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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무엇인가
(1) 성경이란
성경은 무엇인가? 성경은 누가, 언제, 무엇 때문에 기록했는가? 왜 성경은 모두 66권인가? 과연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가? 아니면 사람의 글인가? 아마도 인류가 문자를 사용해 글을 쓰기 시작한 이후 성경책만큼 큰 관심을 끌면서 많은 의문점이 제기된 책은 없을 것이다. 성경은 기독교 신앙과 신학의 기초가 되어 왔을 뿐만 아니라 사실상 서구 문명의 정신세계와 역사의 길잡이 역할을 해왔다.
성경에는 그 어떤 책들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3)성경은 어떻게 보존되었나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한번쯤은 ‘성경 본문은 어떻게 보존되고 후대에 전해졌는가’ 하는 의문을 품을 것이다. 성경은 모세오경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무려 1500여년 동안에 기록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렇게 오랜 세월을 거쳐 후대로 전해졌으면서도 본문 전체가 거의 그대로 보존되었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기적과 같은 사건이다.
물론 고대 유물들 중에 돌이나 점토판 등에 새겨진 함무라비 법전이나 길가메슈 서사시, 아마르나 문서, 메르넵다나 로제타 비문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단편적이고 조잡한 내용들로 꾸며져 있다.
역사가 아널드 토인비가 “강대국들이 도리깨질하던 타작마당”이었다고 표현한 이스라엘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를 제외하고는 주변 강대국들(애굽, 앗수르, 바벨론, 메대 파사, 헬라, 로마 등)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거나 식민지 종살이를 하거나 포로로 끌려가는 등의 숱한 고난과 역경을 겪어야만 했다.
성경을 포함하여 고대 문서들은 처음에 돌이나 토판, 나무, 짐승의 뼈 등에 새겨지다 후에는 양피지나 파피루스, 구리판 등에 붓이나 철필로 기록되었다.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목숨처럼 지키려 했던 유대인들이었다 할지라도 우상숭배 국가들의 강압적 지배 아래에서 성경 본문을 보존한다는 것은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 더욱이 포로로 끌려가면서 엄청난 무게의 돌들이나 토판들, 수많은 두루마리들을 옮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특히 후기 헬라시대(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에는 성경을 읽거나 가졌다는 이유만으로도 처참한 죽임을 당해야 했다.
그러면 도대체 성경은 어떻게 보존될 수 있었을까? 그 정답은 유대인들의 기억력에 있었다. 흔히 유대인들은 “천재적인 머리를 가지고 태어난다”는 말들을 한다. 그런데 유대인 출신의 세계적 물리학자였던 아인슈타인은 유대인들의 천재성이 결코 선천적이 아님을 입증하기 위해 “사후에 자신의 뇌를 영구 보관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지금까지 진행된 연구 결과는 그의 뇌가 보통 사람의 것과 조금도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서를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고”(신 6:6) “평생에 자기 곁에 두고 읽으라”(17:19)고 명하셨다. 이 명령을 따라 유대인들은 어릴 때부터 성경을 읽고 외우도록 강요한다. 특히 유대인 어머니들은 입덧이 시작하면 성경을 큰 소리로 읽는다. 그때부터 몸속의 태아는 엄마의 뜨거운 심장소리와 우렁찬 성경 읽는 소리를 들으면서 명석하고 우수한 두뇌를 가진 아이로 태어난다. 이것이 저 유명한 유대인의 천재교육이다.
유대인들은 끈기 있고 혹독한 암기 과정을 거쳐 성경을 머릿속의 기억에 담아둔다. 어떤 리투아니아의 수석 랍비는 2500여권의 책을 완벽하게 암기했다고 한다. 유대인들은 세 사람의 랍비만 있다면 한 권의 성경책을 만들 수 있다고 한다. 대부분의 학자들에 의하면 오늘날의 구약 성경은 바벨론에서 돌아온 학자 에스라와 랍비들에 의해 모든 성경 본문이 원문 그대로 원상복구되었다고 한다. 우리 인간의 두뇌는 사전 1만권 분량을 기억할 수 있는 1000억 비트의 용량을 가지고 있다. 우리 모두 살아있는 성경(living Bible)이 되자!
(4) 어느 사본에 근거 번역되었나
성경 고고학에서 마치 전설처럼 전해져 오는 두 가지 실화 에피소드가 있다.
1844년, 시내산 자락에 있는 성 카다리나 수도원에 독일에서 온 낯선 길손 하나가 묵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한 수도사가 아궁이에서 무엇인가를 불태우고 있는 장면을 목격하였다. 자세히 살펴보니 성경 구절들이 빼곡히 적혀 있는 낡은 파피루스와 양피지 두루마리들이었다. 하마터면 잿더미로 변할 뻔한 그 두루마리들을 재빨리 수습한 성경학자 티센도르프(C Tischendorf)는 이 성경 사본의 존재를 전 세계 학자들에게 알렸다. 이것이 곧 현존하는 신약성경 사본들 중 최고의 권위를 지녔다는 시내사본이다.
1947년 이른 봄, 사해 북쪽에 있는 유대 광야에서 한 베두인 소년이 양을 치고 있었다. 그런데 잃어버린 양을 찾아 산비탈을 오르내리던 소년은 무심코 어느 구멍 난 동굴로 돌을 던졌다. “쨍” 하는 소리가 들려와 동굴 안으로 들어가 보니, 방금 깨진 항아리 속에 여러 개의 가죽 두루마리가 담겨 있었다. 성경이 기록된 이후 최대의 고고학 발견으로 평가된 사해사본(쿰란사본)은 오랜 역사의 침묵을 깨고 그렇게 세상에 그 고귀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면 성경 기자들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기록했었던 그 최초의 원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아직까지 그 정확한 실체는 파악되지 않고 있지만 그 원본을 필사하여 전해져 내려온 사본들은 많이 남아 있다. 현존하는 구약 히브리어(아람어 포함) 사본은 대략 1000여개, 신약 헬라어 사본은 5000여개 정도가 된다. 앞으로 새로운 사본들이 발견될 때마다 이 숫자는 점차 증가할 것이다.
