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제목 : 창 31장 1-2절
설교본문 : 마하나임의 하나님
이성이 잠들면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한주간 평안하셨습니까? 지난 주 잠시 일상을 떠나서 쉼을 조금 가졌습니다. 일상과 떨어지는 경험의 중요함을 새삼 실감했습니다. 일정 부분 회복되었지만, 돌아오는 여정은 다시 무게감을 느꼈습니다. 여전히 산적한 해결해야 할 과제가 앞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의 현상을 보면서, 프란시스코 고야(1748-1828)의 ‘거인’(1808-1810)이 떠올랐습니다. 예전에도 설명드린 바 있지만, 이 그림에는 거인이 마치 전쟁터 같은 마을을 등지고 앞에서 다가오는 무언가와 마주하고 있는 듯 묘사되어 있습니다. 옷도 걸치지 않고 알몸으로 마치 복싱선수처럼 다가오는 거대한 세력과 싸우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고야는 1807년 프랑스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맞서 영국, 스페인, 포르투칼 사이에 벌어진 ‘반도 전쟁’의 참혹함을 경험하였습니다. 모든 것을 빼앗기고 스페인 궁정화가로서 명예와 부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힘없이 꺼져가는 조국을 막아줄 거인의 존재를 담아내려고 했을 수도 있습니다. 거대한 괴물같은 나폴레옹의 군대를 막기 위해서 괴물에 상응하는 거인을 형상화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서로가 괴물 같은 거인을 투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민족 간의 갈등과 전쟁에는 이런 원형적 투사가 있고, 파괴적인 원형적 힘들이 가세합니다. 고야의 판화집 <변덕>에는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눈을 뜬다”는 글귀가 있습니다.[이원율, 내 생애 첫 미술책, “6. 프란시스코 고야, 거인” 참고] 이성이 잠들면 맹목의 괴물이 깨어남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권력충동에 사로잡힌 자들 안에 맹목의 거인이 현실에 드러나면 사회는 파괴적인 성향으로 결국 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집단 안에서 분별력 있는 로고스가 제대로 기능하지 않으면, 우리 안에는 파괴적인 원초적 본능이 활성화됩니다. 이런 원초적 권력충동에 사로잡히면 서로가 괴물같은 투사를 통하여 물고 물어뜯고 죽이려 듭니다. 분별력 있는 이성을 일깨워, 시대와 개인에게 드리운 권력 충동을 인식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돌아오는 길의 두려움
야곱의 일생을 두 가지로 표현한다면 거짓과 속임수로 점철된 인생이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나그네와 같은 인생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야곱의 이름은 발뒤꿈치를 잡은 자, 속이는 자라나 뜻으로 전반기의 그의 삶의 모습은 남과 심지어 형제와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살았던 삶이었습니다. 또한 인생의 후반기까지 나그네처럼 떠돌며 살았던 인생이었습니다. 오늘 이야기는 야곱의 후반기 인생의 시작점으로 고향으로 돌아오는 여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외삼촌 라반에게서 자신의 소유를 획득하여 부자가 된 야곱은 라반의 아들들의 시기를 받고 갈등이 일어납니다. 그때 주님은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고향땅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야곱은 아내들에게 그동안 라반이 열 번씩이나 품삯을 바꾸었고 자신이 힘든 세월을 보냈음을 고하고 함께 고향땅으로 돌아가자고 청했습니다. 야곱은 서둘러 자식들을 낙타에 태워서 모든 재산을 챙겨서 도망쳤습니다. 라반이 양털을 깎으러 나간 틈을 타서 친정집 수호신의 신상들인 드라빔을 훔쳐서 길을 떠납니다. 도망한지 사흘이 된후, 그 소식을 알게 되어 야곱을 추격했습니다. 그런데 라반의 꿈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좋은 말이든지 나쁜 말이든지 야곱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라(31:24)”고 하셨습니다. 라반은 야곱을 따라잡아 만나고, 자신을 속이고 자신의 딸을 전쟁 포로 잡아가듯 하고, 자식들과 작별한 기회를 주지 않고 어찌 이럴 수 있느냐고 따집니다. 또한 자신의 수호신상을 훔쳐갔는지 물었습니다. 야곱은 장인 어른이 자신의 아내들을 강제로 빼앗으실까 두려웠다고 고백하며, 수호신상들을 훔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라반이 수호신상을 수색하는 동안, 라헬은 낙타 안장에 감추고 그 위에 올라타서 내리지 않았고, 자신이 월경 중이기에 맞이할 수 없다고 하면서 위기를 넘깁니다. 그리고 야곱은 그간의 사무쳤던 마음을 라반에게 이야기를 하고, 라반도 그에 화답하며 돌기둥을 세워 서로를 치지 않기로 맹세합니다.
