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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
호(號)는 본명인 명(名)과 자(字) 이외에 누구나 쉽게 부를 수 있도록 지은 또 다른 이름으로 아호(雅號), 당호(堂號), 필명(筆名), 별호(別號) 등으로 부릅니다.
그리고 택호(宅號)와 시호(諡號) 예명(藝名) 또는 법명(法名)도 넓은 의미로 호(號)라 할 수 있습니다.
아호(雅號)는 문인(文人)이나 예술가(藝術家) 등의 분들이 시문(詩文)이나 서화(書畵) 등의 작품에 본명 이외에 우아한 이름이라는 의미로 사용하는 이름입니다.
이를 글 쓴 사람의 이름이라 하여 필명(筆名)이라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당호(堂號)란 원래는 당우(堂宇)인 본채와 별채에 따로 붙인 이름이었는데 이것이 그 집의 주인을 나타내는 이름이 되어 당호(堂號)가 그대로 그 사람의 호가 되기도 합니다.
여성은 호를 갖지 않는 것이 보통의 관례입니다.
대신 당호, 또는 택호를 갖지요.
평민의 경우 순천댁, 수원댁 등처럼 친정의 지명을 딴 택호를 갖게 되지만 사대부집안의 여인들은 신사임당, 허난설헌처럼 당호를 갖습니다.
조선의 여인 중 유일하게 호를 지어 쓴 이는 이매창(李梅窓)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본명이 향금(香今)이며 계유년에 낳아 아명은 계생(癸生)이며 천향(天香)이란 자를 갖고 있습니다. 황진이와 더불어 명기의 쌍벽을 이루는 이로써 유희경, 허균 등 당대의 호걸들과 교유한 특출한 신분이 여성임에도(?) 당호가 아닌 호의 사용을 가능하게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별호(別號)는 본 이름 이외의 이름이라는 뜻으로 보통 다른 사람이 그 사람의 성격이나 용모 또는 특징을 따서 지어 부르는 별명과 같은 호(號)를 말합니다.
그리고 택호(宅號)는 어떤 이름 있는 사람의 가옥 위치를 그 사람의 호(號)로 부르는 것으로 ○○ 대감댁 등으로 불렀으며, 출가한 여인에게는 친정의 지명을 붙여 진주댁, 하동댁, 부산댁, 공주댁 등으로 불렀는데 이를 택호(宅號)라고 합니다.
법명(法名)은 승명(僧名)이라고도 하는데 불문(佛門)에 귀의하여 승려가 된 사람이나 또는 불법을 공부하는 신도에게 의식에 따라 속명(俗名) 대신에 지어준 이름을 법명(法名)이라 합니다.
이 법명에도 이름의 항렬처럼 모시는 스승의 계보에 따라 항렬자가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시호(諡號)란 벼슬한 사람이나 관직에 있던 선비들이 죽은 뒤에 그 행적에 따라 왕(王)으로부터 받은 이름을 말하는데, 착한 행적이나 나쁜 행적에 따라 정하는 시호(諡號)를 달리하였는데 이는 여러 신하의 선악(善惡)을 구별하고 후대에 권장(勸獎)과 징계(懲戒)를 전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시호(諡號)인 충무공(忠武公)이 한 예라 하겠습니다. 살아있을 때의 본명을 휘(諱:부르기를 삼가야할 이름이라는 뜻)라고 하고 죽은 후에 주어진 이름을 시(諡)라고 합니다.
점차 사회의 계층이 확대되고 계층간 또는 상하간 만남의 기회가 많아지면서 이름의 사용이 일반화되었는데 성인(成人)의 본명(本名)은 부모와 스승 등 윗사람이 아니면 함부로 부를 수 없게 되자 더욱 호(號)의 사용이 촉진되어 일반화되게 되었습니다.
이 결과 후세인들도 선인들의 본명(本名)이나 자(字)보다는 호(號)를 더 많이 부르고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여러 이름을 사용하는 데에는 사람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면 명이 짧아진다는 속설에 따라 실명을 기피하는 실명기피풍속(實名忌避風俗)과 두 가지 이상의 이름을 선호하는 복명풍속(複名風俗)에 기인해 허물없이 부르는 이름을 짓고자 한 것이 호라고 이해하면 될 듯 합니다.
우리시대에 호는 무엇인가
일생 4-5개 이상의 이름을 갖는다는 것이 한 이름으로 평생을 사는 오늘에 비춰본다면 거추장스러운 일이기도 하고 이런저런 명분에 휩싸인 사치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여럿의 이름이 있기는 매한가지입니다.
이름도 불리고, 어떤 이는 이름보다 별명이 더 그 사람의 정체성을 명확히 해주기도 합니다. 또 김부장, 이과장, 박선생님, 강변호사님 등의 호칭으로 불리기도 하고 시우아빠, 경윤이엄마 등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불리는 상대에 따라, 직함에 따라 그 이름이 달라지기도 합니다.
IMF때 명퇴를 한 이였습니다.
퇴직을 하고 나니 김부장, 이과장 등의 직함을 그대로 부르기도 무엇해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모여 호를 하나씩 지어 보기로 했다는.... 그래서 자기의 호가 00이되었는데 처음에는 괜찮았는데 나중에 보니 촌스러운 느낌이 들어 새로운 호를 하나 새롭게 짓게 됐노라고.
1) 호는 누가 불러도 좋습니다.
윗사람이나 아랫사람이 불러도 실례되는 일이 없습니다.
부르기가 적절찮아 ‘어이!’, ‘야!’, ‘너!’, ‘저-어-’ 등의 모호함이 없습니다.
2) 호는 바로 ‘나’입니다.
아랫사람, 윗사람, 아직 친밀한 밀착이 되지 않아 그 이의 이름 부르기에 적절하지 않을 때 우리는 00이 엄마, 00이 아빠, 00이 할아버지, 00이 처 등으로 부릅니다.
살아있는 내가 아닌 누군가의 관계를 대리한 나일뿐입니다.
이렇듯 살아가면서 종종 나를(나의 이름을) 잃어 버리게 되지요.
호는 다른 이를 통하지 않고 나를 드러내는 내 이름입니다.
상대가 누구이든 나를 당당하게 드러내는 ‘개방형’ 이름입니다.
3) 호는 그 사람의 정체성을 더 명확히 해줍니다.
앞서 얘기했듯이 우리의 본명이 나와는 상관없이 부모의 일방적인 욕심에 의해 지어집니다. 그 이름에 따라 내 성품이 닮아가기도 합니다만 보통은 나의 주체성과는 상관없는 것이 우리의 이름이기도 한 것입니다.
4) 호는 자신을 반영합니다.
별명이 그 사람을 어떠한 형태로든 반영하듯이 호는 그 사람이 살고 있는 모양, 바램, 의지 등을 반영하는 그릇이 됩니다. 스스로 자호하든 남이 지어주든 주인의 동의를 전제로 사용되는 것이 호이기 때문입니다.
5) 호는 자신을 가꾸게 합니다.
호를 사용한다는 것은 남에게 나의 이미지를 드러내는 일이 됩니다. 삶의 방향을, 삶의 의지를 드러내는 일이기에 자신의 삶을 되보고 가꾸게 됩니다.
6) 호는 그 사람의 인격을 존중하게 해줍니다.
자신을 가꾸는 이름이기에 그 사람의 ‘격’이 됩니다. 아무리 허물없는 사이일지라도 함부로 훼손할 수 없는 이름이 됩니다.
7) 호는 사회적 활동을 왕성하게 해줍니다.
호는 부모를 떠나 한 인간으로 내가 서 있음을 공표하는 이름입니다. 자신이 세상을 떠받치는 당당한 한 축임을 공표하는 이름입니다. 이름이란 열매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싹을 가리키는 부름이라는 얘기를 어디서 본 듯 합니다. 어떤 것의 이룬 결과가 이름이 아니라, 이루고자하는 스스로의 과제가 스스로의 이름이란 얘기입니다.
호를 어떻게 지을까
호는 나를 가장 나답게 드러내는 주체적인 이름입니다.
따라서 가장 나답게 지으면 됩니다.
특별히 정해져 있는 틀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꼭 한자를 이용해야 할 이유도 없고 글자수의 제한이 있지도 않습니다.
지어 쓰다 맘이 변하거나 다른 생각이 일면 또 지어 써도 무방합니다.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추사 김정희의 경우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503개의 호를 지어 썼습니다.
70성상을 산 그 의 일생에 500여 개의 이름을 사용했다 함은 가히 기네스북에 오를 일입니다.
성년이 된 20세 전후부터 호를 지어 썼다 가정할 경우 70세까지 50년간 한 해에 10개 이상의 새 이름을 지어 썼다는 얘기가 됩니다.
워낙에 삶의 태도가 기고만장하고 지적 활동이 왕성한 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입니다. 가히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은’ 김정희 입니다.
김정희의 호 짓기는 대략 이렇습니다.
그의 관심 영역이 달라질 때마다 새로운 이름이 생겨난 것이지요.
예를 들어 그에게 시서화와 경학, 금석학에 큰 영향을 준 중국의 거유 담계 옹방강과 교유할 땐 ‘담계 옹방강을 아주 보배롭게 생각하는 선비’라는 뜻으로 보담재(寶覃齋)라는 호를 사용했습니다.
이는 담계 옹방강의 또 다른 호인 보소재(寶蘇齋)를 재치 있게 차용한 것인데, 이는 옹방강이 적벽부로 유명한 북송 때의 시인 소식(蘇東坡)의 시에 흠뻑 빠져 보소재(寶蘇齋 : 소동파를 보배롭게 생각하는 선비라는 뜻)라는 호를 사용한 것을 같은 방식으로 활용한 것입니다. 또 보통은 호를 두 자로 짓는 경우가 많겠으나 외자, 석자, 넉자 그 이상의 글자수를 짓는 경우도 흔하긴 합니다.
하지만 추사 김정희의 경우 10자로 된 호(향각자다처로향각노인香閣煮茶處로香閣老人)도 사용했습니다.
