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모 토요 칼럼 2506.4.11>
(제4절) 박정희의 월남파병 내용과 정치 사회 경제적 효과
1. 베트남의 지정학적 위치와 베트남 전쟁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대륙국가인 인도와 중국사이에 있는 커다란 반도를 인도 차이나 (Indo- China)라고 부른다.
인도 차이나는 중국과 접한 동쪽에서 시작하여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태국, 미얀마 등의 5개국이 점유하고 있다.
이들 국가는 19세기 전까지에는 다양한 문화문명을 가지고 독립국가로 존립했었다. 그 후 태국을 빼고는 주로 프랑스등의 식민지가 되었다.
이들 5개국 중 베트남이 지정학적 중요성으로 강대국과 전쟁을 벌여왔다. 이것을 베트남 전쟁 또는 월남전쟁 또는 인도차이나 전쟁이라 부른다
베트남은 제2차 전쟁을 2차 대전즉후 호찌민이 1946~54년간 점령국 프랑스에서 독립하기 위한 독립전쟁이 제1차 베트남 전쟁이었다.
제2차 전쟁은 미국이 1962년 3월부터 1973년 3월까지 참전한 전쟁으로로 한국이 이 전쟁에 파병한 것이다.
제3차는 1979년 중국과의 전쟁이었는데 세 번의 전쟁에서 모두 베트남이 승리하였다.
중국은 지리적으로 동남아 국가들과 연결선상에 있는바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중화사상이 동남아 국가들을 지배하였음은 악랄하다고 할 수 있다.
베트남과 국경을 같이 하고 있는 캄보디아와 라오스는 모두 프랑스의 보혼령으로서 이들 국가 간에도 크고 작은 분쟁이 끊일 줄 모르고 일어났었다
2. 베트남 전쟁과 한국 파병의 개요
베트남은 인도 차이나 국가에서 지정학적으로 예민한 곳에 놓여있어 강대국의 식민지 먹잇감이었다.
제2차 대전 즉후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지에서 벗어나는 독립운동을 하여 승리하고 독립국가가 되었다.
미국이 참전하는 1962년 3월부터 73년 6월까지의 전쟁을 2차 인도 차이나 전쟁이라고 한다.
이것은 북쪽의 공산주의 베트콩과 남쪽의 자유 민주주의 베트남 간의 전쟁에 남쪽의 민주주의 국가를 도우기 위해서 미국이 참전한 것이다.
한국의 월남전에의 파병은 미국의 존슨 대통령의 한미상호 방어협정과 6 25 전쟁 시의 미국의 참전을 등에 업고 한국의 파병을 요청한 데서 시작한다.
미국의 참전기간은 64년 3월부터 73년 3월까지의 약 10년의 기간이었다.
미국의 참전은 전쟁초기에는 국민들로부터 공산화에 대항하는 전투를 환영받았으나 전쟁이 장기화되고 승리의 가망성이 없어지자 닉슨이 월남전쟁을 종식시키는 선거 Slogan으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1969년 출범한 미국의 37대 대통령 Nixon은 69년 7월 25일 우리에게 한마디 말도 없이 아시아 각국의 1차적 방어 책임은 각국에 있다는 "괌 ( Guam)
선언"을 하고 이어서 한국에 주둔 중인 2개 사단 중 1개 사단을 철수시켰다.
닉슨의 미국은 중국과 Ping Pong으로 시작된 동서 화해의 무드를 조성한다고 하면서 71년 대만을 쫓아내고 중공을 UN 상임 이사국으로 만들었다,
이의 배경으로 닉슨은 중공을 소련의 대항마로 만들겠다는 심산이었다는 것이었다는 말도 있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서 베트남 남북간에 평화 협정을 맺게 하고 미국이 철수하니 1년 만에 북쪽의 월맹이 승리하여 베트남을 공산주의 통일 국가로 만들었다.
필자가 베트남을 업무와 관광 관계로 세 번이나 방문 시 몇 분의 베트남 기업가 또는 공직자를 만나 대화하였는데 모두는 자유민주의 국가인 미국이 통일했더라면 지금의 공산주의 베트남 보다 훨씬 잘 사는 국가로 만들었을 것이라고 이구동성으로 얘기했다.
이것이 얼마나 의미 심장한 말인 줄 알아야 한다.
