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문화원 마곡사와 무령왕릉 유적지답사[3](2024.6.12.)
마곡사 대광보전(大光寶殿)[3](보물제802호)
대광보전 안의 비로자나불 지권인을 취하고 있다
고창문화원 일행이 마곡사 대광보전 앞에 당도했을 때는 마곡사 사찰해설사가 대기하고 있다가 바로 해설을 시작했다. 해설을 경청하는 사람이 꽤 많았다. 무엇에 중점을 두고 해설을 하는가를 귀담아 들었다. 그리고 들은 바를 좀더 구체적으로 여기에 옮겨볼까 한다.
해탈문 천왕문을 지나 세심교를 건너면 욕계를 벗어나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의 세계에 이른다는 것을 마곡사에서 알 수 있었다.
즉 세심교를 건너면 마곡사의 가람에는 대광보전, 대웅보전, 5층석탑 등의 무색계를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심검당, 요사, 승방(僧房) 등은 색계를 나타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색계가 선(禪)을 행하는 자의 세계임에 반하여 무색계는 정(定)을 행하는 자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한 마디로 선정(禪定)이라고 말하나 더 자세히 말하면 禪과 定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으나 여기에서 언급하는 것은 오히려 폐가 될 수 있어 생략하기로 한다.
마곡사 대광보전에는 법신비로자나불상 1구와 그 후불탱화가 모셔져 있다. 우리나라 불전 중 비로자나불을 봉안하였을 때 비로전(毘盧殿), 대적광전(大寂光殿), 대광명전(大光明殿) 등으로 전각명을 붙이고 있으나 여기서는 대광보전이라 하고, 선운사에서는 대웅보전(大雄寶殿)안에 비로자나불을 모시고 있다.
마곡사의 대광보전이 특이한 점 몇 가지를 소개한다.
첫째, 일직선상에 두 불전을 배열하고 있는데, 즉 대광보전을 앞에 그리고 그 바로 뒤에 대웅보전을 배열하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 불상 봉안 위치가 불전을 향하여 정면에 놓이지 아니하고 측면 즉 좌측에서 우측을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예는 부석사 무량수전의 경우를 제외하면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셋째, 비로자나불 단신불(單身佛)만 봉안하고 있다. 대개의 경우 법신 보신 화신의 삼신불(三身佛)이 봉안되나 여기서 법신인 비로자나불만 봉안하고 있음은 법신으로서의 불신관(佛身觀)을 더욱 강조하려 하는데 그 의미가 있는 것 같고, 다른 불신(佛身)은 대웅보전에 봉안함에 의하여 대신하고자 하였던 것이 아닌가 한다.
대광보전의 비로자나불은 지정문화재는 아니며, 수인은 비로자나불 공통 수인인 지권인(智拳印)을 취하고 있다.
비로자나불(毗盧遮那佛)은 범어로 Vairocana라 하며, 노사나불(盧舍那佛, 자나불(遮那佛 )이라고도 한다. 편일공처(遍一功處) 광명편조(光明遍照)라 번역한다. 화엄경의 주불이며 부처의 진신(眞身)을 나타내는 칭호이며 부처의 신광(身光), 지광(智光)이 이사무애(理事無礙)의 법계(法界)에 두루 비추어진 원명(圓明)한 것을 나타낸다.
말하자면 이 법신 비로자나불에 의하여 마곡사는 선교양종(禪敎兩宗)의 본산으로서의 교화적 기능을 다할 수 있었던 것이라 믿어진다.
비로자나불에 대하여 좀더 이해하기 쉽게 알아보자.
비로자나불은 의인화된 부처님이다.
불교의 발달과정에서 시간적으로 보면, 석가모니 부처님이 살아계실 때에만 이 세상에 부처님이 계셨단 말인가란 모순과, 공간적으로 보면, 석가모니부처님이 인도의 카필라 성에서 왕자로 태어나, 19세에 ‘야쇼다라’와 결혼하고, 29세에 ‘나훌라’란 아들을 낳았고, 바로 29세에 출가하여 설산에 들어가 6년간 수행하여 35세에 불도를 깨닫고, 그 후 45년간 인도 전역을 다니며 불도를 전파하였다 하더라도 80세까지 살면서 인도 외에는 가본 적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교화권은 인도에 국한되지 않는가. 말하자면 세계적은 아니라는 얘기다. 그래서 비로자나불을 의인화시킨 것이다. 즉 비로자나불은 석가모니부처님의 본래의 모습(법신불, 진여당체)로서, 우주가 탄생하면서부터 비로자나불로 계시다가, 화(化)해서 인계에 오셔서 깨달음을 얻으셨고, 80세에 열반에 드시어 다시 비로자나불로 돌아가셨다고 보면, 시공(時空)을 추월하여 언제고 부처님은 이 세상에 계시는 것이 된다.