가장 권위 있는 구약 사본들로는 앞서 언급한 사해사본을 비롯하여 이집트의 나쉬 파피루스 사본, 전통적인 맛소라 사본, 대영박물관 사본, 레닌그라드(모세 벤 아셀) 사본 등이 있다. 그리고 대표적인 신약 사본들로는 시내(알렙) 사본과 알렉산드리아(A) 사본, 바티칸(B) 사본, 베자(D) 사본 등이 있다.
여기에서 제기되는 한 가지 의문은 ‘오늘날 우리 성경은 어느 사본에 근거하여 번역된 것일까?’이다. 사본 연구가들은 먼저 연대가 앞선 고대 사본들을 주요 대본으로 삼은 후 다른 사본들에도 공통적으로 언급된 내용들과 면밀하게 비교 대조하여 제2차 원본을 구성한다. 그리고 성경이 기록되고 난 후 각 나라말로 번역된 고대 역본들(헬라어 구약성경인 70인역, 아람어역 탈굼, 수리아역 페시타, 콥트어역 등)과 주석서, 고대 문헌 등을 참조하여 표준 본문(Textus Receptus)을 만든다.
근래에 현대어 성경들이 주로 번역 대본으로 삼는 구약 본문은 레닌그라드 사본에 기초한 키텔판(BHK)과 슈투트가르트판(BHS)이고, 신약 사본은 네슬레-알란트(Nestle-Aland)판이다.
사본은 사람이 일일이 손으로 써서 옮겼기 때문에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다. 파피루스나 양피지가 손상되어 글씨가 없어지거나 변형되는가 하면, 한 줄을 더 써 넣거나 생략된 경우도 있고, 때로는 문자의 획이 틀리거나 단어가 빠지기도 하고 또 고대 사본에는 있지만 후대 사본에는 없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한 가지 유의해야 할 것은 이러한 사본상 문제들이 성경의 핵심적인 내용을 변경시키거나 그 근본적인 의미를 바꾸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최초의 그 원문 성경에는 일점일획도 오류가 없었음을 굳게 믿고 있다. 성경(The Bible)을 성경(The Holy Scripture)으로 믿는 것, 그것은 성경 연구자의 기본 요건이요 필수 과제다.
(5) 외경(外經)과 위경(僞經)
유대인의 고대 문헌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들이 있다.
“유딧이라는 매우 아름답고 신앙심 깊은 젊은 과부가 있었다. 유다 전역이 바벨론에 의해 무참히 짓밟히고 있을 때 그녀는 군사기밀을 알려주겠노라고 속이고 적장의 천막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 다음 그녀는 적장을 교묘하게 유혹하여 단독으로 연회를 열었으며 잠시 방심한 틈을 타서 그를 찔러 즉사시킨다. 그녀가 적장의 머리를 베어 가져오자 온 백성은 대대적으로 환영하였고, 마침내 바벨론 군대는 철수하고 말았다.”
“욥은 두 번째 아내에게서 난 아이들을 불러 모아 마지막 임종의 말을 남긴다. 그는 자신이 겪어야만 했던 온갖 시험들과 험난한 여정들을 되돌아보면서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에 대해 교훈적인 말을 들려준다. 드디어 그의 영혼은 병거를 타고 하늘로 옮겨지고 그의 딸들은 하늘의 노래를 부르는 특별한 재능을 받게 된다.”
위의 두 이야기는 각기 외경(外經)인 유딧서(Judith)와 위경(僞經)인 욥의 유언서(Testament of Job)에 나오는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개신교는 외경과 위경을 성경으로 인정하지 않지만 가톨릭교회에서는 외경은 정경으로 그리고 위경은 외경으로 인정하고 있다.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에스라는 성벽을 수축하고 성전을 재건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을 복원하는 데 불철주야 온 힘을 기울였다. 그래서 구역성경 24권(오늘의 39권)은 발간했지만 정경성을 갖추지 못한 70권의 책은 대중이 혼동을 일으킬 위험이 있다고 해서 ‘숨겨둔 책(Apocrypha)’이라는 명칭을 붙여 감추어 두었다. 그런데 이 명칭은 외경이란 뜻으로 사용되었으며, 70인역(헬라어역 구역성경)은 주전 2세기까지 대중적으로 읽혀진 유대 문헌들 중 14권(예레미야 서신을 독립시킨다면 15권)을 번역하여 외경으로 수록하였다.
초대 교부 제롬은 구약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하면서(주후 3세기) 70인역의 외경들을 포함시켰다. 가톨릭교회는 자신들의 교황권을 뒷받침해 주는 제롬의 벌게이트(Vulgate)역(마 16:18의 반석을 베드로로 번역)을 공식 성경으로 채택하였고, 트렌트(Trent) 종교회의는 오직 성경(Sola fide)을 강조한 프로테스탄트에 대항하여 외경을 정경으로 인정하기로 결의하였다(1546년).
위경(Pseudepigrapha)은 ‘가짜 표제’라는 뜻으로 주전 2세기부터 주후 2세기에 걸쳐 쓰여진 일반적인 유대 문헌들을 가리키고 있다. 구약과 신약의 위경을 합치면 100여종에 이르지만 그 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18종이 있다. 외경과 위경은 주로 팔레스틴과 알렉산드리아에서 기록되었으며, 유대 랍비들은 그것들이 정경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바깥 책들’, 곧 경외서(經外書)라 불렀다. 이 책들은 말라기서 이후 하나님의 말씀이 더 이상 들려오지 않고 이교 국가들이 정치적, 신앙적 박해가 더욱 심해졌을 때 유대인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책들로 큰 인기를 얻고 있었다.
비록 유명한 인물들(예레미야, 솔로몬, 마카비 등)의 이름을 빌려 출간하기는 했지만 조잡한 줄거리와 허황된 내용, 근거 없는 이야기 등은 정경으로서의 가치를 전혀 인정받지 못하였다. 외경과 위경은 교회 내에서 “어떤 권위도 지니고 있지 않으며 일반 책들과 별도로 취급될 수도 없지만”(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장 3항) 역사 보조 자료나 학술 참고서로는 사용될 수 있다. 우리 모두 외경, 위경을 한번 읽어보자!
