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산문 6월호 월평
창조적 의미 발견과 개성적 의미 부여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니체는 창조되어질 수 있는 작품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창조하는 행위에서 오는 창조, 다시 말해서 창조자가 자신의 창조적 행위에서 삶의 상승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설파한 바 있다. 작가는 자신이 하는 작업에 대한 가치를 스스로 창출해야 한다는 말과 통한다. 이렇게 보면 자기를 표현한다는 것은 일종의 창조 그 이상의 의미를 내포한다고 하겠다.
김미원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제목이 강하게 나의 눈길을 잡아끈다. 그 역설성 의 내포가 새로운 것을 주목하는 인지시스템에 딱 걸렸다. 작가는 노인의 가치를 여러 사회적 현상과 역설적으로 연관시켜냄으로써 수필의 출발점이 인식에 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이 수필의 ‘늙음’에 대한 신선한 정의, 전개부 ‘요즘의 나는 몸의 지배를 받는다.’라는 선언도 눈길을 잡아당긴다. 젊으나 늙으나 누구나 몸의 지배를 많이 받고 살고, 몸의 상태에 따라 기분과 일정이 달라진다는 작가의 말에 공감하며 글을 따라 가다보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도발적 선언에 수긍을 하게 된다. 마트에서의 사건, 시월드프로그램에 대한 입장 표명은 주제의식의 구체화를 돕고 있고, 사뮤엘 울만의 시와 마르케스의 소설의 대비는 늙음에 대한 해석을 새롭게 인식시켜 공감을 가져다 준다.
노인의 존엄성을 지킬 방도를 강구하면서, 예이츠의 시를 인용한 것도 공감을 확보하는 좋은 전략이다. 노인 하나가 죽는 것은 도서관 하나가 사라지는 것이라 표현도 강한 힘을 갖는다. ‘지하철 무임승차 65세에서 70세로 검토’한다는 기사가 이 수필의 전체를 지배하지만, 작가는 결말부를 단 한 줄,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로 채운다. 의미를 발견하여 그것이 강한 정서적 힘으로 작용하도록 한 점이 돋보인다. 이 작품은 복잡하고 미묘한 노인문제 대응에 대한 해답을 준비하고 있기에 문학의 사회적 가치에 부응한다고 하겠다. 삶은 하나의 귀결점에 도달할 때, 정당하게 평가된다. 문학이 담당해야 할 사명 중의 하나가 인간성 회복이라면, 그 첫 번째로 할 일이 노인의 지혜가 갖는 가치를 제대로 알게 하는 것이다. 강한 역설성이 묻어 있는 사실명제를 가치명제로 되돌리는 간접화 전략을 통해 작가는 자신의 메시지를 정서적으로 형상화해서 문학성의 견인에 성공했다고 하겠다.
장은경의 <고래의 변신>은 생존을 위해 고래가 변신을 선택했다면,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변신>에 나오는 그레고리 잠자의 선택은 생존이 아니라 생존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는 판단을 전제로 해서 작가는 힘든 현대적 삶의 대안을 찾기 위해 현미경을 갖다 댄다. 도전에 응전함으로써 삶의 위기를 탈출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고래의 현실적인 변신에 대해 작가는 그것을 내면보기로 재해석한다. 삶의 지혜를 찾아내는 여기에 수필의 맛이 있는 것이다. 작가는 거대한 자본으로부터 받는 극도의 스트레스가 우리에게 또 다른 생존의 방향성을 제시해 줄 수 있을 거라는 데에 확신을 갖고 설득에 열중하고 있다. 이런 확신을 자기 주변 사람들의 경험을 통해 확인하고, ‘자기 내면과 마주보기’라는 주제화로 연결시켜 냄으로써 문학적 형상화에 성공하고 있다.
자기 주장의 설득을 위해 다이돌핀이라는 감동호르몬의 역할과 효과를 말해주거나, 생존을 위한 고래의 선택을 역설적인 측면에서 새로운 차원으로 재해석하고 있는 부분이 수필의 맛과 멋을 주는 부분이다. 이런 발견이 우리 인간도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자존감을 가지고 자기 존재 의미를 찾아나가면, 고래처럼 바다를 유영하는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으리라는 작가의 메시지에 공감을 보태준다. 여기에는 이 수필이 철저하게 구체성과 보편성의 바탕에서 직조되었음도 일조한다. 작가는 한마디로 수필을 새로운 의미부여하기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생활인의 단순한 인식을 넘어 서서 수필 소재에 담긴, 또는 묻힌 가치를 유의미하게 다듬어 가는 관조의 힘이야 말로 수필을 수필답게 하는 작가 자신의 숨결인 것이다. 이 수필이 갖는 멋은 대상의 본질을 멋지게 태질하는 데 있다. 기존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해내는 솜씨가 돋보인다.
정모에의 <TO PAPILLON>은 자유를 향한 인간의 욕망을 그려낸 영화를 바탕으로 바이오필리아적 가치를 건져낸 수필이다. 이 작품은 영화 <빠삐용>의 마지막 장면, ‘나는 이렇게 살아 있다라는 메아리가 바다를 깨웠다’로 시작하고 있다. 이는 발단의 예술로서 수필의 특성을 잘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첫 석줄이 수필의 성공을 결정하는 알파와 오메가라 할 때, 작가의 이런 선택은 매우 적절한 것이다. 무인도에서 종신형을 받고 복역하면서 아홉 번이나 탈출을 시도했던 주인공 빠삐용, 아마도 작가는 그 빠삐용의 건강한 생명성을 보여주면서 실의에 빠진 사람들에게 인생의 새로운 의욕과 활기를 되찾고 주고자 한다. 자연의 모든 물상에는 하나의 의미가 담겨 있다. 삶은 하나의 의미를 발견하는 데 그 의의가 있다. 그 발견 속에는 삶의 환희와 생명력이 내재해 있음을 이 수필을 잘 그려내었다 하겠다.
마지막으로 가면서, 자신의 삶에 솔직한 작가는 바람처럼 자유로울 수 있는 방법을 되물어 보고, 자신을 반성적 성찰대 위에 내려놓는다. 그 무엇을 힘껏 치닫는 생명력이 번득이는 빠삐용의 싱그러운 생의 욕망 속에서 그녀는 낭만을 꿈꾼다. 차분한 묘사와 사색, 그리고 관조는 작가의 솔직한 성품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어 감동을 준다. 강한 울림을 주는 위대한 문장의 인용으로 구축된 소재의 의미화가 수필적 감흥을 불러온다. 수필의 특성도 자조보다도 관조에 초점을 맞출 때 더 문학적 향취를 거둘 수 있는 법이다. 수필 창작은 본 것, 느낀 것만으로 기록되는 단순한 체험의 배열이 아니라 경험을 넘어 본질의 의미를 찾고, 그 의미를 탐색하는 작업이라는 것을 이 수필은 잘 보여준다, 결국 수필을 쓴다는 것은 어떤 대상으로부터 특별한 의미를 찾아내는 과정인 것이다.
수필을 쓰는 일은 Logos와 대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오세윤의 <행복 나이>, 백형찬의 <추억의 만연필>이란 작품도 체험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어떤 의미를 부여할 것인가는 창조성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이들 작품은 인간에 대한 애틋한 사랑과 그를 실현하기 위한 작가 나름의 창조적 노력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병든 사회일수록 문인들에게는 더욱 막중한 사명이 있다. 삶의 진실을 추구하는 수필만이 구원이라는 사명에 접근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