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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반이민정책과 미주한국불교계의 대응
글 /김형근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하고 난후 켈리포니아, 뉴욕, 콜로라도주 등 전미국에 사는 비백인계 사람들은 그의 반이민 정책 때문에 불안한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뉴욕한국일보 3월 11일자 신문보도에 의하면 유학생으로 합법적인 신분을 가지고 있는 한인이 토플시험장에서 시험감독관에게 쫓겨나는 피해를 당했다고 보도되었다. 어느 곳에서는 자녀의 학교 등굣길에 단속요원에 부모가 잡혔다고 한다. 이런 비슷한 반이민 정책의 피해 사례가 매우 많다고 언론에 보도되고 있다. `주변의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일하던 종업원들이 갑자기 나오지 않는다”는 사람도 있고, 남미에서 온 사람들이 돈 생기면 무조건 자기 고국으로 송금을 하고 소비를 하지 않아서 장사가 안된다는 말도 한다. 또 뉴욕시 플러싱 한인타운의 노던 블러바드에는 남미나 중미에서 온 사람들이 죽 늘어서서 일일 노동자로 구직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는데 요즈음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반이민정책 때문에 비유럽계인들의 피해가 속출하고, 서류미비자들과 그들의 자녀들도 불안한 삶을 살고 있으며 그 파장은 커지고 있다.
이 모두가 트럼프의 반이민 정책인 프럼프 행정명령 때문이다. 이 행정명령은 시애틀 연방 순회법원에 의해 일시 정지되었는데 연방 법무부가 이에 항소를 하였고 항소를 맡은 샌프란시스코 연방 항소법원이 시애틀 법원의 손을 들어 주었다. 이렇게 되어 트럼프 반이민 행정명령이 효력을 상실하지 트럼프는 또 약간 다른 행정명령에 사인을 하였다. 이런 트럼프의 반이민 정책은 미국이‘이민의 나라’라고 하는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통념과는 달리 정반대였다. 미국의 반이민 정책은 오래되었으며 영국을 비롯하여 미국에서 건너온 유럽계 백인들은 흑인과 인디언에 대하여 끔찍한 인종차별과 살상은 하였다. 그 기간이 1백년도 넘는 기간이었고 그 숫자가 너무 많았다. 심지어 같은 백인인 아일랜드인과 천주교인들을 매우 싫어하였다. 미국역사와 미국불교사를 보면 이런 것들은 금방 알수가 있다.
트럼프 반이민 정책에 관해서‘주간경향’2017년 2월 14일자에 실린 노정태씨의 글 <우리가 모르고 싶었던 ‘진짜’ 미국>을 일부 소개해 본다.
그러나 새뮤얼 헌팅턴의 생각은 다르다. 2004년작 <새뮤얼 헌팅턴의 미국>을 펼쳐보자.
이 책의 원제는 (우리는 누구인가?)이다. 제목이 곧 내용이다. “미국은 거의 모두가 영국제도에서 건너온 17~18세기의 개척자들이 만들어낸 새로운 사회”(59쪽)로, “역사적으로 미국인들은 대체로 이민자들을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았고 미국을 ‘이민자들의 국가’라고 자랑하지도 않았다”(59쪽)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이민국가 미국’의 신화는 2차 세계대전을 통해 형성되고 이후 1965년의 이민법 개정을 통해 만들어졌다고 그는 주장한다.실제로 인구 구성을 보더라도 미국은 ‘이민자들의 국가’가 아니다. ‘개척자들과 그 후손들의 나라’라고 보는 편이 옳다. “간단하게 말해서, 20세기 말에 미국의 인구는 절반가량이 초기 개척자들과 노예들의 후손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개척자들이 만든 사회에 합류한 이민자들의 후손이었다.”(67쪽) 전적으로 자신을 이방인, 아웃사이더라고 여길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소리다. 그러므로 미국인으로서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대답하는 것은 영국과 그 외 유럽에서 건너온 신교도 개척자들의 사고방식과 문화적 관습을 어떻게 이해하고 계승하느냐의 문제로 이어진다.
강준만이 쓴 ‘미국사 산책 3권’에도 미국 역사 초기에 있었던 이런 반이민 정책이 자세하게 언급되어 있다.
