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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로, 노래로, 진료로 사당 철거민과 함께했던 사람들
[동작민주올레-시즌2] 사당동 사람들의 주거권 쟁취 투쟁사 ③
오마이뉴스 2021.06.28 17:34l최종 업데이트 21.06.28 17:35l 김학규(hkkim21)
서울 동작구 사당동 철거민들을 도왔던 사람들을 이미 앞에서도 여럿 언급한 바 있다. 희망교회의 정명기 전도사, '예수의 작은 자매들의 우애회' 소속 한국 수녀 3명도 사당동의 가난한 사람들을 도운 사람이었고, 중앙대·숭실대·총신대 학생들을 비롯한 서총련 남부지구협의회 소속 대학생들도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하려고 했던 사람들이다.
이들 말고도 사당동 철거민들을 도우면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고자 했던 사람들'이 더 있다.
지역신문 '산 24번지' 펴냈던 소설가 김하경
▲ 김하경의 소설집 "속된 인생" 작가 김하경은 사당동 철거 싸움에 참여한 이후 소설가가 되어 「속된 인생」, 「바위가 파도에게」, 「별 아래 횃불 들고」 등 자신의 철거 싸움 경험을 담은 철거민 이야기를 단편 소설로 남긴 인물이기도 하다. | |
ⓒ 김학규 |
<내 사랑 마창노련>으로 유명한 작가 김하경은 사당동 철거 싸움에 참여한 이후 소설가가 돼 <속된 인생> <바위가 파도에게> <별 아래 횃불 들고> 등 자신의 철거 싸움 경험을 담은 철거민 이야기를 단편 소설로 남겼다.
교사와 방송 작가로 생활하던 김하경은, 휴식을 취해야 한다는 의사 처방에 따라 사당동 철거촌에 사는 파출부 아줌마를 고용하면서 사당동 철거 싸움에 관여하게 됐다고 한다. 그 파출부 아줌마가 철거 문제를 의논해 온 것이다.
김하경은 이후 철거민과 빈민운동 하는 사람들을 연결시켜 줄 목적으로 철거문제를 잘 아는 사람을 수소문하러 돌아다녔고, 그때 처음 찾아간 곳이 민주화운동청년연합(당시 집행위원장 김병곤)이었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도 사당동 철거 싸움에 연대의 손길을 뻗치게 된다. 김하경은 이어 가톨릭빈민문제연구소나 빈민사목회 그리고 빈민활동 하는 청년들과 알게 되면서 철거 싸움에 스스로도 빠져들게 됐다고 한다.
김하경은 3년이란 짧지 않은 세월을 자신이 그동안 살아온 30여 년의 세월보다 더 진한 삶을, 이곳의 아줌마 아저씨들과 웃고 울면서 살게 됐다고 기억한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때는 아줌마 아저씨들과 함께 최루탄 속을 뚫고 뛰어다녔고, 한밤중 산동네 골목을 누비며 집집마다 유인물을 몰래 넣어주고는 포장마차에서 뜨거운 오뎅 국물을 맛있게 먹기도 했다.
글쓰기에 관심이 많던 김하경은 사당동 철거싸움에 참여하면서 '산 24번지'라는 제목의 지역신문을 발간하는 역할도 담당했다. '산 24번지'는 소식지 성격이 강했으나, 지역주민들의 살아온 이야기를 실어 지역 주민 상호간 이해와 공감을 넓혀 연대의 분위기를 확산하는 역할도 했다.
김하경은 1987년 당시 대선을 앞두고 벌어진 마지막 철거싸움에서, 다리뼈에 금이 가는 부상까지 입고 약 두 달을 사당병원에 입원해야 하기도 했다. 김하경은 그때까지도 자신을 활동가나 운동가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자신도 모르게 현장에서 조직하는 활동가가 되어 있었을 정도로 그 삶에 빠져들었다는 것.
