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수난 : 수난 예고(마26:1-16)
그리스도의 수난 기사는 네 복음 모두에서 언급된다.
수난 기사의 내용 차이는 각 복음서 주제와 상응한다.
마태복음에서는 유대 당국자들이 예수를 살해하려는 음모와
예수를 판 유다의 자살을 기록하여 그들의 죄를 강조한다.
마태복음의 그리스도 수난 기사는 예수께서 유대 당국자들에게 집히심과(마26:1-56)
율법의 최고통치기관인 산헤드린공회에서 재판을 받으심(마26:57-75),
유대 총독인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아 처형을 당하신 내용으로(마27:1-56) 구분된다.
각 내용은 예수를 죽이려는 공회의 음모로 시작된다(마26:2-3, 57, 27:1-2).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율법 아래에 있는 백성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다.
예수의 공생애 사역도 율법과 다른 참되고 온전한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이다.
따라서 예수께서 순종하신 하나님 뜻은
개혁신학의 주장처럼 율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다.
율법 아래에 예수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이다.
이는 율법 아래에 있는 백성을 구원하시려는 아버지의 뜻이다.
따라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음은 아버지의 뜻에 의한 것이다.
종말에 그 아들을 율법 아래에 보내셔서 율법 아래에 있는 백성을 구원하시려는,
율법으로는 없이하지 못하는 죄에서 백성을 구원하시려는 아버지의 뜻에 의한 것이다.
본문은 예수의 수난 예고와(마26:1-2) 산헤드린 공회의 살해 음모로 구분된다(마26:3-5).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당하실 수난을 예고하신 것은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렀을 때와(마16:21),
갈릴리에 모였을 때(마16:22),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 길에서와(마20:17),
종말의 훈화를 마치셨을 때이다(마26:2).
예수께서는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
예루살렘 당국자들에게 받으실 수난을 언급하시며 천국 제자의 도리를 가르치신다.
예루살렘에서 당하실 수난 예고는 종말의 훈화가 마친 후에 언급된다(마26:2)
예수께서는 종말의 훈화를 통해서
예루살렘 심판과 세상 끝 날의 일들을 언급하시고 제자들의 충성을 권고하신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서 팔리우리라”
고 말씀하신다(마26:3).
예루살렘 당국자들은 공생애 내내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들을 거절하고 대적하였다.
예수의 가르침과 사역이 진행될수록 그들의 거절과 대적의 강도도 더해졌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 아들을 거절하고 대적함은
그를 보내신 하나님을 거절하고 대적함이다.
그들의 거절과 대적은 아들의 가르침과 사역이 율법과 다르기 때문이다.
예수의 가르침과 사역이 모세가 준 율법과 같다면 유대 당국자들이 예수를 거절할 필요가 있겠는가?
개혁신학의 구원론처럼
예수께서 율법을 온전히 지켜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셨다면,
율법 아래의 관헌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하였겠는가?
그들은 오히려 예수를 칭찬하고 이전의 선지자처럼 여겼을 것이다.
구약 선지자들은 모세율법을 따라 여호와를 섬기라고 외쳤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의 가르침과 사역은 모세율법과 전혀 다르다.
그래서 예루살렘 당국자들은 이틀 후에 있는 유월절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을 박을 것이다.
예수께서도 이러한 수난에 대하여 예고하신다.
예수께서 언급하신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라는 말은
제자들이 이틀 후면 유월절임을 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나 문맥상의 의미는 인자께서 십자가에 못에 박히는 때가 유월절임을 안다는 말이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유대 당국자들에게 고난을 받으실 것을 거듭하여 가르침 받았으며
이제 그날이 이틀 후에 있는 유월절이라고 일깨우신다.
이러한 그리스도 수난에 대한 진행 상황에 대하여
“그 때에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대제사장 가야바의 관정에 모여서
예수를 흉계로 죽으려고 의논하되 민란이 날까 하니 명절에는 말자 하더라”
고 기록한다(마26:3-5).
이처럼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유월절에는 예수를 죽이지 않기로 결의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에 박히기 위해서 팔리우리라”
고 말씀하신다(마26:2).
