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남해 여행 때에는 인기 있는 관광지를 여행하기 위해 애를 썼다. 그래서 보리암을 다녀왔고, 독일 마을을 다녀왔다. 하지만 여행을 하면서 남해에는 매력적인 곳이 정말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냥 지나치는 바닷가의 풍경마저도 너무나 좋았다. 도로를 달리다가 나도 모르게 차를 세우고 풍경을 감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불편한 교통 사정 때문에 과소평가된 여행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여행에서는 이전 여행 때 느꼈던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다소 사람이 적은 곳을 골라 다녔다. 사람이 발길이 다소 적지만 그 매력이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은 곳을 다니려 애를 썼다. 덕분에 여행은 전보다 한결 한적하고 여유로워졌다. 나만 알고 싶을 정도로 여유롭고 아름다운 관광지들을 소개한다.
산책하기 그만인
물건리 방조어부림
지난 여행에서 들렀던 독일 마을은 그 명성대로 멋진 곳이었다. 주황색 지붕에 흰색 벽이 무척이나 이국적인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는 마을의 풍경은 그 자체로 아름다웠다. 그러나 마을의 풍경을 주의 깊게 관찰한 결과, 마을을 돋보이게 만드는 배경이 있기 때문에 마을이 더욱 아름답게 보이는 것을 알게 되었다. 너른 바다와 산이 없었더라면, 그렇게까지 아름다워 보이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을 마치고 시간이 흘러 또다시 여행을 준비했을 때, 가장 먼저 가보고 싶었던 곳은 독일 마을이 아니라 독일 마을의 배경이 되었던 바다와 숲이었다.
이 숲은 '물건리 방조어부림'이며 1962년 12월 7일 천연기념물 제150호로 지정된 역사적인 유물로 꼽힌다. 방조제 건너편 약 1.5km의 몽돌해변을 따라 초승달 모양으로 30m 너비로 조성되어 있으며 면적은 약 7,000평에 달한다. 먼 곳에 봐도 바로 알아볼 만큼 무성한 숲을 이루고 있다. 바로 앞에 있는 항구는 물건항으로 방파제와 빨간색, 흰색의 등대가 서정적인 풍경을 이루고 있다.
이 숲은 약 300년 전 마을 사람들이 고기떼를 부르고 바람을 막을 목적으로 나무를 심으면서 만들어졌다. 숲이 조성되면서 고기잡이를 위한 작업장 및 마을 사람들의 휴식 공간이 되면서 마을 사람들의 사랑을 듬뿍 받게 된다. 마을 사람들은 이 숲에 피해가 가면 마을이 망한다고 생각해 숲의 나무를 베면 벌금을 내는 등 정성껏 보호해왔다. 실제로 19세기 말에 숲에 있는 나무 일부를 베어냈다가, 그해 폭풍으로 마을이 상당히 큰 피해를 입은 적이 있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말에는 일본인들이 목총을 만들기 위해서 이 숲에서 느티나무 7그루를 베려고 했을 때 마을 사람들의 반대가 심했다고 한다. 나무를 베느니 차라리 우리를 죽이라고 거세게 대항하며 숲을 보호했다고 하니, 마을 사람들의 숲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극진한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매년 음력 10월 15일에 서낭당 나무인 이팝나무의 노거목에 제사를 올리며 마을의 평안을 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이 숲을 아꼈던 만큼, 숲의 울창함은 초록빛이 사라진 겨울에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낙엽활엽수인 푸조나무, 팽나무, 참느릅나무, 말채나무, 모감주나무, 느티나무, 이팝나무, 상수리나무, 무환자나무 등과 상록수인 후박나무가 주를 이루는 1만 그루가 조화를 이루며 바닷바람을 막아주고 있었다. 10~15m 높이의 나무가 서로 어깨동무를 하듯 조성되어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나무 아래로 산책하며 숲의 아름다움을 만끽했다. 겨울에도 이렇게 아름답다면, 여름에는 분명 싱그러운 분위기로 마을을 지키고 있을 것이라 상상하며.
겨울이라 초록빛의 숲을 보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덕분에 가지 사이로 물건항의 수려한 풍경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따스한 햇빛이 바다를 비추는 모습은 산책을 할 때도, 그리고 여행을 다녀와서도 계속 눈에 선했다. 산책하면서 느낄 수 있었던 평온함이 너무나 좋았다. 따스한 햇볕을 고스란히 느끼며 산책할 수 있었던 순간이 너무나 소중했다. 이 기억 덕분에 남해가 더욱 좋아졌다.
오래된 한옥에서 만나는 남해의 감성
어쩌다 남해
한적한 남해에는 오래되어 보이는 건물들이 많았다. 아무래도 개발이 더딘 탓이다. 오래된 건물은 각자의 시간을 보내며 그만의 운치를 더하고 있었다. 허물어져가고 있지만, 어딘가 모르게 마음을 울리는 감동이 있었다. 이런 느낌은 나만 느끼는 게 아닌지, 남해 곳곳에는 버려진 낡은 건물을 활용하여 레스토랑과 카페 등으로 만들어진 곳들이 눈에 띄었다.
