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통해 배우는 삶의 지혜 / 김광우
이솝은 행운의 여신의 도움을 받은 한 남자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행운의 여신은 보통 누구에게나 행운을 가져다주지만, 행운을 붙잡고 못 붙잡고는 그 사람에게 달려있기 때문에, 그 사람이 행운을 알아보지 못한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 그 이상, 쓸데없이 참견하지 않는 것이, 행운의 여신의 기본 방식인데, 다만, 여신은 자비로운 성격이어서, 행운을 가지고 와서 몰래 옆에 두고만 가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제대로 행운을 거머쥘 수 있도록, 때론, 일부러 눈에 띄기 쉬운 곳에, 행운을 놓고 가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런데 이 남자는 어찌된 셈인지, 행운의 여신이 아무리 알기 쉬운 장소에 행운을 두어도, 그 행운의 존재를 전혀 깨닫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여신도 바쁜 몸인지라 여간해서는 그렇게 몇 번씩 특정한 사람에게 행운을 가져다주는 일이 없지만, 그래도 이 남자의 경우는, 행운에 대한 주의력이 너무 없어서, 여신도 그만 화가 나서 몇 번이고 행운을 남자에게 가지고 가서 손을 뻗으면 금방 닿을 곳에 두었는데, 이 남자는 왠지, 자신만을 위해 준비된 그 행운을 일부러 요리조리 피하듯이 놓쳐버리고 맙니다. 그런데도 그는 입만 열면, 행운의 여신은 어째서 나만 빼놓고 다니느냐고 불평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더 이상 참지 못한 행운의 여신은 그 귀한 행운을 남자가 손에 넣을 수 있도록, 이 남자의 삶 자체에, 아주 조금만 손을 대기로 했습니다. 물론 그건 여신의 영역을 넘어서는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신은 이 남자를 보고 있으면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그가 무슨 일을 해도 잘 안 되는 건, 그가 불성실해서도, 그에게 장점이 없어서도, 바보여서도 아니라, 그저 행운을 찾는 방법, 붙드는 방법을 너무 모르기 때문이야. 그것을 조금만 알면, 이 남자의 인생은 절로 열릴 텐데.’
그래서 여신은, 도무지 주의력이 산만하여 주위를 잘 살펴보지 않고 남의 말도 귀담아 듣지 않는 이 남자에게, 아주 조금만, 침착하게 주위를 둘러보는 습관을 갖게 해주었습니다. 그런 다음 여신은, 성격이 조급하여, 머리에 뭐가 떠올랐다 하면 두 번 다시 생각하지 않고 이내 행동해버리는 이 남자에게, 아주 조금만, 그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지고 올지 한순간만 생각해보는 습관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또, 어디서 주워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자신이 생각한 것처럼 말하는 이 남자에게, 아주 조금만, 정말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인지 자신에게 묻는 습관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자칫하면 사물의 나쁜 면만 보고 걱정하는 남자에게, 아주 조금만, 모든 사물에 숨어있는 가능성을 보고, 그것을 향해 돌진하는 용기 같은 걸 주었습니다. 요컨대 이 남자가 사회와 사람 그리고 자기 자신을 대하는 방법에, 아주 조금 변화를 준 것입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이 남자의 행동에 그 나름대로 미덕이 갖춰지기 시작했습니다. 그것과 동시에. 적극성과 침착성, 그리고 좋은 의미에서의 계산 같은 것이 몸에 배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되자, 저절로 행운을 찾는 방법도 알게 된 것인지 하는 일도 점점 잘 풀려나갔습니다. 조금씩 성공을 거두게 된 남자는, 과감하게 무역을 시작했습니다. 맨 처음, 아시아에서 들여온 후추가 비싼 값에 팔려 그 돈으로 밀가루를 사서 북국으로 가지고 갔더니, 마침 그 지방에 기근이 들어 밀가루도 비싼 값에 팔렸습니다. 그 돈으로 털실을 사니, 이번에는 혹독하게 추운 겨울이 와서 독점한 털실이 비싼 가격으로 날개 돋친 듯이 팔렸습니다. 남자가 노리는 건 모조리 적중했고, 순풍에 돛단 듯이 무슨 일을 해도 잘 되자, 남자는 그 성공에, 행운의 여신이 깊이 관여하고 있는 줄 꿈에도 모르고, 모든 것이 자신의 지능지수에 의한 결과이며, 이제 장사 요령을 배운 자신에게는 무서운 것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일생일대의 도박에 나선 결과, 폭풍으로 배가 난파하여 한순간에 모든 재산을 날리고 말았습니다. 그것을 보고 비로소 여신은, 중요한 지혜를 하나 더, 남자에게 주는 걸 깜빡 잊은 걸 깨달았지만, 이내, “뭐, 상관없어, 이번 일로 그것도 배웠을 테니까” 이렇게 중얼거린 뒤, 행운의 수레바퀴를 굴리며, 누군가에게 새로운 행운을 주기 위해 다시 출발했습니다.
