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기억으로 이십여일 여 지난 1987년 2월9일(구정 날) 새벽 수리를 끝낸 배를 타고 거제조선소에 도착하여 아침을 맞습니다.
푸르게 깨어나던 새벽녘.
상사는 내게 장비재가동을 명합니다.
혼자서 안벽으로부터 19메타나 치솟은 배위로 38스퀘어라는 38미리 전기선을 혼자 끌어 올리며 선수(배앞쪽)부터 장비결선을 하던 중 선미(배뒤쪽)부근설치하다 겟트웨이(배 중간 약 1.8미터상부 통로)에서 기름에 미끄러져 갑판위로 떨어집니다.
그 갑판위에는 약 35센티정도의 보강판인 론지라는 것이 있습니다.
하필이면 떨어지며 허리가 그곳에 부딪혀 실신합니다.
그 추위에 정신차린 저는 벌벌기어 배에서 내려와 현장사무실까지 기어가서 상급자에게 보고하고 회사 당직차량에 실려 집으로 돌아옵니다.
이 사건이후 그 상급자는 퇴사하고 하루만에 현장기사가 찾아와 출근을 요구하여 출근하여 보니 제가 대행반장이라는 줄반장이 되었습니다.
당시 우리 조선산업 종사자의 현장인력 중 고졸자도 현장관리직책에 맡겨질 정도로 지금처럼 대졸자가 흔하지 않아서 였겠지요.
죽자사자 현장 쫒아다니며 이제 취업하거나 훈련소 갓 수료자들을 데리고 일을 하려니 전문성 결여는 분명해서 전 담당과장께 보고하고 허락을 득하여 현장사무실에서 그들과 공부하며 가르칩니다.
저는 지금도 말합니다.
전기하면 바이메탈원리를 아냐구요.
스윗칭회로에서 초기 사용물이고요. 이제는 유물이겠죠. 저전압, 고전압범위도 모르는 사람이 경력자라며 입사합니다.
당시는 누구 추천인가가 입사기준이던 시절이라 저도 처남이 거쳐간 삼성이고 당시 대우조선과장이었던 처남덕에 경력특차되어 제법 시급이 많았던 축에 있었습니다.
그렇게 한해가 가고 1987년 11월 28일 이병철이 돼집니다.
이병철,,, 그 노동자를 한 소모품으로 알던자가 주창한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노조는 안된다"는 그의 경영이념은 당시 노조환경에 부닺치며 현대가 노조설립하였고 대우조선이 노조설립데모를 하던 즈음이라 간선제 노사위원제를 직선제 노사위원제로 바꾸어 초대 직선위원선출공고를 합니다.
전 기억합니다. 조선소 본관에 빨간 카페트를 지나 들어선 이병철 개새끼의 영정에 국화 한송이 놓고 묵도하던 저를요.
그때 까지만 해도 냉담자는 아니었습니다.천주교 유치원을 다녔고 안드레아란 김대건신부님과 같은 5월생이라 영세명까지 얻었던 천주교 신자였습니다.
당시 삼성조선은 브라스팅이라는 도장 전 전처리 작업장비를 미국 벡텔사의 쿼드형 반자동장비로 대치합니다.
수입상인의 잘못된 장비체결로 효율이 나지않아 작업불능상태가되고 6척의 수주물인 케미컬(특수화학선)선체에 탈에폭시라는 페인트작업지연으로 페널티를 물어야하는 지경이 됩니다.
근데 이 시기에 공교롭게도 저를 시기하던 공무부장 김모는 외업부장 김모와 공모하여 현장인력축소라는 미명으로 제가 맡고있던 장비직을 해체하고 직원들을 전배처리합니다.
저는 전배에 항거하여 현장에서 저와 남은 직원들과 리어카를 끌고 페인트운반, 기숙사 보일러설치공사 등을 하며 밤이면 장비및에 숨어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습니다.
제가 찾은 문제점을 페퍼웍(작성)하여 마지막 공정회의에 담당과장의 지원으로 참석하고 이 문제의 핵심을 브리핑합니다.
단순히 파이프 30여센티교환과 밸브교체를 제안합니다.
총괄상무 이민이 주재하던 마지막 공정회의는 12월 23일었고 고가의 수입장비가 사장되느냐는 결정시점에 저의 제안이 받아드려지고 밤새 개선 후 이튼 날 아침 10분 작업 후 은바가지가 뱃전에서 뛰어내려와 제 등을 치며"내방으로 따라와"하더군요
한시간 여 후 저는 조선소 최고 경영자인 본부장실에 불려갑니다.
총괄상무보다 한 직급 높았던 이용길이란자가 제게 말하더군요.
"원하는게 뭐야"
"네, 저는 제 보직복구를 원합니다"
냉큼 전 보직에 복귀합니다.
예전 나와 일하던 장비직원들이 다시 뭉쳐졌죠.
이 시기에 노사위원선거가 있었고 선거 삼일 전 입후보하게 됩니다.
저를 아는 제 현장 관리자 중 선거에 출마했던 자가 저를 입후보하게 설득하였고 담당과장은 초대위원의 위험성을 염려하여 적극만류하였으나 저는 동료들의 요구대로 출마하여 선거 날 아침 마지막 유세만을 하고 투표에 들어갑니다.
'''98% 득표 당선'''
당시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의 노동자 전체 1,700여명중 외업부 350여명의 98%로 찬성으로 외업부 노사위원이 됩니다.
이게 제 인생에 유령노조위원장의 굴래가 될 줄은 꿈에도 생각못한 저가 지금은 원망스럽습니다.
이후 일들을 3~4차례 더 기술하려합니다.
기술을 말하는 자리에 제 개인사를 먼저 밝히는 것은 제 의지 때문입니다. 몇번 더 참아주시면 제 의지로 제가 아는 기술들의 집합을 열겠습니다...
양해해주십시오...
첫댓글 기다려 지네요...잘보고 있습니다~^^
인생 행로가 다 나름에 질곡이 있어서 현재가 있겠지요... 기대됩니다.
짦은 인생인데 많은 경험하시네요
잘읽고있습니다
언제 자서전겸 불기술책 쓰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가슴에 응어리가 느껴집니다...
지금은 많이 내려 놓았길 바랍니다.
어쩌면 님이 난로 알리미를 자초하는게 마음 치유의 방법일지도 모르겠다라는 생각도 드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