(6) 성경은 학문적으로 믿을 만한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가, 사람의 글인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보수주의에서는 하나님의 영감성을 그 증거로 제시하지만, 성경은 사람의 글이라고 주장하는 자유주의에서는 과학적 합리성을 그 근거로 내놓고 있다. 무엇보다도 성경의 영감성과 권위를 입증하려면 성경에 기록된 역사적 사실들을 결정적으로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수많은 학적 단서들이 제공되어야만 한다. 이 학문적 과제를 객관적이면서 과학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분야가 곧 성경 고고학이다.
그동안 역사의 어둠 속에 깊이 파묻혀 있었던 고대 유물들을 발굴하여 근대 고고학의 새로운 장을 활짝 열었던 인물은 아이로니컬하게도 프랑스 정복자 나폴레옹이었다. 1798년 그는 막강한 함대와 병력을 동원하여 대대적으로 이집트를 침공했는데, 그때 함께 데리고 간 175명의 학자들로 하여금 이집트를 답사하고 유물들을 수집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리하여 로제타 비석을 비롯해 수많은 고대 유물이 현대문명의 빛을 보게 되었으며 특히 동행했던 프랑수아 샹폴리옹(F Champollion)은 거의 불가능할 것으로 여겨져 왔던 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를 해독하는 데 성공하였다.
나폴레옹이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이집트 문화탐사는 그의 함대가 영국 넬슨 제독에 의해 섬멸되어 철수함으로써 1년 만에 끝났지만 전 세계인의 눈과 귀를 고대 중동국가에 집중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어 영국과 독일, 미국 등의 고고학자들이 이스라엘을 비롯해 터키, 시리아, 이라크, 이란 등에 한꺼번에 몰려들어 본격적인 발굴 작업을 벌였고 그로 말미암아 엄청난 분량의 고대 유물들이 박물관에 차곡차곡 쌓이게 되었다.
그런데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중동 지역에서 발굴된 유물들은 거의 모두가 어떤 형태로든지 성경의 내용들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는 사실이다. 앞서 언급한 이집트의 로제타 비석은 상형문자와 헬라어로 새겨져 있었는데, 그 내용은 이스라엘 역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 주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찾아낸 ‘길가메쉬 서사시’와 ‘에누마 엘리쉬’는 창세기 1∼11장, 특히 대홍수 부분을, 그리고 함무라비 법전은 모세오경에 나오는 율법을 해석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또 유프라테스강 중류에 있는 마리 지역에서 파낸 왕실 문고에는 주전 3000년대 근동 지방에 관한 귀중한 자료들이 많이 들어 있었다.
한편 북부 시리아의 라스 삼라에서 발견된 우가리트의 신전 서고에는 창세기 12∼15장에 등장하는 족장들의 행적을 잘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많은 유물과 문헌들이 무더기로 보관돼 있었다.
그밖에 앙카라 동부에 있는 보가즈쾨이에서 발굴된 앗가드와 히타이트어로 된 1만개 이상의 점토판, 시리아 알레포의 에블라에서 찾은 왕실 문고(주전 2400∼2500년대)의 1만5000여개 점토판, 이란의 베히스톤 바위조각, 갈대아 우르의 왕궁 유적들, 엘 아마르나의 토판들은 성경 연구자들이 그토록 찾아 헤매었던 값진 근거 자료와 지식들을 한꺼번에 다 공급해 주었다.
성경 고고학은 현대 과학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그 발굴 범위와 연구 내용이 급속도로 확장되고 넓어지고 있다. 그와 동시에 성경은 ‘사람의 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도 학문적으로 더욱 분명히 밝혀지고 있다. 고고학자들이 고대 유물을 찾아내듯 우리 모두 성경의 광산에서 정금보다 더 귀한 말씀의 보화를 캐어내도록 하자!
(8) 왜 중세 가톨릭은 성경 번역자를 처형했나
태초에 하나님께서는 우주만물을 창조하셨으며, 그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었다(창 1:4, 12 등). ‘좋았다’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토브’는 ‘선하다, 아름답다, 사랑스럽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곧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인간을 비롯한 온 우주만물을 선하면서도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창조하셨음을 나타낸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본래의 창조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악하고 더럽고 추한 모습으로 삶을 이어가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인간의 악한 본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은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때일 것이다.
교회 역사에 의하면 중세 로마 가톨릭 교회는 자신들의 가르침에 어긋나거나 교리를 반대하는 자들을 이단으로 규정하여 가혹하게 고문하거나 죽였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특히 성경을 번역한 자들인 경우에는 장대에 묶거나 장작 위에 올려놓고 불태워 죽였다. 위클리프(Wycliffe)의 경우 이미 매장되었던 뼈를 꺼내어 그의 저서들과 함께 불태워졌는가 하면, 틴데일(Tyndale)을 비롯하여 후스(Hus), 크랜머(Cranmer), 로저스(Rogers) 등도 차례로 화형에 처해졌다.
그러면 왜 그들은 성경 번역자들을 가장 잔혹한 처형 방식으로 죽였던 것일까? 중세 로마 가톨릭 교회는 주장하기를, “성경은 천국 열쇠와 함께 자신들에게만 맡겨졌으며, 그것을 읽고 해석하는 것도 사제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하였다. 일반 신도들은 라틴어로 된 성경을 읽을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소유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오직 교회가 가르치고 신부가 해석하는 것만이 진리요 복음이었으며, 일반 신도는 그대로 믿고 따라야만 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 거짓되고 형식적인 가톨릭주의에 과감히 맞서서 개혁의 깃발을 높이 쳐들었던 사람은 독일의 마르틴 루터였다. 그는 ‘오직 교회(Sola ecclesia)’가 아니라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라고 외쳤으며, 자신이 직접 원문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였다(Luther Bible). 이로 말미암아 그동안 교회 안에 갇혀 있으면서 사제들의 손에만 들려져 있었던 성경은 누구든지 읽고 배울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빛을 보게 되었다. 그 후 성경 말씀은 칼뱅에 의해 기독교강요(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에서 체계적으로 요약, 정리되어 오늘날의 프로테스탄트 신학의 기초가 되었다.
