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여름 폭서 속으로 장대비가 꽂히는 중이다. 포르티시모로 떨어지는 빗소리를 가르며 수돗물 좔좔 틀어 놓고 콩나물을 씻는다. 하나둘 콩깍지가 벗겨져 나가고 콩나물이 투명해진다. 노란 콩 머리와 실낱같은 뿌리를 자잘하게 달고 있는 것들. 거두절미할까, 잠시 망설이다 어수선한 잔발들만 제거한다.
물에서 건져 올린 콩나물이 환하다. 우리를 무엇으로 만들 참이냐고 묻는 물음표 모양의 콩나물들 앞에서 내 생각에 물음표를 단다. 시원한 냉국? 아삭한 나물 무침? 콩나물은 시인 김승희의 시(詩)에서처럼 ‘콩에서 콩나물로 가는 그 어두운 기간 동안 꼭 감은 눈 속에 쑥쑥한 시루 음악의 보름달이 벅차게 차오르고 하나씩 금빛으로 터져 나온 천지개벽’의 순간을 맞이했던가. 삭은 콩 껍질을 둘러쓴 채 해탈한 그것들의 몸은 티 하나 섞이지 않음 ‘맑음’이다.
요리로 거듭나는 방식에서 콩나물은 주연과 조연을 가리지 않는다. 몇 가지 양념과 어우러져 매콤한 콩나물무침이 되기도 하고 얼큰 시원한 콩나물 해장국도 되며, 아귀찜이나 잡채엔 콩나물이 빠져서는 요리가 제대로 완성되지 않는다. 뿐인가, 땡초와 콩나물을 넣은 칼칼한 칼국수며 양념간장으로 비벼 먹는 콩나물밥, 역할로 보자면 팔방미인 격이다. 어릴 적 내 잦은 감기에도 어머니의 처방은 아스피린 반쪽과 뜨끈한 콩나물국이었다. 한 줌 쌀과 콩나물을 넣고 뭉근하게 쑨 콩나물죽이 땟거리가 되기도 했다.
먹는다는 건 ‘삶’과 상통한다. 별미가 아니라 착한 먹거리로 허기진 삶을 달래 준 콩나물은 가난한 시간과 아리아리한 추억과 살가움까지 동시에 품고 있다. 딱히 어떤 반찬을 해야겠다는 생각 없이도 콩나물을 사 놓고 보는 건, 마음 허전한 날 꺼내 보는 기억인 듯 익숙하여서인지 모른다. 그런 콩나물이라 하여 구태의연할 수만 있으랴. ‘먹는다’를 넘어 ‘즐긴다’는 이즈음엔 콩나물도 더 이상 가난을 나타내는 음식이 아니다. 맛이란, 사람을 즐거움의 세계로 빠뜨리는 행복한 감각이며 음식만큼 행복하고 훈훈한 위로가 있던가.
콩나물을 씻어 놓고 더위 먹은 입맛을 살려낼 방법을 찾는다. 조용히 수소문하기엔 인터넷만 한 것도 없으니 새뜻한 콩나물 반찬을 찾아 클릭, 클릭, 그러다가 주르르 펼쳐지는 콩나물의 무한 변신에 탄성을 지른다. 바야흐로 음식이 ‘음식 문화’로 발전한 세상이라 하였나. 사진으로 봐도 갖가지 콩나물 요리들이 군침을 돌게 한다 어쩜 내 얕은 요리 상식과 여태 어설픈 조리 솜씨가 흐벅지게 먹은 세월 대비 엄청, 모자란 주방 경력 탓만 아닌 성싶다. 콩나물 앞에서조차 한심한 여자다.
우선 급하게 구한 아이템이 ‘콩나물 겨자 냉채’다. 콩나물을 끓는 물에 살짝 데쳐 찬물에 헹궈내고, 냉장고에서 찾아낸 야채들은 깨끗이 다듬어 씻는다. 파프리카는 얇게 채 썰고 오이도 살살 돌려 깍아 가늘게 채 썬다. 게맛살을 결대로 찢는 것으로, 그나마 쉽고 초(超)간단 냉채 준비를 완료한다. 마지막으로 넓은 그릇에 콩나물과 나머지 재료들을 모두 담아 겨자 소스를 넣어 버무린다. 중간 품평을 해보는데 아하! 톡 쏘는 겨자 소스와 사각거리는 콩나물과 부재료들의 새콤달콤한 하모니가 제법 상쾌한 음절로 튀어 오른다. 콩나물도 이렇듯 새크무레할 수 있는걸, 낡은 시간일수록 신선한 전환이 필요했던 것을.
음식을 만들면서 알게 되는 것들이 많다. 뻣뻣한 날것들을 다듬고 씻고 양념 넣어 간 맞추고 조리하다 보면, 잡다한 상념들도 간물이 밴 식재료들처럼 수굿해진다. 설익은 말이 숨을 죽이고, 색깔 찬연한 말들이 숨겨 놓은 서늘한 함정도 용서한다. 떠들썩한 세상과 사람에 대한 실망과 분노, 홧홧한 가슴속 감정들이 잘게 썬 대파를 동동 띄운 콩나물국에 희석되기도 한다. 삶의 한기도 데워지는 듯하다.
어느 땐 음식을 만드는 행위 자체가 예술이라는 생각이 든다. 마음 수행인가도 싶다. 창조물이 무엇이건 온 마음을 다하면 결과가 있을 것이고, 지극한 정성의 과정은 수행과 다름없을 터이므로 콩나물도 비린내가 나지 않으면서 무르지 않게 익혀내고 콩나물 가락들을 솔솔 들었다, 놓으며 가볍게 버무려야 아삭아삭, 식감이 살아난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무간한 사이라고 자칫 소흘하다간 누구도 손쓸 수 없는 관계처럼 허물어질 수 있다. 주방에서 허둥대는 내 손길은 얼마만큼의 수련을 거듭해야 손맛이 깊어지려나. 언제쯤이면 밋밋하게 겉도는 내 삶도 감칠맛이 날까.
콩나물은 융통성 없는 내가 가끔 닮고 싶은 삶의 방식이다. 눈부신, 햇빛과 한 철 바람에 나붓대는 것들과는 태생부터가 다르다. 검은 장막 속 어둠과 물만 먹고 수수(水水)하게 자란 몸이 투명하고, 요리에서 주연이든 조연이든 척척 맛을 내는 은근한 재주를 지녔다. 카랑해 보이지만 완고하지 않으며 낫낫 할 줄도 산뜻할 줄도, 아는 콩나물의 방식, 수수(水水)한 콩나물이 수수하지만은 않다. 콩나물은 누군가를 위해 또 다른 변신을 꿈꾸고 있을지도 모른다.
창밖에서 피아니시모로 바뀐 빗줄기들이 자분자분 폭염을 잠재운다. 여름이 가려나 보다. 스러지고 피어나고 다시 이울어 가는 것들, 한 소절 촉촉한 노래가 되기까지 시름은 얼마만큼이었을지. 어떠한 삶이든 맛깔난 세상이었으면 좋겠다. 어제 했던 일을 오늘 또 하고, 내일도 그런 일상이라 한들, 지금처럼 빗소리 가락마저 예술인 순간엔 좀 행복해도 되지 않을까. 오후의 빗소리와 살강살강 씹히는 콩나물이 오늘은 선율 위 음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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