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Islam)은 종교의 이름이다. 아랍어로서 이슬람(al-islām)은 ‘알라에게 복종하다’라는 뜻으로 ‘복종’을 의미하는 ‘아살라마’(asalama)에서 파생하여 무함마드가 만든 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슬람을 회교(回敎)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중국에서 이슬람을 회회교라고 부른 것에서 유래한다. 간혹 이슬람을 마호메트교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으나 이것은 잘못이다. 이슬람은 무함마드를 믿는 종교가 아니며, 알라를 유일신으로 믿는 종교다. 무슬림은 알라에게 복종한 자, 즉 이슬람 신자를 가리킨다. 여자 신자는 무슬리마라고 부른다.
모든 사람은 알라 앞에서 평등하다. 이슬람은 절대자인 알라와 인간 사이에 일체의 매개자를 인정하지 않으므로 신부나 목사 또는 승려 같은 성직자가 존재 하지 않는다. 이것은 이슬람이 다른 종교와 구별되는 중요한 차이점이다. 무슬림들은 성장 과정에서 이슬람을 체계적으로 배우며 이를 바탕으로 누구나 선교사나 종교 교육자로 활동할 수 있는 자질을 습득하게 된다. 따라서 이슬람은 따로 성직자들을 둘 필요가 없다.
이슬람에서 특히 수니파에서 이맘은 예배할 때에 맨 앞에서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을 일컫는데 모든 무슬림은 예배를 인도하는 이맘이 될 수 있다. 부자, 가난한 자, 젊은 사람, 나이든 사람, 무식한 자, 여행자 등 누구에게나 이맘이 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된다. 예배하러 모여든 사람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거나 학식이 뛰어난 사람이 그 예배를 인도하면 이맘이 되는 것이다. 이맘의 지위를 얻기 위해 성직 임명식이나 안수식 같은 특별한 예식이 필요하지 않으며 신학교를 졸업해야 할 필요도 없다. 기독교의 성직자처럼 영적 권위와 자격을 갖춘 사제 집단이 이슬람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면에서 이슬람은 매우 평등한 종교라고 볼 수 있다.
안사리의 책을 읽으면서 때로는 인터넷 검색을 통하여 궁금한 점을 확인하고, 그러다 보니 점심 시간이 되었다. 호텔 바로 앞에 있는 분수 광장으로 걸어가 보았다. 날씨는 여름이지만 그렇게 뜨겁지는 않았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걸어 다니고 또 긴 의자에 앉아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나는 광장 건너편에 있는 맥도날드 가게에서 햄버거와 콜라를 사서 가지고 나와 광장에 있는 긴 의자에 앉아 천천히 먹었다. 나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한다고 생각하지만 지나가는 사람들은 흔치 않은 동양 사람을 구경한다고 생각하면서 지나갈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구경한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유심히 살펴보니 히잡을 입은 여자들은 그렇게 많지 않았지만 우즈베키스탄보다는 많다고 생각되었다. 아제르바이잔은 이슬람 국가이지만 세속화의 물결은 여기서도 출렁거리고 있었다. 젊은 여자들은 히잡을 쓴 사람이 드물었다. 그런데 분수 앞에서 니캅을 입은 여자 4명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눈만 빼꼼히 나오고 얼굴과 온 몸을 검은 천으로 가리고 사진을 찍는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다. 사진을 보고서 누가 누구인지 어떻게 구별할까? 이처럼 더운 여름에 검은 천으로 온 몸을 가리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자연스럽지 못하다. 의복에 관한 이슬람의 계율은 오래 가지 못할 것 같다.
광장에서 점심을 끝내고 다시 호텔로 돌아와서 안사리의 책을 읽었다.
