여시회향(如是廻向)호대: 이와 같이 회향한다. 어떻게 회향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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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일체불찰(願一切佛刹)이: 일체 세계가, 일체 불찰이
개실청정(皆悉淸淨)하며: 다 훌륭하기를 원한다. 일체 세계가 전부 훌륭하기를 원한다. 법보시를 잘해서 그 선근으로써 일체세계가 다 청정해졌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것이다.
이불가설불가설장엄구(以不可說不可說莊嚴具)로: 또 불가설 불가설 장엄구로써, 그 많고 많은 장엄구로써
이장엄지(而莊嚴之)하며: 장엄하기를 원한다.
일일불찰(一一佛刹)이: 일일불찰이
기량광대(其量廣大)하야: 그 양이 광대해서 그 양이
동어법계(同於法界)하며: 법계와 같기를 원한다. 본래 법계와 같은데 그렇게 인식하고 그렇게 깨닫기를 원한다.
순선무애(純善無礙)하며: 순선무애하기를 원한다. 원(願)자가 다 먹힌다. 순박하고 선하고 걸림이 없기를 원한다.
청정광명(淸淨光明)하며: 청정 광명하기를 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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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불(諸佛)이 : 제불이
어중(於中)에 : 어중에서
현성정각(現成正覺)하며 : 정각 이루기를 원하며
일불찰중(一佛刹中)에 : 한 세계 가운데서
청정경계(淸淨境界)가 : 청정한 세계가
실능현현일체불찰(悉能顯現一切佛刹)하며 : 다 능히 일체 불찰에 현현하기를 원한다.
일불찰 중에 있는 청정세계가 모든 세계에 다 현현하기를 원한다.
여일불찰(如一佛刹)하야: 한 불찰과 같아서
일체불찰(一切佛刹)도: 일체 불찰도
역부여시(亦復如是)하니라 : 또한 다시 이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 냉정하게 새기려면 원(願)자를 거기에 한 번만 새겨도 된다.
ㄴ, 內寶莊嚴
其一一刹을 悉以等法界無量無邊淸淨妙寶莊嚴之具로 而爲嚴飾하니 所謂阿僧祇淸淨寶座에 敷衆寶衣하며 阿僧祇寶帳에 寶網垂布하며 阿僧祇寶蓋에 一切妙寶가 互相暎徹하며 阿僧祇寶雲이 普雨衆寶하며 阿僧祇寶華가 周遍淸淨하며 阿僧祇衆寶所成欄楯軒檻이 淸淨莊嚴하며 阿僧祇寶鈴이 常演諸佛微妙音聲하야 周流法界하며 阿僧祇寶蓮華에 種種寶色이 開敷榮曜하며 阿僧祇寶樹가 周帀行列하야 無量妙寶로 以爲華果하며 阿僧祇寶宮殿에 無量菩薩이 止住其中하며 阿僧祇寶樓閣이 廣博崇麗하야 延袤遠近하며 阿僧祇寶却敵이 大寶所成으로 莊嚴妙好하며 阿僧祇寶門闥에 妙寶瓔珞이 周帀垂布하며 阿僧祇寶牕牖가 不思議寶로 淸淨莊嚴하며 阿僧祇寶多羅가 形如半月하야 衆寶集成이라 如是一切가 悉以衆寶로 而爲嚴飾하야 離垢淸淨하야 不可思議니 無非如來善根所起라 具足無數寶藏莊嚴하니라
“이른바 아승지 청정한 보배 자리에는 여러 가지 보배 천[衣]을 깔았고, 아승지 보배 휘장에는 보배 그물로 드리웠고, 아승지 보배 일산(日傘)에는 일체 아름다운 보배가 서로 비치었고, 아승지 보배 구름에서는 여러 가지 보배를 비 내리었느니라.
아승지 보배 꽃이 두루 청정하고, 아승지 보배로 이루어진 난간에는 청정하게 장엄하였고, 아승지 보배 풍경에서는 항상 모든 부처님의 미묘한 음성을 연설하여 법계에 두루 흘러 퍼지느니라.
아승지 보배 연꽃은 가지각색 보배 빛으로 찬란하게 피었고, 아승지 보배 나무는 사방으로 줄지어 섰는데 한량없는 아름다운 보배로 꽃과 열매가 되었고, 아승지 보배 궁전에는 한량없는 보살이 그 안에 머물고 있었느니라.