워낙에 삶의 태도가 기고만장한 사람이라 각 시시기별 그의 사상편력과 관심의 편린들을 읽어낼 수 있을 정도로 자기를 적극적으로 표현해낸 증거들입니다. 또한 당대 최고의 신학문, 신예술의 수용자로서 고루한 겸손쯤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호기와 변덕, 자기에 대한 애착이 오히려 그의 힘의 원천이었음을 숨김없이, 부끄럼 없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호를 짓는 기준이나 방법에 대해서 알아보지요.
고려시대 이규보는 그의 [백운거사록(白雲居士綠)]이란 책에서 "거처하는 바를 따라서 호로 한 사람도 있고, 그가 간직한 것을 근거로 하거나, 혹은 얻은 바의 실상을 기준으로 호를 지었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하나를 덧붙여 신용호라는 사람은 호를 짓는데 네 가지 기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1) 소처이호(所處以號): 생활하고 있거나 인연이 있는 처소를 호로 삼은 것
(예컨대 도곡 김태정 선생은 도곡이란 지명을 호로 삼았지요)
2) 소지이호(所志以號): 이루어진 뜻이나 이루고자 하는 뜻을 호로 삼는 것
(예컨대 여초 김응현 선생은 항상 처음과 같은 자세로 공부에 임하겠노라고 여초(如初:처음과 같이)라고 하였지요)
3) 소우이호(所遇以號):자신이 처한 환경이나 여건을 호로 삼은 것
(퇴계 이황 선생은 고향으로 물러나 시내를 벗하면서 공부에 전념하겠노라고 퇴계(退溪)라고 하였지요)
4) 소축이호(所蓄以號): 자신이 간직하고 있는 것 가운데 특히 좋아하는 것으로 호를 삼은 것이지요.
이와 비슷하기는 하나 저는 조금 더 세분화 된 기준으로 나눠볼까 합니다.
서로 기준이 중복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호 짓는 발상을 돕고자 편의상 분류해본 것입니다. 유래와 같이 적어 봅니다.
1) 인연 깊은 장소나 처소를 호로 삼은 것 - 소처이호(所處以號)
○ 퇴계(退溪) 이황
고향이 안동 하회이다.
河回를 순 우리말로 바꾸면 ‘물돌이 마을’이 된다.
낙동강이 이 마을을 에두르고 지나간다.
집 뒤로 시내가 흘러가는데 이 시내를 일러 퇴계라 했다.
집 앞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집 뒤로 흐른다하여 ‘물러나는 시내’라 해서 퇴계이다.
어렸을 적 노닐던 이 퇴계를 자신의 호로 삼은 경우이다.
자신의 어릴 적 자양분이 되어준 장소에 대한 그리움 등이 녹아 있는 것이다.
한편으론 이 속에 비유도 있다. 앞으로 나가는 것이 아닌 뒤로 물러나는 것의 겸손함.
남 앞에 나서는 것을 꺼렸던 이황의 겸손의 덕이 호에 반영되었다고 보면 되겠다.
내가 아는 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사표를 쓴 사람이 이황이다.
무려 79번의 사표를 썼으니 겸손도 그만하면 허물이 될 듯도 하다.
평생 야인으로 살고 싶어 동시대의 학자 남명 조식을 한없이 부러워했다는 그다. 임금이 그를 놓아주지 않아 임명과 사퇴를 번복하며 살았다.
그런 만큼 퇴계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간절했으리란 짐작을 해본다.
○ 연암(燕巖) 박지원
만년을 제외하고는 벼슬살이를 하지 않았음에도 그의 글로 인하여 정조와 불화를 겪게 된다.
문체로 인한 필화를 겪게 되는 것인데 정조의 대리인 격인 홍국영에 몰려 황해도 금천의 연암협에 살 것을 다짐하며 그 지명을 빌려 연암이라 자호했다.
○ 다산(茶山) 정약용
19년 유배지인 전라도 강진의 뒷산 이름을 호로 삼았다.
19년 유배생활을 통해 그의 학문과 500여권이 넘는 저술이 여유당전서란 이름으로 완성되었다.
여유당(與猶堂)응 그의 당호이다.
다산 외에 삼미, 사암, 태수, 자하도인 등의 호가 있다.
○ 토정(土亭) 이지함
마포 근처의 초라한 흙더미 집에서 헐벗은 자들을 구휼하며 지냈다하여 토정을 호로 삼았다.
○ 화담(華潭) 서경덕
화담은 개성의 교외에 있는 연못으로 경치가 아름다워 여기에 은둔하는 사람이 많았다. 유교지식인들이 호를 지을 때 보편적으로 사용한 방식은 자신의 향리나 승경의 이름을 그대로 쓰는 것이다.
○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
젊은 시절 학문을 닦았던 한양의 삼각산의 세 봉우리를 따서 지은 호. 이단의 학문을 배격하고 자신의 학문을 지켜나가겠다는 의지를 봉(峰)으로 표현하고 있다.
2) 자신을 한껏 낮춰 비유한 호
○ 쇠귀 신영복
‘쇠귀에 경 읽기’에서 따온 한글 호다.
즉 ‘나는 미련하고 아둔한 자로소이다.’의 속뜻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디 그 뿐일까?
이재와 이세, 처세에 밝지 못하지만 자신이 믿는 것 소처럼 우직하게 한 길을 갈 줄 아는 소의 숭고함이 진짜 속뜻이 아닐까? 한문으로는 牛耳를 쓴다.
○ 점필재(占畢齋) 김종직(金宗直)
영남사림의 거두로 사화에 휘말려 부관참시까지 당한 성리학의 달통문인.
점(占)은 본다는 뜻이며 필(畢)은 간략하다는 뜻이다. 본 것이 적어 견식이 얕은 까닭으로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는 의미로 자신의 학문을 겸손히 표현함.
○ 櫟翁(역옹) 李濟賢
자신은 나라의 큰일을 할 사람이 못되며 단지 오래나 살고 싶다는 겸손한 소망을 표현. 櫟(상수리나무 역)은 재목감이 못되는 하찮은 나무를 뜻함.
○ 눌재(訥齋) 박상(朴詳)
자신이 아주 못났음을 나타내는 뜻. 졸(못날 졸)이나 눌(어눌할 눌)자를 써서 자신의 재주를 감추고자 했다.
○ 백범(白凡) 김구
백범 선생의 처음 호는 연하(蓮下)였는데 1912년 37세 때 서대문 형무소에서 백범(白凡)으로 고쳤다.
백은 백정(白丁)에서 따온 말로 가장 천한 사람이라는 뜻이고 범(凡)은 범부(凡夫). 즉 평범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가 교육사업에 열중하던 중 한 번은 인근 아낙네들에게 이르기를 “아주머니들도 따지고 보면 모두 白丁이 아니겠오?
무, 배추를 짤라 먹으니 무백정이요, 닭을 잡아먹으니 닭백정이요, 소돼지를 잡아먹으니 역시 소백정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그런 신분계급을 따질 시대는 지났습니다.
누구나 다 하늘아래 똑같은 이 나라 백성으로 계급을 얘기할 것이 아니다”고 타일렀던 것이다.
3) 분기탱천형 호
○사암(俟庵) 정약용
정약용의 20세 전후로 사용한 호.
정약용을 얘기하는데 정조를 빼놓을 수 없다. 정약용의 최대 후원자는 바로 정조다.
뒤주에 갇혀 8일 동안 울부짖으며 죽어간 생부 사도세자의 죽음을 목격하며 왕위에 등극한 정조. 왕위에 등극하는 과정도 우여곡절과 파란만장이었다.
영조의 뒤를 이어 왕위가 내정된 세손의 신분이었지만 18차례의 자객침입을 당했을 정도였다.
잠을 청할 수도, 잠을 이룰 수도 없는 것이 정조의 세손 시절이었던 것이다.
매일 잠자리 처소를 비밀리에 옮겨야 했던 정조는 밤 동안 무섭게 공부를 했다.
왕의 신분이었지만 정조는 그 시대 최고의 학자였다.
사후에 정조의 호인 홍재를 붙여 엮은 그의 저서집 [弘齋全書 184권 100책)을 포함해 그의 총 저서가 5천권에 이른다 하니 세계 어느 나라의 왕이 이만할까? 학자군주인 정조는 스스로 군사(君師)를 자처했다.
군주이자 신하와 만백성의 스승으로서의 君師. 규장각을 설치하고 젊은 인재들을 길렀다. 신하들과 무릎을 맞댄 자리에서 스스로 강학하고 시험을 치렀다. 이 강학과 시험에서 늘 우등을 차지한 이가 바로 약관의 정약용이다. 스무살 남짓한 나이에 임금의 머리쓰다듬음을 받는 다는 것은 그를 매우 의기양양하게 만들었다.
사암은 그가 23세때 정조의 중용강의 80여조의 질문에 답술하여 1등평정을 받은 뒤 젊은 혈기에 득의만면하여 지었다 전해지고 있다. 여기에 1표2서를 완성한 50대 이후에 지은 호라는 이설이 없는 것은 아니나 중요에 나오는 ‘百世以俟聖人而不惑’에서 따왔다는데는 이견이 없다. 즉 ‘훗날성인이 나오더라도 내 학설을 바꾸지 못하니 의심할 바 없다.’는 뜻이니 기고만장 분기탱천도 이만하면 국보 양주동, 우주보 김용옥에 비견할만하다.
○도올 김용옥
도올은 무슨 뜻일까?
도올은 맹자에 나오는 역사 책 이름이다.
노나라에는 춘추가 있듯이 초나라 역사책에는 도올이 있었다.
도올은 다듬어지지 않은, 가능성이 남아 있는 통나무를 뜻한다.
또 전설 속에서는 사나운 맹수 이름으로도 쓰이고 옛날 황제의 고집 불통 아들 이름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김 용옥은 어려서부터 「돌대가리」 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도올=돌」의 음을 취하여 호를 삼았다고 밝힌 적이 있다.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엣날에 도올 김용옥의 책을 전문으로 출판하는 출판사의 이름이 ‘통나무출판사’였다.
學人의 경계를 넘나드는 ‘노력하는 돌머리 天才’ 도올 김용옥. 서태지 못지않은 인기 구가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에듀테이너(Edutainer). 중고교 시절 술, 담배, 여자, 당구 등에 빠져 지낸 그가 마지막 빠진 곳은 바로 학문이었다는.