“외국 이민자 수는 1830년대엔 50만, 1860년대엔 250만 명에 이르렀다. 1860년대에 150만 명이 넘는 아일랜드 태생의 이민자와 100만명에 육박하는 독일 태생의 이민자가 미국으로 건너왔다. 이렇듯 이민자가 급속히 늘면서 외국인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한 비밀결사 조직들이 만들어졌다.
1844년 필라델피아에서 아일랜드계 카톨릭교도에 반대하는 격렬한 시위가 일어났다. 시위자들은 “거친 아일랜드인과 그 비슷한 사람들에게 무차별적으로 참정권을 주는 대 대해서 어떤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자유와 재산은 곧 끝장이 나고 말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 힘입어 결성된 첫 번째 조직은 1837년 ‘Native American Asso.)였으며, 1850년엔 'Supreme Order of the Star-Spangled Banner)'이 조직 되었다. 이들은 카톨릭교인이난 외국인에게 공직 보유를 허용하지 않고 더욱 제한적인 이민법을 제정해야 하며 참정권 행사를 위해 문맹검사를 실시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수필가로 이름높은 랠프 왈도 에메슨은 1840년대의 보스톤 초월주의자 그룹의 지도자였는데 그는 인종차별주의자와 반카톨릭주의자들에 대한 혐오감을 자신의 일기에 드러냈는데 바로 여기서 '용광로(melting pot)' 개념이 탄생했다.
“코린트 사원의 옛 가마에서는 금은과 다른 금속을 녹여 혼합함으로써 코린트 황동이라는 어떤 것보다 값진 새로운 합금을 만들어내었다. 마찬가지로 모든 민족의 피난처인 이 대륙에서도 아일랜드인, 독일인, 스웨덴인, 폴란드인, 코사크인 등 모든 유럽 종족의 에너지와 아프리카인과 폴리네시아인 등 모든 인종의 에너지는 새로운 인종, 새로운 종교, 새로운 국가, 새로운 문학을 건설할 것이며, 이것은 중세 암흑시대의 용광로로부터 나온 새로은 유럽만큼이나 활기찬 것이 될 것이다.”
미국사에서 보이는 반이민 정책의 연속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아시아인들에 관한 인종 차별에는 미주현대불교에 연재되었던 '백조가 호수에 온 이야기(한국 단행본 제목은- 이야기 미국불교사)'에 잘 나와 있다.
여기 그 내용을 옮겨서 다시 소개한다.
초월주의자들이 콩코드(보스톤 근교-편집자 주석)에서 동양적인 것을 놓고 연구하며 즐기고 있을 때, 아시아인들은 콩코드로부터 3,000마일 떨어진 미국 서부에 당도하기 시작했다. 1848년, 샌프란시스코 북부에 있는 존 셔터의 제재소에서 금이 발견되었을 때만 해도 미국 땅에 중국인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불과 1년 후에는 300명의 중국인들이 캔톤 식당에서 모임을 가졌고, 최고급의 중국 비단옷과 신발을 착용한 중국의 상인들과 무역단들이 포트머스 광장에서 도시의 유지들로부터 공식적인 환영을 받았다. 이날 중국인들은 중국어로 깨끗이 인쇄된 그리스도교 선교 팸플릿을 받았는데, 중국인들은 큰 관심 없이 의례적으로만 잠시 훑어보았다. '캘리포니아 신보(California Courier)'지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우리는 이렇게 멋진 사람들의 모임을 이전엔 본 적이 없다. 이 사람들은 다른 외국인들뿐만 아니라 우리 미국인들에게도 질서와 준법정신이 강한 침착한 사람들로서 본보기가 되는 민족임이 틀림없다”라고 보도했다.
이 상인들은 선두주자들이었다. 1852년까지 미국의 골드러쉬gold rush: 새 금광지로의 쇄도로 2만여 명의 중국인들이 미국에 도착하였다. 1860년에는 캘리포니아 주민 10명 중 1명이 중국인이었다. 19세기 말에는 무려 중국인 주민이 6만 3천 명이나 되었다.
