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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생활 원고>
영성생활은 카톨릭 신부.수녀님들,수도자들이 보는 계간지입니다.
씨앗으로 살아가기
변현단 - 농부 · 토종씨드림 대표
「씨앗철학」 출간을 앞두고 있다. 나는 생태순환농사를 짓는 농부로 십수 년 토종씨앗운동을 하면서 토종씨앗의 가치와 중요성이 ’식량주권과 농부권‘ 회복에만 있지 않음을 알았다. 좌우 정치색을 막론하고 그 가치와 중요성을 인정한다. 개량종자도 토종씨앗이 원종이란 측면에서 ’자원의 가치‘로, 어떤 이는 ’신토불이‘와 ’약성‘에 방점을 찍으며, 어떤 이는 식량주권의 문제로, 기후변화에 대응으로, 형질이 고정된 씨앗을 계속 받을 수 있는 지속성으로, 종자를 다루고 이용하는 농부의 권리에 강조점을 둔다. 토종씨앗이 다양한 만큼이나 다양한 관점이 존재하지만 씨앗의 중요성에는 누구나 공감한다.
말씀이 씨앗 되어 우리 안에 사셨다
말씀에 씨앗이 있었다. 예수, 싯다르타, 수운 최제우 등 깨어있는 선구자들은 자신의 고행과정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 세상에 나섰다.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풍요와 행복’의 의미를 알려주었고, 빵 한조각도 나누는 삶을 실천했으며, 병든 자를 고치고 돌봤으며, 부패한 정치권에 바른 말을 하였다. 그들은 당대의 ‘상담사’이자 ‘의사’였으며, ‘예언가’고 ‘혁명가’였다. 선지자들의 행적은 후손을 통해 ‘말씀’으로 전해졌다. 그들의 삶과 언행은 세상의 ‘씨앗’을 만들었다. 말씀의 씨앗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의 삶을 본받는 ‘사람 씨앗’이 되게 하였다. 싯다르타는 모여든 군중에게 설법을 통해 말씀이 씨앗이 되었다. 수운 최제우도 ‘동경대전’으로, 해월 최시형을 통해 억압받는 민중에게 실천적 삶을 제시하였다. 인도의 성자 간디는 손수 물레를 돌리며 근검절약하고 자립하며 영국 식민지로부터 독립과 비폭력 단식으로 대항하였다. 그들은 스스로 몸을 깨우는 수행과 삶을 통해 ‘깨어 있기’를 호소했다. 몸을 깨워 자연의 만물과 소통하였으며 보이지 않는 수많은 우주의 원리를 깨달았다. 하느님과 부처님의 손바닥은 한 평의 마음일 수도, 무한한 우주일 수도 있다. 우리는 ’신‘이라 부르는 이들의 가르침, 이미 말씀 속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다. 손오공이 삼장법사의 손바닥에 있던 것처럼 ’말씀의 씨앗‘은 우리에게 자각과 삶의 방향을 제시한다.