氣철학 원리 완성해 인류의 보편적 자산을 만들겠다는 야심 찬 인생의 설계를 가진 이이자 우리나라 최고의 학술분야 베스트셀러 작가.
그의 끊임없는 호기심은 어린애 같은 순수함이 아닐까? 도올
○ 무위자(無爲子) 강희맹(姜希孟)
도가에서 말하는 ‘무위자연’ 즉 자연의 상태대로 맡겨놓고 아무런 인공적인 작위를 가하지 않는다는 뜻.
○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매화와 달을 벗 삼아 현실에서 초연하여 은둔하는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자신이 거처하는 서재의 이름으로 지은 당호. 어려서부터 시문에 재주가 뛰어나 五歲神童으로 불려 金五歲가 별명이 되었으나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하자 분개하여 오세의 음을 빌려 汚世(더러운 세상!)로 호를 짓고 승려가 되어 산수를 방황하며 일생을 마침. 설악산에 그가 거쳐하던 오세암(五洗菴)이 있다.
한편 김시습의 시습은 논어의 학이편 첫 구절에서 따온 것임을 알 수 있다. 學而時習之면 不亦說乎아라! 그 이름 참 명쾌하다!
○ 불우헌(不憂軒) 정극인(丁克仁)
세속의 모든 욕망에서 벗어나 걱정 없이 한가로이 지내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호. 세조의 왕위 찬탈 후 벼슬을 물러나 고향 태인에서 은거하며 후진을 양성. 賞春曲 불우헌곡, 불우헌가 등 시가문학사상 중요 자료가 그의 작품들이다.
○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
정치현실에 환멸을 느낀 시인이 강가에 살며 낚시와 술과 시작으로 소일하며 지내겠다는 뜻의 호. 가을 강은 고독과 은둔의 이미지를 표현할 때 많이 쓰였다. 생육신의 한 사람.
5) 존경하는 인물을 기려 짓는 호
○ 청련거사 이후백
명종대의 이조판서. 이백(이태백)의 뒤를 잇는다하여 이름도 이후백. 호도 이백의 호인 청련거사의 ‘청련’을 그대로 썼다
○ 사임당(사임당) 신씨-신인선
흔히 신사임당이라 불리는 이 율곡의 어머니 신씨. 본명은 인선이다. 신사임당이 스스로 자신이 거처하는 곳의 이름(당호)을 지은 것이다.
師任에서 師는 스승 '사'자로 ‘흠모하여 존경하다’란 뜻을 갖는다.
사임의 任은 옛날 중국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 태임(太任)을 뜻한다.
신사임당이 태임을 존경하는 마음에서 태임을 스승으로 본받고 싶다는 의미에서 師任이라고 지은 것이다. 특히 태임의 태교를 본받고 싶었다고 전해진다.
태임의 성품은 단정하고 성실하며 오직 덕(德)을 실행하였다고 한다. 그가 문왕을 임신해서는 눈으로 사악(邪惡)한 빛을 보지 않고, 귀로는 음란(淫亂)한 소리를 듣지 않으며, 입으로는 오만(傲慢) 한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문왕을 낳으니 총명하고 사물의 이치에 통달하여 하나를 가르치면 백을 알더니, 마침내 주(周)나라의 으뜸 임금이 되었다고 전한다. 이러한 태임의 태교와 교육을 본받고 싶어서 당호를 사임이라 지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의 堂은 본채나 별채 등 안주인이 기거하는 집안의 한 건물을 말한다.
위에서 말했듯이 사임당은 사람의 호가 아니라 집안 건물의 이름이다.
즐겨하는 취미와 일, 그리고 완물을 이용한 호
○ 노가재(老歌齋) 김수장(金壽長)
늙은 시조가인들이 모여 시와 시조를 읊는 서재라는 뜻.
자신의 화개동(삼청동) 집에서 가객들과 교류하며 제자를 가르치고 시를 지으며 살았다.
아전 출신으로 조선후기의 대표적 시조작가.
○ 삼혹호(三酷好) 이규보(李奎報)
세 가지를 지독히 좋아한다는 뜻. 시와 술과 거문고를 지독히 좋아하여 스스로 지은 호.
○육일거사(六一居士) 구양수(區陽修)
장서 일만 권, 금석문 일천 권, 거문고 한 개, 바둑판 한 개, 술 한 병, 그리고 그 속에 있는 늙은 자신을 가리켜 육일이라 했다.
○ 주선옹(酒仙邕) 이백(李白)
이태백이다. 태백은 그의 字다. 술을 즐겨 주선옹이라 자호했다. 詩仙이자 酒仙을 자처한 셈. 행동거지가 초연하여 이 세상으로 귀양 온 신선이라 불렸다. 靑蓮居士는 그의 또 다른 호다. 맑은 물에 씻기운 연꽃이란 뜻으로 군자가 좋아하는 꽃의 상징이다.
○ 취묵헌(醉墨軒) 인영선
먹 향기에 취하는 방. 서예가 인영선의 호다.
○ 석치(石痴) 정철조
조선후기의 벼슬아치다. 벼루에 미친 사람이다. 돌만 보면 벼루를 깎아 나눠줬다. 무엇엔가 미친 사람을 일러 벽(癖) 또는 치(癡)라고 한다. 돌에 미친 사람 석치!
○ 억만재(億萬齋) 김득신(金得臣)
자못 엽기적인 노력가다. 절대로 IQ가 두 자릿수를 넘지 않았을 것 같은 위인이다.
그의 아버지가 태몽으로 노자를 보았다하여 노자의 이름인 담(耼)을 따서 ‘몽담(夢耼)’이란 아명을 주었다. 신통한 꿈을 꾸고 낳은 아이라 한 문장 하겠구나 하는 기대가 있었지만 머리가 지독히 나빴다.
10살에 이르러 글공부를 겨우 시작했는데 스무 살이 되어서야 겨우 글 한편을 지어 아버지께 올렸다고 한다. 머리가 나쁜 대신 지독한 노력을 하였는데 그 아버지는 “저 아이가 저리도 미욱하나 포기하지 않으니 대기만성 할 걸세”하며 그의 아들을 두둔했다고 한다.
그의 독수기(讀數記)가 전해지고 있다. 독수기란 책을 읽은 수를 기록한 문서다. 백이전이란 책은 1억1만3천 번. 모두 36종의 책을 1만 번 이상 읽었다. 1만 번 이하로 읽은 책은 아예 여기에 적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 횟수를 빠짐없이 기록해 두었다. 김득신의 미련이 아니고서는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그의 엽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스스로 1억 번 이상 읽었다는 책. 때는 단옷날이라 그와 관련한 좋은 시제를 하나 얻었는데 그 댓구가 영 떠올려지지 않아 끙끙거리자 그의 말고삐 시종이 왜 그런지를 물었다. 이유를 말하자 그의 말 시종이 대뜸 그 다음 시제를 읊더란다. 그러면서 말하길 “마님이 노상 읽은 아닙니까?”라고 한다. 하도 읽어 주어들은 종도 다 외울 지경인 글을 그는 또 잊고 만 것이다. 이에 김득신은 말에서 내려 “네가 내 재주보다 나으니 내가 네 말구종을 들겠다”며 하인을 말안장에 앉혔다고 한다. 이런 그가 자신의 호를 억만재(億萬齋)로 삼았다. 억 만 번을 읽고, 읽고 또 읽고.
이름으로 세상을 조롱하다.
○ 필재(疋齋) 이단전(李亶佃)
천한 신분의 조선 후기 시인이다. 그의 이름 亶佃은 ‘진실로 단’에 ‘밭갈 전’자로 소작인 또는 종놈을 뜻한다. 이를테면 ‘진실로 종놈’인 셈이다. 여기에 스스로 붙인 그의 호가 또 걸작이다. 필재(疋齋)! ‘필(疋)’자를 파자하면 하인(下人)이 되는 것이다. 나는 진짜 종놈에 불과하다며 신분사회에 대한 조롱을 퍼 부운 것이다. 천한 신분에 시인이라면 필시 筆才임에 틀림없겠으나 疋齋라!
○ 송산(松山) 조견(趙狷)
여말선초. 이성계의 역성혁명을 도와 일등공신이 된 조준(趙浚)이 있다. 그러나 그의 아우 조견은 정반대의 길을 걷는다. 불사이군(不事二君). 어찌 두 왕조 두 임금을 섬기겠는가? 해서 개성을 버리고 수원의 인근 청계산에 은둔했다. 원래 이름이 윤(胤)을 버리고 아예 견(狷)으로 고쳤다. 견(狷)은 지조와 절의를 지킨다는 뜻이다. 그리그 그의 자(字) 또한 종견(從犬)으로 고쳤다. ‘옛 주인을 잊지 못하는 것이 개와 같고, 나라를 잃고도 죽지 못하는 것이 개와 같다’는 얘기다.
○ 오원(吾園) 장승업(張承業)
영화 [취화선]의 주인공이기도 한 오원 장승업. 세속의 일은 안전에도 없이 예술 혼을 불사른 조선의 3대가 또는 4대가의 한 사람으로 평가되는 19세기의 화가. 금전도, 권력도, 가정도 심지어 임금의 명도 거부한 채 살아가는 호기방탕한 사나이. 단원(檀園) 김홍도, 혜원(蕙園) 신윤복 등 가장 뛰어난 화가에게 붙여 준 원(園)에 빗대어 “나도(吾) 원(園)이다!”라고 자호 했다.
○ 공초(空超) 오상순(吳相淳)
나와 시詩와 담배는 이음異音 동곡同曲의 삼위일체三位一體. 나와 내 시혼詩魂은 곤곤滾滾히 샘솟는 연기. 끝없는 곡선曲線의 선율旋律을 타고 영원永遠히 푸른 하늘 품속으로 각각刻刻 물들어 스며든다....
