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쟁은 완전히 쓸데 없는 짓이라고 전에 말한 적이 있습니다. 논쟁이 쓸데 없는 짓인 것은 논쟁을 하는 당사자가 이미 결론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자기가 생각하는 바가 옳다고 관철시키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군다나 대부분의 인간들은 자기가 알고 있는 정보(지식)와 자기자신을 동일시하면서 살아가기 때문에 논쟁에 질 경우 상대의 의견을 검토해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졌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논쟁에 진다고 해서 상대에게 승복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런 경우 논쟁에서 진 사람은 마음에 상처를 입게 됩니다.
소위 진리를 추구하겠다는 수행자가 되어서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이런 망상을 품고 사는 한, 진리가 무언지는 영원히 미궁일 수 밖에 없을 겁니다. 수행자는 사회가 필요로하는 것을 따라가는 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사회가 수행자를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역사적으로 그런 시대는 없었고 앞으로도 그런 시대는 오지 않겠지만..
경전에 보면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두 수행자가 진리를 주제로 해서 논쟁을 합니다. 그러면 둘 중 한 수행자가 패합니다. 논쟁에서 패한 수행자는 자기 스승에게로 가서 논쟁에 진 사실을 알리고 스승을 모셔와서 스승과 상대 수행자와 논쟁을 합니다. 이 때, 스승을 데려온 수행자는 스승을 업고 스승은 제자의 등에 업혀서 논쟁을 합니다. 그러다가 상대 수행자가 자기 스승에게 논쟁에서 지면 진 수행자는 또 자기 스승에게로 가서 자기가 논쟁에서 진 사실을 알리고 스승을 데려와서 등에 업고 상대 수행자의 스승과 논쟁을 합니다. 그러면 두 명의 수행자가 각각 자기의 스승을 등에 업고 스승들은 제자들의 등에 업혀서 논쟁을 합니다. 굉장히 웃기는 장면이 연출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이렇게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이런 이야기는 비유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즉.. 이 정도로 구도자는 치열해야 한다라는 것과 또 다른 하나는 스승을 업었다는 것은 곧 스승에게로 가서 다시 배워서 스승의 이론으로 무장한 다음 다시 와서 논쟁했다는 이야기도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저도 어려서 논쟁을 많이 했습니다. 제가 논쟁했던 상대는 대부분 스님이나 목사님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코로나 팬데믹이 발생하고 나서 의사들과 논쟁 좀 했습니다. 전에도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저는 논쟁에서 져 본 적이 없습니다. 논쟁에서 지고나서 정신승리하거나 이랬던 것이 아니라 실제로 논쟁에서 져 본 적은 없습니다. 이건 자랑하려고 하는 이야기가 전혀 아닙니다. 논쟁에서 이겼다고 자랑해서 뭐하겠습니까? 더군다나 다 늙어서 말이에요. 그러면 이런 이야기를 왜 하느냐하면 제가 말하는 수행의 길은 진실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그리고 바이러스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진실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인 것입니다.
그러나 논쟁이니 뭐니하는 것도 모두 옛날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 사람들은 대부분 전화통화하는 것 자체도 거부하는 편이니까요. 전화통화 하기를 거부하는 현상은 팬데믹 이후 나타나는 현상으로 보입니다. 물론 전에도 있었지만 특히 팬데믹 이후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인터넷의 악영향으로 보입니다. 말하자면 관계 맺는 것의 두려움, 귀찮음, 복잡함, 무책임함 등이 복합되어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보입니다.
논쟁은 완전히 쓸데 없는 것일 수도 있지만 만약에 논쟁하는 당사자가 자기가 알고 있는 것과 자기자신과의 동일시 없이 정보를 순전히 정보로만 볼 수 있다면 그렇다면 어느 분야든 가장 빨리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정도로 마음을 준비하고 사는 사람을 만나본 적은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내가 정말로 원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13...진실을 찾기 위한 논쟁과 이기기 위한 논쟁
집 주인과의 대화..
마을에 물건을 사러 내려간 어느 날, 산 속 집주인 집에 들렀습니다. 커피를 주시면서 말씀하시더군요. 수행을 얼마나 했는지 물으시더니 "명상"에 대해서 그리고 "수행"에 대해서 대화를 좀 하자고 하셨습니다. 아저씨는 저보다 나이가 14년이 더 많은 분이었습니다. 당시 제가 32살이었으니 아저씨는 46살이었겠네요.
대답했습니다. "대화하는 건 좋지만 명상과 수행에 대해서 대화하려면 아저씨는 완전이 나이를 배제하셔야 합니다. 그러지 않는다면 저는 아저씨와 명상과 수행에 대해서 대화할 수 없습니다. 하실 수 있으시겠어요?" 한참을 생각하시더니 말씀하시더군요. "나이를 배제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가?"