옛 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만 취한 어리석은 우리
코로나19가 한반도와 세계를 강타했다. 매년 찾아오는 바이러스 중 하나가 강하게 한반도를 덮쳤다. 면역력을 테스트하는 감기는 매년 찾아오는데 언젠가부터 감기조차 감당하지 못해 많은 이가 ’독감‘ 주사를 맞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다. 내성은 점차 커져만 갔다. 원인이 무엇인지 알려주지 않으며 스스로 찾아보려고 하지 않는다. 아프면 병원과 약국에만 의존한다. 병원 치료와 약이 정말 우리 몸을 치료해왔던 걸까? 그랬다면 왜 병원과 제약회사는 나날이 번창하고 우리는 점차로 병약해져만 갈까? 혹여 우리에게 병 주고 약 주면서 그들에게 의존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병원과 제약회사의 목표는 ‘이윤’이다. 이윤을 목표로 하지 않으면 도산을 한다. 이윤을 최대한 올리기 위해 그들은 무엇을 할까? 내가 어린 시절에만 해도 집에서 민간치료를 하였고, 중병이 걸려야 의사를 찾았다. ‘삭힌 홍어 한 마리가 위장병을 없앤다.’고 했다. 할머니와 엄마는 약손이었다. 지금은 한의원과 양의사를 찾지만 그들은 손으로 진맥도 하지 않거니와 청진기도 사라졌으며, 문진問診으로 손은 컴퓨터 자판기를 두들기는 데만 이용한다. 눈을 까불려보지도 혀를 내밀게 하여 보지도 않는다. 위내시경으로 검사가 끝나면 “위는 괜찮습니다.” 말하고 증상을 억제하는 약 처방만 내린다. 환자가 “이상해요. 소화가 안 되고 위는 계속 아파요” 하는데도 말이다. 그들은 소화불량이 신체 다른 부분과 연결되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간과하거나 말하지 않는다. “어깨가 아파요? 정형외과에 가셔요.” 위는 위만 보고, 대장은 대장만 본다. 그러니 환자는 분절된 전문가들을 만나러 끝 모를 병원 탐방을 하게 된다.
우리 몸은 부분으로 그치지 않고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외면한다. 다리관절 문제는 인공관절을 넣고, 허리 문제는 시멘트를 부어 고정시키고, 엄지발가락 변형인 무지외반증은 발가락뼈를 갈아 맞추는 방식으로 ’기계 부속품 다루는 공장‘이 현대 병원이 아닌가. 치료하고 나았다면 병원이 제 도리를 했을 터인데, 또 다른 곳에 통증이 발생한다. 그리고 우리는 부속품을 바꾸러 병원에 간다. 나이 들수록 병원과 가깝게 있어야 하는 이유다. 부속품을 갈다 못해 포기하고 온갖 증상 억제제 수십 알을 먹으며 요양원에서 생을 마감한다.
하늘의 기운을 담은 소우주인 우리의 신체, 하느님이 당신의 형상을 본떠 흙으로 만든 소중한 몸은 현대문명과 의학을 만나면서 자동차 부품이 되었다. 흙으로 돌아가는 몸을 너무 천대하는 것이 아닌가. 농부에게 토양을 살리는 자문을 한다는 기술센터도 영양제와 퇴비의 투입을 말하고 병충해에 걸리면 농약 처방만을 말한다. 농사나 몸을 대하는 것이 천편일률적으로 같다. 옛 것을 버리고 새 것만을 취해 온 우리는, 스스로 생사여탈권을 개한테 던져버린 것이 아닐까? 신의 형상을 본떠 만든 몸을 당신 대하듯 하라는 말씀을 잊어버린 것이 아닐까? 우주의 만물이 한 알의 씨앗-신神에서 시작하고, 씨앗이 온 세상에 퍼트려져 너무 많으니 그 소중함을 스스로 저버린 것은 아닐까? 조상의 정서와 문화, 혼이 담겨 대물림된 토종씨앗을 버리고, 수확량만을 최고의 가치로 매년 종자회사가 출시하는 ’새로운 씨앗‘을 사는 것처럼.
쉼이 없는 씨앗은 병이 든다.
겨울은 지상의 생명들이 동면하는 계절이다. 농경생활이 없는 도시생활은 동면을 잊은 지 오래다. 현대문명은 그렇게 자연과 생명의 이치를 거스르도록 했다. 내가 농부로 산 지 18년째,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농사를 지으며 농경생활에만 몰입한 것은 아니었다. 가난한 이들이 모인 공동체 운영자로 귀농을 시작한 나는 공동체의 경제적 자립을 위해 고분 분투했다. 먹고 살기도 바빴지만 공동체 식구들의 가지가지 애환을 해결하면서 ‘산전수전 공중전’을 겪었다. 빌어서 농사짓던 땅이 개발되면서 공동체가 해체되었다.