아승지 보배 누각은 넓고 화려하여 길이가 멀기도 가깝기도 하고, 아승지 보배 망루는 큰 보배로 되었는데 장엄이 매우 아름답고, 아승지 보배 문과 창문에는 묘한 보배 영락이 두루 드리웠느니라.
아승지 보배 들창에는 부사의한 보배로 청정하게 장엄하고, 아승지 보배 다라나무는 모양이 반달과 같은 여러 가지 보배를 모아 이루었느니라.
이와 같은 모든 것은 다 여러 가지 보배로 장엄하게 꾸미었으며 때가 없고 청정하여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으니 모두 여래의 선근으로 생긴 것이라 무수한 보배의 장엄을 구족하였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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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보장엄(內寶莊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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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보(依報)는 우리들이 의지하고 있는 세상이다. 여러분들 각자가 입은 옷부터가 의보다. 우리는 옷을 의지하고 있고, 여기 올 때 차를 타고 온 분도 있고 차를 타지 못하고 온 분도 있고 각자 자기 사정 따라서 왔지만 그것도 전부 의보에 해당이 된다.
작은 절에 있느냐 큰 절에 있느냐. 작은 절에 있다고 꼭 나쁜 것도 아니고 큰 절에 있다고 좋은 것도 아니지만 자기가 처해 있는 곳은 전부 의보에 해당된다.
그런데 의보중에서 내보장엄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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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일일찰(其一一刹)을: 그 낱낱세계를
실이등법계무량변청정묘보장엄지구(悉以等法界無量無邊淸淨妙寶莊嚴之具)로 : 그 많고 많은 세계, 예를 들어서 내가 하루에 접하는 지역만 하더라도 얼마나 많은가.
한사람이 접하는 환경만 해도 엄청 많은데 여기에 백 명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백 명이 하루 동안에 접하는 모든 세계들 그것이 일일불찰이다. 일일세계다. 그것이 다 법계와 같은 한량없고 가이 없고 청정하고 아름다운 보배의 장엄 도구로써
이위엄식(而爲嚴飾)하니 : 그걸 가지고 전부 아름답게 꾸민다. 우리가 가는 곳마다 거기에 황금 칠을 하고 가는 곳마다 근사한 자가용을 대기시키고 있다는 말이 아니다.
현재 있는 그대로, 깨달음의 눈을 뜨면 이미 이와 같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화엄경은 늘 그것이다. 그래서 화엄경 첫 구절에 열쇠가 있다고 하였다.
‘시성정각(始成正覺)하니 그 땅은 견고하야 전부 다이아몬드로 되어 있더라’이것이 화엄경을 푸는 열쇠다. 여기도 마찬가지다. 전부 그 열쇠로 푸는 것이다.
소위아승지청정보좌(所謂阿僧祇淸淨寶座)에 : 소위 아승지 청정 보좌에
부중보의(敷衆寶衣)하며 : 여러 가지 보배 옷을 폈으며, 청정한 보배 자리에 여러 가지 보배 옷을 폈다. 이미 우리는 이것을 수용을 하고 있는데도 다만 눈을 뜨지 못해서 수용하고 있는 줄을 모른다.
아승지보장(阿僧祇寶帳)에 : 아승지 보배 장막에
보망수포(寶網垂布)하며 : 보배로 된 그물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으며, 이것도 역시 이미 그렇게 되어 있다.
아승지보개(阿僧祇寶蓋)에: 아승지 보배의 일산에는
일체묘보(一切妙寶)가 : 낱낱묘보가
호상영철(互相暎徹)하며 : 서로서로 사무친다. 전부 보배가 매달렸으니까 거기에 빛이 서로서로 사무치며
아승지보운(阿僧祇寶雲)이 : 아승지 보배구름이
보우중보(普雨衆寶)하며 : 여러가지 보배를 널리 비 내린다.
우보익생만허공(雨寶益生滿虛空)이다. 중생을 이익하게 하기 위해서 보배가 하늘에서 장마철 비 쏟아지듯이 쏟아지고 있다. 이미 우리의 삶은 그렇다. 이것도 사실은 내가 누리지를 못해서 그렇지 이해하기는 간단하다.
늘 비유를 들지만 깨달은 사람과 깨닫지 못한 미혹한 범부는 눈 어두운 사람과 눈 뜬 사람의 차이에 견주어서 생각해 보면 아주 간단하다.