종교개혁은 한마디로 “본래의 말씀으로 되돌아가자”는 환원운동이었다. 다시 말하면 성경 말씀을 새롭게 해석하거나 교회 제도를 개편하자는 것이 아니라 중세 가톨릭교회 시대를 거치면서 잘못되게 덧칠해지고 왜곡된 것들을 바로잡고 원상으로 복귀시키자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초대교회 이전 성경이 기록된 바로 그 원점으로 되돌아가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그 본래의 생생한 뜻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그대로 실천하자는 것이었다.
성경책 안쪽 표지에는 붉은 색이 칠해져 있다. 그것은 예수님의 피를 상징할 수도 있지만 목숨 걸고 성경을 번역한 위대한 말씀의 영웅들이 흘린 핏자국을 의미할 수도 있다. 믿음의 선진들이 그토록 피 흘리며 쓰고 번역하고 소중히 지켰던 하나님의 말씀 성경! 과연 우리는 이 생명의 말씀을 내 삶 전체와 맞바꿀 수 있는가? 그것은 양자택일의 문제(question)다.
(9) 성경을 기록한 언어들
사람은 다른 동물과 달리 언어를 사용하여 서로 간의 대화를 나누고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호모 사피엔스(지혜로운 인간)이다. 인류 언어학자들에 의하면 인간은 그 초창기에 소리나 표정, 몸짓 등으로 의사를 소통하다가 그것들이 점차 진화하여 오늘날의 언어 형태로 발전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성경은 인류의 첫 조상 때부터 완벽하게 체계화된 언어가 사용되었음을 분명히 알려주고 있다. 아담은 동물들과 하와의 이름을 직접 지었으며(창 2:19∼32), 하나님과 더불어 대화를 나누기까지 하였다(3:8∼13). 그들의 후손은 에덴의 동쪽으로 쫓겨난 이후에도 각 지역으로 흩어져 살면서 하나의 공통된 언어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교만과 패역의 바벨탑을 쌓기 시작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셨다(11:7). 이때 지구상의 언어들은 노아의 세 아들의 계통을 따라 크게 세 갈래로 나누어졌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즉 셈의 후손은 아랍어와 아람어, 히브리어, 수리아어 등을 사용하게 되었고, 함의 후손들은 애굽어를 비롯한 아프리카어, 그리고 야벳의 후손들은 아리안어와 아르메니아어, 헬라어, 라틴어, 대부분의 유럽국가의 언어들을 사용하게 되었다.
성경은 세 가지 언어로 기록되었다.
구약성경은 히브리어와 아람어(스 4:8∼6:18과 7:12∼26, 단 2:4∼7:28, 렘 10:11과 창 31:47)로, 그리고 신약성경은 헬라어(희랍어)로 기록되었다. 아람어는 히브리어의 한 방언으로서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사용하였다. 신약성경에서 인용된 아람어는 가나나인(막 3:18), 게바(요 1:42), 보아너게(막 3:17), 달리다굼(막 5:41), 엘리 엘리(엘로이 엘로이) 라마(레마) 사박다니(마 27:46, 막 15:34) 등이 있다.
히브리어는 우리말이나 영어와 달리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쓰는데, 몸 안쪽으로 끌어당기면서 힘을 주며 쓰기 때문에 이상적인 서법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히브리어는 문장 구조가 간결하고 표현 방식이 다양하기 때문에 감정을 드러내거나 시를 짓기에 매우 적합한 언어이다. 하나님의 위대성이나 대자연의 질서, 삶의 본질과 내면세계의 갈등, 인간의 최고 행복 등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히브리어는 최상의 언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을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마음을 가다듬고 뜨거운 가슴과 열정으로 읽으려는 자세가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한편 신약성경이 기록된 헬라어는 문법구조가 체계적이고 어법이 정확하면서도 관념적이기 때문에 교리나 신학을 논하는 데는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언어이다. 특히 알렉산더 대왕의 명령으로 여러 헬라 지역들의 방언들을 수집하여 그 장점을 살려 통합시킨 코이네 헬라어는 누구든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복음이 급속도로 전파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때로 성경 해석상의 문제가 생길 때마다 헬라어 원문의 의미를 찾게 되는 것은 그 언어가 지니고 있는 힘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강하게 암시해주고 있다.
성경에 사용되었던 히브리어와 헬라어는 지금 사어(死語)가 되고 말았지만 현재 이스라엘과 그리스에서는 변형된 형태로 여전히 통용되고 있다. 사실상 번역된 성경과 원문 성경의 차이는 번역본으로 셰익스피어의 햄릿이나 나관중의 삼국지를 읽는 것에 비할 수 있다. 무릇 성경을 올바르게 체계적으로 연구하려면 반드시 성경 원어를 알아야만 한다. 이제 서둘러 책을 구입하여 알파벳부터 시작해보자!
(10) 성경은 어떻게 구분되었는가?
성경은 간결하면서도 명확하고 모든 지적인 요구들을 충족시켜주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때로 모순처럼 보이고 의문이 제기되는 부분들은 성경 그 자체에 어떤 문제점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제한적인 지식을 가진 인간이 그 의미와 내용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의문을 품어보는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
첫째, 성경은 어떻게 배열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구약성경이 배열된 순서는 히브리어 성경과 70인역 성경(영어나 독어, 한글 성경도 포함) 사이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히브리어 성경은 율법(토라, 창∼신), 예언서(네비임, 수∼말), 시가서(케투빔, 시∼대)로 되어 있다.
그러나 70인역은 모세오경(창∼신), 역사서(수∼에), 시가서(욥∼아), 예언서(사∼말)로 되어 있다.
히브리어 성경은 정경으로 인정된 순서, 즉 모세오경(주전 5세기, 에스라 시대), 예언서(주전 2세기), 시가서(주후 90년께)를 따르고 있지만,
70인역은 이스라엘 시대, 즉 이스라엘의 과거(창∼에), 현재(욥∼아가, 미래(사∼말)를 순서적으로 배열하고 있다.
예수님 당시에는 시가서가 정경으로 확정되지 않았기(주후 90년께 얌니야 회의에서 확정됨) 때문에 성경을 언급할 때는 “율법과 선지자”(마 5:17, 7:12)라고 하셨다.