곡성에서 터를 잡을 때 어떤 이는 내가 중병에 걸려 시골로 갔을 것이라고 추측했단다. 공동체 일도 밤낮이 없는데 엄마가 중병으로 쓰러져 분당과 시흥을 오가고 아버지마저 병환에 있으면서 내 신체가 감당하지 못해 급성 폐렴으로 1년에 두세 번 병원에 누워야 했다. 곡성에 내려온 뒤에도 논농사와 밭농사를 하면서 인근지역부터 토종씨앗을 퍼트리는 모임과 강의 등 활동을 시작하며 전국을 오갔다. 2015년 새 터를 얻어 8개월 동안 집을 직접 짓던 탓에 수족냉증도 얻었다. 겨울을 쉬지 않고 중노동으로 보낸 탓이었다. 토종씨앗 활동을 내가 사는 지역으로만 한정하고 동선을 짧게 하겠다는 다짐도 하릴없이 무너졌다. 토종씨드림 활동을 재정비하고 산적한 문제들을 수습하는 과정은 여름 대상포진으로 표출되었다. 나의 일상생활은 전국을 밤낮으로 오가며 씨앗 수집, 보급, 교육. 연구, 정책, 각종 회의와 모임을 하고 일주일에 절반 이상을 2-3일 또는 당일로 전국을 오갔다.
자가용과 인터넷은 사람들로 하여금 더 많은 일을 하게 한다. 집에 돌아오면 때에 맞춰야 하는 농사가 기다리고, 밤에는 컴퓨터 앞에 앉아 각종 계획, 보고서, 메일 등 자판기를 두들기며 숙면의 시간을 넘겼다. 12월 중순이 되면 한 시름 놓지만 겨울에는 각종 결과보고서나 행정단위 요청으로 겨울은 겨울대로 바빴다. 나의 집에 있는 날이면 전국에서 수많은 사람이 오간다. 농사시간을 쪼개 얘기를 나누고, 다음날이면 운전대를 잡는다. 달력에는 일정이 빼곡하게 적혀 있다.
돈이 별로 들지 않는 자립적 삶, 내 손으로 집도 짓고, 산물을 먹고, 나무를 하고, 기계를 쓰지 않고 농사를 짓는다. 농사나 사는 것에 돈이 들지 않는 삶. 돈이 들지 않으면 생태적 순환이 보장되는 환경, 자유롭게 지내려고 귀농을 한 지 18년 만에 ’위기의 몸‘이 되었다.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식당 아주머니가 냉장고가 있는 방문을 열자 냉장고에서 뿜어낸 전류로 나는 기절할 정도로 두통에 시달려야 했다. 또 산 너머에 있는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 고압 전류로 인해 몸이 휘청거렸고, 몰려오는 구름에 몸이 돌덩이처럼 무거웠다. 어둡고 무거운 파장을 내는 사람이 오면 몸의 방어벽이 무너져 통증이 온다. 그나마 오기傲氣로 버티던 몸이었다.
자유롭게 살기 위해 귀농했지만 내 몸의 소리를 듣되, 건성으로 넘겨버리고, 세상의 소리만을 귀담아 들었다. 누적된 ’burn out’은 나에게 선택을 강요했다. 안식년이 무엇인지, 하느님이 세상 창조 때 하루를 왜 쉬었는지, 그리고 씨앗의 휴면기간과 겨울잠을 자는 이유를 알았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쉼이 없고 더욱 바빠진 생활을 당연하게 여긴다. 도시생활은 질병의 시대라고, 과연 나는 18년 만에 안식년이 가능할까?
씨앗은 스스로 움직이며 환경에 순응한다.
기후변화 또한 자연의 법칙이다. 살기위한 몸부림. 균형을 되찾으려는 자연의 변화다. 우리의 삶은 현대과학문명을 무심결에 받아들이고 편리한 생활에 젖어 분절된 사유를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다단계 전문가에 의해 장악된 노예가 아닌가? 내 몸의 소리조차 읽지 못하는데 어찌 하늘의 뜻을 알 수 있을까? 하늘의 뜻을 알려면 내 몸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래야 다른 이들의 소리를 잘 들을 수 있다. 다시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를 되새김한다.