가을이 되어서 ‘단풍이 아름답다, 저기 산에는 벌써 단풍이 진다.’ 그런 사실을 눈뜬 사람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고 누리고 느낀다. 심지어 이야기를 주고 받지도 않는다. ‘저기 단풍이 들었구나’ 하는 것도 처음 단풍 들었을 때의 말이지 단풍이 든지 며칠 지나면 이야기 거리도 안된다.
그런데 눈 어두운 사람에게는 그것이 신기하게 들릴 뿐이다. 아주 신기하게 들릴 뿐 그것이 하나도 느껴지지 못하고 이해가 되지 못한다. 눈 어두운 사람과 눈뜬 사람의 차이는 그렇다.
마찬가지로 정말 마음의 눈, 지혜의 눈을 뜬 부처님과 그렇지 못한 우리 범부 중생이 세상을 보는 안목도 똑같다. 그것이 얼마나 우리 가슴에 와 닿느냐 하는 것만 남아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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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승지보화(阿僧祇寶華)가: 아승지 보화가
주변청정(周遍淸淨)하며 : 두루두루 청정하며
아승지중보소성난순헌함(阿僧祇衆寶所成欄楯軒檻)이: 아승지 중보로 여러 가지 보물로써 이른 바 난순과 헌함이, 난간 툇마루나 돌아가며 지어놓은 작은 집 이런 것들이
청정장엄(淸淨莊嚴)하며 : 청정 장엄해 있으며
아승지보령(阿僧祇寶鈴)이: 아승지 보배 방울이
상연제불미묘음성(常演諸佛微妙音聲)하야 : 항상 모든 부처님의 미묘한 음성을 연설해서
주류법계(周流法界)하며: 법계에 두루 흐르고 있다.
이대목은 소동파의 게송과 같다.
계성변시광장설(溪聲便是廣長舌) 시냇물 소리가 그대로 부처님의 광장설법이어라.
산색기비청정신(山色豈非淸淨身)가, 산천초목이 어찌 청정 법신 비로자나불이 아닌가
야래팔만사천게(夜來八萬四千偈) 밤이 되면 팔만사천 게송이나 되는데
타일여하거사인(他日如何擧似人)가, 이 소식을 다른 날 누구에게 좀 알려줄 수 있겠는가. 눈을 뜨고 보니 분명히 그렇게 되어 있는데 이것을 다른 날 누구에게 일러줘야 좋겠는가. 이 역시 화엄경을 푸는 열쇠다.
아승지 보배 방울에서 그런 부처님의 미묘한 음성이 법계에 흘러나온다.
이런 것을 우리가 자주 읽어야 된다. 그리고 사유를 아주 많이 해야 된다. 결국 이 말씀이 내 가슴에 탁 와 닿아야 되는데 연습을 안하면 그렇게 안된다.
점수(漸修)이고 점오(漸悟)다. 끊임없이 읽고 되뇌이고 생각하고 사유하고 사경할 때 가슴에 탁 와 닿는 날이 있다. ‘모든 것들, 두두물물이 진짜 아승지 보물이구나, 이렇게 있는 보물을 내가 왜 그동안 몰랐던 말인가. 모든 사람들은 전부 불보살이다. 이걸 내가 왜 몰랐을까’틀림없이 그렇게 통달할 때가 있을 것이다.
이것은 부처님이 만들어 놓은 것이 하나도 없다. 털끝 하나도 변화시키거나 만들거나 조작한 것은 없다. 현재에 있는 그대로를 가지고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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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승지보련화(阿僧祇寶蓮華)에 : 아승지 보배 연꽃에는
종종보색(種種寶色)이 : 가지가지 보배 색깔이
개부영요(開敷榮曜)하며: 활짝 펴서 아름답게 번성하고 빛나고 있으며
아승지보수(阿僧祇寶樹)가 : 아승지 보배 나무가
주잡항렬(周帀行列)하야 : 두루두루 줄을 서서
무량묘보(無量妙寶)로 : 한량없는 아름다운 보배로써
이위화과(以爲華果)하며 : 꽃이 되고 열매가 되어 있더라.
아승지보궁전(阿僧祇寶宮殿)에: 아승지 보배 궁전에는
무량보살(無量菩薩)이 : 한량없는 보살들이
지주기중(止住其中)하며: 그 가운데 모여 있더라.
여러분들이 사찰에 돌아가서 이것을 봐야 된다. 여러분들이 사는 그 절은 이미 아승지 보배 궁전이다. 궁전궁전마다 화장실은 화장실대로 공양간은 공양간대로 법당은 법당대로 한량없는 보살이 그 가운데 곽 차 있다. 사람이 있어서 그렇다는 말이 아니다.
