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재 지 : 내손동 산154-1
□지정사항 : 경기도 지정 문화재자료 제98호
임영대군(臨瀛大君, 1418~1469)은 세종의 제4왕자로 모후(母后)는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이고 이름은 구(璆)이며 자는 헌지(獻之)이다. 일찍부터 학문을 닦는 데 힘써 경서(經書)와 병서(兵書)를 공부하였고 군기(軍器) 제작에도 뛰어났다. 이를 안 세종과 문종이 화포(火砲)와 화차(火車) 제작의 감독을 명하였다. 또 화살의 비거리를 약 1,000보(步)까지 높여 “병기(兵器)와 군사(軍事)에 관한 지보(至寶)”라고 불렸다.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른후 여러 아우들의 동정을 살피자, 이를 눈치 채고 지금의 의왕시 내손동 모락산(慕洛山)으로 은신하였다. 임종에 즈음하여 자손들을 불러 모으고 유언하기를, ‘사후에 예장(禮葬)을 받지 말고 신도비를 세우지 말라’고 한 후, ‘나는 본디 안평(安平) 형님과 금성(錦城) 아우와 더불어 함께 절의(節義)에 죽고자 하였다’고 했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묘는 내손동 능안말로 뻗어내린 모락산의 줄기에 자리잡고 있다. 조선 제17대 왕인 효종(孝宗)의 왕릉 후보지로 임영대군 묘가 선정되었으나 같은 왕족인 관계로 다시 여주(驪州)로 옮겼다고 한다. 묘역은 조선 초기의 유행를 따라 3단 계체석(階砌石)의 구조로 조성되었으며 문인석과 장명등, 고석받침석의 옛 석물이 설치되어 있다. 복두공복(㡤頭公服)을 착용한 문인석은 안정된 신체 비례에 부드러운 의습선(衣褶線)을 갖추고 있으며 허리에는 야대(也帶)를 차고 있다. 장명등은 중대석(中臺石)과 하대석(下臺石)에 비해서 화사석(火舍石)이 더 높은 구조상의 특징이 있다. 또한 새로 호석(護石)을 두른 봉분의 우측에 방부개석(方趺蓋石) 양식의 묘표가 서 있다. 오석의 비신 앞면에 “조선국 왕자 임영대군 정간공지묘(朝鮮國 王子 臨瀛大君 貞簡公之墓)”이라 쓴 후 비신의 좌측에 “개국 오백삼십삼년 알봉곤돈 병월 일 중건(開國 五百三十三年 閼逢困敦 窉月 日 重建)”이라고 건립연대를 새겼으나 음기는 기록하지 않았다. 알봉(閼逢)은 고갑자(古甲子)로 1924년에 해당되며 병월(窉月)은 3월의 이칭(異稱)이다. 그리고 안평대군(安平大君)이 쓴 것으로 알려진 옛 묘표는 후손에 의하면, 1924년 묘표를 개수(改修)하면서 주변에 묻었다고 전한다.
한편 묘의 우측 구릉에는 사당(祠堂)이 세워져 있다. 원래 종가 뒷편 구릉에 있었으나, 약 150~180년 전에 지금의 위치로 이건(移建)하였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를 갖추었다. 1960년대에 사당의 단청을 새로 입히고 일부 보수를 하였고 2000년에는 사당을 완전히 해체한 후 쓸만한 재목만을 간추려 다시 원형대로 복원하였다.
사당에 올린 맞배지붕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지붕 양식으로 측면의 합각(合閣)이 삼각 형태로 짜여진 것이 건축상의 특징이다. 지붕의 양측면에는 박공널[朴工板] 아래로 장막처럼 늘인 방풍널[防風板]을 달았는데 이것은 비바람을 막기 위한 장치이다. 사당 뒤쪽과 좌우 벽면은 사고석벽으로 견고히 쌓았으며 정면에는 툇마루를 설치하였다. 지붕을 받치는 기둥의 하부에는 주초석(柱礎石)을 두었고 그 아래에 땅을 잘 다져서 1단의 지대(地臺)를 마련하였다. 지대는 사당을 보호하고 격을 높이기 위한 시설물이며 ‘1단 지대’를 순수한 우리말로 ‘외벌대’라고도 부른다. 사당 주위로 기와지붕 담장을 둘러 보호하고 정면에는 1칸 규모의 솟을대문을 세웠다.
사당의 실내 중앙에는 임영대군의 신주(神主)가 모셔져 있고, 나머지 공간에는 제기(祭器)와 제복(祭服)등이 보관되어 있다. 사당의 한 칸은 원래 서고(書庫)로 사용하면서 고문서와 유물을 두었으나 한국전쟁 때 산실(散失)되었다. 또한 종친회 주관으로 해마다 음력 정월 21일 정오에 기신제(忌辰祭)를 올리는데 전국에서 평균 150~200명의 후손이 참가한다. 그리고 기신제에 사용할 음식을 종가(宗家)에서 준비하여 사당으로 옮길 때 쓰던 ‘나무가마’가 예로부터 전해오고 있어 주목된다. 나무가마는 ‘가자(架子)’라고도 하는데 후손의 증언에 의하면 약 100여 년 정도 된 것이라 한다
첫댓글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