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도시락
조수현
6시 50분 알람이 울린다. 육아 휴직하면 7시 반 전에는 절대 일어나지 않겠다고 선언했는데, 아침에 남편 도시락을 싸게 되면서 늦잠은 물 건너갔다. 구내식당이 없는 직장을 다니는 남편은 20년째 회사 주변 식당에서 점심을 사 먹고 있는 중이다. 남편이 2년간 타 시도 근무를 마치고 돌아온 지 2주쯤 되었을 때 지나가는 말로 한마디 했던 말이 뇌리에 박힌다.
“요즘 젊은 직원들은 카페 가는 걸 정말 좋아해. 식사는 10분 만에 해치우고 카페 가서 점심시간 끝날 때까지 이야기해. 난 식사 속도도 느린데 빨리 먹으려니까 음식 맛도 모르겠고 일단 소화가 잘 안 돼. 커피 안 마시는데 매일 카페에 가니 자몽차 밖에 시킬 게 없더라고. 이러다 당뇨병 걸리겠어.”
선택지가 뻔한 회사 주변 식당, 기본 점심 값이 한 끼 1만 원에 육박하지만 만족스럽지 못한 수준이다. 설상가상 식후 카페에서 마시는 달디 단 과일 차가 혈당을 급속도로 올릴 것을 생각하니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잠시, 올해 휴직했으니 점심 도시락을 싸 볼까? 생각했지만 그러기엔 나의 큰 희생이 불가피하다. 생각만 해도 억울하다.
고민하다가 국산 스테인리스 보온 도시락만 검색하던 3월 초, 남편의 2월 점심 식대가 나왔다.
“뭐야? 25만 원? 이거 맞아? 명절도 며칠이나 있었고 회사에서 점심 사준 날도 있었다며. 2년 전 근무할 땐 점심 식대가 10만 원 초반이었잖아?
나의 말에 남편이 대꾸한다.
“그때랑 같나 뭐. 기본 밥값이 다 올랐잖아. 카페도 자주 갔고 말이야.”
25만 원은 우리에게 한 달간 주 2회 한살림, 품앗이 마을에서 싱싱한 유기농 식재료를 사서 풍성하게 식사를 차릴 수 있는 돈이다. 나는 남편의 점심 식대 이야기를 듣자마자 몇 주간 장바구니에 담아두기만 했던 고가의 국산 스테인리스 보온 도시락의 주문 버튼을 눌렀다. 그의 의사 따윈 묻지도 않은 채 앞으로 점심 도시락을 싸 주겠다고 했다. 고분고분한 스타일인데 의외로 저항한다. 혼자 회사 탕비실에 앉아 점심 먹는 모습이 상상되지 않는다. 직원들과 함께 밥 먹으며 친해져야 하는데 도시락 싸 가면 그런 기회가 사라져서 직장생활이 힘들어질 수 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도시락 준비해 본 적 있냐? 휴직인데 좀 쉬지 왜 사서 고생하려 하냐며 완곡하게 거절해 왔지만 나는 이미 첫 도시락 반찬을 고민하고 있었다.
3월 첫 주 목요일부터 남편은 도시락을 들고 회사에 가기 시작했다. 창피하다며 커다란 백 팩에 도시락을 숨겨 다니는 것을 빼면 도시락에 적응이 된 듯싶다.
점심 도시락 준비를 쉽게 생각한 건 사실이다. 전날 저녁 준비할 때 밥, 국, 반찬을 평소보다 넉넉히 만들어 놓았다가 다음 날 아침 대충 챙겨주면 되겠지 생각했다. 그런데 도시락을 준비하다 보니 없던 마음이 생긴다. 기왕이면 밥은 새로 한 것, 반찬도 따뜻하고 싱싱한 것으로 해야지 하는 욕심 말이다.
갓 지은 밥을 싸 주기 위해서는 전날 잡곡을 씻어 불려야 하고 최소 6시 50분에는 일어나서 취사 버튼을 눌러야 한다. 알람이 울리면 벌떡 일어나 취사 버튼을 누르고 그 사이 15분 정도 거실 매트 위에서 스트레칭을 한다. 실컷 자고 일어나서 부랴부랴 남편과 아이를 챙기던 불과 며칠 전에는 상상도 못 해본 그림이다.