이러한 진척 상황은 오직 마태복음에서만 언급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유월절에 죽음은
대적자 산헤드린 공회의 결정에 의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다.
이처럼 마태복음은 하나님의 뜻의 성취를 강조한다.
인자께서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기 백성의 죄를 담당하기 위하여 은 삼십에 팔리신다(마26:15, 27:9).
은전 삼십은 당시에 거래되던 노예 값이다.
이는 선지자 스가랴의 예언 성취이기도 하다.
스가랴는
“내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고가를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말라.
그들이 곧 은 삼십을 달아서 내 고가를 삼은지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이 나를 헤아린바
그 준가를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로
내가 곧 그 은 삼십을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지고”
라고 기록한다(슥11:12-13).
이에 대하여 요한복음은
“그중에 한 사람 그 해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저희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라고 기록한다(요11:49-50).
요한 복음 서두에서도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라고 기록한다(요1:29.
모세율법에서 유월절의 어린 양은 그해의 대제사장이 지목하도록 하고 있다.
따라서 그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는 예수를 지목하여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된다”
고 말한다.
이처럼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그해 대제사장 가야바가 지목한 유월절 어린 양으로 죽으셨다고 말한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대제사장 가야바와 백성의 장로들은 유월절에는 예수를 죽일 생각이 없었다.
이는 백성들이 예수를 대대적으로 환영하는 분위기이어서 그들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마26:5).
그러나 가룟 유다의 배반으로 결국 예수를 죽이기로 결의하고
그들은 즉시 산헤드린 공회를 소집한다.
산헤드린 공회는 일반적으로 성소의 방에서 소집되나
당시에는 대제사장 가야바의 아문에서 모였다(마26:3).
이처럼 마태복음은 산헤드린 공회원의 음모와(마26:1-5)
한 여인의 봉사(마26:6-13),
제자 중 하나인 가룟 유다의 배신을(마26:14-16) 순차적으로 배치하여 대비한다.
예수께서 한 여인으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으신 기사는 네 복음서 모두에서 언급된다.
본문과 마가복음 14:3-9와 요한복음 12장 1-8은 같은 내용이다.
그러나 누가복음에서 바리새인의 집에서
한 여인이 예수의 발에 기름을 부은 내용은 전혀 다른 사건이다(눅7:36-50).
요한복음에서 예수께 기름을 붓은 일은 유월절 엿새 전에 일어났다고 말한다(요12:1-2).
요한복음에서의 기름 부은 사건은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전 나사로의 집에서 일어난 일이다(요12:1-8).
나사로의 집에서 배설된 예수를 위한 잔치 자리에서 기름 부음을 언급하여(요12:2-3)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당하실 존귀한 죽음을 설명한다(요12:7-8).
예수의 시신도 유대인들이 행하는 율법의 격식대로 향유를 바르고 세마포로 감싼다.
그런데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기름을 부은 여인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고
장소도 베다니 나병 환자 시몬의 집이라고 말한다.
기름을 부은 사건의 배열도
마가와 마태복음에서는 예루살렘 입성과 이스라엘 멸망 선고 후에 배열하여
산헤드린 공회의 살해 음모와 가룟 유다의 배신 사이에 배열한다.
이는 샌드위치 구조이다.
샌드위치 구조에서는 중앙에 배치된 기름을 부은 내용이 강조된다.
마태복음은 베다니 문둥이 시몬 집에서
한 여인에 의해 장례를 위한 기름 부음을 받으셨다고 말한다.
이는 산헤드린 공회와 배신자 유다의 합동작전 때문에
예수의 장례가 기름 부음도 받지 못한 비천한 자의 장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가복음에서는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다”
고 기록한다(막14:8).
요한복음은 예수께 기름을 부은 여인이 마리아라고 밝힌다(요12:3).
이는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심을 탁월하게 말하기 때문이다.
율법 아래에서는 대제사장이 유월절 제물인 양을 지목하는 것처럼,
당대의 대제사장 가야바는 예수를 유월절의 어린 양으로 지목한다(요11:49-52).