담배와 함께 평생을 살다간 6.25를 전후한 시인 공초 오상순. 잠에서 깨어 담배를 피워 물면 다시 잠 잘 때까지 담뱃불을 꺼뜨리지 않았다던 그다. 세수할 때도, 밥 먹을 때도. 그래서 그의 별명은 ‘꼴초’다. 허나 어쩌랴! 그 전쟁 통에 시가 밥이 되었으랴! 담배 한 갑이 되었으랴! 꼴초인 그는 늘 남이 피우다 버린 꽁초나 탐내는 위인이었던 것을!
그의 별명을 빌려 공초(空超)라는 호가 만들어졌다. 시가 밥 한 줄이 되지 못하거늘! 늘 남의 꽁초에나 눈독 들이는 처지인들 가진 것을 탐할 소냐? 집 한 채! 시집 한 권! 소유하지 않은 무소유의 자유인 空超! 다.
북한산자락 그의 무덤 앞에 재떨이가 있다. 자연석 재떨이. 죽어서도 담배 공양을 받는다. 담배 굴뚝인지 구멍 뚫린 석비도 하나 서 있다.
○ 봉이 김선달
조선 후기의 풍자적인 인물 봉이 김선달 (본명 김인홍. 자호로는 낭사. 평양출신의 재사 김선달이 자신의 경륜을 펼치기 위하여 서울에 왔다가 서북인 차별정책과 낮은 문벌 때문에 뜻을 얻지 못하여 울분하던 중 세상을 휘젓고 다니며 권세 있는 양반, 부유한 상인, 위선적인 종교인들을 기지로 골탕 먹이는 여러 일화들이 있다.
김선달이 봉이라는 별호를 얻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내력이 있다. 김선달이 하루는 장 구경을 하러 갔다가 닭전 옆을 지나가게 되었다. 마침 닭장 안에는 유달리 크고 모양이 좋은 닭 한마리가 있어서 주인을 불러 그 닭이 '봉'이 아니냐고 물었다. 김선달이 짐짓 모자라는 체하고 계속 묻자 처음에는 아니라고 부정하던 닭장수가 봉이라고 대답하였다. 비싼 값을 주고 그 닭을 산 김선달은 원님에게로 달려가 그것을 봉이라고 바치자, 화가 난 원님이 김선달의 볼기를 쳤다. 김선달이 원님에게 자기는 닭 장수에게 속았을 뿐이라고 하자, 닭장수를 대령시키라는 호령이 떨어졌다. 그 결과 김선달은 닭 장수에게 닭 값과 볼기맞은 값으로 많은 배상을 받았다. 닭 장수에게 닭을 '봉'이라 속여 이득을 보았다 하여 그 뒤 봉이 김선달이라 불리게 되었다.
또한 유명한 일화로 대동강물을 팔아먹은 재밌는 얘기가 있다.
김선달이 대동강가 나루터에서 사대부집에 물을 길어다 주는 물장수를 만났을 때 기발한 아이디어가 생각났다. 물장수를 데리고 주막에 가서 얼큰하게 한잔을 사면서 내일부터 물을 지고 갈 때마다 내게 한 닢씩 던져주게나 하면서 동전 몇 닢씩을 물장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이튿날 의관을 정제하고 평양성 동문을 지나는 길목에서 의젓하게 앉아서 물장수들이 던져주는 엽전을 헛기침을 하면서 점잖게 받고 있었다.
이 광경을 모든 사람들이 수군대며 살피고 있었다. 이때 엽전을 내지 못한 물장수가 선달로부터 호되게 야단을 맞고 있었다. 이를 본 한양인들은 대동강물이 선달 것인데 물장수들이 물 값을 내지 못하게 되자 호되게 야단을 맞고 있는 것으로 보여 내일부터는 밀린 물 값까지 다 지불하여야 한다고 엽전준비에 야단이 났다.
이를 참다 못한 한양상인들은 어수룩한 노인네 하나 다루지 못할 것인가 하면서 장수꾼들이 능수능란한 말솜씨로 꼬득여 주막으로 모시게 된다. 술잔이 오가고 물의 흥정이 시작되었다. 선달은 조상대대로 내려온 것이므로 조상님께 면목이 없어 못 팔겠다고 버티면서 이를 물려줄 자식이 없음을 한탄까지 하였다.
한양상인들은 집요하게 흥정을 했다. 거래금액은 처음에는 1천 냥이었다. 2천 냥, 4천 냥으로 올라가 결국 4천 냥에 낙찰되었다. 당시 황소 60마리를 살 수 있는 돈이었다. 당시의 매매계약서는 다음과 같다.
품 명: 대동강(대동강)
소유자 봉이 김선달
상기한 대동강을 소유자와의 정식 합의하에 금년 5월 16일자를 기해 인수함을 증명함과 동시에 천하에게 밝히는 바이다.
인수자- 한양 허풍선
인수금액-일금 4천 냥
인도자 김선달
선달은 못내 도장 찍기를 서운한 듯 도장 찍기를 주저한다. 그러자 상인들은 졸라대기 시작하여 결국 계약이 체결된다.
재산은 모으지 못했다고 한다. 워낙 풍류와 시를 좋아하고 어려운 서민을 보면 양반들을 골탕 먹이고 뺏은 돈을 서민에게 다고 한다.
한글로 지어진 호
한글학자인 주시경 선생의 '한흰샘', 이병기 선생의 '가람', 최현배 선생의 '외솔' 등은 널리 알려진 한글 호다. 서예가 가운데도 '꽃뜰 이미경 선생, 갈물 이철경 선생께서 한글호를 사용한다.
앞서 설명한 쇠귀 신영복 선생도 마찬가지.
가람 이병기 선생은 자신의 호를 짓게 된 경위를 그의 일기장에서 술회한 바가 있다. 그의 일기장에는 "가람은 강이란 우리말이니 온갖 샘물이 모여 가람이 되고 가람물이 나아가 바다물이 된다. 샘과 바다 사이에 있는 것이니 근원도 무궁하고 끝도 무궁하다. ...중략...우리말로는 가람이라하고 한자로는 임당(任堂)이라 하겠다"라고 호를 지은 연유를 밝히고 있다.
또 문익환 선생님은 ‘늦봄’을 사용한다. 고희에도 만년 청춘이었던 그다.
이외에도 오리 전택부(전 YMCA 명예회장), 한솔 이효상(전 국회의장), 눈뫼 허웅(한글학회 이사장), 한결 김윤경, 한벗 김계곤, 구름재 박병순, 높세율 남영신 (이상 한글학자), 얄라 이봉원(영화감독), 늘봄 전영택(소설가) 등이 있다.
한글호를 짓는 또 하나의 경향이 있다. 지금은 대부분 사라진 고한어(古韓語)를 살려 호로 사용하는 예가 그렇습니다. 주로 한배달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분들인데 봄수레 노재춘, 사라아리 권희영, 해머슴, 아라가비, 수바마니, 나난도리, 다라사니, 마루달, 나랑아루, 무파랑 등이 그 예다.
호를 지으매 같은 자수로 한글도 되고 한자도 되면 더욱 좋겠다. 쇠집 鐵齋, 쇠귀 耳牛, 늦봄 晩春, 눈뫼 雪山 등.
그룹 짓기 호
흔히 스님들의 법명을 지을 때 사승관계에 따라 돌림자를 넣거나 한 동아리에서 인연이 있는 한 글자와 각자의 특징에서 찾은 한 글자를 따서 짓는 경우다.
정조의 죽음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하루 동안의 미스테리를 엮은 이인화의 소설 [영원한 제국]에 보면 죽란사(竹欄舍)란 비밀조직의 동아리들이 주자를 붙여 호 하나씩을 지어갖는 장면이 나온다. ‘얼굴이 검은 이유수는 오죽(烏竹), 담배를 많이 피워 공방대 장죽을 물고 사는 윤지눌은 장죽(長竹), 홍시제는 청승맞게 생겼다고 상제 지팡이를 뜻하는 상장죽(喪杖竹), 깡마르고 키가 큰 유치명은 수죽(脩竹)....’하는 식이다.
선조의 대를 이은 호
호의 대종을 이루는 것 중 자신이 사는 곳이나 마을 · 산이름 · 강이름 등에서 한 글자를 따서 거기에 동 · 서 · 남 · 북 방향을 가리키는 글자를 넣거나 은거한다는 뜻으로 '은○' 자를 붙인 것이 많다. 자기를 겸손하게 표시하여 한낱 나무꾼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으로 '초○' 자를 넣어 자호하기도 하였고, 선향의 땅이름을 담은 글자에 ○암 · ○당 · ○재 · ○헌· ○와 등의 글자를 붙여 짓기도 하였다. 그리고 선조의 호에서 한 글자를 따고 그 후손이라는 뜻으로 '후○' 자를 앞에 붙이든가, '운○' 자를 뒤에 붙여 짓기도 하였습니다. 또는 어느 부분에서 일가를 이룬 집안의 경우 그 후손이 선조의 호를 그대로 쓰고 ‘○○二代’ 식으로 대를 잇는다는 뜻을 표하기도 한다.
○ 철재(鐵齋) 오옥진 그리고 철재이대(鐵齋二代) 오윤영.
서각의 원류인 각자(刻字)에서 독보적 위치를 갖는 중요무형문화재 제106호 각자기능보유자 오옥진의 호는 쇠집 철재(鐵齋)다. 4대를 이어온 목수집안의 손이다. 각자에서 일가를 이룬 그를 이어 장남 윤영의 호는 鐵齋二代다. 철재를 통해 사사받은 이들을 鐵齋刻緣이라 한다.
○ 이향(里香), 호호득(呼好得) 민학기
명성왕후 민비의 조카로 19세에 조선조 최연소 이조정랑이 된 민영익(閔泳翊. 1860-1914). 이향 민학기에게는 증조부 뻘이 된다.