기둥은 기둥대로 서까래는 서까래대로 난간은 난간대로 탁자는 탁자대로 촛대는 촛대대로 전부 보배 궁전에 무량보살이 지주기중하는 것이다. 그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어느날 그 사실을 알게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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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승지보누각(阿僧祇寶樓閣)이 : 아승지 보배로 된 누각이
광박숭려(廣博崇麗)하야 : 널찍널찍 하고 아주 높고 화려하게 꾸며져서
연무원근(延袤遠近)하며 : 연무원근하며 동서로 된 것을 연(延)이라고 하고 무(袤)자는 남북을 뜻한다. 동서로 남북으로 멀고 가깝게 그렇게 전부 화려하게 꾸며져 있으며
아승지보각적(阿僧祇寶却敵)이 : 누각을 만든다든지 할 때 적을 물리치려고 사이사이에 예를 들어서 병사가 여러 사람들이 지키고 있을 정도로 작은 누각을 지어놓은 것을 각적이라고 한다. 적을 물리친다는 뜻이다. 적이 있고 없고가 문제가 아니고 누각을 만들 때 만드는 격식이 그렇다는 것이다.
대보소성(大寶所成)으로 : 큰 보배가 이룬 바로써
장엄묘호(莊嚴妙好)하며 : 장엄으로써 아름답게 아주 좋게 꾸며져 있으며
아승지보문달(阿僧祇寶門闥)에 : 아승지 보배로 된 전부 아승지다. 아승지는 무량무변 무수 한량이 없다는 뜻이다. 보배문달에
묘보영락(妙寶瓔珞)이: 아름다운 보배 그리고 영락구슬 이것이
주잡수포(周帀垂布)하며: 두루두루 드리워져 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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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승지보창유(阿僧祇寶牕牖)가 : 아승지 보배로 된 창문들이
부사의보(不思議寶)로 : 부사의보로써
청정장엄(淸淨莊嚴)하며 : 청정하게 장엄되었으며
아승지보다라(阿僧祇寶多羅)가 : 아승지 보다라가, 다라수가
형여반월(形如半月)하야 : 모양이 반달과 같아서
중보집성(衆寶集成)이라 : 온갖 보배로써 이루어졌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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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시일체(如是一切)가: 이와 같은 일체가
실이중보(悉以衆寶)로: 온갖 보물로써
이위엄식(而爲嚴飾)하야: 다 장엄하게 꾸며서
이구청정(離垢淸淨)하야: 때가 하나도 없고 청정해서
불가사의(不可思議)니: 가히 헤아릴 수 없음이니, 불가사의 불가사의하다.
무비여래선근소기(無非如來善根所起)라 : 여래의 선근소기 아닌 것이 없더라. 여래의 선근소기라는 말은 여래의 안목으로 그렇게 보인다는 뜻이다.
여래의 안목으로, 깨달음의 안목으로 눈뜬 사람과 맹인과의 차이처럼 그렇게 보인다.
구족무수보장장엄(具足無數寶藏莊嚴)하니라: 무수 보장 장엄을 구족하였느니라.
누차 말씀드렸지만 화엄경에 나오는 이런 모습은 이렇게 만들어서 보여주는 것은 절대 아니다.
중국 무석 대불에 가면 범궁이라는 궁전을 만들어 놨는데 그 범궁은 하나하나 그 자재라든지 칠이라든지 나무라든지 대리석이라든지 이 세상에 있는 가장 값지고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으로써 궁전을 만들어 놓았다. 대리석보다 더 비싼 나무를 갖다가 썼다. 거기서 연극을 하고 부처님의 일생을 거기서 여러 가지 모습으로써 보여주고 하는 것이 있는데 이 세상에 있는 어떤 조형물 내지 물질로써는 상당히 근사하게 하느라고 했다. 여기 경전에 말씀하신 대로 가깝게 한다고 했다. 그래도 여기에 설명한 것에 비하면 그야말로 족탈불급(足脫不及)이다. 어림도 없다. 만 분의 일도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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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大方廣佛華嚴經 大方廣佛華嚴經 大方廣佛華嚴經...
염화실지가 집에 도착하면 행복한 마음으로 잘 읽을 것입니다...ㅎㅎ 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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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제된 댓글 입니다.
고맙습니다^^
@慧明華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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