신약성경은 어느 정도 70인역의 순서에 맞추어 복음서(마∼요), 역사서(행), 서신서(롬∼유), 예언서(계)로 배열하고 있다. 특히 서신서는 바울 서신과 일반(공동) 서신으로 나눈 다음 바울 서신은 지역 이름(로마 고린도 등)이 있는 서신을 먼저 앞에 놓고 그 뒤에 사람 이름(디모데, 디도 등)이 있는 서신을 놓았으며, 장수가 많은 서신을 앞부분에 배열하였다.
둘째, 성경책의 제목은 어떻게 붙여졌는가 하는 것이다.
히브리어 성경의 제목은 원래 그 책의 첫 단어를 따서 붙였다. 예를 들면 창세기는 ‘뻬레쉬트’(태초에·1:1), 출애굽기는 ‘왜알레 쇄모트’(밖으로 나갔다·1:1), 레위기는 ‘와 이크라’(또 그가 불렀다·1:1) 등이다.
그러나 70인역은 책의 내용을 따라 헬라어로 창세기는 ‘제네시스(Genesis)’, 출애굽기는 ‘엑소더스(Exodus)’, 레위기는 ‘레비티쿠스(Leviticus)’ 등으로 제목을 붙였다. 신약성경은 각기 ‘유앙겔리온’(복음서) ‘프락세이스 아포스톨론’(사도들의 활동) ‘에피스톨라이’(서신서) ‘아포칼룹시스’(계시록)로 구분하였다. 한 가지 유의해야 할 것은 성경책의 배열은 연대순서나 책의 중요성에 따라 정해지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셋째, 성경의 장(章)과 절(節)은 누가 언제 구분하였는가 하는 것이다. 원래 옛 성경에는 장과 절의 구분이 없었다. 특히 헬라어 대문자 사본에는 글자까지도 띄어 쓰지 않고 계속 연이어 쓰였고, 바티칸 사본(4세기)이나 알렉산드리아 사본(5세기)에는 각 책이 여러 개로 구분돼 있다.
오늘날의 장과 절로 구분한 사람은 켄터베리 주교 스테판 랑톤이었다(1204∼1205년). 그 후, 솔로몬 벤 이스마엘은 최초로 히브리어 성경의 일부 필사본에 랑톤의 장 표시를 적어 넣었으며(1330년), 로버트 스테파누스는 제네바 성경에 장절을 표시하였다(1551년).
누구든지 성경을 읽을 수는 있지만, 그 내용을 다 이해할 수는 없다. “성경은 단순한 책이 아니다. 반대하는 모든 것을 정복하는 능력을 가진 생명체이다.”(나폴레옹)
(11) 성경엔 오류가 있는가?
성경은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여러 가지 신학사상으로 표현될 수 있다. 각기 주장하는 바들을 요약해 보면, ‘성경은 사람의 글이다’(현대자유주의), ‘성경과 교주의 말은 똑같다’(이단사이비종교),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신정통주의),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보수정통주의) 등이 될 수 있다.
성경은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사람이 그것을 기록하고 번역하는 과정에서는 종종 오해와 착각을 일으키는 문제들이 생겨날 수 있다. 역사상 최초로 인쇄되었던 구텐베르크 성경(Gutenberg Bibel)이 출간(1456년)되기 이전 모든 성경은 사람의 손에 의해 필사되거나 번역되었다.
성경을 옮겨 쓰다 보면 어떤 경우에는 착시현상에 의해 몇몇 단어나 문장을 빠뜨리거나(Haplography) 혹은 중복할(Dittography) 수 있다(삼상 9:16, 겔 40:9). 그런가 하면 단어의 순서가 뒤바뀜으로써 ‘에돔 사람’이 ‘아모리 사람’(삿 1:36)이 되는가 하면 유사 음이나 유사 문자가 혼동되어 ‘목초지’가 ‘큰 바위’(삼상 6:18), ‘나의 주’가 ‘사람’(17:32)이 되기도 한다.
원래 히브리어에는 자음만 있었으며 모음은 정확한 발음을 위해 후대(주후 8세기쯤)에 맛소라 학파에 의해 붙여졌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율법의 일점일획’(마 5:18)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모음 부호를 의미한 것이 아니라 히브리어에서 가장 작은 부분까지도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임을 나타내고 있다.
히브리어 문자들에는 획의 모양을 세밀하게 보지 않으면 혼동하기 쉬운 것들이 있으며(아람과 에돔, 삼하 8:13), 모음 부호를 어떻게 붙이느냐에 따라 의미가 정반대가 되는 경우도 있다(‘눈을 감았던 자’가 ‘눈을 뜬 자’로도 해석될 수 있다, 민 24:3).
히브리어 구약 성경에는 필사나 사본 문제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문제가 될 만한 부분은 없다. 그 이유는 성경을 옮겨 쓰고 보존하는 임무를 맡은 서기관들이 자신들의 업무를 철저히 수행했을 뿐만 아니라 혹 어떤 오류가 발생했을 때에는 즉시 그 사본들을 다 모아 불태워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약 성경의 경우는 전혀 달랐다. 원래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성경 기자들은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예수님의 삶과 말씀을 들려주고 참된 복음이 어떤 것인가를 전해줄 목적으로 복음서와 서신들을 기록하였다. 이러한 책들은 일일이 손으로 필사되어 예배나 회람용으로 전해졌는데, 이때 그 내용들을 옮겨 쓴 사람들은 서기관처럼 전문 필사가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자연히 사본상에 많은 오류와 차이점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러한 사본상의 문제점들이 성경의 기본적인 진리나 핵심적인 내용들을 수정하거나 손상시키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성경에서 “한 획이 빠지는 것보다 하늘과 땅이 사라지는 것이 오히려 더 쉬울 것이기”(눅 16:17, 사역) 때문이다.