우리는 매일 씨앗을 먹고 산다. 씨앗의 힘을 살면서 나 또한 씨앗이 된다. 씨앗은 생명의 근원이다. 우리는 온통 씨앗으로 이루어졌다. 말씨. 마음씨. 글씨. 맵씨. 솜씨. 불씨. 성씨. 씨앗은 다양하다. 어느 것 하나 뺄 것도 줄을 세울 수 것도 없이 오색찬란하다. 말씨와 마음씨, 글씨는 내가 뿜는 씨앗이며 파장이다. 숲의 맑은 새소리와 흐르는 물소리를 들을 때 심기가 편해진다. 잔인한 폭력이나 전쟁터의 총소리는 공포의 트라우마로 몸에 각인돼 평생을 안고 살아간다. 파장은 이렇듯 물질로 존재한다. 하느님의 말씀이 씨앗이 되었다는 얘기는 바로 이런 뜻이다. 말이 씨앗이 되며, 마음이 씨앗이 된다. 마음은 신경조직을 통해 오장육부와 두뇌, 온몸에 작용하니 세포 하나하나 미세한 신경조차도 씨앗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씨앗이 움직여야 한다. 자율신경조차도 움직여야 한다. 신실한 마음은 씨앗의 힘을 믿는 것이다. 나의 몸을 믿는 것이다. 나의 신경 세포 하나하나의 ‘온전한 힘’을 믿는 것이다. 하느님이 인간을 만드실 때 온전한 우주를 만드셨기 때문이다. 씨앗을 소중히 다루는 것. 토종씨앗만이 아니라, 내 몸의 모든 씨앗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다.
내가 변해야 세상은 변한다.
오십 중반을 넘어섰다. 살아온 모습이 아득하다. 토종씨앗을 수집할 때 할머니에게 씨앗을 재배한 햇수를 물으면 기억나지 않는다고 한다. 기억할 것 같지만 금방 잊어버린다. 많은 기억이 사라지고 현재만 남는다. 농부가 된 뒤에는 생태적 생활에 천착하면서 흐름에 내맡겨 살아왔다. 특히 ’너와 나‘의 구별이 없었다. 내가 사는 이곳은 산의 물을 그대로 먹고. 밖에 화장실이 있어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엉덩이 내리고 날씨를 그대로 느끼며 살지만 불편을 모른다. 기후 변화가 심해도 커다란 걱정 없이 농사를 짓는다. 매년 받아서 심은 토종씨앗이 알아서 기후에 적응하기 때문이다. 수확량이 적으면 적은대로, 변이가 나오면 원인을 추적한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으니까. 행위와 대상, 환경, 나를 포함해서 둘러싼 모든 것은 나에게 배움과 터득으로 작용한다. 자연은 내게 이치를 알게 하고 지혜를 준다. 자연의 이치는 사회와 인간의 삶의 이치와 같다.