사당동 싸움이 끝난 후 퇴원한 김하경은 서울빈민연합을 조직하고 사당동, 봉천동, 서초동, 낙골 등에 놀이방을 세웠다. 봉천동에서 일용공노조를 만드는 일도 했다. 김하경은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며 "정말 그땐 신들린 듯 일에 미쳐 있었어.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었어"라고 회고했다.
민중가요 '민중의 아버지'와 '빈민의 함성' 만든 김흥겸
김흥겸은 연세대 신학과 출신으로 관악구의 난곡에서 1983년부터 난곡 낙골교회 담임 교육전도사가 돼 낙골야학을 운영하면서 도시빈민운동에 평생 헌신한 인물이다.
김흥겸이 사당동 철거 싸움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86년부터 김해칠이라는 가명으로 '서울시철거민협의회'의 연대사업차장과 사무국장 등을 맡아 활동하던 중 상계동, 양평동 등 다른 지역의 철거반대 투쟁에 함께했는데, 이때 사당동 철거반대 투쟁에도 참여하게 됐기 때문이다. 김흥겸은 1991년에는 신대방동 철거투쟁에 참여했다가 구속돼 3개월간 감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김흥겸은 음악에 재질이 있었는데, 그가 남긴 민중가요 8곡 중 특히 '민중의 아버지'와 '빈민의 함성'은 철거 싸움을 하던 도시빈민들이 투쟁의 현장에서 즐겨 부르던 애창곡이었다. 김흥겸은 1997년, 불과 서른여섯의 나이에 암으로 사망했다.
민중의 아버지 / 김흥겸 시, 곡
우리들에게 응답하소서 혀 짤린 하나님
우리 기도 들으소서 귀먹은 하나님
얼굴을 돌리시는 화상 당한 하나님
그래도 내게는 하나뿐인 민중의 아버지
하나님 당신은 죽어버렸나
어두운 골목에서 울고 있을까
쓰레기 더미에 묻혀버렸나 가엾은 하나님
얼굴을 돌리시는 화상 당한 하나님
그래도 내게는 하나뿐인 민중의 아버지
'노동해방의 나팔수', 노동가요 작곡가 김호철
노동가요 '파업가'와 '단결투쟁가' '포장마차' 등을 작곡한 김호철은 사당동 철거지역에 살았다. 김호철이 노래에 집중한 최초의 경험은 육군군악대 시절이었다. 한국체대에서 태권도를 전공하던 김호철은, 3학년이던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한국체대 학생회장으로 5.15 서울역 회군에 반대한 원칙파였다.
그는 전국학생회장단회의에도 참석한 탓으로, 전두환 등 신군부세력이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쿠데타를 일으키고 정치인과 학생운동가를 잡아들일 때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합수부에 연행돼 고문을 당한 끝에 투옥되기도 했다. 이어 강제징집으로 군대에 갔는데, 하필 육군 군악대였다.
김호철은 1985년 자신이 살던 사당동이 재개발 지역이 되면서 세입자대책위 일에 뛰어든 것이 그의 삶을 바꿔놨다. 그는 이어 노동현장에 투신한 여동생의 권유로 1986년에 구로공단에 '취업'했고, 이듬해 해고됐다.
'파업가'는 구로공단에서 기타반을 운영할 때 작곡한 노래였다. 그는 1987년 노동자대투쟁을 경과하면서 1988년 봄부터 서울노련 문화국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단결투쟁가'와 '전노협진군가' '끝내 살리라' 등 노동자들을 위한 새로운 노래를 줄기차게 만들었다.
김호철이 1988년부터 2000년까지 작곡한 노래는 작사 88편, 작곡 114편으로 작사·작곡 모두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민중가요 최대의 작곡가이자 작사가였다. 당시 왕성하게 쏟아져 나오던 민중가요(1987~2000)에서 김호철의 작품은 작사 7%, 작곡 9%를 차지할 정도여서 '민중가요 자판기'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김호철은 자신의 노래가 일하는 이들의 삶을 대변하고, 그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되기를 희망해왔다. 민중가요가 등장하기 전에는 일하는 사람들의 삶을 외면했던 한국의 노래문화는, 김호철을 비롯한 민중음악인들의 노력으로 비로소 그들을 노래하기 시작했다. 노동자라는 말이 부끄럽고 불온하게 느껴지던 세상에서 김호철의 노래는 노동자의 자존심과 긍지를 되찾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된다.