선비화가로 자는 자상(子湘), 호는 운미(芸楣), 원정(園丁) 또는 천심죽재주인(千尋竹齋主人)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정치적 혼란기에 미국전권대신, 한성부판윤, 병조판서 등의 요직을 지냈다. 개화기 외교업무를 통괄하는 자리에 있은 이유로 한국인 최초로 세계 일주를 한 일물로 기록되고 있다. 1905년 러일 전쟁 후 명성황후의 시해와 친일 정권이 수립되자 홍콩, 상해로 망명하여 오창석(吳昌碩) 등과 교유하였으며, 그곳에서 죽었다. 묵란(墨蘭), 묵죽(墨竹)을 특히 잘 그려 흥선대원군인 석파 이하응과 쌍벽을 이뤘다. 상해 망명 시 칠리향장(七里香蔣)이란 당호를 사용했다. 칠리향이란 ‘한눈에도 다 뵈는 아주 작은 마을에 맑은 향기를 전하는 집’이란 뜻이다. 이향은 선대의 당호에 장난기를 더해 지은 호다. ‘우리 할아버지가 7리를 풍기니 난 그 두 배 쯤 풍겨보지. 뭐! 십사리(十四里)는 그렇고 시오리향(十五里香) 정도!’ 그래서 사용한 것이 ‘시오리향’이고 그 중 두 자를 취해 ‘里香’이란 호를 사용하고 있다. 내 머무는 자리에서 한 시오리쯤 풍기는 맑은 향이었으면 하는 바램에서 지었습니다. 주변에서 향기는 무슨? 발구린 내에 입구린내만 풍기고 다닌다는 조롱도 참아내며 사용하고 있지요. 담배도 하루 두 갑 정도 피워대는 왕골초니 그런갑다 이해하기를 빌며.
또 다른 호로는 호호득(呼好得)을 사용하고 있다. 전각을 새길 때 칼로 새겨낸 돌가루를 입으로 호호 불며 새기는데 이때 입부는 소리인 호호(呼呼)와 칼로 돌 새기는 소리인 득득 소리를 합치면 ‘호호득득’이 되는데 이 소릿말을 약간 바꿔 ‘득득[得] 새겨 호호 불면[呼] 좋은 한 세상을[好得 : 篆刻 一顆] 얻는다[득]’란 뜻으로 전각의 일과를 얻는 과정을 호로 표현 했다.
자 [字]
우리나라와 중국에서 관례(冠禮:성인식)를 거행하고 실명(實名:家名) 외에 붙여주던 별명(別名).
이는 실제 이름을 공경하여 부르기를 꺼려하는 데서 비롯되었으며, 호(號)·휘(諱)·시(諡)와 함께 2가지 이상의 이름을 갖는 복명속(複名俗)과 실제 이름을 피하는 실명경피속(實名敬避俗)의 하나였다.
자를 사용하는 것은 중국에서 시작되었는데, 언제부터 사용했는지 확실하지 않다. 송나라 사유신(謝維新)의 〈고금합벽사류비요 古今合璧事類備要〉 속집에 강숙(康叔)의 호칭이 문헌상으로 처음 나타나는 자이다. 주나라 초기의 동기(銅器)에 나타나는 '영이'(令彛)라는 글자에 자라고 추정되는 '영'자가 쓰여진 것으로 보아 이미 주나라 초기에 자를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한나라 때에는 어린이의 소명(小名:幼名)을 소자(小字)라고 하여 자가 매우 복잡해졌다. 우리나라에는 중국과 교류가 많았던 삼국시대부터 받아들여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보편화되지 않았던 듯하며 이후 고려와 조선시대로 이어져 활성화되었다.
〈의례 儀禮〉 사관례(士冠禮)에는 관례를 올리면 자를 지어주어 그 본명을 높인다고 했으며, 이밖에 〈예기〉 곡례(曲禮) 상(上)과 교특생(郊特牲)에 의하면, 남자는 20세에 성년이 되는데 관례를 행하여 성인이 되면 자를 짓고, 여자는 15세로 결혼하게 되어 비녀를 꽂으면 자를 지었다고 했다. 자가 붙은 뒤에는 왕이나 부모 등 윗사람에 대해서는 자신을 본명으로 말하지만 동년배 이하의 사람에게는 자를 썼다. 또 다른 사람을 부를 때에도 자를 사용했으나, 손아랫사람인 경우 특히 부모나 스승이 그 아들이나 제자를 부를 때에는 본명을 사용했다고 한다. 〈논어〉에서 공자는 제자인 안연(顔淵)을 회(回), 자공(子貢)을 사(賜)라 불렀다. 자를 지을 때는 본인의 기호나 윗사람이 본인의 덕을 고려하여 붙였으며, 대개 장유(長幼)의 차례를 따라 자를 지었다. 여자의 자는 옛날에 흔히 자매의 차례를 나타내는 백(伯)·중(仲)·숙(叔)·계(季)를 붙이기만 했으나, 남자의 자는 그 본래 이름과 의미상 관련이 있는 자를 붙이고 다시 그 위에 형제의 차례를 나타내는 백·중·숙·계나 남자의 미칭인 자(子)를 붙이는 일이 많았다. 또 진(晉)말경부터는 형제의 경우 같은 글자를 자로 써서 형제라는 것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호 [號]
본명이나 자(字) 이외에 쓰는 이름.
당호(堂號)·아호(雅號)·별호(別號)라고도 한다. 중국에서는 당대(唐代)부터 시작해 송대(宋代)에 일반화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나타났다. 자신이 짖거나 남이 지어주기도 하는데 흔히 거처하는 곳, 이루고자 하는 뜻, 처한 환경이나 여건, 간직하고 있는 것 등을 근거로 짓는다. 글자수는 1∼10자까지도 있으나 2자가 보편적이다. 추사 김정희(金正喜)는 무려 503개에 이르는 호를 사용했다. 현대의 문인들이나 예술 가들 사이에서는 필명(筆名)이라고도 한다.
더 상세하게
號와 字의 차이 예기(禮記)에 '남자는 20세에 관례(관례)를 행하고 자(字)를 짓고,
여자는 혼인을 약속하면 계례(笄禮)를 행하고 자를 짓는다.'고 하면서
'관례를 행하고 자를 짓는 것은 그 이름을 공경해서이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름을 소중히 여기는 관념 때문에 어른(成人)이 된 사람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어서, 출생한 후부터 갖게 된 이름(名)이외에 누구나 널리 부를 수 있는 별도의 칭호가 필요하게 되어 자(字)를 지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자(字)는 성년의식인 관례를 행할 때 짓게 되는 데, 예전부터 관례를 혼인례(婚姻禮)보다 중요시하였다고 합니다.
전통사회에서는 어른과 아이를 구분할 필요가 있었고, 그 기준을 머리에 두었기때문이지요. 남자의 관례는 머리를 가다듬어 관을 쓰는 의식이고,
여자의 계례는 머리를 꾸며서 비녀를 꽂는 의식입니다.
머리에 변화를 가함으로써 아이에서 벗어나 어른이 됨을 상징하는 것이지요.
바꿔말하면 인격의 변화를 머리에다 그린 것입니다.
왜냐하면 머리는 신체를 대표하는 동시에 정신이 담긴 곳으로 인간에게 있어서 더할 수 없는 靈妙處인 까닭으로 다른 의례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관례에서는 중심적인 역할을 한답니다.
그래서 빈(賓)은 성년이 된 젊은이(冠者)에게 세 번 각각 다른 관을 씌워 줍니다. 평생 쓸 수 있는 관은 한 번씩 선뵈는 것인데, 그때마다 축사(祝辭)를 해서 성년이 된 의미와 이후 마땅히 지녀야할 마음가짐을 일깨워주는 것이지요. 이렇게 의미있고 엄숙한 의식을 거행하면서 성년이 된 사람으로서 항시 마음에 새기고 행동으로 실천해야할 덕목이 함유된 자(字)는 成人으로서의 의무와 책임이 담겨져 있습니다.
즉 성인으로서 훌륭한 선비가 되기 위한 인생의 지표가 그안에 담겨있다고 하겠습니다. 이렇게 자(字)를 중시하였으므로 비교적 자유롭게 지을 수 있는 호(號)처럼 풍류적, 해학적인 성격을 띤 것은 전혀 없고, 대부분 근엄하게 실천할 德目이 함유된 글자로 지었던 것이죠.
이러한 자(字)를 지을 때는 일반적으로 이미 지어진 이름(名)과의 연관을 지어 지었고, 이름과 무관하게 짓는 경우는 드물었다고 합니다.《淵鑑類函》에는 '자는 이름에 의거하여 짓는 것이니, 이름은 자의 본(本)이고 이름은 자(字)의 말(末)이다.' 하였고, 한편《白虎通》에서는'그 이름에 의거하여 자를 지으니, 지은 이름을 들으면 그 자를 알 수 있고, 자를 들으면 곧 그 이름을 알 수 있게 된다.' 하였으니 이름과 자의 관련은 이로써도 알 수 있죠.
이러한 상관관계는 '이름과 다르나 의미는 동일한 경우' 이름에 쓰인 글자를 그대로 쓰는 경우', '이름의 의미를 확충하는 경우', '이름의 뜻이 한쪽으로 치우쳐 있는 결함을 보완한 경우'가 있습니다. 한편, 매우 많은 인물들이 경서(經書)에 있는 자를 따다가 본인의 자로 삼기도 하고, 이외에 같은 유(類)에 속하는 사물의 이름안, 출생한 지명으로 자를 지기도 하였답니다.
이같이 같은 자는 그 사람이 지향할 인생관이나 실천할 덕목이 들어있음으로 학덕이 높은 사람이 자를 짓고 동시에 字說을 지어주어 그 뜻을 설명하고 그 덕목을 일상 생활 속에서 항상 실천할 것을 勸勉하였습니다. 주로 자는 성인으로서의 책임을 부여하는 막중한 의미를 가진 것으로, 친구들이나 선배들조차 상대를 존중하여 상호 부르는 이름이라고 한다면, 호는 본인이나 친구간, 마을 사람들, 혹 그외 다른이들이 가볍게 이름 대신, 또한 자 대신 부를 수 있는 호칭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시 정리하여 보면, 名(이름)은 가장 무거워 임금, 부모, 스승이 아니면 부를 수 없는 것이요,
字가 다음으로 선배나 지친의 친구가 존중하여 부를 때에야 부르는 것이요,
號는 선후배간 뿐만 아니라 기타 누구나 부를 수 있는 오늘날의 별명(닉네임) 정도의 가벼운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조선 선비의 號를 보면 인생이 보인다
현대 한국인은 대부분 태어날 때 지은 이름(名) 하나로 평생을 살아간다. 모두 자신 이름에 만족할까. 500년을 이어 온 조선의 선비들은 최소한 셋 이상의 호칭을 지니고 있었다. 풍류와 품격이 담긴 멋들어진 이름들이 많았다. 부모와 스승이 부르는 이름이 달랐고, 처음 만나는 이에게 자신을 소개하는 이름도 있었다. 친한 친구끼리 부르는 이름 또한 가지고 있었다. 명(名)과 자(字), 호(號)가 그것들이다.
