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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14-23
원컨데 보게 하옵소서 /
미국의 어느 신학대학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종교학 강의 시간에 교수가 일본의 샤머니즘에 대하여 강의를 끝낸 다음, 자기 의견을 말해 보라고 학생들에게 말했습니다.
한 한국학생이 벌떡 일어나서 "일본의 샤머니즘의 뿌리는 한국입니다. 시베리아 부근에서 시작된 샤머니즘은 한국을 거쳐서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그러나 지금 샤머니즘의 본토는 공산화되어 그 정신은 질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일본의 샤머니즘을 정확히 연구하려면 먼저 한국의 샤머니즘에 대한 이해가 필요할 것입니다."
이렇게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교수는 "그래, 맞다. 나도 샤머니즘의 경로를 잘 알고 있다. 한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것을 안다.
그러나 한국의 샤머니즘은 feeling, 즉 감정이요. 일본의 샤머니즘은 philosophy, 철학이다. feeling은 학문이 아니다. 내용 있는 체계적 philosophy만이 학문이다. 이것이 나의 관심사다. 계시도 아니고 철학도 아니므로 강의 내용 중에 한국에 관한 부분을 뺐다"고 대답을 했더랍니다.
너무도 자존심이 상해서 과연 그러한 지를 찾아 보리라하고 도서관에 가서 책을 열람해보니까 한국에서는 한 권도 없는 한국의 샤머니즘에 대한 연구 서적이 가득 차 있어 그것을 보면서 너무도 부끄럽고 민망해서 울었답니다.
계시와 철학이란 언제나 인간이 추구하는 두 가지 중심가치 체계입니다.
계시는 진정한 초월을 강조하고 철학은 철저히 이성적인 현실적 판단을 요구합니다. 이 둘 중의 어느 것이 더 중요하느냐? 그것이 바로 인류 사상사의 흐름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둘 중의 어느 것도 인간에게 없어서는 살아갈 수 없는 귀중한 가치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 두 개의 가치관이 아닌 또 다른 하나가 우리의 인생을 지배합니다. 우리의 삶을 강력하게 이끌어 가는 또 하나의 제 3의 힘. 그것은 feeling, 감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감정이란 정확한 것도 아니요, 초월적이지도 않습니다.
제임스 돕슨라는 분은 "감정이 우리의 생활을 지배하도록 허용한다면 이보다 더 위험한 것은 없다. 그것은 우리를 인생의 폭풍 길에서 표류하게 하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자기 감정과 자기 시각에 꼭 묶여 사는 것을 철학에서는 "터널 뷰"라고 말합니다. "터널 뷰"란 좁은 소견과 편견과 자기 감정이라고 하는 작은 터널 속에 갇혀서 자기 느낌과 짐작대로 동굴 밖의 세계를 상상하고 평가하고 분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는 진실도 정확성도 없습니다. 아집과 두려움과 분노와 혹은 자기 연민에 빠지게 될 뿐입니다.
파리에 다녀온 우리 월드컵 축구팀에 대해서 국민들이 참 많은 기대를 했습니다. 멕시코는 반드시 이길 것이라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멕시코를 당연히 이길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70%가 넘습니다. 그 중의 상당수가 8강까지도 갈 수 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졌습니다. 그 때 발간된 미국의 시사 주간지 Times에는 월드컵 특별 호에 이런 기사를 싣고 있습니다. "축구 경기에는 정치와는 다른 근본적인 정직성이 들어 있다." 축구란 정직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상상으로 안되는 것입니다. 마음만 먹어서 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여러분, 정직해야지요. 멕시코가 우리보다 몇 수 위입니다. 그러니 결과와 상관없이 열심히 싸우라고 했었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당연히 이긴다고 생각하다니요. 그것은 감정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멕시코는 지고 나서는 "이제는 더욱 힘을 모아 네덜란드를 재물로 삼자, 벨기에를 깨라"고 했단 말입니다. 이러한 감정적 대응은 현실을 못보고 있는 것입니다. 확실한 근거도 없이 감정적으로 기대하고 거기에 따라 실망하는 것은 아주 어리석은 것입니다.