'노동해방의 나팔수'로도 불리는 김호철은 2000년대에도 사당동 자신의 집을 스튜디오로 두고 작사·작곡 활동을 지속하고 있으며, 인터넷방송 <노동의 소리>를 운영하고 있다.
달동네 파수꾼 사당의원과 김록호·김종구 원장
▲ "달돌네 파수꾼" 사당의원 원장 김록호(1989. 3. 19) "달동네의 파수꾼"으로 불리기도 한 김록호가 원장으로 있던 사당의원은 사당동 판자촌에 사는 가난한 이들에게 무료 진료를 제공하기도 하던 지역병원의 원조이자 산업재해·직업병 노동자들이 찾는 대표적인 산재 병원이었다. | |
ⓒ 한겨레신문 |
이수역 10번 출구에서 사당2동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던 사당의원은 1985년에 설립됐다.
사당의원은 사당동 판자촌에 사는 가난한 이들에게 무료 진료를 제공하기도 하던 지역병원의 원조이자 산업재해·직업병 노동자들이 찾는 대표적인 산재 병원이었다. 서울에는 사당의원을 모델로 구로의원과 성수의원이 이후 더 생겨나기도 했다.
사당의원 초대 원장 김록호는 1987년 11월에 창립된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인의협) 소속 의사이기도 했다. 그는 날품팔이를 하는 아버지와 함께 무허가 판자촌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판자촌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신뢰를 받으면서 진료활동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사당의원은 특별한 점이 많았다. 우선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병을 얻거나 장기수로 복역하다 나온 이들에게는 치료비를 받지 않았다. 이런 식의 무료 진료 규모는 전체의 5% 정도를 차지했다고 한다.
김록호 원장은 당시 대부분의 의사들이 별 관심을 갖지 않았던 산업재해와 노동자의 건강권에 대해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고 집중하는 의사로도 유명했다.
한국 사회에서 산업재해 문제가 전면에 부상하게 된 계기는 15세의 어린 나이에 수은중독으로 사망한 문송면 군 수은중독 사망 사건과(1988년), 원진레이온 노동자 집단 이황화탄소중독 사건이었다. 김록호 원장은 이 두 사건 해결에 깊이 관여했다. 특히 원진레이온 사태를 '직업병'이라는 차원에서 국민적 관심을 환기시키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인물이 김록호였다.
그는 <한겨레신문>과 한 인터뷰'('전근대적 노사관으로 책임회피 문제/ 노동자 생명보호에 의료인 앞장서야', 1988. 12. 22.)에서 "의료인들은 환자만 열심히 보면 되겠지만, 그러기엔 우리 사회 현실 특히 노동자들의 건강 문제가 너무 심각합니다. 1천만 명이나 되는 노동자 계층이야 말로 어느 누구보다도 한국사회의 발전에 큰 몫을 해내고 있는데, 이들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는 의사가 적어 안타깝습니다"라고 토로하기도 했다.
김록호 원장은 뒤늦게 미국 하버드대에 유학해 1995년 졸업할 때는 슈바이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김록호 원장은 이후 1999년에 설립된 산재전문병원인 원진녹색병원 초대 원장으로 활동했다. 김록호 원장은 앞에서 소개한 '노동해방의 나팔수' 김호철의 형이기도 하다.
1990년 김록호 원장을 1년만 돕겠다고 사당의원에 왔던 김종구는, 김록호 원장이 미국에 유학한 1993년부터 원장까지 맡아 사당의원을 이끌었다.