오늘 이야기는 야곱에게 돌아오는 여정도 또한 순탄치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야반도주하듯 도망친 이유는 무엇일까요? 야곱의 양심 속에 라반에게서 획득한 가축들이 속임수로 획득했기에 떳떳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내면의 법칙은 그의 부당함을 걸고 넘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정직하게 취하지 않은 소유는 부담이 될 수 밖에 없는 법입니다. 대통령의 영부인이 부당한 주식이 떳떳하다면 소명하면 그만인 것입니다. 또한 야곱은 라반이 자신을 떠나지 못하게 할 것이라는 착각속에서 서둘러 도망치듯 떠난 것이었습니다. 이미 라반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기에 그는 정당하게 떠나겠다고 표현하지 못한 것입니다. 여전히 야곱은 부자가 되었지만 인격은 성장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관계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으로 여전히 위축된 20년 전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마하나임의 하나님
그런 야곱에게 하나님은 라반의 꿈에 나타나셔서 야곱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야곱의 돌아가는 길을 준비시켰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형 에서를 만나려고 길을 떠나는 길에서 하나님의 사자들을 만났습니다. 야곱이 그들을 보고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의 이름을 마하나임이라고 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오는 야곱에게 돌연 마하나임의 모습으로 나타난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마하나님의 뜻은 두 군대, 두 진지, 두 진영이라는 뜻입니다. 부대가 이동할 때 행군이나 전투 중에서 두 진영으로 나눕니다. 군사적으로 볼 때 선발대 혹은 첨병 또는 선두감시조라고 불리우는 것이 앞서 진행하며 적이 있는지 없는지를 식별하고 부대가 가는 길을 인도하고 장애물을 개척하는 역할등을 하게 됩니다. 마하나임의 하나님은 돌아오는 자에게 보이시는 하나님의 비전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야곱의 두려움은 실상 형 에서에 대한 보복의 두려움이 돌아오는 길을 주저했을 것입입니다. 20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그런 보복의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죄의 대가를 치를 결단을 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진정으로 용서를 구하고 화해하고 사랑을 회복하기 위해 돌아오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모습이 두 군대의 출현방식은 하나님의 군대가 너를 지킨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비젼입니다. 야곱에게 내가 너와 함께 하고 지킨다는 위대한 경험이었습니다. 그런데 32장 7절 말씀에 보면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였다라고 합니다. 마하나님의 하나님의 모습을 진정으로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진정으로 화해하고 용서를 구하기 위해 돌아가는 자에게 두군대의 엄위하신 모습으로 나타나십니다. 보복의 두려움에 떨고 있지만 오히려 하나님은 마하나님의 모습으로 나타나셔서 우리를 호위하시고 지키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돌아가는 길이 때로 두렵지만, 온전히 돌아서려는 자에게 마하나임의 모습으로 나타나심을 명심했으면 합니다.
32장의 말씀을 전체적으로 읽어보면, 야곱은 자신의 소유를 두 떼로 나누어 한 떼를 먼저 가게 하고 한떼를 나중에 가게 했습니다. 그는 얍복강가에서 여전히 의심과 두려움 속에서 하나님의 사람과 날이 맞도록 씨름합니다. 환도뼈가 끊어진 다음에야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진정 자신을 지키시고 도우신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야곱이 자신의 안위를 위하여 자신의 식구들을 앞세우는 비겁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돌보시는 모습 속에서 야곱의 인생이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로 산 인생임을 볼 수 있습니다. 돌아오고 돌아오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복은 지키시고 도우심을 굳게 붙들길 소망합니다.
약한 자들로 이룬 마하나임
마하나임의 하나님은 중요한 진리가 그 속에 담겨 있습니다. 32장 7절 말씀에 보면 야곱은 마하나임의 두 군대의 모습을 보고 돌연 두 떼로 두 무리로 나눕니다. 마하나님의 하나님의 두 군대가 야곱의 무리에게 전이되고 있습니다. 바로 야곱의 무리가 하나님의 군대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2장 3절에서 사도바울은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되기를 원하신다고 편지합니다. 야곱의 무리, 돌아오는 자에게 요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 마하나임의 하나님의 두 군대가 되는 것입니다. 야곱이 자신을 포함하여 무리들을 두 진영으로 나눈 것처럼 우리 또한 마하나임의 하나님의 두 군대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야곱은 20년간의 타향살이의 아픔과 상처의 벽을 뛰어넘어 고향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그때 그에게는 네 아내와 많은 자녀들 그리고 종들과 양떼와 소떼가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전혀 강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거기에는 연약한 자들, 곧 여자들과 어린이들이 주류였던 것을 보게 됩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군대가 어떤 존재들인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위대한 자나 거인들을 원치 않으십니다. 주님은 연약한 자들, 보다 약한 자들 어린이들이 하나님의 군대가 될 수 있음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야곱의 인생을 화해시키기 위하여 선두에서 목숨을 걸고 행동했던 사람들은 바로 여자들과 어린이들로 구성된 약한 자들이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때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더 큰 사람, 위대한 사람이 되기를 갈망하며 노력합니다. 꼭 필요한 태도입니다. 그러나 위대한 사람은 작은 사람부터 시작하며, 작은 일을 하는 자가 위대한 일을 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현재의 모습을 사랑하고 인정하지 않는 자는 결코 내일의 아름답고 더 큰 자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군대는 자신의 약함을 내어놓고 약한 것을 자랑하며 자신을 비워 모든 것 앞에서 겸허할 수 있는 사람들이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약한 것, 아픈 것, 답답한 것, 열등한 것들, 모자란 것을 보듬어 안고 그것을 사랑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야곱이 전이하여 이룬 마하나님의 군대가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약하고 부족하고, 힘없는 것들이 하나님의 군대가 될 수 있음을 마음에 품고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