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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대학교에 들어가서 교양필수 과목 국어를 수강하면서 처음 받은 과제가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책을 읽고 독후감을 내는 것이었습니다. 이 책은 2차 세계대전 이후에 혼란하고 부조리한 세상을 고발하는 사회성 짙은 연극 대본이었습니다.
두 부랑자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는 한 외진 길가에서 고도를 기다립니다. 끊임없이 기다리는데 럭키와 푸조가 등장합니다. 그들은 세상의 현실을 대변하는 억압과 피억압의 관계 속에 있으며 희망이 없었습니다.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에게 럭키와 푸조는 그들에게 불안과 공포 그리고 불합리의 모습, 그 자체였습니다.
그렇지만 에스트라공와 블라디미르는 끊임없이 고도를 기다립니다. 고도는 오지 않았지만 한 소년이 다가옵니다. 이 소년은 절망적인 세상의 유일한 희망으로 떠오릅니다. 하지만 이 소년이 던지는 메시지는 ‘고도는 오지 않을 것이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는 절망 속에서 떠나지 않고 고도를 기다립니다.
저는 대학시절에 서점에서 이 책을 사서는 읽지 않았습니다. 너무 난해하고 재미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대충 백과사전을 보고 서평을 해내었습니다. 그러다가 30년이 지나서 뉴질랜드에 와서 겨우 숙제하는 마음으로 그 책을 읽어 보았습니다.
왜 교수님이 이 책을 읽게 했는지를 [고도를 기다리며]를 읽으며 헤아릴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기다리는 고도가 무엇인지, 누구인지, 모든 사람에게는 기다리는 자기만의 고도를 품고 살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람이 살아있는 한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누구를 기다리고 있습니까?
시편 130편의 시인은 그 실체가 불분명한 고도가 아니라 너무나 분명한 대상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 곧 내 영혼이 여호와를 기다리며 내가 그 말씀을 바라는도다. 파숫군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숫군의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그래서 오늘 설교제목이 [기다리며 바라는도다]입니다. 시인은 인생의 깊은 데서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그때의 심정이 바로 ‘기다리며 바라는 것’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누군가를 기다려 보았습니까?
경북 울산시 울주군 범서면 척과리에 전해져 오는 설화가 하나 있습니다. 남편이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부인은 남편이 오는지 잘 보기 위해 날마다 높은 산마루에 올라가 남편의 배를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많은 시간이 지나도 결국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남편이 무사히 돌아오길 간절히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내는 끝내 돌이 되었습니다. 그 이후 사람들은 그 돌을 망부석이라고 했습니다. 절개 굳은 아내가 외지에 나가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고개나 산마루에서 기다리다가 지쳐 돌이 되었다는 설화입니다. 이 설화는 발전해서 한국의 여러 지방에 방부석이라는 설화를 재창조했습니다.
시인은 떠나간,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5절에 보면 “나 곧 내 영혼이 여호와를 기다리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기다립니다.
여기서 ‘기다리다’(카바)는 ‘함께 묶다’ ‘강건하다’ ‘기대하다’ 등의 뜻을 갖고 있습니다. 왜 기다리느냐 하면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육간에 강건하게 되는 것입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말했습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카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주와 연합하여 강건하게 되어)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며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사40장31절). 이 말씀은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우리에게 잘 보여 줍니다.
사도 요한은 주님의 사랑하는 제자였습니다. 그는 다른 제자들과는 다른 죽음을 죽었습니다. 교회전승에 의하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한결같이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를 당합니다. 그렇지만 서기 100년경에 94살의 나이에 사도들 중 유일하게 순교하지 않고 편안하게 임종을 맞았다고 전해 내려옵니다.
그렇지만 그의 일생은 교회의 기둥이라고 불리우며 숱한 박해 가운데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갔습니다. 95년 경에는 로마 황제 도미티아누스의 박해로 인해서 밧모섬에 유배를 당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유배지 밧모섬에서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96년 도미티아누스가 암살되자 사면받아 에베소스로 귀환하여 요한 복음서와 요한 서신을 기록했습니다. 그때 그는 너무 노쇠하여 제대로 설교를 할 수 없어 항상 신도들에게 부축을 받았다고 합니다. 요한은 항상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쳤습니다. 매일 같은 말만 반복하는 것에 대해 신도들이 불평을 하자 요한은 “사랑은 그리스도 교회의 기초요, 사랑만 있으면 죄를 범하지 않는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요한은 ‘사랑의 사도’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런 그가 요한계시록 맨 마지막에 무엇이라고 기록했습니까?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신 예수님을 소망하면서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했습니다(계 22:20).
성도 여러분, 우리도언제나 주님을 기다리며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 기다려야 하겠습니까? 시인은 6절에 말하기를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더 기다리나니...”라고 합니다.
어떻게 기다려야 하나요?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 기다려야 합니다. 파숫꾼이 아침을 어떻게 기다립니까?
이기영 집사님께 한번 물어보십시오. 군대생활을 DMZ 철책근무를 했습니다. 저는 대학교 2학년 때 전방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때 DMZ 철책 바로 앞에서 야간 보초를 선 적이 있었습니다. 깜깜한 한 밤중에 군인과 함께 소초에서 보초를 서는데, 낮에는 안받는 훈련을 받아서 피곤하고 잠은 오는데, 옆에 있는 군인은 똑바로 안한다고 겁을 주고, 북쪽에서는 대남방송소리가 계속 들려오는 그런 야간근무였습니다. 그때에 왜 그렇게 시간이 안가는지, …. 어서 빨리 아침이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얼마나 들었는지 모릅니다.
