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63) -벨라스케스의 ‘세비야의 물장수’
벨라스케스(1599-1860)는 스페인의 세비야에서 부유한 중류층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교육도 아주 많이 받았다. 당시에는 벨라스케스만큼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이 화가가 되는 일은 드물었다. 당시에는 화가를 캔버스에 물감을 바르는 노동을 하는 사람 정도로 알았다.
11살이 되던 1610년에 세비야에서 화가인 파체코의 문하로 들어가서 그림을 배웠다. 파체코는 지적 수준이 아주 높았다. 파체코도 거의 양자처럼 대해 주었다. 그러다가 사위로 삼았다. 파체코는 세비야에서 지적 엘리트, 특히 인본주의 학자와 시인들을 많이 소개해 주었다. 파체코도 그랬지만 당시의 세비야 화가들은 인습적인 그림을 판박이 하듯이 그렸다. 그러나 세비야의 사람들을 보면 일상생활에서 어느 곳보다 많은 볼거리를 제공해 주었다. 벨라스케스는 이들에게서 소재를 찾고, 자연주의 기법으로 그림을 그렸다.
당시의 화가들이 아틀리에서 정물화나 인물화를 우아하게 그렸다. 벨라스케스는 새로운 기법으로 그렸다. 정물화와 인물화를 합쳐서 그리기도 하고, 일상의 생활을 화폭에 담기도 했다.
술집을 마시면서 작은 소리로 이야기를 나누는 남자들, 식당이나 가정에서 음식을 준비하는 여인들, 늙은 물장수 등을 그렸다. 이러한 광경을 스페인어로 ‘보데고네스’라고 했다. 선술집 정도의 의미이다. 이러한 풍경은 문학이나 대중적 이야기에 흔히 등장하는 환경이다. 벨라스케스는 종교화도 그렸다. 종교화도 보데고네스를 배경으로 삼았다. 미켈란젤로와 카라바조의 그림을 배웠다. 빛과 어둠의 극적인 대비를 흔히 사용했다.
18세 때 그림 첫 작품도 전해온다. 초기에는 자연주의를 한 단계 끌어올리는 작업을 했다. 다시 말해 미술은 자연의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자연을 관찰하여 눈에 보이는 것을 화폭 속의 형상으로 변형시켰다. 세비야에서 그린 초기 작품 중에 가장 완성도가 높은 것이 ‘세비야의 물장수(1620)’와 ‘달걀 부치는 노파’이다. 이 시기에 벨라스케스는 ‘보데고네스’ 양식을 창안했다.
장인이자 스승인 페체코는 인맥을 동원하여 벨라스케스가 마드리드에서 자리를 잡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1623년에 스페인에서 왕의 보좌관으로 핵심 권력자인 올리바데스 백작을 소개받았다. 올리바데스는 자신도 세비야 출신이었으므로 궁정에 세비야 인맥을 만들기 위해서 열심히 뛰던 시기였다. 올리바데스는 벨라스케스를 궁정화가로 만들기 위해서 마드리드로 불러 올렸다(1623).
벨라스케스는 마드리드로 가면서 20세 때 세비야에서 그린 ‘세비야의 물장수’를 갖고 갔다. 이 작품은 그가 자연주의에 관심을 가지고 힘들여 그린 그림이었다. 결과로 사실주의 그림에 탁월한 기량을 발휘했다. 늙은 물장수가 젊은이와 소년에게 물을 팔고 있다. 당시의 벨라스케스는 세비야의 시민들이 살아가는 일상 생활과 피카레스크 소설(=악당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에 나오는 술집을 소재하여 그렸다.(보데고네스 양식)
세 명의 등장인물이 있다. 뒤의 사람은 어둠에 싸여있어 형상이 아주 흐릿하다. 앞으로 나올수록 강렬한 빛의 효과를 나타냈다. 빛이 반사되는 앞에는 두 개의 물항아리가 있다. 물항아리와 유리잔은 서로 부응하여 생명감을 느끼게 해준다. 이 작품은 서로가 미묘한 대조를 이루지만, 그 중에서 어둠과 빛의 대조는 아주 두드러진다. 세비야에서 시원한 물맛을 내기 위해 잔 안에 무화과 열매를 넣었다. 유리잔 속에 보인다.
벨리스케스는 이 작품을 그리기 위해서 소품을 실제로 구입하여 관찰했고, 인물들도 다양한 자세를 취하도록 구도를 잡았다. 세 인물은 현실에서 벗어난 이상적인 표현을 한 사람은 없다. 벨라스케스는 평범한 보통 사람들에게 고요하고도 명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도록 하여 영원성을 부여했다. 벨라스케스는 이 작품을 아주 아꼈다. 마드리드로 가져 간 것도 자신의 그림 솜씨를 자랑하고, 선전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이 그림은 벨라스케스의 초기 후원자이자. 펠리페 4세의 의전관이었던 후안 데 폰세카에게 팔렸다. 이 그림은 벨라스케스가 얼마나 사실적인 그림을 그렸는가를 보여주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