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전쟁 3. 도요토미의 전쟁준비
조선통신사 황윤길과 김성일
by온기철 James Ohn43분전
한국아이닷트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전쟁준비와 통신사 파견
그의 보스였던 오다노부나가는 대륙정복에 대한 야망을 가끔 도요토미에게 토로했다. 자연히 그의 마음속에도 항상 대륙 지배에 대한 야망이 웅지를 트고 있었다.1585년7월, 간파쿠(관백) 취임후에는 가슴속에 간직해 두었던 포부를 입밖에 내기 시작했다. 그는 그의 어머니에게 명나라에서 어머님을 모시고 여름휴가를 보낼 약속을 하기도 했다.
일본전역을 장악하고 천황 으로부터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대권을 인정 받아 관백이 된 그는 기세가 등등 했다. 대륙 정복의 야망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 했다. 1587년8월 사쓰마(대마도) 성주 소씨 형제에게 일본통일을 조선에 알리고 조선왕이 자신을 배알 할 것을 요구 하라고 명령했다. 일년 안에 배알하지 않으면 조선을 침공 할 것이라고 알리라고 했다.
조선은 명나라외에는 외국과 통상을 하지 않는 것이 무역의 원칙이었다. 일본과의 교역은 대마도를 통해서 이루어 졌다. 일본 상인들은 부산에 설치된 왜관에 거주 하면서 교역을 했다. 도요토미도 싸스마를 통해서 조선과 소통을 해야 했다. 대마도는 농토는 거의 없고 대부분이 산으로 되어 있는 섬이어서 조선과 교역을 하지 않으면 먹고 살 수가 없었다. 소씨도 조선의 비위를 건들 수가 없는 처지 였다. 소씨는 알현 대신에 통신사를 파견 할 것을 조선에게 충고 했다. 그리고 도요토미를 신중하게 다루라고 당부 했다. 잘못하면 도요토미가 쳐들어 올 것이라고 경고 했다. 그러나 조선은 통신사 파견을 일단 거절했다.
소 요시토시 조선통신사 파견성사
일 년을 기다려도 대답이 없자 도요토미는 대마도 다이묘(성주) 소 요시토시에게 조선왕으로 하여금
자신을 알현하게 하라고 다시 재촉했다(1589년). 소 요시토시는 조선에 또 사신을 보냈다. 조선 측에서는 진도 사람 사화동을 잡아서 조선에 인계하라고 요구 했다. 사화동은 왜구가 되어 조선에 들어와 약탈을 했던 인물이었다. 성주 소 요시토시는 사화동 뿐만아니라 그동안 잡혀온 조선인들 까지 석방하고 통신사를 파견할 경우 험한 바닷길을 안전하게 안내 하겠다고 약속했다. 조선은 황윤길을 정사, 김성일을 부사로 정하여 통신사를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조선 통신사 도요토미 만나다.
1590년3월 통신사 일행은 한양을 출발했다. 약 4개월 걸려서 7월에 교토에 도착했으나 도요토미는 원정 중이었다. 또 4개월을 허비하고 11월7일에 토요토미를 대면할 수 있었다. 도요토미는 이들을 속국의 사신이 상국의 왕을 알현하러 왔다고 믿고 있었다. 반면에 통신사는 일본의 왕이 즉위한 것을 축하하러 온 것이었다. 도요토미는 이들 앞에서 무례한 행동을 하고 푸대접 했다. 며칠을 기다려서 겨우 답신을 받아 보았다. 그야말로 천인공노할 답변 이었다. 자신은 태양의 아들이고 명나라 400여주를 정복할 것이라고 장담했다. 자신을 전하라 하지 않고 합하라고 했다. 조선의 예물을 방물이라 부르고 통신사의 일본 방문을 입도라하여 조선을 조공국 취급했다.
황윤길과 김성일
1591년 초에 통신사는 조선에 돌아와서 선조에게 서로 상반되는 보고를 했다. 정사 황윤길은 필시 병화가 있을 것이며 풍신수길은 눈빛이 반짝 반짝하여 담과 지략이 있는 사람인 듯 합니다. 라고 아뢰었다. 그는 서인이었다. 부사 김성일은 그러한 정상은 발견하지 못하였는 데 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민심이 동요하게 하니 사의에 매우 어긋납니다. 풍신수길의 눈은 쥐와 같으니 족히 두려워할 위인이 못됩니다. 라고 반박했다. 그는 동인이었다.
두사람의 보고를 듣고 있던 유성룡은 김성일을 한쪽으로 불러서 “그대가 정사 황윤길의 말을 고의로 다르게 말하고 있는 데 도대체 어쩌려고 그러느냐?” 고 다그쳐 물었다. 김성일이 대답하기를 “나도 어찌 왜적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하겠 습니까? 다만 온나라가 놀라고 의혹 될까봐 두려워 그것을 풀어 주려고 그런 것입니다” 라고 했다. 유성룡은 동인 이었다. .