전세계적으로 아시아의 경제가 무너진다고 해서 걱정들을 많이 합니다. 왜 아시아는 이렇게 힘없이 흔들리고 있는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서양의 많은 나라들은 동양의 발전에 대해서 두려운 마음을 가졌습니다. 서구 문명은 몰락하는가? 다음 세대는 동양이 주도하는 세대가 올 것인가? 거기에 대해 매우 초조한 감정을 가지고 살펴보았습니다만 IMF가 터지면서 뚜껑을 딱 열어 보니 생각하던 것과 동양의 모습은 전혀 달랐던 것이 증명되었니다. 그래서 서양 사람들은 "Asian value, 소위 아시아적 가치는 이제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아시아적 가치란 유교, 불교, 혹은 무속종교에 기초를 둔 아시아인들의 가치관입니다. 이 가치관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는 공정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명백한 객관성이 철저하게 결여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이 불투명하고, 막연하고, 들어가 볼수록 이중 구조란 말입니다. 회사의 장부를 펴보아도 도무지 믿을 것이 없습니다. 다 부정직합니다. 보고서를 봐도 윗사람이 원하는대로 보고했고, 대충대충 해놓았습니다. 심지어 정부의 통계도 믿을 수가 없다고 결론이 내려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서양인들은 "막연하고, 모호하고, 다분히 감정적이고, 예측을 해도 막연히 잘 될 것이다라는 측면에서 전망을 해놓았고, 현실에 입각한 냉정한 분석과 판단이 없는 주먹구구식 계획이다. 이러한 가치관이 얽혀 있는 것이 동양이다. 그러므로 이런 가치관으로는 서양의 가치관과 경쟁할 수 없다. 동양의 가치관은 끝났다"고 선언을 했습니다. 자기 현실도 잘 못보고 뭔가 대단한 것을 이루어 놓은 줄 알고 아시아 전체가 들떴었다는 말이 됩니다. 냉정한 현실 인식과 경제 법칙에 입각한 서양가치체계, 그 philosophy 앞에 동양의 막연하고 희미한 feeling은 실패했다는 말입니다.
어떤 청년이 저를 만났는데, "목사님, 저 위해 기도 좀 해 주세요"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래서 왜냐고 물었더니 "불안해서 잠을 못 자겠어요. 내가 왜 이 시대에 태어나서 이 고생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 말에 진정으로 동감이 갔습니다. 여러분, 요즘의 젊은 사람들, 참 답답한 시대를 살아갑니다.
청년의 부탁대로 기도하는데 해주고 싶은 한 마디가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한마디했습니다. "얘, 너만한 고통 없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 어디 있니? 정신 차려! 괜히 이불 뒤집어쓰고 울지 말고. 너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나도 힘들게 산다. 그리고 우리 주님도 어렵게 사셨다. 그래서 때론 울기도 하셨다. 그렇게 알고 가!"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1차 원인은 다른 사람이나 환경이다"라고 말하지만 아닙니다. 진정 자기자신에게 피해를 주는 1차적 요인은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 자신의 잘못된 생각, 나쁜 습관 그리고 자기의 반응의 형태 이런 것들이 자기를 괴롭히는 것이지, 다른 외부적 요인이 나를 괴롭히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대개 우리가 사는 모습을 보면 막연히 불안해하는 사람이 많고 혹은 반대로 근거 없는 헛된 기대 속에서 사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감정 주도적 인격형이 너무도 많습니다. 이러한 감정을 털어 버리고 냉정한 현실을 직시하는 그러한 안목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현실히 정확하게 바라본다고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이 사실은 용기의 시작이요, 진실을 향해 나가는 첫 걸음이요, 해결의 문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현실을 잘 보고 계신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목사이기 때문에 다른 가정의 문제들을 어느 정도 아는 편입니다. 보면 부모와 자식간에 다투는 가정이 꽤 있습니다. 왜 다툴까? 그 내용은 부모가 똑똑해서 그렇습니다. "나는 똑똑하고 공부 잘했다. 그런데 너는 뭐 하는 거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부분의 부모와 자식간의 갈등 내용입니다. 문제는 똑똑한 부모가 현실을 냉철하게 판단했다는 것이 문제인데 그 부모가 오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식의 현실을 냉정하게 보지 못한다는데 있습니다. 자기 각도에서 자식을 판단합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아이의 길이 있고 그에게 맞는 재능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겁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가치관은 이러하니 너는 따라 오라"고 하는데 따라 갈 수가 있습니까? 부모와 자식은 절대로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부모의 가치관이 다르고 자식의 가치관이 다릅니다. 앞으로의 세대는 부모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수가 없습니다. 자식들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인정 못합니다. 그래서 똑똑한 부모가 자식들을 괴롭힙니다. 그것은 똑똑함이 아닙니다. 자식의 현실에 대한 무지함입니다. 자기의 감정의 노예가 되었음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현실을 정확하게 본다는 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럼 현실을 잘 본다고 해서 모든 것이 다 장미 빛으로 보이는가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현실은 내 생각보다 훨씬 못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나라 현실과 정치를 한 번 보십시오. 얼마나 믿을만 합니까? "아예 없으면 좋겠다"는 말도 나오는 판입니다. 이것이 정치 현실입니다. 안보 현실을 볼까요? 군인들이 나라 잘 지키나요? 수고 많이 합니다만 헛점은 더 많습니다. 꽁치잡이 어선에 잠수함이 잡히는 상황입니다. 경제적으로 보면 망하기 십상입니다. 우리 나라 대기업의 부채비율은 굉장합니다. 도대체 앞으로 얼마나 장사를 잘해서 그 이자 갚고 원금 갚고 돈 벌게 될지! 상식적으로는 희망이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 모습을 정확히 몰라서 그렇지 실상을 알고 알면 기가 막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래도 우리 나라 사람들은 교육 수준이 높으니까" 그런 말 할지 모르지만 교육수준 높은 것 말하지 맙시다. 전문가가 너무 없어서 탈입니다. 우리나라가 이렇게 되기까지 경제 전문기관에서조차도 IMF가 뭐 하는 곳인 줄 정확히 알지도 못했습니다.