1995년에는 경찰의 사당의원 무단점거 사태가 일어나기도 했다. 해고노동자(나현균 코리아타고마 노동자) 연행을 위해 1개 소대를 병원에 투입한 것이다. 당시 나씨는 과천정부종합청사 앞 시위 뒤 노동부장관 면담을 위해 청사로 들어가려다 이를 막는 경찰과의 충돌로 부상당하며 사당의원에 입원한 상황이었다. 이에 사당의원 원장 김종구는 "영장 없이 경찰이 병원에 진입해 철수를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면서 "업무의 차질뿐 아니라 의사로서의 명예와 신용에 엄청난 훼손"을 당한 것에 대해 4000만 원의 손해배상 청구를 국가를 상대로 하는 소송을 벌이기도 했다.
김종구 원장은 북한이 재난으로 식량위기에 몰렸을 때 북한어린이돕기 의약품지원사업도 벌였다. 김종구는 이후 인의협 상임대표(1997~2000)를 맡기도 했다.
김종구는 2004년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인의협' 이끌어온 김종구 상임의원]', 2004. 7. 8)에서 "가정폭력 방지법 제정 당시 참여해 가정폭력 문제를 공론화 한 것이 보람"이라고 말했다. 그는 당시 매일 오후 3시30분부터 6시까지의 2시간 반을 가정폭력 피해자 및 중국교포들과의 상담에 할애했다고 한다.
사당의원은 원래 있던 자리가 재개발되면서 근처로 자리를 옮겨 지금은 이름도 새사당의원으로 고쳐 운영하고 있다.
사당동 철거 투쟁 현장을 방문한 문익환
▲ 사당2동 철거민대회의 문익환 1988년 1월 31일 문익환 민통련 의장은 사당동 철거민촌을 방문하여 철거민들을 격려하였다. 이날 철거민들은 사당동 공터에서 6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재개발 반대 및 임대주택 쟁취를 위한 도시빈민대회’를 열었고, 이 대회에서 문익환 목사는 격려사를 통해 “빈민이라는 말이 없는 국민이 진짜 주인이 되는 사회를 만들자.”고 하여 큰 박수를 받았다. | |
ⓒ 사당2동 세입자 대책위원회 |
문익환 목사(1918~1994)는 1970,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의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 민주화운동가들은 문익환을 비롯하여 1980년대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을 이끈 3인(문익환, 계훈제, 백기완)을 '문계백'으로 부르기도 했다.
만주 용정에서 태어나 윤동주 시인과 친구 사이이기도 했던 문익환은 해방과 함께 월남해 서울 수유리에 자리를 잡고 살았다.
1988년 1월 31일 문익환 민통련 의장은 사당동 철거민촌을 방문해 철거민들을 격려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성과로 쟁취한 대통령 직선제 하에서 노태우가 당선된 직후였다. 민통련은 1989년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이 출범하기 전까지는 재야 민주화운동의 구심 역할을 했던 단체였다. 그러다보니 민통련은 민주주의와 평화통일을 위한 활동만 한 것이 아니라, 도시빈민들의 생존권 투쟁에도 연대하고 지원하는 일도 했다.
이날 철거민들은 사당동 공터에서 6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재개발 반대 및 임대주택 쟁취를 위한 도시빈민대회'를 열었고, 이 대회에서 문익환 목사는 격려사를 통해 "빈민이라는 말이 없는 국민이 진짜 주인이 되는 사회를 만들자"고 해 큰 박수를 받았다. 문익환 당시 민통련 의장이 사당동 철거민들과 함께 한 연대 방문 소식은, 이후 <사당소식 제2호>에 실리기도 했다.
대회가 끝난 후 참석자들은 '사당·동작동 세입자 일동' 명의의 "장기융자 임대주택 쟁취하자"는 플래카드 아래 '선 대책 후 철거' '서민주택 건설' 등이 적힌 피켓을 들고 연좌시위를 벌였고, 이어 플래카드를 선두로 해 재개발 사무실로 내려가 항의 시위도 벌였다. 이날 흰 머리띠를 두른 주민들은 사람들이 붐비는 지하철역까지 진출해 시민들을 상대로 자신들의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