최초의 이들 아시아 이민자들은 흔히 기술도 없고 이름도 없는 하급 노동력을 제공하는 무리들로 인식되고 있는데, 사실 이것은 오해다. 대부분의 이민자들은 그들이 ‘황금산(Gold Mountain)’이라 부른 그들의 일터에 쓰이는 요긴한 기술을 가지고 왔다. 중국인 목수들은 자신의 연장까지 가지고 와서 야영장을 옮길 때마다 다시 조립할 수 있는 나무집을 미국에서 최초로 지은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약은 물론 의사도 데리고 왔다. 중국 의사인 아 손Ah Son은 양키크리크에 있는 광산 야영장에 50개의 침상이 있는 중국인 병원을 만들었다. 중국인들은 협동하는 훌륭한 전통이 있어서, 개인주의적인 백인들이 포기해버린 금광에서 금맥을 찾아내기가 일쑤였다.
1867년, 이 중국인 노동자들이 중부 태평양 연안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이들은 절벽에서 타고 오르내릴 수 있는 바구니를 만들어 사용하여 로키 산맥과 네바다에 다이너마이트를 설치하고 곡괭이질을 했다. 중국인 농부들은 야채를 심고 과수와 포도도 재배하였다. 중국인 어부들은 해안에서 새우나 조개류를 잡았고, 중국인 노동자들은 사크라멘토 강 삼각주의 물을 빼는 제방시설과 운하를 건설하였다. 중국인들은 요리사, 세탁사, 이발사, 점원으로도 일했다. 이러한 모든 직업에 종사하면서 중국인들은 소설가 마크 트웨인Mark Twain이 묘사하듯이 “조용하고 화평하며 술주정뱅이가 아닌 유순하고 부지런한 좋은 이웃”임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미국인의 태도는 점점 적대적이고 폭력적으로 변했다. 미국의 법률에 따라 중국의 어부와 광부들은 특수외국인 세금을 부담했다. 그러면서도 중국인들의 권리 요구는 종종 묵살되었고, 낚시터들은 총으로 위협받기까지 했다. 1877년,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중국인 세탁장들이 불탔으며, 1885년에는 25명의 중국인들이 와이오밍의 락 크리크에서 사형私型을 당했다. 그뿐만 아니라, 1884년에 워싱턴 주의 타코마에서는 그 도시의 모든 중국인들을 유개有蓋화차에 실어 도시 외곽으로 갖다 버리는 일까지도 발생했다.
주민들의 태도뿐만 아니라, 법률마저도 이들 이민자들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다. 1854년, 캘리포니아 대법원의 찰스 머레이 판사는 두 명의 백인이 연루된 살인 사건에 중국인 증인 채택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 판사의 이론은 간단했다. 즉 콜럼버스 이래로 미국 인디언이나 몽고인이나 아시아인은 열등한 종족들로서 백인들과 같은 권리를 부여받을 수 없다는 논리였다. 자신들의 정부로부터도 보호받지 못한 중국 이민자들은(중국에서 이민자들의 출국은 1868년에야 정식으로 허용되었음) 미국땅에서 정치적으로 무력했다. 처음에 미국 대법원에서는 중국인 이민을 반대하는 법안을 기각했지만, 미국 내의 도시나 주州 차원에서 수많은 반反중국인법이 제정되었다. “중국인 세탁부는 나무로 된 건물에서는 일할 수 없다. 중국인 행상은 기둥에 매단 바구니에 물건을 놓고 팔 수 없다. 중국인 새우잡이 어부들은 촘촘하게 짠 그물을 사용할 수 없다” 등이 그 사례들이다. 1870년대 들어 중국인 문제는 미국 내에서 큰 골칫거리였다. 마침내 1882년 미국 의회는 ‘중국인 추방령(Chinese Exclusion Act)’을 통과시켰다. (1858년 캘리포니아 주 차원에서 더 이상 중국인 유입을 금지하는 법령을 세웠는데 이것은 주 차원이었다.) 이에 대해 스튜어트 크레이톤 밀러Stuart Creighton Miller는 '환영받지 못한 이민(The Unwelcome Immigrant)'에서 “미국은 건국 이래 지켜 온 자유로운 개방 이민 정책에서 처음으로 인종적,문화적 차등을 두기 시작했다”고 썼다.