이 가운데 가장 독특한 게 호다. 명과 자는 부모나 스승이 지어줘 함부로 사용하지 않았다. 반면 호는 자신이 마음대로 지어 부를 수 있었다. 명과 자가 처음부터 타고난 운명이라면 호는 자신의 의지와 사상, 성격이 담긴 개성적인 삶의 표현이었다. 이를테면 호는 조선 선비의 자존심이었다.신간 ‘호, 조선 선비의 자존심’은 조선 선비들의 호를 풀이한 책이다. 정약용, 이이, 김홍도, 이황, 정도전, 박지원, 김시습, 정조 등 조선의 역사를 이끌어간 인물들의 호를 분석한다. 이들 선비는 세상에 초연하고자 했고 세상을 개혁하려는 의지가 강했다. 나아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스스로의 다짐을 호에 담아 표현하곤 했다.
조선 건국의 설계자 정도전의 호는 삼봉이다. 왜 삼봉이라고 지었을까. 그가 태어난 충북 단양의 비경 도담삼봉에서 호가 유래됐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이 책을 쓴 역사평론가 겸 고전연구가 한정주는 “각종 문헌을 비교해보니 삼각산 삼봉, 즉 오늘날의 북한산을 가리켜 삼봉으로 지었다”는 해석을 내놓았다.
정도전은 한양이 내려다보이는 삼각산에서 자신의 신분적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역성혁명의 큰 꿈을 품었을 것이다.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자 했던 정도전의 야망이 ‘삼봉’이라는 그의 호에 반영되어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야망을 거침없이 드러냈던 정도전과 달리 호시탐탐 목숨을 노리는 수구 세력들을 피해 살아남으려고 애썼던 선비도 있었다. 조선 최고의 실학자 여유당 정약용이다. 그는 ‘겨울에 시냇물을 건너듯 신중하고(與), 사방의 이웃을 두려워하듯 경계하라(猶)는 뜻에서 자신의 호를 ‘여유당’이라고 지었다. 몰락한 남인 출신으로 정조가 아꼈던 재사 정약용은 정조가 갑자기 승하하자 노론 수구세력의 표적이 되었다. 스스로 여유당이라는 당호를 내걸어 시시각각 옥죄어 오는 숙청의 피바람을 피하려고 했다. 그러나 노론의 칼바람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신유사옥이라 불리는 정치적 탄압으로 300여명이 처형됐다. 정약용은 겨우 목숨을 유지하고 유배지로 쫓겨났다. 여유당은 조선 당파싸움을 드러내는 호였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누구나 자유롭게 부를 수 있는 호를 통해 자신의 철학과 신념, 지향, 개성을 표현했다. 왼쪽부터 삼봉 정도전, 남명 조식, 율곡 이이, 연암 박지원의 초상화. |
다산초당 제공
‘다산’이라는 호는 차를 즐겨 마신 자신의 취향을 애처롭게 드러낸 것이다. 유배된 전남 강진군 도암면에 있는 만덕산의 또 다른 이름이 다산(茶山)이다. 수많은 야생 차나무가 자생하고 있었기에 붙혀진 별칭이다. 다산이란 호에는 큰 뜻을 펼치지 못한 정약용의 간난신고와 애환이 깃들어 있다.
조선의 걸출한 인재 이이의 호들 가운데 율곡(栗谷)과 우재(愚齋)가 있다. 이이는 29세 때 출사한 이후 자신의 직언과 개혁책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는 미련 없이 벼슬을 내던졌다. 이이는 경기도 파주시 율곡, 즉 밤골 마을로 돌아와 안식을 취하곤 했다. 율곡은 이이가 삶의 고비 때마다 몸을 의탁했던 힐링의 장소였다. 더욱이 율곡은 유일한 스승이자 어머니 신사임당이 묻혀 있는 향수의 땅이었다. 그러니 이이가 후세에 남길 자신의 첫 번째 호로 선택한 율곡의 의미는 작지 않다.
어리석은 인재라는 의미의 우재는 이이의 성격을 드러낸다. 과거시험에서 아홉 번이나 장원을 차지해 ‘구도장원공’이라 불렸던 이이는 자신이 어리석다고 한탄했다. 기호학파의 태두로 추앙받은 이이는 살아갈수록 어려움에 처하게 되는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스스로 어리석다고 탄식했다. 그럴수록 더욱 학문에 정진하고 백성을 깨우치고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 온 힘을 쏟았다.
조선 성리학에서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뤘던 남명 조식은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 정진과 후학 양성에 생을 바쳤다. 이런 그의 기상은 ‘남명(南冥)’이란 호에 오롯이 담겨 있다. 요사스럽고 혹세무민 학문이라고 비판받은 ‘장자’에서 따온 것이다. 출사와 사직을 되풀이했던 퇴계와 달리 남명은 오직 한 길을 가면서 나라와 백성을 위한 경세사상을 개척한 인물이었다.
이 책에는 세상의 아픔을 끌어안고 누구보다도 깊이 고민했던 조선 선비들의 대쪽 같은 삶이 담겨 있다. 백성의 아픔을 풀어주려고 몸부림쳤던 진정한 선비정신이 있었기에 500년이 넘는 기간 조선에서는 수많은 명문가들이 나왔다. 저자는 선비들의 풍류가 가득한 아름다운 시(詩)부터 작호의 근거가 되는 산문까지 꼼꼼히 챙겨보면서 이 책을 썼다. 조선시대의 새로운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영처(嬰處) 이덕무… 어린아이의 천진함과 처녀의 순수함호(號)를 보면 그 사람이 보인다①
한정주 역사평론가
오늘날 우리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태어나면서 갖게 된 이름 하나만을 평생 동안 사용한다. 그런데 조선의 선비들은 최소한 셋 이상의 호칭을 지니고 있었다. 명(名)과 자(字)와 호(號)가 바로 그것이다. 명(名)이란 ‘이름’으로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이름과 같다. 자(字)는 관례(冠禮:성인식)를 치르고 짓는데, 그 까닭을 유학의 경전 중 하나인 <예기(禮記)>에서는 “이름(名)을 귀하게 여기기 때문이다”고 밝히고 있다. 즉 이름(名)을 귀중하게 여겨서 관례를 치르고 나면 함부로 이름을 부르지 못하고 자(字)를 지어 부르도록 했다는 것이다. 단 자(字)를 지을 때는 함부로 짓지 않고, 반드시 이름(名)과 연관 지어 짓도록 했다.
관례는 대개 15~20세 때 행해진다. 그런데 여기에서 흥미로운 사실은 명(名)과 자(字)는 부모나 어른 혹은 스승이 지어주는 것으로 자기 마음대로 함부로 지어 사용할 수 없었던 반면 호(號)는 자신이 살아가면서 뜻한 바 있거나 마음이 가는 사물이나 장소에 따라 또는 어떤 의미를 취해서 제멋대로 지을 수 있고 혹은 다른 사람이 지어 줄 수도 있는 호칭이다.
예를 들면 율곡(栗谷:이이)과 연암(燕巖:박지원)은 자신이 좋아하는 지명(地名)으로 호(號)를 삼은 것이고, 퇴계(退溪:이황)와 초정(楚亭:박제가)은 마음에 품고 있는 뜻과 의지를 호(號)로 표현한 것이다. 또 다산(茶山:정약용)과 석치(石癡:정철조)는 자신의 기호나 취향을 좇아 호(號)를 지었으며 완당(阮堂:김정희)과 오원(吾園:장승업)은 존경하거나 본받고자 하는 인물의 이름(혹은 호)을 따와서 호(號)로 삼았다. 삼혹호(三酷好:이규보)와 어우당(於于堂:유몽인)은 스스로를 희화화한 아주 해학적인 호(號)다.
이렇게 보면 명(名)과 자(字)가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한 생물학적 자아(태생적 자아)에 가깝다면 호(號)는 선비가 자신의 뜻을 어디에 두고 마음이 어느 곳에 가 있는지를 나타내는 이른바 사회적 자아를 표상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 사람의 호(號)를 살펴보면 그의 사람됨과 더불어 그 삶의 행적과 철학을 어렵지 않게 짐작해볼 수 있다.
필자는 앞으로 호(號)를 통해 조선을 대표할 만한 선비들의 다채로운 삶과 철학을 추적해보려고 한다. 이 여정을 통해 ‘호(號) 문화’가 지니는 가치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어렵지 않게 복원할 수 있는 유산이라는 사실을 증명해 보여주고자 한다. 그리고 이 여정의 첫 주인공으로 이덕무를 선택해 독자들에게 소개한다.
북학파(北學派)와 백탑시사(白塔詩社)의 중추(中樞)
규장각(奎章閣) 4검서관(四檢書官)의 한 사람으로 정조(正祖)의 ‘문예부흥’에 큰 공헌을 한 인물이다.
더욱이 문학사(文學史)에서 볼 때 조선 후기의 한시 4가(四家: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이서구), 즉 백탑시사(白塔詩社)를 대표하는 큰 시인으로 ‘기궤첨신(奇詭尖新:기이하고 괴이하며 날카롭고 새롭다는 뜻)’이라는 전무후무한 시풍(詩風)을 세워 청나라에서까지 명성을 떨쳤다.
특히 ‘북학파’의 지식인들은 북쪽의 청나라를 통해 외부의 선진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여 조선을 크게 개혁해 부국안민(富國安民)을 이루고자 하는 대의(大義)를 공유하면서도 각자 특정 분야에서 독자적으로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예를 들면 <의산문답>을 저술한 홍대용은 천문지리(天文地理) 과학에서, <열하일기>를 지은 박지원은 문장으로, <북학의>를 쓴 박제가는 사회개혁론에서, <발해고>를 저술한 유득공은 역사 방면에서 큰 업적을 남겼다.