루이스 월리스(L Wallace)는 철저한 무신론자로서 기독교를 악의적으로 공격하였다. 그는 기독교를 반박할 자료들을 얻기 위해 성경을 읽다가 오히려 눈물로 회개하고 한 권의 책을 저술하였다. 그것이 저 유명한 벤허(Ben Hur)다. 오늘도 성경은 수많은 기적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 옮긴이 의견
성경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으로부터 기인한 하나님 자신의 창조적 산물이다. 따라서 성경에 기록된 내용은 일점일획이라도 바꿔서는 안 된다는 성경상의 기록을 근거로, 성경의 모든 내용에는 오류가 전혀 없다(마5:18). 그러나 성경 무오성은 성경 사본이나 번역본이 오류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12) 성경 번역에 어떤 오류가 있는가
각 나라와 민족마다 그들만의 독특한 언어와 고유의 문자가 있다. 그러나 그것을 말하거나 발음할 때는 종족이나 지역에 따라 각기 다르게 표현될 수 있다. 2차 세계대전 중 미국군은 중국인과 일본인을 구별하기 위해 Liewelyn(남자이름)이나 lollipop(막대사탕) 등을 발음시켰다. 그 이유는 일본인은 L 발음을, 중국인은 R 발음을 잘 못하기 때문이었다. 성경에도 그와 비슷한 일화가 있다.
길르앗과 에브라임 사람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을 때 그들을 구별하기 위해 ‘십볼렛’(곡식의 눈)이라는 단어를 발음하게 한 적이 있었다. 길르앗 사람들은 제대로 발음했지만 히브리 방언을 사용했던 에브라임 사람들은 강한 악센트를 사용하여 ‘씹볼렛’이라고 발음하였다. 결국 도망치던 4만2000명의 에브라임 사람들은 입다의 군사들에 의해 무참히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삿 12:6).
베드로는 멀찍이 떨어져 예수님의 재판 광경을 쳐다보면서 불을 쬐고 있었다. 한 여종이 다가와서 “당신도 저 나사렛 사람 예수와 함께 다닌 사람이지요?”(막 14:67) 하고 물었다. 베드로는 강하게 부인했지만, 주변 사람들은 그의 ‘말소리’를 듣고 예수님의 제자라고 몰아세웠다(마 25:73). 왜냐하면 베드로는 당시 회당이나 예루살렘 지역에서 사용했던 세련된 히브리어를 사용하지 않고, 교육수준이 낮은 서민층에서 통용되던 투박한 아람 방언으로 말했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문제들이 성경을 번역하는 과정에서도 일어난 적이 있다. 제네바(Geneva) 성경(1560년)은 창세기 3장 7절(‘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에서 ‘치마’를 ‘반바지’로 번역했으므로 반바지 성경으로 불렸다.
주교(bishop) 성경(1568년판)은 예레미야 8장 22절(‘길르앗에는 유향이 있지 아니한가’)에서 ‘유향’을 당밀(糖蜜·treacle)로 잘못 번역함으로써 당밀 성경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두웨이 레임즈(Douay Rheins) 성경(1610년)은 예레미야 9장 22절의 ‘유향’을 송진 덩어리(Resin)로 번역해서 송진 성경으로 불렸고, 흠정역(KJV·1702년)은 시편 119편 161절(방백들이 무고히…)에서 ‘방백들(princes)’을 ‘인쇄공들(printers)’이라고 잘못 번역해 인쇄공들 성경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주교 성경(1632판)은 십계명 중 일곱 번째 계명을 인쇄하면서 not를 빠뜨려서 ‘간음할 지니라(Do adultery)’로 번역함으로써 ‘사악한 성경’이라는 악명을 가지고 있다.
성경은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일점일획이나 한 단어, 한 문장도 결코 소홀히 하거나 빠뜨려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 2:7)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뱀은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3:4∼5)라고 말했다. 즉 완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생략하거나 고쳐서 첫 조상을 교묘히 유혹했던 것이다. 성령과 그리스도께서는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계 22:18)라고 말씀하셨다.
아무리 작은 점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를 옮기거나 바꾸면 전혀 다른 뜻이 될 수 있다. ‘번역’은 ‘반역’이 되고 ‘너’는 ‘나’, ‘님’은 ‘남’이 된다. 만일 예수님께서 “자신을 팔 자”에 대해 말씀하셨을 때 가룟 유다가 “나?” 대신 “나!”라고 답했었더라면. 말 한마디는 천국과 지옥을 판가름한다.
(13) 한글 성경 출간
예부터 우리나라는 동방예의지국, 백의민족, 배달겨레 등으로 불려왔다. 우리 조상들은 물 맑고 산 좋은 금수강산에 살면서 흰옷을 즐겨 입고 예의범절을 올바르게 지키면서 멋지고 착하게 살아왔다.
그러면 이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 누가, 언제 기독교 복음을 전했던 것일까? 어떤 사람은 경주 부근에서 출토된 돌 십자가와 마리아상에 근거하여 신라시대에 네스토리안(Nestorian) 계통의 기독교(경교)가 이미 들어 왔었다고 말한다. 임진왜란 때 고니시 유키나가 휘하의 종군신부였던 세스페데스(G Cespedes)나 혹은 표류하다 제주도에서 붙잡혀 14년 동안 억류생활을 했던 하멜(H Hamel) 일행에 의해 소개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실제로 한반도에 맨 처음 십자가를 세웠던 것은 천주교였다. 그 무렵 중국에는 이미 예수회 소속 마태오 리치(M Ricci) 신부에 의해 들여온 천주교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당시 중국을 빈번히 왕래하던 몇몇 조선인들은 자연히 천주교를 접하게 되었고, 이승훈 김대건이 각기 영세와 신부 서품을 받으면서 마침내 한국 천주교는 본격적인 선교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1885년 4월 5일은 한국 개신교의 시작을 알리는 기념비적인 날이었다. 이 부활절 아침 유난히 파란 눈을 가진 두 젊은 선교사 언더우드(H G Underwood)와 아펜젤러(H G Appenzeller)는 그동안 굳게 닫혀 있었던 한국 선교의 문을 열면서 의료와 구제, 교육 사업 등을 활발히 전개시켜 나갔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두 선교사가 심혈을 기울여 중점적으로 추진한 것은 성경을 번역하는 일이었다. 그 이유는 오직 성경만이 영혼을 구원하고 교회를 부흥시킬 수 있는 유일한 도구요 효과적인 수단으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물론 선교 초창기에도 한문 성경을 비롯하여 로스역이나 이수정역 등이 있었지만 대부분 중역이거나 의미가 불분명해서 좀 더 원문에 근거한 정확한 번역 성경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었다.