한 가지 예를 더 들면, 금덩이가 있다고 보자. 금덩이 자체는 금이란 성질이 변하지 않는 법신(法身) 비로자나불, 반지를 만들기 위하여 불에 달구고 두드리는 것은 수행과정인 보신(報身) 노사나불, 금반지로 완성되면 화신(化身) 석가무니불이라 한다면 이해가 갈 것이다.
한 가지 더 들어보겠다. 하늘에 뜬 달 은 언제나 변화가 없는 법신 비로자나불, 달빛은 수행과정인 노사나불, 물에 비친 달은 하늘의 달이 화한 석가모니불이라면 완전히 이해가 갈 것이다. 이때 삼신불(三身佛),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 등 ‘신’자를 귀신 신자를 쓰면 안 된다. 불교는 무신교이기에 ‘몸신(身)’자를 써야 하는 것이다.
비로자나불을 밀교에서는 대일여래(大日如來)라 하는데, 밀교에서 설하는 우주의 실상을 불격화(佛格化)한 근본불로서, 모든 부처와 보살이 출생하는 본원이며 궁극의 귀결처이다. 그 몸과 입과 뜻의 활동은 허공에 가득하여 여래의 삼밀문(三密門)으로서 금강의 깊은 가르침을 연설한다고 한다.
마곡사 대웅보전(大雄寶殿)
대웅보전 안의 삼신불(중앙 석가모니불. 석가불의 좌측 약사여래. 오른쪽 아미타불)
해설사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대광보전과 대웅보전, 마곡사 5층석탑, 백범 김구 선생이 머물렀던 내역에 대하여 해설한다. 해설사의 요점만 마음속에서 정리하면서 대광보전의 이모저모를 보고 필요한 사진을 찍은 후 대웅보전으로 향하였다. 대광보전과 대웅보전 중 주된 불전(佛殿)이 어디인지 이해가 잘 안되었다. 주불전(主佛殿)이 어디이면 뭣하랴 그냥 있는 그대로를 보면 된다고 생각하며 부지런히 사진을 찍으며 일행과의 시간을 맞추려고 애를 썼다.
대웅보전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에 모시고 좌우에 아미타여래상과 약사여래상을 봉안하고 있다. 대광보전에서 법신, 보신, 화신의 삼신불을 봉안하는 대신, 보신 화신을 대웅보전에 봉안하고 있는 셈이다.
약사여래의 불신관(佛身觀)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으나 아미타여래를 보신불로 보게 되면 화신불인 석가모니불과 더불어 삼신불 체계가 대광보전 대웅보전으로 나누어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대웅보전에 약사여래상을 봉안한 것은 대웅보전의 기능과 대광보전의 기능을 분담하는 두 기능을 함께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대웅보전은 마곡사 경내의 북변 부분인 가장 높은 곳에 터를 잡아 배산(背山)의 터를 깎아내어 정지(整地)된 높은 축단(築壇) 위에 세워져 있다. 전면으로는 축단 아래에 대광보전과 5층석탑이 있으며, 서편에 노전채(魯殿體)인 대향각(大香閣)이 있다.
대웅보전은 이론적으로는 주불전을 대광보전에 양보한듯하였으나 실제 불(佛)의 연원은 석가불에 있음을 당당히 나타내고 있는 가람구조로 이해가 가는 것이었다.
이상의 교화가람지역에는 대광보전 대웅보전 이외에 나한전(羅漢殿)으로서의 응진전(應眞殿) 등의 전각이 있어 선종사찰의 한 특징 이상의 다른 의미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외에 대웅보전 노전(爐殿)으로서의 대향각(大香閣) 대광보전 노전으로서의 심검당(尋劍堂)과 요사 등이 있다.
여기 교화가람지역에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명소가 있다.
그것은 바로 1896년 명성황후가 시해된 날, 백범 김구 선생은 명성황후의 복수를 결심하고 일본군 중좌를 살해하였다. 그 후 살인범으로 붙잡혀 인천교도소에서 복역 중 그곳을 탈옥하여 1898년 마곡사에서 은신하였다. 그 은신처에서 하은당이라 불리는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법명을 원종이라 하였다. 스님이 된 김구선생은 삭발을 하게 되었고, 지금은 삭발바위와 마곡천을 잇는 다리를 놓아 백범교라 부르고 마곡사에서 마곡천 절경을 굽어보는 또 다른 명소가 되었다.
또한 마곡사 생태농장에서 군왕대로 이어지는 <백범 솔바람 명상 길>을 두어 마곡사를 방문하는 사람들이 1시간가량 산보하기 좋은 코스를 만들어 놓았다.
우리는 다시 세심교를 건너 영산전 지역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참고문헌
불교미술 : (재)대한불교진흥원 출판부
한국의 가람 : 홍윤식 동국대, 교토불교대학 교수 역임.
불교성전 : 동국대학교 부설 동국역경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