"마지막 남은 것은 우리의 국민성이다, 결단이다"라고 할지 몰라도 우리 나라 정신의식 다시 한번 점검
해 봐야 합니다. 금을 팔아서 수출하자는 것까지는 좋았지만 그런데 외국 영화 수입해서 그 번 돈 다시 날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네 실상입니다. "막연히 잘 될 것이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현실을 보면 쓰리고 쓰린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우리는 막연한 감정에서 벗어나서 철저한 현실 분석적 안목을 가지고 냉철하게 오늘을 분석하고 전략을 세우고 노력해 나가야 할 줄로 압니다.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아야지 긴장 풀면 큰일 납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의 현실 인식,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보이는 현실이 전부가 되면 그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우리의 현실을 뛰어 넘은 하나님의 은총의 세계가 있고, 복 부으심이 있고, 계시와 영감이 우리 위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러한 계시와 현실 인식의 상호 관계를 아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북쪽에 있는 아람 왕은 여러 번 이스라엘을 침공하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런데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왜냐하면 엘리사 선지자가 영감으로 그 왕의 침공 의지를 알아서 이스라엘 왕에게 다 고하여 방비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이 자꾸 반복 되자 아람 왕은 생각을 합니다. "우리 중에 저 이스라엘과 내통하는 첩자가 있다"고 생각하고 자기 신하들을 다그칩니다. "우리 중에 누가 내통한 자인지 밝혀 내라!" 신하들의 대답이 6장 12절에 나옵니다.
그 신복 중에 하나가 가로되 우리 주 왕이여 아니로소이다 오직 이스라엘 선지자 엘리사가 왕이 침실에서 하신 말씀이라도 이스라엘 왕에게 고하나이다
"엘리사라는 선지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대답을 듣고도 왕의 마음은 변화가 없습니다. 이렇게 여러 번 실패를 했고, 또 자기 마음을 다 아는 사람이 있다면 이번에도 들킬 것 아닙니까? 그러려면 침공 의도를 포기해야 할 텐데 막무가내입니다. 기어코 가서 전쟁을 일으키겠다고 결심을 합니다. 그리고 엘리사를 먼저 죽여겠다고 생각하고 엘리사가 살고 있는 마을 주변의 산을 빙 둘러 포위를 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엘리사의 종이 문 밖에 나가보니 주변 산에 적군이 가득하게 진치고 있는 것을 보고 탄식합니다.
15절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수종드는 자가 일찌기 일어나서 나가보니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을 에워쌌는지라 그 사환이 엘리사에게 고하되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낙담하고 있습니다. 적군의 강함에 대하여 낙담하는 종을 보고 엘리사가 기도합니다. 17절입니다.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여시매 저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주여 눈을 열어 보게 해 주옵소서!" 그러자 영의 눈이 열리면서 하나님이 보내신 군대를 보면서 그 종은 안심합니다.