절대 선과 악이 따로 없고 옮고 그름이 따로 없는 것처럼. 불경에 ’분별을 하지 말고 관조하라‘는 울림이 크게 다가온다. 너무 기뻐해도 너무 슬퍼해도 몸을 그르친다. 몸의 신경계는 촘촘하게 그물망처럼 연결되어 반응한다. 몸은 끊임없이 균형을 향해 움직인다. 균형이 깨어지며 나타나는 것이 감정이요, 몸의 증상이다. 기후변화와 각종 자연재해는 자연이 살기 위한 생태적 순환 과정이다. 몸의 증상도 살기 위한 표현이다. 이를 제대로 알아차리는 것이 변화의 시작이다. 내 몸을 관觀하고, 언사를 관하고, 나를 둘러싼 환경을 관하고,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을 관하는 것. 변화는 ’나‘로부터 일어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씨앗은 생명의 본능을 충실히 이행하려고 저절로 순응한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늘 깨어 있으며 기도하라고 했다. 사도신경을 할 때 손으로 가슴을 치면서 “내 탓이오, 내 탓이오.”하는 구절이 있다. 가슴을 치면 가슴에 뭉쳐있던 통증을 풀어준다. 누구의 탓도 아닌 내 탓. 내가 변하지 않은 탓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했으며, 자신의 가슴에 못을 박았다. 가슴에 못이 박힌 것처럼 아픈 통증은 가슴에 담아둔 응어리, 화기가 있다. 화기를 빼려면 가슴을 계속 두드려서 응어리를 흩어야 한다. 간절하게 ’내 탓이오‘ 회개해야 하는 이유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예수님 또한 십자가를 지고 죽음을 맞이한 것은 내가 변해야 세상이 변한다는 것을 실행한 것이다. 죽은 뒤 사흘 만에 부활하신 것은 하늘의 뜻에 따라 순응한 예수라는 씨앗이, 후세대에 수많은 씨앗으로 환생함을 나타낸 것이리라. 하나의 씨앗으로부터 셀 수 없는 씨앗으로 수많은 우주를 이루고 있음을.
우리는 매일 밥상을 대한다. 내 밥상 위에 얼마나 많은 씨앗이 담겨 있는지, 밥을 올린 상조차 얼마나 많은 씨앗으로 만들어져 있는지, 우리는 매순간 씨앗을 먹고 살아간다. 씨앗을 먹고 사는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한다. ‘씨앗으로 살아가는가?’
2020. 3. 8
은은가隱誾家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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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보았습니다.
현대문명으로 인한 모든 문제들이 씨앗의 철학으로 돌아가 해결되기를 바랍니다~^^
서문 형식의 글을 읽으니 일단 뒤의 글이 몹시 궁금해집니다.
진정 그대는 쉬어야할 때 쉬고 있는가? 라고 제게 자문해 봅니다.
늘 강건하시길 기원합니다
요즘 코로나19께서 정신없이 바쁘게만 살아가던 사람들로 하여금 잠깐의 안식일을 주신 듯 합니다..
변쌤께서두 이참에 짧으나마 알찬 안식일을 보내시길....
단이샘 건강이 젤 걱정됩니다.
맛나고, 좋은것들로라도 건강 잘 챙기시면 좋겠습니다 ^^♡
건강이 제일중요합니다.
건강챙기면서 하세요.
너무 많은일를 하시네요.
너무 많은 일을 하고 계셔서 늘 건강 걱정이 됩니다
조금씩 일을 줄였으면 합니다~~
느긋하게 산책을 즐겨보신 적이 오래지 않나요 대표님? 사시는 곳 산책하기 딱 좋던데요. 🚶♀️🚶♀️🚶♀️🚶♀️🚶♀️
회원님들 걱정이 많네요. 몸과 마음 잘 챙기시길 기도합니다~~
단이님, 크고 많은 일을 하셨으니 이젠 정말 몸을 돌보셔야 할 때! 멀리서 소식듣는 저도 알겠어요. 단이님이 건강하셔야 토종씨앗도 퍼지고 사람씨앗도 퍼지고..하잖여요~^^
저는 작년에 컨테이너집에 구들방을 붙였어요. 이화종 선생님께서 고개넘어 계셔서 덕을 봤구먼요. 이제 영월오시면 저의 뜨끈한 방에서 쉬어가셔요.. 저희 모두 그럭저럭 잘 있습니다. 댓글빌어 인사드리옵니다 _()_
드뎌 가입하고 변선생님 글을 읽으니 너무 좋네요.
많는 지도편달 바랍니다. 선생님의 건강을 기원합니다.
토농회 가입신청서 보냈어요? 보냈으면 게시판 열어드릴께요.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1.04.20 02:50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1.04.21 00:57
수고 많으셨습니다~항상 감사 하는 마음 입니다~
가슴에 파고드는 말씀여요
씨앗으로 살고 있는가?
씨앗으로 살고 있는가?
한살림강연때 뵙고 반했어요
좋은 글과 마음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