지능검사를 통해 측정되는 소위 지능지수IQ는 지성적 지능을 말합니다. 지성적 지능은 다중지능의 일부분일 뿐입니다. 다중지능의 매우 중요한 능력이 내면적 지능으로 이는 수양을 통해 마음속에서 자라는 능력, 곧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내면적 지능은 감정으로 가는 통로로서 곧 감성적 지능입니다. 감성적 지능은 마음이 지닌 힘과 능력으로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감정이입 능력과 그들을 배려하고 그들과 협동하고 사회적 유대감을 형성해나갈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예의, 책임감, 주의력, 자제력 등이 감성적 지능에 속합니다. 감성적 지능을 측정하는 것이 감성지수EQ입니다.
감성지수EQ는 마음의 수양을 통해 행운을 알아보는 능력입니다. 지능지수IQ가 아무리 높아도 자신의 격정과 충동을 조절하지 못하면, “자신에게는 무서운 것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하게” 되어 “한순간에 모든 재산을 날리고” 만 이솝의 남자가 될 것입니다. 지능지수IQ는 지식의 습득을 통해 계발할 수 있지만, 감성지수EQ는 감정을 순화하고 논리와 이성을 뛰어넘어 대상을 직접적으로 인지하는 직관을 성립시키는 것입니다.
직관은 삶의 본질을 파악하게 해주는 지혜입니다. 직관을 ‘내면의 소리’ 혹은 ‘영혼의 소리’라고 하는데, 지혜를 주어 최선의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지만 오류를 범했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아와 직관을 혼동한 것입니다. 자아와 직관을 구별하기란 쉽지 않은데, 생각이 많은 사람들이 구별하는 데 더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들은 직관을 사고능력인 오성과 혼동합니다. 논리적 사고에 의존하는 자아가 우위를 점하면 삶의 본질을 파악할 수 없습니다. 논리적 사고의 중요성은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치닫지 않게 해주고, 현실감을 잃지 않도록 돕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직관과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지나치게 논리적이 되면 삶의 본질을 파악할 수 없습니다.
헤르만 헤세는 말했습니다. “지식은 전달할 수 있지만, 지혜를 그렇게 할 수는 없다. 지혜는 찾아낼 수 있고, 그것에 따라 살아가며, 그것을 힘으로 사용하고, 그것으로 기적을 행할 수도 있지만, 그것을 입 밖에 내어 말하고 남에게 가르칠 수는 없다.” 지혜를 가르칠 수는 없지만,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지혜인지는 말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행동을 늘 관찰하고 반성하는 것, 용기와 확신으로 근심과 두려움을 제압하는 것, 자신의 분수를 인정하고 사랑하는 것, 화, 흥분, 일중독, 스트레스를 멀리하는 것은 지혜입니다.