무함마드는 죽기 전에 후계자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슬림 공동체 사람들은 회의를 거쳐 무함마드의 칼리프(대리인)을 선출하였는데, 제1대 칼리프에는 무함마드의 가장 가까웠던 친구 아부 바르크가 추대되었다. 일부는 무함마드의 사위인 알리를 후보로 추대했지만 젊은 알리가 바르크에게 밀렸다. 아부 바르크는 2년 후에 갑자기 병사하면서 무함마드의 가장 가까운 동지였던 우마르에게 제2대 칼리프 자리를 넘겨 주었다. 우마르는 10년 동안 이슬람의 토대를 굳건히 했다. 우마르는 페르시아 왕조를 무너뜨리고 이란, 이집트까지 정복하였다. 우마르는 공동체를 지휘하는 동안에 이슬람 신학의 진로를 정하고 이슬람을 정치적인 이념으로 정립하였다. 안사리의 표현에 의하면 우마르는 기독교의 사도 바울과 소련의 칼 마르크스, 그리고 프랑스의 나폴레옹을 합쳐놓은 인물이었다. 우마르가 죽을 무렵에 이슬람은 500만 km2의 영토를 차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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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5가> 이슬람의 영토 확장
우마르는 모스크에서 한 노예가 휘두른 칼을 맞고 암살당하였는데, 임종 전에 그는 중대한 선례를 하나 남겼다. 그는 여섯 명으로 구성된 자문단인 ‘슈라’를 지명해서 그들이 새로운 칼리프를 선택하고 이슬람 공동체인 움마의 동의를 얻게 했다. 후대의 이슬람 사상가들은 슈라가 이슬람 사회에서 민주적인 제도의 기반을 이룬다고 보았다. 제3대 칼리프에는 무함마드의 12촌의 아들인 68세의 우스만이 선출되었다. 우스만은 12년 임기 동안에 쿠란의 확정판을 만들고, 세수를 늘려 공동체의 재정을 정비하고, 상업을 활성화시켰다. 그러나 우스만은 소요 사태가 일어나 폭도들에게 맞아 죽었다. 제4대 칼리프에는 무함마드의 사위인 알리가 선출되었지만 내전에 휩싸였다. 알리는 칼리프로 선출된 후 5년 만에 한 젊은이에게 암살당하였다.
일부 세력은 무함마드의 혈통을 이어 받은 알리의 아들 하산을 칼리프로 추대하지만 칼리프의 칭호는 우스만의 사촌이며 반란군의 수장이었던 무아위야에게 넘어가고 이후 우마이야 제국을 거쳐 칼리프는 승계된다. 이슬람 교도 중에서 칼리프를 추종하는 교파가 수니파이다.
알리를 추종하던 세력들은 죽은 알리를 이맘이라고 불렀고 알리는 제1대 이맘으로 추서되었다. 무함마드의 혈통을 이어받은 알리로부터 승계된 이맘을 추종하는 교파가 시아파가 된다. 시아파는 무함마드의 혈통을 이어받은 사람만이 이맘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맘은 수니파에서는 예배의 인도자를 말하는데, 시아파에게 이맘은 영적 지도자를 의미한다. 수니파의 칼리프에 해당하는 지위가 시아파의 이맘이다.) 알리의 장남인 하산이 제2대 이맘으로 추대되었는데 그만 반대파의 꾐에 넘어간 아내에게 독살당한다. 이어서 알리의 차남인 후세인이 제3대 이맘이 되었는데, 후세인이 수니파와의 전투에서 숨을 거두면서 이후 두 종파는 원수지간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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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5나> 중동 각국 시아파와 수니파 비중 (2013년 미국 퓨리서치 조사 기준)
이슬람 교도의 90%는 수니파인데 소수인 시아파와의 갈등은 현대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위 그림을 보면 아제르바이잔은 이란, 이라크와 함께 시아파가 우세한 국가이다.
내가 가보지는 않았지만 아제르바이잔에서 유명한 관광지는 불타는 산 ‘야나르닥’이라고 한다. 이곳에서는 고대로부터 천연가스가 새어나와서 불타고 있는데, 2500년 동안 땅에서 불이 꺼지지 않고 타오르고 있어서 아제르바이잔은 ‘불의 나라’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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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5다> 불타는 땅 야나르닥
바쿠는 오랫 동안 실크로드 대상들이 지나가던 길목이었다. 그러다가 러시아 지배 하에 있던 19세기 후반에 석유가 대량으로 발견되어 바쿠는 원유 생산의 중심지가 되었다. 바쿠는 한때 세계 석유 생산의 반절까지를 차지할 정도로 번성하였으며 지역 최대의 화려한 도시가 되었다. 바쿠는 뉴욕 타임즈가 선정한 2015년 추천 여행지 목록에 들어 있다.