언더우드는 서둘러 번역위원회를 구성하여(1887년 2월) 자신이 직접 위원장이 되었고, 번역에 착수한 지 14년 만에 마침내 신구약 성경이 빛을 보게 되었다. 특히 언더우드는 신(神)의 이름을 ‘천주’(天主) ‘상제’(上帝) 등으로 정하자고 했을 때 강력히 ‘하나님’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편 아펜젤러도 성경 번역에 혼신의 힘과 열정을 쏟아 부었다. 그는 신변보호 문제로 잠시 나가사키에 가 있을 때에도 열심히 한국어를 배워 직접 설교하거나 번역할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어학 공부와 성경 번역에 지나치게 체력을 많이 소모함으로써 크게 건강을 해쳐 9개월 동안 휴식을 취해야만 했다. 그는 목포에서 열리는 번역위원회에 참석하러 가다가 파선되어 45세의 젊은 나이에 순교하고 말았다.
그 후에도 성경 번역은 꾸준히 계속되어 개역성서(1937년), 공동번역(1977년), 새번역(1991년), 표준새번역(1993), 개역개정판(1998) 등이 차례로 출간되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원문의 의미가 우리말로 정확하게 옮겨지지 못하고 여전히 애매하거나 오역된 부분이 상당수 남아 있는 것은 실로 안타깝고도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원문에 충실하면서도 이해하기 쉬운 성경 번역, 그것은 한국교회가 시급히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필수 과제다
(14) 신구약 성경 66권, 어떻게 확정되었는가
흔히 ‘기독교’ 하면 천주교와 개신교를 총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지만, 둘 사이에는 구원의 방법이나 예배 형식, 행정 체계들에 있어서 많은 차이점이 있다. 그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차이점은 성경에 대한 관점과 이해에 있다. 개신교는 성경을 ‘신앙의 유일 규범(Sola fidei regula)’으로 보고 절대 권위를 두지만, 천주교는 ‘신앙의 제일 규범(Prima fidei regula)’ 정도로 보고 교부들의 언행이나 고대 신조, 종교회의 결정, 구전 등을 성경에 버금가는 권위로 인정하고 있다.
성경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오늘날 66권의 성경이 정경으로 확정되기까지는 숱한 논쟁과 회의의 과정을 거쳤음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몇 가지 필수 요건을 충족시켜야만 했다.
첫째는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기록되어야만 하고,
둘째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과 인간 구원에 대한 진리가 담겨 있어야 하고,
셋째는 사도들에 의해 인정되거나 인용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 기준에 못 미칠 경우에는 정경에서 제외되거나 외경이나 위경의 수준으로 낮추어졌다.
구약의 정경을 확정시킬 때 가장 큰 논란을 불러일으킨 것은 에스더서와 아가서, 에스겔서였다.
에스더서는 하나님의 이름이 없다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그러나 에스더서는 아크로스틱(acrostic) 표현법(단어의 처음이나 끝 문자를 맞추면 한 단어가 되는 기법)을 써서 여호와라는 의미를 은밀히 나타내고 있다(1:20; 5:4, 13; 7:5, 7).
아가서는 하나님의 이름이 없고 지나친 성적 묘사 때문에 논란이 되었지만, 오히려 하나님과 성도 사이의 사랑이 최고의 문학 형식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에스겔서는 난해한 환상과 계시의 내용이 문제시되었지만,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정확하게 예언적으로 표현된 것으로 밝혀졌다.
그동안 수없이 거듭되어온 정경 논란은 얌니아회의(주후 90년쯤)가 39권을 구약정경으로 확정함으로써 그 최후의 마침표가 찍혀졌다.
신약시대의 초대교회는 오순절 성령의 역사 이후에 불같은 선교 열정을 통해 여러 지역에 많은 교회들을 세웠다. 성도들은 사도들이 써 보낸 서신들을 서로 돌려가며 읽었고, 예배 시에는 그것들을 낭독하였다. 한편으로는 예수님의 직계 제자들이 순교 등으로 하나 둘 사망함에 따라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기록해 둘 필요성이 있게 되어 사복음서가 완성되었다.
사복음서와 서신들이 신약성경으로 모아지기 시작한 것은 2세기 초였는데, 3세기에 이르러서는 교회마다 상당수가 구비되어 있었다. 그 무렵 마르키온(Marcion)은 유대교적인 것을 배제시키려고 누가복음과 바울서신만을 권위 있는 것으로 선정하였다. 그 이후 무라토리 단편(Muratori Canon)은 히브리서, 야고보서, 베드로 전후서, 요한 삼서를 정경에서 배제시켰다.
오리겐(Origen)은 성경을 ‘인정된 것’과 ‘토론의 여지가 있는 것’으로 나누었고, 유세비우스(Eusebius)는 또다시 후자를 ‘배제해야 할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분류하였다. 오늘날 27권의 신약성경을 정경으로 확정한 것은 카르타고(Cartago) 회의(397년)였다.
주의 말씀과 교훈은 순금보다 더 귀하고 정금보다 더 사랑스럽다(시 19:10, 119:127). 그러기에 인간적인 불순물들을 제거하기 위해 불 속에서 검증해야 할 기간이 그렇게 오래 필요했었던 것은 아닐까?
(15) 성경 옮긴 서기관은 누구인가
성경의 원저자(原著者)는 하나님이시지만 그것을 글로 기록한 기자(記者)와 책으로 옮겨 쓴 서기(書記)는 인간이었다. 하나님의 뜻은 성경 안에서 일점일획도 흠이 없는 가장 완벽한 형태로 인간의 글과 만나고 있다. 그러기에 성경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딤후 3:16)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이다.
고대에는 문자 모양이 온전치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으로 글을 쓰거나 기록으로 남겨두는 일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백성들은 글을 읽거나 쓸 줄 몰랐으며, 특히 이집트의 상형문자나 바벨론의 설형문자 같은 것은 그 문법체계가 매우 난해하였다. 그래서 자연히 그것을 읽고 쓰는 직업적인 전문가인 서기(관) 혹은 서사가 출현하게 되었다. 서기관들은 왕과 국가의 문서를 쓰거나 보관하는 업무를 맡았으며, 사관(史官)과 더불어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였다. 서기관의 전통은 후대에까지 내려왔으며, 한때 공산세계에서 제1인자를 서기장, 총서기로 불렀던 것이나 미국의 국무장관을 국가서기(Secretary of State)라고 하는 것도 모두 그런 역사적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다.