대답했습니다. "중요합니다. 아저씨랑 저는 나이가 14년 차이입니다. 그런데 진리에 대해서라면 아저씨도 자기 나름의 어떤 관점이 있을 겁니다. 그런데 저와 대화를 하다가 이 관점이 상충이 되었을 때 아저씨가 저보다 나이를 더 먹은 사람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한다면 저는 반박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저야 속으로 변하지는 않겠지만 제가 생각하는 관점을 아저씨에게 곧 진실하게 이야기할 수 없게 될 것이고 그런 대화라면 하나마나한 대화가 됩니다. 그래서 저와 이야기를 하시려면 나이는 완전히 잊어버리고 그냥 사람대 사람.. 수행자 대 수행자로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 저도 제 경험과 제가 알고 있다고 여기는 진리에 대해서 솔직하고 진실하게 모두 이야기할 수 있을 겁니다."
이야기를 모두 듣더니 알았다고 하시고 그렇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이후 정말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갔습니다. 그리고 결국 진리란 무엇인가?를 이해시키고 설득시키는 지점까지 갔습니다. 언젠가 제게 서운했는지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자네는 그렇게 오랫동안 수행을 했다면서 어찌 그리 마음이 좁은가? 단 한번도 안지는구만.." 그래서 대답을 했습니다. "저는 이기려고 대화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좁은 마음이나 넓은 마음 그런게 있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마음이란 자기 맘에 들면 그 순간 부처가 되었다가도 지 맘에 안 들면 그 순간 그 마음 땅에는 송곳 하나 꽂을 자리도 없는 것이 마음 아닌가요? 저라고 뭐가 다르겠습니까마는 분명한 건 저는 이기려고 논쟁을 하거나 대화를 하지는 않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했던 것으로 기억이 납니다.
머.. 지금 같은 상황이 발생한다고 해도 똑같이 이야기할 것입니다.
김처사화의 대화..
김처사와 그 겨울 산 속의 그 집에서 같이 보내면서 몇몇 논쟁을 했습니다. 김처사는 자기가 저보다 나이가 많고 수행을 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자기는 견성을 했기 때문에 자기는 선지식이고 그렇기 때문에 제가 자기에게 고개를 숙여야 한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김처사는 사회에서 살다가 문득 경전 속 부처님의 이야기의 진위를 알게 된 이후 강원도 모처에서 수행을 하다가 견성을 했다고 했습니다. 견성 경험이라면 무어랄까.. 머리에서 번개가 쳤다고 하더군요.
물어 보았습니다. "그 견성 누가 했습니까?"
답이 돌아 왔습니다. "나라니까.."
내가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그건 견성이 아닙니다."
김처사가 말했습니다. "왜?"
내가 말했습니다. "김처사님이 견성을 경험했다면서요?"
김처사가 말했습니다. "그렇다니까.."
내가 말했습니다. "그래서 견성이 아닌 겁니다."
김처사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견성하는 자가 있는 견성이라니.. 그저 마음이 장난을 치고 있었습니다. 왜 견성을 경함한 자가 있는 견성은 진짜가 아닌지 설명해 주었습니다. "김처사님 생각을 해 보세요. 견성이란게 뭡니까? 성품을 보았다는 말이죠. 성품이 뭔가요? 진리죠? 이게 어떨 때 나타나는 겁니까? 수행자가 사라졌을 때 나타나는 겁니다. 맞죠? 그런데 김처사님이 경험했다면서요? 그래서 견성이 아니라고 하는 겁니다. 김처사님이 경험한 것이 진짜 견성이라면 이렇게 말할 겁니다. 견성이 있긴 있었다.. 그런데 그 때 나는 없었다.. 그러니까 견성이라는 현상이 일어난 것은 분명하지만 견성을 체험한 자는 없었다.. 아마도 이렇게 말할 겁니다.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김처사님이 견성체험한 것이 맞습니까?"
김처사가 한참을 망설이다가 답했습니다. "분명히 내가 체험했거든.."
내가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그건 견성이 아닙니다."
이제 김처사는 내 앞에서 더 이상 견성했노라고 말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체험한 자가 없는 견성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건 사회에서 깨달았노라고 선언하고서 스승 노릇하고 있는 수많은 가짜 스승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죄다 가짜라고 말하는 겁니다. 깨달은 자가 있는 깨달음이라니.. 이건 완전히 블랙코미디인 겁니다.
물론 라마나 마하르쉬나 니사르가다타 마하라지 그리고 오쇼 라즈니쉬나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그리고 백봉거사와 대우거사도 자기들이 깨달았다는 말을 하긴 합니다. 그러나 이 분들은 자신들이 깨달았다고 말을 할 때는 그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서이지 <나>라는 것을 내세우기 위해서 깨달았다는 말을 하지는 않습니다. 이 둘의 차이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견성을 경험했다고 하는 자들.. 깨달음을 경험했다고 하는 자들은 모두 가짜입니다. 깨달은 자는 형체가 없어요. 그러니 어떻게 달마대사에게 수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무아지경無我之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가 사라진 어떤 경지를 체험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가 있어.. "난 무아지경을 체험했다"라고 말한다면 이게 맞는 말이겠습니까?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