병산은 혼자서 시내 구경을 마치고 저녁 때에 호텔로 돌아왔다. 우리는 밖에 나가 레스토랑에서 현지 음식을 먹었다. 병산이 낮에 나가서 찍은 사진들을 보여 준다. 그 중에서 눈길을 끄는 사진은 불꽃 타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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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5라> 바쿠 불꽃 타워
불꽃 타워는 타오르는 불꽃을 상징하는 고층 건물 3개를 말한다. 불꽃은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천연가스와 원유를 의미한다. 윗 부분의 모양이 다른 세 건물은 각각 서, 남, 북쪽을 향해 타오르는 불꽃의 형상을 나타낸다고 한다. 석유의 힘으로 번영을 누리는 바쿠 시가지는 마치 두바이를 연상시키는 다양한 스카이라인을 자랑한다. 서울의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DDP)를 설계한 것으로 유명한 건축가 자하 하디드 작품인 바쿠 문화센터 건물은 미래의 우주선 같은 자태를 뽐내고 있다. 우리는 문화센터를 방문하지는 못하고 버스를 타고 지나가면서 보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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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5마> 바쿠 문화 센터 건물
첫댓글 평소 살던 곳을 떠나 멀리 외국으로 여행가면 많은 것들이 새롭게 와 닿는다. 내게는 익숙하고 그러려니 했던 것들이 안 그럴 수 있고 다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마주하게 되면서 나의 고정관념은 유연해지고 견문은 넓어지게 마련이다. 그 곳의 풍토와 문화, 즉 자연환경과 인문환경이 그 곳만의 독특한 환경을 형성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제르바이잔은 차례로 주변국 터키와 제정 러시아의 지배를 받다가, 러시아 왕조가 축출되자 1918년 민주공화국을 설립했으나 1920년 공산화되어 1991년 소련으로부터 독립한 국가이다. 70여 년간 뿌리내린 공산주의 체제는 아마도 현재 아제르바이잔 문물에 깊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수도인 바쿠를 보더라도 도시의 구조나 대부분의 공공시설은 공산주의 이념과 러시아문화를 배경으로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국립극장
이스말리야 궁
무심거사님이 위에서 소개한 바쿠문화센터는 예상을 뛰어넘는 매우 혁신적인 모습으로 다가왔다. 이전 우즈베키스탄의 도시에서 보던 현대건축의 모습과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두 나라는 똑같이 소련으로부터 독립해서 자국의 정체성을 새로이 설정하는 과정에서 서로 다른 노선을 선택했다는 느낌이 든다. 이슬람문화의 전통을 계승하려는 의지가 현 시대의 건축에 반영되는가의 차이이다.
내부모습 1
내부모습 2. 공연장
출처: https://www.archdaily.com/
외부전경
지금의 바쿠 문화센터 모습은 국제공모를 통해 제출된 다양한 설계안 가운데 건축주인 아제르바이잔 정부가 선택했다고 볼 수 있다. 이라크 출생의 영국 건축가 자하 하디드가 설계한 건축에는 과거와 단절하고 미래를 향한 혁신 의지를 강력히 담고 있다.
내게는 이런 장면이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만 고수하지 않고 때로는 단고창신(斷古創新)의 자세도 필요하다는 선언같이 들린다.
현 시대의 재료와 기술 그리고 정신을 담아 이 시대의 건축을 새롭게 창작한다는 자세.
신축된 바쿠 문화센터에서 소련 사회주의 건축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강건하고 기념비적 표현과 대칭의 장중미를 극복하고, 유연하고 연속적인 형태와 건축 객체와 도시경관의 융합을 구현한 것으로 보인다.
소련체제 시기에 건립된 건축사례: 국립연극원
스탈린식 아파트
국립경제대학교
출처: 위키피디아. Architecture of Baku
국가의 정치적 대표광장이라 할 수 있는 정부청사 앞 ‘레닌광장’은 1991년 ‘자유광장 Azadliq Square’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그 중심에 있던 레닌동상은 철거하여 과거에 대한 기억지우기로 바쿠 도시 곳곳의 모습은 변화하는 중이다.
현재 모습
레닌광장과 동상. 이전 모습
철거 전 레닌 동상
공산체제 수립에 희생되거나 기여한 인물에 대한 동상 및 기념건축은 상당수 철거되었다고 한다.
바쿠 도심에 자리한 '26지사 추모건축'은 1920년 건립, 2009년 철거됐고. 현재 사일공원(Sahil Park Baku)으로 개조되어 있다.
철거 후, 사일공원(Sahil Park)
철거 전.
철거 중.
공원으로 개조된 후, '꺼지지않는 영원한 불'이 있던 자리는 분수가 설치되어 물이 샘솟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