오늘도 우리는 위험한 세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보며, 무엇을 생각하는 것입니까? 세계정세가 어떻고, 안보가 어떻고, 자원이 어떻고, 공해가 어떻고... 이제 큰일났다, 이제는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낙심하고 계십니까?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정치를 잘해서, 군대가 강해서 그래서 이제까지 살아온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지금까지 생명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대로 하나님의 불말과 불병거의 인도와 그의 은총이 우리를 둘러 진치고 있기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군사 전문가들에 의하면 군사 작전을 통하여 계획대로 세계를 제패한 나라는 한 나라도 없답니다. 잠시동안 지배하는 것같았지만 세월이 흐른 후에는 전부 실패였음이 역사 속에서 증명이 되었습니다. 왜 그럴까? 왜 군사 력으로 온 세계를 지배하려는 시도가 성공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들의 작전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일까? 군비가 부족하기 때문일까? 혹은 그것을 방비하는 자들의 능력이 그들보다 더 강해서 일까? 절대로 아닙니다. 하나님의 정의, 하나님의 보호, 불말과 불병거. 이것이 악의 시도에 대한 실패의 근본 원인임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현실을 보되 냉철하게! 그러나 역사를 다스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그에게만 유일한 권세가 있음을 우리는 오늘도 고백해야 할 줄로 압니다. 엘리사는 이것을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심령은 담대합니다. 그래서 적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19절입니다.
“엘리사가 저희에게 이르되 이는 그 길이 아니요 이는 그 성도 아니니 나를 따라 오라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의 찾는 사람에게로 나아가리라 하고 저희를 인도하여 사마리아에 이르니라”
홀로 많은 적 앞에 나가서 "당신들이 결국 원하는 것은 적국의 수도 사마리아가 아닙니까? 이리로 오시지요"하고 인도해 갔습니다. 그들의 눈이 멀었다고 해서 장님이 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가치관, 그들의 욕심에 붙들린 사고 때문에 엘리사를 따라 갔고 가서 보니 적국의 수도 한 가운데 자기들이 갇힌 것을 발견합니다. 이제 독 안에 든 쥐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이스라엘 왕은 너무 기뻤습니다. 그래서 왕이 하는 말이 21절입니다.
“이스라엘 왕이 저희를 보고 엘리사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내가 치리이까 내가 치리이까”
"우리를 넘보던 이 사람들 그냥 단칼로 끝내버릴까요?" 기분이 좋아서 그렇게 말할 때 엘리사는 대답합니다. 22절을 봅시다.
“대답하되 치지 마소서 칼과 활로 사로잡은 자인들 어찌 치리이까 떡과 물을 그 앞에 두어 먹고 마시게 하고 그 주인에게로 돌려보내소서”
은혜를 베풀어 먹여서 돌려보내 줘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진정한 승리이기 때문입니다. 칼로 찌르고 무기로 항복을 받는 것은 승리하는 것 같으나 또 한편으로는 원수를 생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베풀어 관대하게 돌려보내는 것이 참된 승리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람이 몰랐던 것이 있습니다. "엘리사만 없으면 될 것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가지 모든 실패가 어디에 있었는지 그들은 알지 못합니다. 그것은 스파이 때문도 아니요, 첩보가 누설되었기 때문도 아니요. 이스라엘에 헛점이 없어서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과 보호하심 때문이었습니다. 엘리사는 그것을 알고 담대합니다. 그러나 현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 종이 적군을 보며 두려워 할 때 "그까짓 적군,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적은 분명히 침입했고 그 수는 많다고 사실 그대로 인정했습니다. 문제는 그 수보다 더 많은 하나님이 인도하는 군대, 그것을 보았을 뿐입니다.
북한을 위해서 기도할 때마다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 저들이 얼마나 적화 통일을 원하고 있습니까? 누가 그들의 계획을 이제까지 좌절시킨 겁니까? 우리의 군대입니까? 미국의 능력입니까? 경제력입니까? 혹은 외교적 압박입니까? 절대로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 불말과 불병거로 이 백성을 씻기시는 하나님의 은총! 그것 때문에 우리는 평화를 누리며 오늘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저들은 그것을 모릅니다. 그래서 분노하고 작전을 바꿔 보기도 하고 우리 가운데 반동분자가 있다 해서 숙청도 해보고 지금도 전쟁준비를 합니다. "미군만 없으면 좋겠다, 보안법만 얼마나 좋을까?" 지금도 계속 요구하는 것이 이 내용 아닙니까?