군대 이야기는 여자 분들에게는 별로 마음에 와 닿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럼 이 구절을 이렇게 읽으면 됩니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대신에 “드라마 다음 편이 나오길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지금이야 인터넷으로 시도때도 없이 드라마를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정말 재미있는 드라마를 그때그때 보려고 하면 기다려야 합니다. 엄청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보다 드라마를 더 기다립니다. 그렇지만 드라마를 기다림보다 더 하나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이 간절함을 시편 42편에서는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이것을 더 원문에 가깝게 번역하면 "하나님, 사슴이 시냇물 바닥에서 물을 찾아 헐떡이듯이, 내 영혼이 주님을 찾아 헐떡입니다."(시 42:1 / As the deer pants for streams of water, so my soul pants for you, my God.)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시냇물은 '와디'(wadi: 건천)인데, 평소에는 바짝 말라 있다가 비가 올 때 잠간 물이 흐르는 개천이 와디입니다. 사슴이 너무 목이 말라서 개천을 찾아왔는데, 모양만 개천이지 물 한 줄기 흐르지 않는 마른 개천입니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개천 바닥을 핥아보는 목마른 사슴의 심정처럼 그렇게 간절하게 하나님을 필요로 한다는 신앙고백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이렇게 간절하게 하나님을 필요로 합니까? 아니면 계셔도 그만 안 계셔도 그만, 만나면 좋고 못 만나도 아쉬울 것 없는 그런 존재입니까?
"나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며, 나를 간절히 찾는 사람을 만나 준다."(잠 8:17 / I love those who love me, and those who seek me find me.) 이 말씀처럼 우리가 주님을 필요로 하고 그래서 주님을 간절히 찾을 때에 주님께서는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자기를 찾아오는 사람을 절대로 빈 손으로 돌려보내시지 않습니다. 주님을 만나는 사람은 반드시 주님의 은총을 입게 됩니다.
이렇게 파숫군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 하나님을 기다리는 자에게는 특징이 있습니다. 5-6절을 다시 한 번 읽어보십시다.
“나 곧 내 영혼이 여호와를 기다리며 내가 그 말씀을 바라는도다. 파숫군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숫군의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5-6)
본문에서 ‘기다리다’(카바)는 ‘기대하다’ ‘바라다’의 뜻도 갖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다림에는 기대하는 것이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무엇을 기대할 것입니까? 우선 하나님의 복 주심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능력주심을 기대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다 좋습니다.
그렇지만 시인은 큰 고통의 깊은 데서 구할 것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가 기대했던 것이 무엇인지 보십시오. “내가 그 말씀을 바라는도다”라고 했습니다. 무엇을 바랬다고요 ‘그 말씀’입니다.
여기서 ‘말씀’(다바르)의 어원은 ‘정돈하다’ ‘인도하다’라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실때에 어떻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이 가라사대”입니다. 말씀하셨습니다. “빛이 있으라” 하니 낮과 밤이 정돈됩니다. 궁창의 물이 나누어져서 하늘과 땅이 생깁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니 우주질서가 형성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무질서를 질서로 바꾸어 보기에 좋게 하며, 어둠 속에서 빛으로 인도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능력이 있는지를 말합니다.
(1) 말씀은 거듭나게 하는 능력입니다.
(약 1:18)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2) 말씀은 살리는 능력입니다.
(시 119:50) 이 말씀은 나의 곤란 중에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음이니이다
(3) 말씀은 점점 왕성해 갑니다.
(행 6:7)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4)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습니다
(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기다리며 무엇을 바라고 있습니까?
솔로몬은 일천번제를 드린 후에 하나님이 소원이 무엇인가를 물으셨을 때에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다. 솔로몬은 장수, 부, 원수의 생명, 부귀, 영광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다바르)을 구하였습니다(열왕기상 3장 참조). 하나님은 이것을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고, 살리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왕성케 합니다. 살았고 운동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기대하십시다. “주여 말씀하여 주옵소서”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슨 신비한 방법으로 받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꿈이나 환상 속에서, 어떤 신령한 사람의 입에서 들으려고 합니다.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뜻이 성경에 새겨져 있습니다.
미국이 낳은 대작가 월레스는 본래가 장군이요 장관이요 외교관이며 문필가로서 평소에 기독교 신앙에 대하여 적개심을 품고 있던 불신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큰 작품 하나를 쓰고 싶어했습니다. 그것은 어떤 종류의 작품이냐 하면 반기독교적 작품이었습니다. 사람이 작품만 읽으면 기독교를 떠나서 적그리스도가 되게 하는 작품이었습니다.
그는 많은 자료를 수집하고 나서 마지막으로 성경의 약점과 거짓, 그리고 허구성을 폭로하기 위하여 신구약 성경을 읽기로 작정했습니다. 창세기에서부터 읽기 시작한 그는 복음서를 다 읽기 전에 마음이 뜨거워지기 시작하였고 요한계시록을 다 읽기 전에 돌 같은 마음이 물 같이 녹게 되었습니다. 큰 감동에 복받쳐서 그리스도에게 항복한 그는 기독교를 농락하려던 붓을 꺾어버리고 새로운 붓으로 그리스도의 사랑과 속죄를 주제로 하여 만인의 심금을 울리는 대작을 쓰게 되었으니 그것이 저 유명한 작품 '벤허'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기를 노력하십시다. 그리고 그 말씀에 기대하십시오. 그러기 위해서 성경의 다섯 손가락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구하시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는 듣기, 둘째는 읽기, 셋째는 묵상하기, 넷째는 암송하기, 다섯째는 성경연구입니다. 여기에 충실하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구하며 기대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을 맺겠습니다.
여러분이 그토록 기다리는 고도는 무엇입니까? 로또가 하나님이어야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바라며 삽니까? 잘먹고 잘사는 것이 아니라 나를 살리고 변화시키며 왕성하게 해 줄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풍성한 구속을 맛보며 사시는 여러분과 저가 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