이처럼 마가나 마태복음은
예수의 행적에 대하여 역사적인 순서를 따라 기록하지 아니하고
예수 죽음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드러나도록 기록한다.
따라서 시간의 진행에 따른 것과는 차이가 나게 기록하고 있다.
한 여인이 예수께 향유를 붓은 일은 백성이 예수를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기름을 부음이 자기의 죽음을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마26:10-12).
당시에 크고 먼저 된 자들인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들을 거절하고 대적하였다.
하나님 아들을 거절하고 대적함은 그를 보내신 하나님을 거절하고 대적함이다.
이는 종말의 하나님 뜻을 거절하고 대적함이다.
이러한 행태는 마치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는 모양새이다.
그러나 율법 아래에서 작고 나중 된 여인,
예수를 하나님 아들로 알고 따랐던 여인은 귀한 기름을 부어서 예수를 존귀케 하였다.
따라서 예수께 기름을 부은 여인과 반대된 자들은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를 은 삼 십에 판 유다이며(요12:4-6),
마가복음에서는 어떤 사람들이며(막14:4),
마태복음에서는 제자들임을 말한다(마26:8).
요한복음은 돈궤를 맡은 유다가 도적질을 하였으며(요12:4-6),
마가복음에서는 함께 한 여러 사람이
무슨 의사로 이 향유를 허비하는고 라고 분하여 책망하였으며(막14:4-5),
마태복음에서는 제자들이 여인의 하는 일을보고
무슨 의사로 이것을 허비하느뇨 라고 분하게 생각하였기 때문이다(마26:8-9).
제자들은 여인이 귀한 향유를 붓는 것은
많은 사람을 구제하는 비용을 허비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분노하였다.
그러나 가난한 자들은 항상 있으며 그들을 구제할 기회는 남아 있다.
예수께 기름을 부음은 유월절이 임박하여 당장 이루어져야 하는 긴급 사안이다.
이에 예수께서는 여인의 행동을 칭찬하시고 복음이 전파되는 모든 곳에서
이 여인이 행한 일도 말하여 기억하게 하라고 말씀하신다(마26:13).
이러한 예수의 말씀은 여인의 기름 부은 행위를 칭찬하신 것이며
여인과 제자들의 깨달음 차이를 대조함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본문은 가룟 유다의 배신을 언급한다(마26:14-16).
요한의 증거에 따르면 가룟 유다는 세상을 사랑하여 돈을 탐한 자이다.
그가 예수를 따른 것은 세상에서 부자가 되어서 잘되기 위함이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 편만한 가르침처럼
삼박자 축복을 받아서 세상에서 머리가 되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가룟 유다의 눈과 마음은 오직 예수를 통한 돈에 있었다.
유대 사회에서 유력한 자가 되고 부족함이 없는 삶을 누림에 있었다.
그래서 그는 대제사장을 찾아가서 은밀한 거래를 제안한다.
은 삼십을 받기로 약조하고 예수를 판다.
율법에 따르면 은 삼십은 이스라엘 중에서 가장 비천한 남자 노예 값이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유대인 중에서 가장 비천한 자로 취급받으시고
유월절 어린 양으로 십자가에서 죽음을 죽으신다.
그리고 가룟 유다는 유대 관헌들과 연합하여 예수를 죽인다.
한국교회에는 모세율법(구약성경)대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는 가르침이 편만하다.
장로교 신학인 개혁신학은
예수께서 율법을 온전히 지켜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가르침의 예가 모세가 말한 십일조를 주장하고 가르치는 일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 구속의 효력을 부인하는 일이다.
그것은 종말에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심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를 구원하기 위함이기 때문이다(갈4:4-5).
율법 아래에 있는 자를 구원함이란 율법 아래에서 그리스도의 통치로 옮기셨다는 말이다.
이는 모세에게서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로 세워졌다는 말이다.
이는 모세가 아니라 아들의 말을 따라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고 섬기는 자로 구원하셨다는 말이다.
하늘에 속한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