그렇다면 이덕무는 어떠했는가? 그는 <청장관전서>라는 백과사전적 저술과 기록을 통해 18세기 당시 신학문이었던 ‘고증학과 변증론’에서 독보적인 역량을 펼쳐 보였다.
그러나 이덕무는 인문학에 관심있는 사람들에게는 비교적 잘 알려져 있지만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유득공 등과 비교하면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이다. 혹시 안다고 하더라도 2012년에 개봉한 한국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차태현이 희화화시켜 연기한 이덕무 정도일 것이다.
그렇다면 필자가 왜 다른 유명한 ‘북학파’ 지식인들을 제외하고 잘 알려지지 않은 이덕무를 소개하려고 하는 것일까?
그 까닭은 한국사를 통틀어도 이덕무만큼 ‘호(號)’를 통해 자신을 강렬하게 드러내고자 했던 인물을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는 호(號)에 관한 한 생전에 100여개의 호(號)을 사용했던 추사(秋史) 김정희와 견줄만한 유일한(?) 인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덕무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수많은 호(號)를 사용했다. 스스로 고백하기를 매번 글을 지을 때마다 새로운 호(號)를 만들었다고 할 정도였다. 이덕무는 왜 이토록 많은 호를 사용했던 것일까? 그것은 왕성한 호기심과 지식욕 때문에 공간적으로는 동양과 서양, 시간적으로는 고대와 당대(18세기)를 넘나들며 백과사전적 지식을 탐구하고 기록으로 남겼던 그의 삶과 무관하지 않다. 즉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이동하며 변신을 모색한 그의 호기심과 지식욕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운 호(號)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기호(記號)’, 글로 그린 자화상
“삼호거사(三湖居士)는 약관(弱冠)에 호기(豪氣)가 있었다. 엄숙하고 공경하면 나날이 학문이 강해진다는 말에 뜻을 두어 일찍이 호(號)를 ‘경재(敬齋)’라 하였다. 뜻이 있으면 바로 지향(指向)하는 목표가 있으니, 여기에 도달하고자 하여 또 호를 ‘팔분당(八分堂)’이라 하였다. 팔분(八分)이란 사마광(司馬光)이 성인(聖人)을 십분(十分)이라고 할 때 구분(九分)이면 대현(大賢)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에 가까운 것이다. 가난해서 집은 한 말(斗) 정도의 부피만큼 작았지만 또한 즐거워하였다.
이에 매미의 허물과 귤의 껍질처럼 구부정하다고 하여 호를 ‘선귤헌(蟬橘軒)’이라 하였다. 처지에 따라 행실을 닦고자 해서 또한 호를 ‘정암(亭巖)’이라고 하였다. 세상을 피해 숨는 사는 것을 편안하게 여겨 또 ‘을엄(乙广)’을 호로 삼아서 구부러지고 조그마한 석실(石室)에 뜻을 두어 은둔하려 하였다. 마음을 수경(水鏡)처럼 잔잔하고 맑게 하고자 해서 다시 호를 ‘형암(炯菴)’이라고 하였다. 대저 일마다 공경하여 닦으면 고인(古人)에 가깝고, 마음을 물과 같이 맑게 하고 작은 집에 누워 세상을 피해 숨어 살면서 비록 부엌 연기가 쓸쓸하여도 붓을 잡아 문장(文章)을 지으면 아침에 피는 꽃과 같이 빛이 난다. 이 사람은 이것으로도 오히려 편안하지 않아 빙긋이 웃으면서 말하였다.
‘이는 어린아이가 재롱을 좋아하는 것과 다름없다. 장차 처녀와 같이 지키려고 함이다”고 하며, 그 원고의 제목을 ‘영처(嬰處)’라고 하였다. 여러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면 자신의 학식과 재능을 감추고는 어리석고 미련한 척하였다. 단정한 사람이나 장중한 선비에게도 기뻐하고 저잣거리의 장사꾼에게도 기뻐하였으니, 대개 빈 배를 홀로 띄워 어디를 가나 유유자적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또 호를 ‘감감자(憨憨子)’ 혹은 ‘범재거사(汎齋居士)’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일찍이 삼호(三湖)에 거주했기 때문에 스스로 ‘삼호거사(三湖居士)’라 하였는데, 이것이 호의 시초이다.” <청장관전서>, 영처문고 1 ‘기호(記號)’
또한 거기에는 화가가 초상화를 그릴 때 인물의 권세와 위엄을 한껏 높일 목적으로 전형적으로 등장시키는 어떤 인위적인 표정도 가식적인 꾸밈도 없었다. 단지 남인(南人) 명문가의 자제로 태어났지만 벼슬길이 막혀 폐족(廢族)의 신세나 다름없으나 세상을 뒤흔들 웅지와 기백만은 결코 감출 수 없었던 ‘불안하지만 강렬한’ 지식인의 모습이 존재할 뿐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윤두서는 ‘자화상’을 통해 자신의 내면세계(자의식)을 ‘있는 그대로’ 표출한 최초의 선비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수십 년이 지나 이덕무의 ‘기호(記號)’를 읽게 되었을 때 필자는 윤두서의 ‘자화상’을 볼 때 느꼈던 감정을 새삼 떠올리게 되었다. 이 글에는 서자(庶子) 출신이라는 장벽과 가난이라는 굴레 때문에 고통받고 있지만 타고난 문장, 뛰어난 학문, 탁월한 식견을 숨길 수 없었던 ‘불운한’ 지식인의 내면세계(자의식)가 아주 잘 표현되어 있다.
여기에는 삼호거사(三湖居士), 경재(敬齋), 팔분당(八分堂), 선귤헌(蟬橘軒), 정암(亭巖), 을엄(乙广), 형암(炯菴), 영처(嬰處), 감감자(憨憨子), 범재거사(汎齋居士) 등 10여개의 호가 등장한다. 그러나 이들 호를 하나로 관통하고 있는 철학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영처지심(嬰處之心)’이다.
이덕무는 ‘영처고(嬰處稿) 자서(自序)’라는 글에서 “어린아이의 재롱은 천진(天眞) 그대로의 것이요, 처녀의 부끄러워하여 감추는 것은 순수한 진정 그대로이다. 이것이 어찌 억지로 힘써서 되는 일이겠는가?”라고 하였다. 따라서 영처지심이란 ‘어린아이’의 천진함과 ‘처녀’의 순수함을 간직한 ‘자연스러움’ 그 자체를 말한다. 여기에는 어떤 가식과 작위도 용납하지 않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만이 존재할 뿐이다.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과 이덕무의 ‘기호’는 바로 그 지점에서 서로 닮았다.
필자가 아주 다른 두 가지 작품에서 비슷한 감정을 느꼈던 까닭 역시 이 때문이 아니었을까? 따라서 ‘기호’는 이덕무가 글로 그린 자화상이다.
선귤당(蟬橘堂)과 청장관(靑莊館) : 매미와 귤 그리고 해오라기
“최상(最上)의 사람은 가난을 편안하게 여긴다. 그 다음 사람은 가난을 잊어버린다. 최하등(最下等)의 사람은 가난을 부끄럽게 생각해 감추거나 숨기고, 다른 사람들에게 가난을 호소하다가 가난에 짓눌려 끝내 가난의 노예가 되고 만다. 또한 최하등보다 못난 사람은 가난을 원수처럼 여기다가 그 가난 속에서 죽어간다.” <청장관전서>, ‘이목구심서’ 중에서
이덕무의 ‘가난의 철학’은 가난에도 ‘품격’과 ‘품위’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이처럼 가난을 편안하게 여기며 부귀와 권력을 쫓아다니지 않았던 이덕무의 삶은 ‘선귤당’과 ‘청장관’이라는 당호(堂號)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당호(堂號)는 자신이 거처하는 곳에 붙이는 호(號)를 말한다. 이 때문에 다른 어떤 호보다 상징성이 강하다. 먼저 ‘선귤당’은 젊은 시절 이덕무가 ‘영처(嬰處)’와 더불어 가장 좋아했던 호였다. 그래서 그는 ‘선귤(蟬橘)’에 관한 많은 글을 남겼다.
‘세제(歲題)’라는 글에서는 “내가 예전 남산 부근에 살고 있을 때 집의 이름을 선귤(蟬橘)이라고 하였다. 집이 작아서 매미(蟬)의 허물이나 귤(橘)의 껍질과 같다는 뜻에서였다”고 적었다. 짧은 글이지만 작고 초라한 집에 살면서도 부끄러워하기보다는 오히려 당당했던 이덕무의 기백이 잘 드러나 있다. 또한 ‘11월14일 술에 취해’라는 시에서는 깨끗하고 향기로운 마음가짐을 ‘선귤’에 비유해 노래하기도 했다. “깨끗한 매미와 향기로운 귤 마음에 간직하니 / 세상사 시끄러운 일 내 이미 잊었노라 / 불을 공중에 살라본들 저절로 꺼질 것이고 / 칼로 물을 벤다한들 다시 무슨 흔적이 있겠는가! / ‘어리석다’는 한 글자를 어찌 모면하겠냐마는 / 온갖 서적 널리 읽어 입에 담을 뿐이네 / 넓고 넓은 천지간 모옥(茅屋)에 살며 / 맑은 소리 연주하며 밤낮을 즐기네.” <청장관전서>, 아정유고 2, ‘11월14일 술에 취해’ 중에서
세상 사람들이 죽자 살자 덤벼들어 얻으려고 하는 부귀나 명예나 출세 따위는 이덕무에게 그냥 세상사 시끄러운 일일 따름이다. 이러한 것들은 불로 허공을 사르거나 칼로 물을 베는 것처럼 허무하고 망령된 일이다. 그에게는 오로지 ‘매미의 깨끗함’과 ‘귤의 향기로움’을 간직하려는 맑고 맑은 마음이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자신을 말하다’는 뜻의 ‘자언(自言)’에서는 세속의 관심사인 이욕(利慾)에 맞춰 살아보려고 했지만 스스로 용납할 수 없어 다시 처음의 본모습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고 하면서 가난하지만 ‘매미(蟬)’처럼 마땅히 자신이 거처할 곳을 알아 깨끗함을 지키고, 남루하지만 귤(橘)처럼 자신을 갈고 닦아 추하지 않는 향기로움을 잃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청장관(靑莊館)’은 이덕무가 죽음을 맞이한 곳이기도 하면서 그의 글과 기록을 모두 모아 엮은 ‘전서(全書)’의 제목이 될 정도로 생전과 사후 모두 항상 따라다녔던 이덕무를 대표하는 호이다. 그가 ‘청장관’을 호(號)로 삼은 까닭 역시 박지원의 증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는 이덕무의 욕심 없는 순박한 삶 자체가 담겨 있다.
