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탕자의 비유 - 명인서 목사
오늘 이 비유는 너무도 잘 알려진 이야기이고, 오랜 시간에 걸쳐 회화로 단편소설로 재탄생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본문의 두 아들의 이항대립을 통해 아버지의 마음을 잘 나타내며, 회개와 은혜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제자들과 바리새인들 앞에서 하셨습니다.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의 말씀 들으려 몰려드는 것을 당시의 종교 엘리트인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은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당시 유대교의 전통과 상관없는 행보를 보이시는 예수님에 대해 불만이 컸을 것입니다. 이러한 긴장감이 느껴지는 현장에서 예수는 3가지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1번째로 잃은 양의 비유: 99마리 양을 두고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헤매다가, 찾으면 기뻐하신다.(유목민) 2번째로 드라크마의 비유: 한 여자가 10 드라크마를 가지고 있는데, 하나를 잃어버리면 샅샅이 뒤져서 찾는다. 찾아서 기뻐한다. (화폐, 상인뿐 아니라 누구나 이해) 3번째 탕자의 비유: 킁 아들과 작은 아들, 방탕한 둘째가 돌아오면 아버지는 기뻐서 잔치를 베푼다. (정주민) 위의 3가지 비유는 모두 “잃어버린다~ 찾는다~ 기뻐한다” 의 구조로 되어있습니다. 다만 1,2의 경우는 직접 찾아 나서서 데려오고, 3은 아버지가 찾으러 가지 않고 기다립니다. 인간은 스스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에 그의 결단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본문으로 들어가면 먼저 아버지와 함께 사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다스림을 받으며 은혜와 사랑을 받는 곳으로 묘사됩니다. 그런데 둘째가 아버지에게 자신 몫의 유산을 먼저 달라고 요구합니다. 유대인들은 이 비유를 읽으며 둘째의 뻔뻔함에 놀라지만, 그것보다도 아버지가 그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에 더 경악합니다. 유산이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받는 것인데, 미리 댕겨서 달라는 것은 아버지에게 급사하라는 것과 같습니다. 그는 자기 몫을 가지고 먼 나라로 갑니다. 아버지를 떠나 자기 마음대로 살면 행복할 것 같아서. 그러나 아버지를 떠나는 것이 죄악입니다. 여기에서 먼 나라로 갔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거리가 멀다는 뜻보다는 아버지를 완전히 떠났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먼 나라에 간 그는 허랑방탕하여 재산을 낭비하고 재산관리에 실패합니다. 설상가상으로 그 나라에 흉년이 들어 모두의 삶이 궁핍해 집니다. 인재와 천재지변으로 그는 먹고 살기 어려워졌습니다. 그러자 그는 유대인인데도 이방인에게 의탁하여 일자지를 구합니다. 그래서 돼지 치는 일꾼으로 살게 됩니다. 돼지가 유대인들에게 부정한 동물이니, 그는 인생의 밑바닥까지 떨어진 갓이지요. 돼지가 먹는 먹이라도 마음껏 먹고 싶은데‘ 그것마저 여의치 않자 그는 아버지를 생각합니다. 본문 17~19절에 보면 그는 아버지 집에 가서 품꾼의 지위로 살려고 합니다. 차마 아들로 살지는 못하고. 고난이 그를 아버지께로 향하게 했습니다. 그는 스스로 돌이켰습니다. 그는 아버지께 돌아가는 구원의 길을 택했습니다.
20절 아버지는 동구 밖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는 아들을 보았고, 먼저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춥니다. 잘 먹고 통통해서 좋은 옷 입고 떠난 아들이 피골이 상접하여 누더기를 입고 맨발로 오는데, 아버지는 급히 맞으러 오십니다. 나이든 어른이 뛰는 것은 경망스런 일이고, 유대인의 옷은 통으로 된 긴 옷이므로 뛰다가는 다리가 걸려 넘어질 수도 있는데,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아들의 회개보다 아버지의 은혜가 앞섭니다. 아들의 지위를 회복시키십니다. 좋은 옷, 가락지, 신발로 신분회복을 가시적으로 보여줍니다. 가문의 권한을 위임하고, 종이 아니라 자유인임을 선언합니다. 그뿐 아니라 미리 준비해 둔 바로 그 송아지를 잡아 천국의 잔치를 벌입니다. 여기까지는 탕자가 뉘우치고 돌아오는 해피엔딩 같습니다.