18세기 유럽에서는 볼테르Voltaire나 디드로Diderot 등이 중국문명의 세련됨과 이성적 특징 및 질서와 지혜를 찬탄했다. 이런 견해는 공자의 사상을 라틴어로 번역했고 중국 왕실의 최고로 높은 지위에 있던 사람들에게서 감동을 받은 예수교 선교사들로부터 나왔다. 그러나 이제 19세기 중엽에 와서는 스튜어트 크레이톤 밀러가 썼듯이 중국인에 대한 전혀 다른 이미지가 “기본적인 이미지”로 전면에 나서게 된다. 즉 “침체되고 사악하며 아직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한 벌떼처럼 몰려드는 떼거리”가 이들에게 느껴진 중국인의 모습이었다. 이런 선입견의 일부는 중국으로 간 미국 개신교 선교사들이 본국의 수백 가지에 달하는 크리스천 신문에 보내온 보고서들 때문이기도 했다. 이 크리스천 신문들은 개신교 근본주의자들의 부흥기 동안에 우후죽순처럼 생겨나 전 미국을 휩쓸었다. 이들 선교사들은 중국 포교사업에 본국의 지원과 자금을 호소하기 위해, 자신들이 중국 이교도들 때문에 얼마나 비참한 곤욕을 치르고 있는지를 설명하였다. 중국인들 사이에서 중혼重婚, 전족纏足, 유아살해, 도박 등의 무시무시한 여러 가지 악행이 횡행하고 있다고 전하며, 이들 선교사들은 종교와 관련하여 “이교도의 중요한 네 가지 표시”는 “도교, 불교, 조상숭배, 그리고 아편중독”이라 하였다.
위에서 보듯이 미국에서 중국인이라는 특정 국가의 사람을 대상으로 한 반이민 악법이 지금으로부터 130년 전인 1882년에 제정된 것이다. 1869년 미국의 동서를 연결하는 대륙철도가 완공되었다. 이 공사의 동부철도는 대부분 아일랜드인 노동자들이었고 서부철도는 대부분 중국인 노동자들이었다. 이 공사에 중국인 14,000명이 투입되었고, 이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런 희생에도 일부 백인들은 감사는 커녕 증오했다. 이러한 반이민정책은 1965년 10월4일 오후 뉴욕항 남쪽 자유의 여신상이 서있는 리버티 아일랜드에서 린든 존슨 대통령의 역사적인 개정 이민법 서명식이 거행으로 완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법은 케네디 대통령 시절에 발의되었다. 완화되어 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였던 반이민 정책을 내걸고 프럼프가 지난 해 11월 대선에서 당선되었고 그의 취임과 함께 반이민 정책을 시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트럼프에 대해 미국의 켈리포니아와 뉴욕 주정부, 그리고 뉴욕시를 비롯한 많은 시에서 반대를 한다고 발표하고 있다. 이런 주와 시외에도 수 많은 시민단체와 종교단체들도 반이민정책에 반대하고 나서고 있다. 천주교에서도 한인 개신교에서도 이런 움직임이 활발하다. 하지만 불교단체 특히 미주한국불교계에서는 타종교의 이런 움직임을 그저 바라볼 뿐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 현재 미주한국불교계 교세로는 마음은 있지만 할 여력이 없다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트럼프의 반이민 정책은 시대에 역행하는 잘못된 정책으로 머지않아 중단될 것이다. 그 시기가 빨리 오기를 기대하면서 미주한국불교계는 이런 사회적 문제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지 생각해 본다.
미국에서 1965년 이민법 발효 이후 아시안 이민자들이 많이 들어왔고 이것은 미국불교계의 지형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이민 사회에서 불교 사찰은 이민자들의 정착에 도움을 주면서 성장하였다. 미국에 건립된 태국, 스리랑카, 미야만, 캄보디아, 태국, 베트남, 대만 사찰들은 그 민족들 커뮤니티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한국 커뮤니티에서 사찰은 그런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이런 이유로 한국에서 불교신자였던 사람들이 미국으로 이민으로 온 후에 타종교로 개종한 사람들이 많다. 이민사회에서 이민사회의 문제, 미국사회의 문제를 외면하는 종교는 현실 도피로 보일 수가 있다. 앞으로 미주한국불교계는 불교포교와 더불어 사찰이 서있는 지역사회에 참여하면서 사회와 소통해야 한다. 건물 공간을 있는 사찰은 지역사회에 개방하여야 한다. 또 한인사회의 문제와 미국 사회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트럼프 반이민정책에 어려움을 겪는 한인들을 위해서는 사찰들이 연대하고 타종교계와 연대하여야 한다. 또 타민족 불교계와 연대하여 역량을 키워 이들을 보호하고 도와야 한다. 미주한국불교계는 어렵더라도 이 길로 나간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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