공산주의는 어디를 가나 싫어하는데 전쟁에는 이긴다. 공산주의에서 패배는 죽음을 의미하므로 죽을 각오로 임하기 때문에 승리하는 것이다.
참고로 월남인은 천성적으로 순하지만 자존심이 강하다. 한국인의 해외 진출에서 중에서는 실패했지만 월님에서는 성공했다고 ㅎ한다.
2. 월남전 파병에 따른 한국의 군사와 상품수출 및 건설용역 개척
미국은 1960년대 초부터 월남전에 개입하여 미국의 산업이 군수물자 생산에 치중됨으로써 소비재는 외국으로부터의 수입에 의존하였다.
여기서 가장 덕을 본 것은 일본이었다. 일본은 미국의 평화주의 보호아래 미군의 625 전쟁과 월남전 에서의 두 전쟁에 따른 특수로 전후 벼락같이 경제대국으로 비상하였다.
한국도 월남전에 경제적으로 도울 것이 없어 미미했지만 참전 미국군과 월남국에 경공업 상품수출이 시작되었다.
일본은 월남에 중공업 제품을 수출하고 한국이 경공업 제품을 떠맡아 수출하게 된 것이다.
한국이 월남전에 계속 파병함으로써 섬유류와 철강재등을 수출하게 되어 66년도 대월남 수출액이 6천만 달러에서 67년도에는 1억 달러에 도달했으며 1970년까지 누계 6억 달러를 수출하였다.
70년도 한국의 상품 수출실적이 총 10억 불인 것을 감안하면 대 베트남 수출액이 얼마나 큰 것인지 알 수 있다.
한국은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국군의 전력화를 고려하여 베트남전 참전으로 미국으로부터 군사원조를 받아 한국군의 현대화를 기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존슨 대통령의 월남전 참전
요청에 국제사회는 냉랭하였을 때에 박정희 대통령은 파병을 결심하고 국회의 동의를 얻어 월남에 파병하기 시작한 것이다.
국제사회에 존재도 없었던 한국이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특히 대미외교에서는 고자세를 취할 수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읃 월남전 파병이 한국군의 현대화에 절대 필요한 것으로 확신한 것이다.
베트남 파병이 경제적으로 상품수출과 건설공사 수주를 하게 될 것으로는 어느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
수출할 상품도 없었고 한민족이
해외로 진출하여 건설공사를 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베트남 파병으로 군대와 기업체의 해외진출과 대대적 상품수출을 가져왔고 미래를 기약해 준 것은 단군시조의 건국 이래 초유의 일이었다.
베트남전 파병은 이리하여 또한 남성 인력이 국가를 위해 활약하는 계기를 만든 희망적인 장래를 보여 주는 것이 된 역사를 만들기도 했다.
월남전 파병에 의한 건설용역 수주로 경험을 얻은 것이 70년대 초 중동 진출의 교두보를 만든 전연예기치 못한 천운이 내려준 경제적 효과도 있었다.
이 교두보가 한국이 73년의 오일쇼크 시절 사우디에 선두로 진출할 수 있게 만들었다.
예를 들면 1966년부터 대한통운을 비롯해서 현대건설, 삼환기업 대림산업등 토건회사가 줄을 이어 월남으로 진출하였다.
(참고로)
한국의 월남진출에서 잊어버릴 수 없는 것이 60년대의 한국의 수출왕 대우그롭 김우중 회장의 활약이다.
월남인들에게 많은 인프라 건설로 널리 알려져 자기 나라 대통령 이름은 모르지만 우중 김은 안다고 했다.
필자에게는 대우조선, 대우중공업, 대우전자, 대우건설, 대우실업과는 그룹의 무엇이든지 해보겠다는 진취적인 사고방식으로 모험적인 프로젝트를 한 역사가 있다
창시자 김우중 화정은 IMF 위기 때 처신을 잘못하여 한국의 3대 그룹이 와해되는 아깝고 어굴한 결과를 가져왔다.
결론적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한결같은 신념인 부국강병의 철학으로 윌남파병을 결정한 것이 한국이 자유민주주의 대국으로 성장함에 있어서 빛나는 역사를 창조하도록 만든 것이다. ( 4. KIST 설립 5. 윌남파병의 역사적 의의로 계속 )
2026.4.11 김광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