같은 반찬이나 국은 최대 이틀을 넘기지 않고, 제철에 나오는 건강한 먹거리를 사용해서 반찬을 만들려 하다 보니 온라인 마켓 방문이 뜸해졌다. 대신 로컬푸드마켓이나 한살림에 직접 방문해서 그때그때 필요한 신선한 재료를 소량 구매하게 된다. 온라인 장보기는 편리하긴 하지만 포장할 때 플라스틱과 스티로폼을 과도하게 사용해서 상자를 열 때마다 지구에 못 할 짓 한다는 생각에 괴로웠는데 정말 잘 됐다. 매일 소량 장을 봐서 요리하니 식재료 낭비도 줄었다. 주말에만 왕창 장을 봐서 냉장고에 쌓아두고 어디 있는지 기억 못 해서 썩어 버리는 것들이 정말 많았는데 요즘은 그럴 일이 없다.
이런 나의 수고를 아는지 처음 며칠 회사에서 따돌림 당하겠다고 걱정하던 남편도 군소리 없이 도시락을 챙겨가서 잔반 없이 깨끗한 도시락 가방을 가지고 온다. 남편이 도시락을 가져와서 먹는다는 것이 소문이 났는지 젊은 직원 2명도 주2~3회 정도 도시락 싸 오기에 동참해서 셋이 함께 각자 준비해 온 도시락을 먹으며 이야기도 나누었다고 했다.
사실, 다가가기 쉽지 않은 과묵한 성격인데 설상가상 타 시도에서 전입한 지 한 달도 안 되어 혼자 도시락을 먹는 까탈스러운 모습까지 보여서 회사 내 인간관계가 힘들어지는 것 아닌지 걱정했는데 정말 다행이다. 점심을 느긋하게 먹어도 40분 이상 시간이 남아서 음악을 들으며 회사 인근 천변을 매일 걷는단다. 운동하라는 말에 꿈쩍도 않던 사람이 매일 1만 보 이상을 걷는다고 하니 건강 문제로 잔소리할 일이 줄었다.
며칠 전엔 점심 식사를 마친 남편이 들뜬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다. 평소 이름을 막 부르며 무례하게 굴던 선배 팀장이 우연히 쇠고기 듬뿍 들어간 잡채를 반찬으로 먹고 있는 남편을 보고 부럽다는 말을 여러 번 하며 선식을 물에 타 먹던 상황을 설명했다. 전화기를 붙잡고 누가 먼저랄 것도 낄낄 소리를 내며 웃었다.
우연히 뉴스 기사를 보다가 밥값 고공행진으로 구내식당 이용직원이 전년 대비 20% 이상 늘었다는 내용을 읽었다. 예전엔 점심 도시락을 준비하는 사람을 보며 ‘유별나다.’ 생각했는데 요즘 물가가 너무 오르다 보니 도시락은 더 이상 특별한 것이 아니라는 기사도 보인다.
아침 일찍 분주히 끓이고 굽고 부쳐서 준비한 도시락을 남편 손에 건네고 돌아서면 싱크대에 수북이 쌓인 설거지거리가 비로소 눈에 들어온다. 창문을 알고 환기를 시킨 후에 설거지하다
가 ‘이러려고 휴직했나? 출근 때랑 똑같이 바쁘네.’라며 한숨이 나올 때도 있지만 내년에 복직해서 출근 전쟁이 시작되면 도시락 싸 주던 일은 전설이 되겠지 싶으니 이 시간이 귀하게 느껴진다.
나 하나 수고해서 남편 건강관리, 알뜰한 살림 운영, 환경을 생각하는 소비까지 한다는 자부심도 있다. 아무튼 올해 1년은 꾸준히 도시락 싸는 알뜰한 아내로 살아볼 참이다.
첫댓글 아주 톡톡 튀는 수필 입니다.
내용이 젊어 신선합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