독일 마을을 가기 전에 눈길을 끌었던 '어쩌다 남해'도 낡은 한옥을 개조해 만들어진 카페 겸 소품가게다. 오래된 한옥 건물이 현재의 새로운 감성과 만나 따스하면서도 아기자기한 분위기의 카페가 되어 사람들의 발길을 이끌고 있다. 시골 친척 집에 온듯한 정감 있는 마당을 거쳐 건물 내부로 들어가면, 한옥의 모습을 그대로 살린 공간이 자리 잡고 있다. 소박한 분위기와 더불어 다양한 초록빛의 식물들이 이곳을 더할 나위 없이 친근하게 느끼게 한다.
감성 넘치는 공간이지만, 오래된 한옥을 최대한 살려 만든 공간이기 때문에 약간의 불편함은 있다. 대청마루 앞 통로는 좁으며 공간에 비해 테이블이 많은 편은 아니다. 2인 테이블, 창가, 대청마루에 앉는 것이 전부다. 날이 좋으면 정원에 있는 테이블에 앉을 수 있긴 하다. 그래서 처음엔 카페가 맞는지 의문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공간이 주는 불편함을 다시 생각하면,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적을 수밖에 없어서 한가로운 곳이다. '작은 한옥 X 소박한 정원'이라는 슬로건답게, 그리고 남해의 분위기와 퍽 잘 어울리는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쩌다 남해의 공간은 작지만, 공간을 채우고 있는 소품과 식물들이 많다. 커피와 더불어 이곳의 시그니처 메뉴인 푸딩을 먹는 것도 좋지만, 이곳에 있는 소품들과 남해의 특산품을 구경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도 꽤 즐겁다. 남해에서 자란 톳을 이용한 식품들, 남해에 있는 작가들이 만든 소품들은 이곳을 더욱 매력적으로 만든다. 그 밖에도 독특한 식재료와 소품, 의류와 잡화들이 각자의 개성을 뽐내고 있어 눈길을 홀린다. 한참을 구경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손에 가득 무언가를 사고 있는 것을 알게 된다.
첨가제와 보존제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푸딩은 그 자체로 맛있는데, 여기에 국내산 어린 햇쑥과 남해와 고흥 유자를 사용하여 맛을 더한 푸딩들도 있다. 지역색을 잘 살린 먹거리가 아닐까 싶다. 입안 가득 고급스럽고 순수한 맛을 맛보며, 남해에 계속 머무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용한 찻집의 매력
모음집
남해의 매력을 맘껏 느끼기 위해 며칠간 남해를 종횡무진했고, 남해의 모든 것을 맛보려 애를 썼다. 여행 막바지에는 늘 그러하듯, 피곤함이 밀려왔다. 여독을 풀기 위해서는 따근한 목욕과 차가 필요했다. 그래서 찾은 곳은 찻집인 '모음집'이었다. 이 찻집은 오랫동안 차와 관련된 물품을 판매하던 부부가 최근에 문을 연 곳으로 차에 대한 모든 것을 보고 맛볼 수 있는 곳이다.
이곳에 대해 알아보던 와중에 이곳에서 차를 마시려면 차실을 예약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다급하게 차실을 예약하고, 시간에 맞춰 찾아갔다. 인스타그램 계정에서 볼 수 있었던 세련된 인테리어 덕분에 우리는 이곳이 대로변에 있다고 착각했었다. 그러나 이곳은 의외로 논이 주변에 있는 마을 한 귀퉁이에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곳에서 차를 마시는 동안 무척이나 조용했다. 마음이 평온해지기 그만이었다.
입구로 들어서면 깔끔하게 전시되어 있는 다기들이 눈길을 끈다. 차를 마시는데 필요한 기구들이 조용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 절로 숙연해지는 곳이다. 단정하고, 간결하며, 정갈하다. 차를 마시지 않았지만, 벌써부터 몸과 마음이 정화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남해의 농가에 이렇게 세련되고 멋진 차실이 있다니.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다른 세상에 발을 들인 기분마저 들었다.
차실을 예약하면 두세 가지 차를 맛볼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 준다. 이 시간에는 녹차, 황차, 보이차 등 전통적이고 고급스러운 차들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더불어 차를 우리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그저 물에 차를 우리는 게 전부라고 생각했던 우리에게 차를 우리는 경험, 차를 맛보는 체험 모두 신비롭게 다가왔다. 차마다 우리는 방법이 달랐고, 그에 따라 느껴지는 향과 맛이 완벽하게 달랐다. 차를 우리며 마시는 동안 여행에서 지쳤던 몸이 새롭게 재단장되는 기분이었다. 의도치 않게 우리는 여기서 3시간 가까이 머물며 차를 즐겼다. 그런데 그 시간이 결코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차가 주는 여유와 안정감이 너무나 좋았다. 남해 여행을 마무리하기 퍽 좋은 곳이었다.
*여행지 정보
물건리 방조 어부림
위치 경남 남해군 삼동면 동부대로1030번길 59
어쩌다 남해
위치 경남 남해군 삼동면 봉화로 148
운영시간 11:00-17:00
https://www.instagram.com/our_namhae/
모음집
위치 경남 남해군 이동면 남서대로203번길 34 주차장
운영시간 토-월요일 12:00-18:00
https://www.instagram.com/boubouworks_namhae/
차실은 전화 또는 인스타그램 DM으로 예약 가능
영유아 포함 13세 이하의 어린이, 반려동물은 출입 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