감정을 순화하고 직관을 성립시키는 훈련은 예술을 이해하는 가운데 가능합니다. 예술은 삶의 본질에 다가가려는 인류의 노력이기 때문입니다. 삶의 본질은 지성적 지능으로는 파악되지 않지만, 예술을 통해 감정을 순화하는 가운데 직관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예술가들의 삶과 그들의 작품을 통해 감성적 지능이 매우 높은 사람들의 다채로운 삶과 삶에 대한 그들의 수준 높은 표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부와 명성을 추구하기 위해 정치에 참여하여 정치적 선전 그림을 그린 예술가도 있으며, 자만심에 가득 차서 교활하고 비열해진 예술가도 있고, 사회적 유대감을 형성하지 못하고 사회를 등진 예술가도 있으며,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정신분열을 일으킨 예술가도 있고, 절망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예술가도 있으며, 평생 여성을 두려워하여 독신으로 고독한 삶을 산 예술가도 있고, 다른 예술가들의 작품을 모사하면서 그들의 감정을 이해하고 공감하여 감정이입 능력을 고양시킨 예술가도 있습니다. 그들의 작품에는 그들의 사고, 의도, 감정 그리고 모든 감각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작품을 제작할 때에 플로우경험을 맛보았습니다. 그들 삶의 다양성과 작품의 다양성에서 부분적으로 공감이 생긴다면 감성적 지능을 계발하는 것으로 이를 통해 삶의 본질을 파악하는 직관이 절로 생길 것입니다.
미술의 아마추어amateur 혹은 딜레탕트dilettante가 되길 바랍니다. 아마추어는 라틴어의 아마레amare, 즉 ‘사랑하다’라는 동사에서 파생한 말로 자신이 하는 일을 사랑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와 유사하게 딜레탕트도 ‘~에서 즐거워하다’라는 라틴어 델렉따레delectare가 어원으로 특정 활동을 즐기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두 단어의 본래의 뜻은 성취보다는 경험에 좀 더 비중을 두는 것이었으며, 얼마나 많은 성취를 하는가보다는 어떤 일을 하는 과정에서 얻게 되는 주관적 보상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 두 단어만큼 경험 자체의 소중함에 대한 우리의 태도 변화를 극명하게 나타내주는 건 없습니다.
춘추전국시대 송나라 사람 莊子(장자)가 말한 逍遙遊(소요유)에서 遊(유)는 유람하다wandering(or flowing)는 뜻입니다. 소요유는 자유롭게 이리저리 유람한다는 말입니다. 장자는 유가 올바른 삶의 길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외적 보상에 연연해하지 않고 자발적이며, 완전한 헌신의 삶, 즉 완전한 자기 목적적인 경험을 의미합니다. 아마추어와 딜레탕트가 바로 이런 자기 목적적인 경험, 즉 플로우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능동적이지 않고 수동적일 때 대중적인 여가, 대중문화, 심지어 고급문화까지도 우리의 정신을 좀먹는 기생충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들은 심리적 에너지만을 흡수할 뿐이며, 그 대가로 어떤 실재적인 힘도 제공해주지 않습니다. 결국 우리는 이전보다 더욱 지치고 의기소침하게 만들어줄 뿐입니다.
경험의 질을 통제할 능력이 있는가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은, 주의력을 조직해줄 만한 외적 요구 없이 혼자 있는 상황에서 그 사람이 무엇을 하는가의 여부입니다. 여가를 혼자 있는 좋은 기회로 활용하여 독서를 하는 것은 매우 유익하며, 내면의 통합뿐 아니라 세상과도 더욱 일치되는 느낌을 얻을 수 있습니다. 화가들의 다양한 삶과 작품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켜 그들의 세상과 일치되는 느낌이 생기기를 바랍니다.
('미술에서 길을 찾다 2' 서문에서 발췌)
첫댓글 행운을 찿는 방법이요...그거 아주 가까이에 있지요....
금과옥조같은 글이네요. 예술을 통해 삶의 본질을 알아낼 수 있다는 말이 참 신선하고 새롭게 다가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잘 읽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