“청장(靑莊)은 해오라기의 별명이다. 이 새는 강이나 호수에 사는데, 먹이를 뒤쫓지 않고 제 앞을 지나가는 물고기만 쪼아 먹는다. 그래서 신천옹(信天翁)이라고도 한다. 이덕무가 ‘청장’을 자신의 호로 삼은 것은 이 때문이다.” <청장관전서>, ‘형암행장’ 중에서
앞서 밝혔던 호(號) 이외에도 이덕무는 청음관(靑飮館), 탑좌인(塔左人), 재래도인(䏁睞道人), 매탕(槑宕), 단좌헌(端坐軒), 학초목당(學草木堂), 주충어재(注蟲魚齋) 등의 호를 사용했다. 이 가운데 탑좌인(塔左人)은 이덕무가 현재 서울 종로2가 탑골공원 안에 자리하고 있는 백탑(白塔:원각사지 10층 석탑) 주변에 거처했던 사실을 표현한 호이다.
백탑(白塔)은 ‘북학파’ 인물들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 그 까닭은 그들이 이 백탑을 중심으로 모여 살았기 때문이다. 이덕무가 박제가, 유득공, 이서구 등과 맺은 시문학 동인을 ‘백탑시사’라고 이름붙인 이유 역시 동일하다.
매탕(槑宕)은 매화의 풍모(風貌)와 아취(雅趣)를 언제 어느 곳에서든 즐기고 싶어서 밀랍(蜜蠟)으로 인조 매화를 만드는 방법인 ‘윤회매십전(輪回梅十箋)’까지 직접 저술한 ‘매화 미치광이’ 이덕무를 보여준다. 또한 학초목당(學草木堂)과 주충어재(注蟲魚齋)에서는 인문학의 범위를 뛰어넘어 풀과 나무, 곤충과 벌레 등 식물과 동물에 관한 지식까지 검색하고 탐구했던 이덕무의 백과사전적 호기심과 지식욕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마지막 호(號) 아정(雅亭) : 군사(君師) 정조대왕과의 인연
이 자호(自號)는 이덕무와 정조의 각별했던 인연을 담고 있다. 서자 출신의 가난한 선비였던 이덕무는 정조가 즉위한 지 3년째 되는 1779년, 나이 39세 때 인생의 커다란 전환점을 만나게 된다.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문치(文治)을 표방하고 새로운 인재(人材)를 발탁할 방법을 고심한 끝에 세종대왕 때의 집현전(集賢殿)을 모방하여 규장각(奎章閣)를 세우고 각신(閣臣)을 두었다. 그리고 교서관(校書館)을 창덕궁 단봉문(丹鳳門) 밖으로 옮겨 설치하고 규장각의 외각(外閣)으로 삼았다.
또한 규장각의 각신들에게 하교해 벼슬하지 못한 여항(閭巷)의 선비들 중에 학문과 지식을 갖추고 문학에 능숙한 사람들을 뽑아 외각의 관원(官員)을 채우게 하고 처음으로 ‘검서(檢書)’라는 관명(官名)을 하사했다. 이때 이덕무가 첫 번째로 발탁되었으며, 그 뒤를 이어 박제가, 유득공, 서이수 등이 뽑혔다. 정조 시대 ‘문치(文治)와 문예부흥’에 크나큰 족적(足跡)을 남긴 서자 출신의 이른바 ‘규장각 4검서관’은 이렇게 탄생했다.
그리고 이덕무가 죽기 한 해 전인 1792년 4월, 정조는 한양(漢陽)을 그린 지도(地圖)인 ‘성시전도(城市全圖)’을 시제(詩題)로 하여 칠언 고시(古詩) 100운(韻)을 짓게 했다. 여기에는 이덕무를 비롯한 검서관은 물론 여러 조정 대신들까지 참여했다.
이때 정조는 우등(優等)으로 여섯 사람을 뽑아 그들의 시권(詩卷)에 각각 어평(御評)을 했는데, 이덕무의 시권(詩卷)에는 어필(御筆)로 친히 ‘아(雅)’자를 썼다. 이덕무가 제출한 ‘성시전도’는 ‘우아하다’는 최고의 찬사였다. 지존(至尊)인 임금이기에 앞서 당대 최고의 학자이자 문장가였던 정조에게 받은 극찬(極讚)이었기 때문에 이덕무는 ‘아(雅)’라는 어평(御評)을 가문의 영광으로 여겼고, 이를 후손들이 두고두고 기억하도록 하기 위해 자호(自號)를 ‘아정(雅亭)’이라고 하였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아정(雅亭)’은 이덕무의 수많은 호 가운데 유일하게 호사스러운(?) 호였다. 또한 가장 짧은 시간 동안 이덕무와 함께 한 호이기도 하다.
그런데 ‘아정’이라는 호에 얽힌 이덕무와 정조의 인연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성시전도’를 지은 다음해(1793년) 1월25일 이덕무는 청장관(靑莊館)의 정침(正寢)에서 죽음을 맞는다. 그리고 정조는 이덕무가 사망한 3년 후 그의 아들 이광규에게 친히 내탕금(內帑金)을 하사하고 어명을 내려 이덕무의 유고(遺稿)를 문집으로 엮어 출간하도록 했는데, 이 유고집(遺稿集)의 이름이 다름 아닌 <아정유고(雅亭遺稿)>이다. ‘아정’이라는 호는 이 때문에 가장 짧은 시간 동안 이덕무와 함께 했지만 역설적이게도 가장 오랜 시간 동안 또 가장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호가 되었다.
이렇듯 ‘아정’이라는 호는 이덕무와 정조의 인연이 결코 간단하지 않았음을 알려주는 흥미로운 호이다. 끝으로 정조가 최고의 찬사를 내린 이덕무의 시 ‘성시전도’를 통해 18세기 말 당시 한양의 풍경을 일부나마 감상하는 것으로 ‘호, 조선 선비의 자화상’ 첫 번째 편을 마무리한다.
…… / 한성(漢城) 가운데 태어나고 자랐으니 / 직접 보고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 한번 보고 한번 펼칠 때마다 한 잔씩 마시니 / 하늘은 청명(淸明)하고 해는 길어 다시 반복하네 / 구천 구백 칠십 보의 / 하얀 성벽 띠처럼 둘러있네 / 별을 벌여 놓은 듯 바둑을 늘어놓은 듯 단단하게 다졌으니 / 범이 웅크린 듯 용이 서린 듯 수려하기 그지없네 / 북쪽 산은 백악(白岳)보다 빼어난 것이 없고 / 오른쪽으로 인왕산(仁王山)을 끼고 있으니 백중(伯仲)과 같네 / 산천의 정기 모여 여러 돌 빛 푸르니 / 산 아래 기이한 선비 왕왕(往往) 태어났네 / 남쪽 산은 자각(紫閣 : 남산)보다 수려한 것 없고 / 푸른 기운 하늘로 솟아올라 하늘도 지척(咫尺)이네 / 빠르게 내닫는 말이 안장을 벗는 형세라고 말하니 / 평안도(平安道의) 봉화가 남쪽 변방까지 통하네 / …… / 원각사(圓覺寺)에 우뚝 솟은 백탑(白塔)은 / 열 네 층을 겹겹이 공중에 포개었네 / 운종가(雲從街)에 있는 흥천사(興天寺)의 대종(大鍾)은 / 아주 큰 누각(樓閣) 가운데 날듯이 있네 / 오고 가고 또 갔다 왔다 하는 사람들 / 바다 같은 사람 물결 멀고 아득해 끝이 보이지 않네 / …… / 거리 좌우에 상점이 천 보(步)나 늘어서 있고 / 온갖 물화(物貨) 산처럼 쌓여 셀 수조차 없네 / 비단 가게에 울긋불긋 벌여 있는 것은 / 모두 능라(綾羅)와 금수(錦繡)로 아름답기 그지없네 / 어물 가게에 신선한 생선 맛나게 살이 올랐으니 / 갈치·노어·준치·쏘가리·숭어·붕어·잉어이네 / …… / 한양 안 물건과 경치 이미 다 적었으니 / 다시 교외로 내달려 한번 비교해 보세 / 숭례문(崇禮門) 밖에서는 무엇을 볼 수 있는가 / 십리(十里) 강가의 창고에는 곡식이 억만(億萬) 섬인데 / 안개와 물결 사이로 끝이 보이지 않는 삼남(三南)의 선박 / 빽빽하게 들어선 돛대 만 척이나 정박하고 / …… / 흥인문(興仁門) 밖에서는 무엇을 볼 수 있는가 / 적묘(籍묘)의 농부가 푸른 따비를 쥐고서 / 화양정(華陽亭)은 빛나고 석책(石柵)은 높은데 / 푸르른 풀빛은 하늘에 맞붙었고 녹이(騄駬 : 준마)가 뛰어 노네 / 혜화문(惠化門) 밖에서는 무엇을 볼 수 있는가 / 푸른 숲이 하얀 모래밭에 연이어있네 / 북쪽 언덕의 복숭아꽃 천하에서 가장 붉고 / 푸른 물빛의 시냇가에는 울타리 짧은 집들 / 성은 견고하고 땅은 기름지니 아름답기 그지없고 / 태평한 세월이라 또한 즐겁기 그지없네. / ……
<청장관전서>, 아정유고 12, ‘성시전도(城市全圖)’ 중에서 |
한국전례원 카페에서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