조선의 전쟁 대비
“조선이 부사 김성일의 말을 믿고 전쟁준비를 하지 않아서 임진왜란 때 조선이 패퇴 했다” “서인 정사 황윤길의 보고에 동인 김성일이 파당적인 무조건 반대로 나라가 망할 뻔 했다”. 통신사 의 상반된 보고는 조선이 당파싸움 때문에 망했다는 좋은 예로 곧잘 회자 된다. 그러나 도요토미의 회답서에 분명이 대륙침략의 야욕이 표현돼 있고 전쟁을 운영 했던 유성룡이 김성일이 터무니 없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통신사 귀국후 조선은 일본침략에 대한 대비를 시작 했다. 그러나 준비 할 기간은 겨우 일년 남짓이었다. 조정에서는 지방관들에게 성을 보수하고 쌓을 것을 종용 했다. 그러나 지방에서는 이 핑계 저 핑계로 제대로 시행하는 곳이 거의 없었다. 농사일을 하는 젊은 이들이 군사훈련을 해야 군대가 유지 되었는 데 농사일을 하지 군 훈련을 하려 하지 않았다. 중앙정부는 이런 상황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조정대신들은 일본정규군과 왜구를 구별하지 않고 그저 왜구로 생각하고 얕 잡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유성룡은 정읍 현감으로 가 있던 이순신을 전라 좌수사로 천거 했다. 전쟁 발발 일년 남짓 남은 1591년2월13일이었다. 이순신의 등용은 조선을 구할 수 있었던 신의 한 수 였다.
도요토미 조선침략 준비 완료
조선통신사 귀국 직후 1591년9월 도요토미는 전국 다이묘(영주)들에게 조선을 쳐들어 갈 것이라고 통보 했다. 동년 10월 도요토미는 가토 기요사마(가등청정)에게 규슈의 북단에 있는 나고야에 전진기지 건설을 맡겼다. 도요토미는 가토에게명을 정벌하면 20주를 하사 하겠다고 약속 했다 가토는 부하들을 불철 주야 독려하여 단 2개월 만에 전진기지를 완공 했다 침공 병력 17만대군이 이곳에 집결 했다.
1592년 음력1월 히데요시는 쓰시마 번주 소 요시토시에게 조선으로 하여금 일본에 복속하고 명나라를 정벌하는 과정에서 일본군의 길잡이를 맡을 것을 조선에 전하라고 명령하였다. 조선과의 관계가 악화되는 것을 두려워한 그는 “명나라를 정벌하는 데 길을 빌려 달라(가도입명)”는 완곡한 표현으로 바꾸어 조선과 교섭했으나 조선은 이를 거절 했다.
조선침공에 참여 했던 장수들은 도요토미와 출신지역이 같은 규슈와 혼슈 남단 즉 일본 서부 지역 사무라이들이 었다. 도요토미가 그랬듯이 모두 하급 사무라이 출신들로 도요토미에게 절대 충성하는
인물들이었다. 이들의 자손들은 명치유신의 주역이 되었고 4백여년 후 조선 정복에 성공 했다. 이들은 지금도 일본 우파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일본의 사무라이는 조선의 선비에 해당하는 상층 계급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평화로우 면 이들은 손가락을 빨아야 했다. 도요토미는 실업자가 된 사무라이들에게 무엇인가 탈출구를 마련해 주어야 했다. 센코쿠 시대를 끝내고 일본을 통일 시킨 후 도요토미는 대륙정복이라는 원대한 포부를 충족 시킴과 동시에 이들의 불만을 잠재우려고 했다.
4백여년 후 사무라이들의 불만은 다시 재현 된다. 명치유신으로 중앙집권 적인 근대국가가 만들어 지고 근대 개념의 군대가 신설 되자 사무라이는 아무 쓸데 없는 계급이 되었다. 전쟁이 업인 그들에게 대륙 침략보다 더 빈가운 일은 없었다.
1910년 일본과 조선의 국력 차이는 어마어마 한 것이었다. 일본은 조선을 보호하고 있던 청나라를
제압하고 영국과 쌍벽을 이루던 러시아를 굴복시킨 나라였다. 일본은 군대를 동원하지도 않고 무혈로 조선을 점령 했다. 한민족이 5000년 역사를 끝내는 데 500년이 걸렸다. 조선은 한민족의 터전을 일본에게 같다 바친 것이다. 그래서 조선이라는 나라는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1592년 임진전쟁은 조선이 나라를 말아 먹는 한 과정이라고 생각 한다. 1592년에는 동북아 정세가 1910년과 같이 조선에게 극히 불리하지는 않았다. 조선의 보호국이었던 명나라가 일본보다 월등하게 강한 국력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이 조총으로 무장하고 있었지만 조선에는 화포(대포)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조선 수군의 화력은 일본 수군을 압도 했다.
온기철의 브런치입니다. 역사를 주제로 한 수필을 쓰고 있습니다. 본직은 의사이고 취미는 골프와 역사 공부입니다. 지루한 역사를 재미있게 이해시키기위한 글을 쓰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