왜 저 사람들은 저렇게도 전쟁 준비에 몰두할까? 참 중요한 질문입니다. 그러나 북한 전문가들은 "저들은 우리가 저들을 쳐들어 올 것으로 믿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돈도 없다. 쌀도 없다. 군대도 약하다. 그런데 이제 남한이 쳐들어오지 않을 리가 있느냐?" 변증법적 유물사관에 의하면 강한 자는 약한 자를 당연히 잡아먹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그들이 볼 때에는 자기들이 약하므로 반드시 남한에서 쳐들어와 자기들을 진멸시킬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볼 때에는 참으로 우스운 생각입니다. 우리가 왜 쳐들어갑니까? 그들도 잘 살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짐작, 느낌, 생각대로 두려워하며 군비를 증강하고 있는 겁니다. 한 쪽으로는 경제 협력이 확대되기를 바라고, 한쪽으로는 무력 도발하고 이 전략의 이원성은 두려움 때문입니다. 개방은 해서 경제협력은 증진시켜야 되겠는데 그렇게 자꾸자꾸 열다보니 우리가 그들의 약점을 더 많이 알게 될 것 같고, 그러니 마음은 불안해서 "군사적으로 우리도 힘이 있다, 우리도 긴장하고 있다, 우리도 시퍼렇게 살아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무력 도발이 병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해야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오늘 본문이 대답하고 있습니다. 엘리사처럼 담대하게 나가서 은혜를 베풀어야 됩니다. 담대함의 근거는 경제력이나 군사력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인도에 대한 믿음으로 담대해야 되고, 그렇다고 쳐서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담대하게 나가서 은혜를 베풀면 19절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원자탄으로 위협하는 길은 제 길이 아니다. 국민은 굶어 죽는데 군비 증강하고 무력 도발하는 것이 바른 길이 아니다. 이리로 오라. 화평하게 사는 길이 여기에 있다." 외교용이 말하면 협상테이블로 끌어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 세계와 함께 개방의 한 복판에 서 있음을 느끼게 해 줘야 되는 것입니다.
소위 우리 나라의 정부 햇볕론은 북한에 대한 제재 완화와 개방 유도 정책을 말합니다. 저는 나라를 위해 기도할 때 "그 기본 정책의 근거가 무엇인가? 하나님이 이 나라를 보호하신다고 하는 신앙 위에 기초한 것인가, 아니면 되지 못한 군사력와 작은 돈에 대한 신뢰에서 나온 것인가? 또한 냉정한 현실 분석과 대안이 있는가? 소위 그들을 향한 philosophy가 우리 나라 정부에 있는가? 아니면 막연히 feeling을 가지고 그때 그때 임기응변적으로 대처하는 것인가? 막연한 동정심이나 혹은 정치적 업적을 위하는 것은 아닌가?"하고 생각해 볼 때가 많습니다. 북한은 앞으로도 계속 무원칙적으로 나올 것입니다. 감정적으로, 공격적으로 나올 것입니다. 지금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그들의 불안에 대한 표출이요, 그들의 이데올로기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잠수함 사건이 앞으로 없겠습니까? 얼마든지 또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것 하나 예상하지 못하고 정책을 펴가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진정한 신앙적 논리와 현실 분석이 있었으면 이런 일 하나가지고 휘청거려서는 안될 것입니다.
소 떼가 갔습니다. 소 떼가 갔다고 해서 통일이 당장 되겠습니까? 50년간 막혔던 길인데 어림없는 일입니다. 여러분, 감상적으로 해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굳은 신앙을 가지고 철저한 현실 논리에 입각해서 안보에 힘쓰면서 은혜를 베푸는, 그러한 안정된 정책을 우리 정부가 펼 수 있도록 많이 기도해 주어야 할 줄로 압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인줄로 압니다.
이제 각자얘기로 돌아가 봅시다.
여러분이 살아가는 삶의 패턴이 무엇입니까?
자기 모습을 보십시다.
자기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감정에 붙들려 사는 사람 너무너무 많습니다. 이제는 현실을 직시해야 됩니다. 정신 바짝 차리고 현실을 수용해야 됩니다. 그리고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야만 새로운 길이 열리고 성실과 정직이 빛을 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안됩니다. 그 위에 하나님의 은혜와 돌보심을 믿고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우리 개인의 심령 속에 평화가 있습니다. 이 나라 평화의 길은 어디에 있는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영원한 평화의 법칙은 감정에서 벗어나서 이성적으로 현실을 평가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고 그 위에 하나님의 계시의 은총을 믿고 나가는 거기에 참 평화의 길이 제시되는 것입니다.
기도
은혜로우신 하나님!
우리는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막연히 짐작하며 불안해하고 감정에 붙들려 살 때가 너무도 많습니다. 인생을 느낌으로 살지 않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현실을 직시하고 냉철히 판단하게 하시되 나의 나약함에 절망하고 두려움에 빠지거나 보이는 것이 전부다라고 생각하면서 절망치 않게 하옵소서. 우리의 눈을 여시어서 하나님이 붙드시고 다스리심을 알고 우리 위에 오늘도 불말과 불병거가 진치고 있음을 깨닫게 하사 큰 용기를 가지고 담대히 살게 하여 주옵소서. 그 옛날 이스라엘을 도우신 아버지. 오늘 저희와 이 나라를 그 은혜로 지켜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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