그런데 큰아들이 등장합니다. 그는 밭에서 일하다 돌아온 성실한 사람이고 효자요, 모범생 같습니다. 몸은 아버지 곁에서 아버지 잘 모시고 있는 듯하나, 감사와 순종에서 나오는 섬김이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목적을 위해 열심히 종노릇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자기 몫을 받아가 탕진한 둘째가 돌아왔으니, 큰아들 몫을 둘째에게 나눠줘야 하니 속상하고 억울합니다. 그도 또한 구원받아야 할 대상이며, 자신의 노력으로 의의법을 추구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상징한다고 하겠습니다. 죄인이 구원받는 것을 기뻐하기 보다는 자기의 이익을 중심으로 판단하고 정죄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둘째를 그리워하고 끝까지 사랑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모릅니다. 28절에 큰아들이 화를 내녀 집에 들어오지 않자, 아버지가 또 문밖으로 나오십니다. 그리고 큰아들을 잔치에 참여하라고 권하십니다. 여기서 ‘권하다’의 헬라어 파라칼레오는 보혜사 성령을 이르는 파라클레이토스와 같은 뿌리입니다. 아버지는 둘째 탕자도 첫째 교만한 자도 다 품으시고, 부르시고, 초청하사는 풍요로운 은혜의 하나님이심을 보여줍니다.
29절에 아버지를 비난하는 큰아들은 돌아온 둘째를 ’내 동생’이라 부르지 않고, ‘아버지의 이 아들’ 이라고 칭합니다. 멸시와 경멸과 적대감을 나타내며 동생에게 아무런 사랑이 없음을 보여줍니다. 아버지는 그에게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며 불평할 이유가 없다고 달랩니다. 그는 아버지가 둘째만 사랑하고 자기는 사랑하지 않는다고 오해했습니다. 주님의 비유를 듣는 세리와 죄인들, 그리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어느 누구도 덜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우리 모두는 둘째 혹은 첫째처럼 하나님을 떠나 잃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에 힘입어 다시 아버지의 집에서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인문학적 입장에서 이 비유를 읽으면, 한 가지 의문이 듭니다. 왜 어머니가 등장하지 않는가? 맹목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은 어머니의 사랑이 아닌가요? 아버지의 존재는 법, 질서, 정의의 상징이고? 저 같은 의문을 가지고 나름대로 답을 구한 예술가들이 있습니다. 17세기의 화가 램브란트는 아들의 어깨를 감싼 아버지의 두 손을 하나는 어머니의 곱고 작은 손으로, 따른 하나는 어비지의 매듭진 굵고 큰 손으로 그렸습니다. 1소설가 앙드레 지드는 1907년에 “돌아온 탕아”라는 단편소설을 발표합니다. 이 소설에는 어머니도 등장하고, 셋째 아들이 나옵니다. 탕아가 돌아오기 까지는 성경 내용과 일치합니다. 아버지는 진심으로 기뻐하시고, 형은 동생에게 앞으로 이 집에서 살며 지켜야할 규범들과 행동거지를 세세히 규정합니다. 어머니는 집 떠나려는 셋째를 말려달라고 안타깝게 청합니다. 그러나 둘째는 동생을 떠나보냅니다. 이게 무슨 의미인가? 기독교 문화권 안에서 인문학은 성경을 토대로 성장했습니다. 고전문학, 예술은 인간의 시선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그 시대에 투사합니다. 앙드레 지드는 왜 셋째 아들을 등장시켰는지, 둘째는 왜 셋째를 말리지 못하는지 공감할 수 있게 됩니다. 지드 소설의 주인공들은 거부하지 못할 악(유혹)에 이끌려 방황한 후에 제자리를 찾아갑니다. 작가가 높이 평가한 것은 결과가 아닌 그들의 방황입니다. 진실에 도달하려면 오욕의 길을 거쳐야하고, 고뇌와 실패 후에 자기만의 규범을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주 집을 떠나고 아버지를 떠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한 번도 자기 자식을 떠나보낸 적이 없습니다. 방황하든 규범을 어기든 그 모습과는 상관없이 아버지 가슴 속에는 우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멀리 떠나는 사람을 동경 합니다. 머나먼 곳에 가서 어떤 체험을 하고 돌아 온 사람들에 대한 선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떠나다’라는 말은 이미 ‘돌아옴’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떠나 본 사람이 더욱 집과 아버지의 은혜를 뼈저리게 느낄 수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