성경에서 서기관이란 명칭은 다윗 시대부터 사용되었으며, 가장 유명한 서기관은 바사(페르시아) 제국의 에스라였다. 그는 유대인이면서 아닥사스다 왕의 총애를 받았고, 스룹바벨에 이어 유대인들을 예루살렘으로 귀환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그는 구약성경 전체를 암기를 통해 재현시킨 인물로 알려지고 있으며, 이스라엘에 이주하여 백성들에게 열심히 성경을 가르쳤다(스 7:10). 그 이유는 예루살렘의 멸망이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한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예수님 당시에 서기관은 율법사, 율법학자로 불렸으며, 공의회에서는 제사장, 장로들과 더불어 중요한 구성원이 되었다. 그리고 2대 종파 중 사두개파는 주로 제사장 출신으로 이루어진 반면 바리새인은 서기관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서기관들의 주요한 업무는 성경책을 베끼거나 가르치는 것이었지만, 그들은 오히려 정치적인 이권에 관여하였고 결국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악행에 동참하였다. 서기관들은 처음부터 엄격한 훈련을 받았으며, 잘못을 범하지 않기 위해 여러 가지 대책을 마련하였다. 다른 동료들의 작업을 검토하거나 그가 옮겨 쓴 글들을 일일이 세어 원본과 사본이 다름없는지 확인하였다. 혹 사본들과 돌비에서 틀린 글자가 발견되면 반드시 그것을 수정하여 적어 넣었다.
고대 구약사본 가운데 가장 정확한 사본은 쿰란 동굴에서 발견된 사해사본 중 이사야서 두루마리이다. 성경학자들이 감탄하며 놀라워한 것은 그 내용이 1000년 후의 레닌그라드 사본의 것과 정확히 일치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직업 전문가가 아닌 일반 필사자들이 옮겨 쓴 신약 사본들은 구약의 그것들과는 많은 차이점이 있다. 어떤 사본들(보드머 P, 바티칸 M)에는 문구 누락(요 13:32), 이중 반복(요 17:18), 고의적인 삭제(눅 17:30), 내용 변경(요 10:7) 등이 있다.
당시 성경 사본책을 구입하려면 베끼는 품삯과 재료비 등을 지불해야만 했다. 이사야서는 삼일 품삯이 들었는데, 2세기에는 헬라어 1000줄 베끼는 값(2데나리온)에다 파피루스 값(1데나리온)을 합치면 3∼4데나리온(25만∼30만원) 정도 들었다. 지금 여러분의 성경책 값은 얼마인가?
(16) 유물에서 밝혀진 성경
가장 오래된 성경책은 어떤 것이며, 어떤 형태로 기록되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곧 성경을 둘러싼 많은 의문을 해결해 줄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처음 기록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모세시대까지 3500여년을 거슬러 올라가 옛 시대의 역사적 진실을 밝힌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필자는 8년 전 노아 방주의 흔적을 찾아보기 위해 6명의 현지 셀파, 포터와 함께 터키의 아라랏산(5180m)을 올라간 적이 있다. 영하 40∼50도의 매서운 강추위와 엄청난 고산증세와 사투를 벌이면서 힘겹게 올라간 정상 부근에는 평평한 눈 언덕만이 자리 잡고 있을 뿐 노아 방주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그곳에 “방주가 있었다”(창 8:4)고 증언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맨 처음 문자로 새겨진 것은 시내산에서였다. 하나님께서는 우뢰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 가운데서 십계명을 “돌판에 친히 쓰셔서”(출 31:18) 모세에게 주셨다. 이 돌판(증거판)은 아론의 싹 난 지팡이, 만나와 함께 법궤(언약궤)에 보관하도록 명해졌다. 이 법궤는 유대인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기(주전 586년) 전까지 성전에 보관되어 있었지만, 그 이후의 종적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오늘날 일부 정통파 유대교 랍비들은 이 법궤가 옛 성전 어느 곳에 은밀히 보관되어 있을 것으로 굳게 믿고 있다. 그렇지만 지금은 아랍인들이 목숨 걸고 지키는 회교 사원(알 아크샤)이 되어버린 곳을 직접 파헤쳐 확인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할 일이다.
사실상 성경의 주요 무대가 된 애굽이나 중동지방에서 찾아낸 많은 고대 유물에서는 성경과 연관된 구절들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 사실에 근거하여 소위 고등비평가들은 성경의 기록 연대를 훨씬 후대로 끌어내리려고 하였다. 심지어 다윗이나 벨사살, 빌라도와 같은 인물이 일반 역사 기록에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어 성경의 역사적 진술들을 강력히 부인하기도 했다. 성경의 기록들이 고대 유물에서 발견되지 않는 것은 (1)수없이 반복된 국가 재난과 포로생활 (2)일정한 거처 없이 떠도는 유목민의 삶 (3)서기관과 같이 특정인에게만 허용된 성경 필사 및 교육 등을 이유로 들 수 있다.
성경구절이 새겨진 기록물이 처음 발견된 것은 유대인 고고학자 가브리엘 발케이(Gabriel Barkay)에 의해서였다(1079년). 그는 예루살렘의 어느 무덤에서 민수기의 축복기도문이 새겨진 두 개의 은 두루마리를 발견했는데, 그것들은 솔로몬 성전이 파괴되고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가기 시작한 주전 600년쯤에 기록된 것으로 밝혀졌다.
그 밖에도 아비가드(N Avigad)가 수집한 바룩(렘 32:12)의 인장, 바이란(A Biran)과 나베(J Naveh)가 발견한 ‘다윗의 집’과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글귀가 새겨진 비문, 이탈리아 고고학자들이 가이사랴에서 찾아낸 본디오 빌라도의 이름이 새겨진 보도석 등 수없이 많이 있다.
1947년 사해 근처에 있는 동굴들에서는 엄청난 분량의 사본 두루마리와 파피루스, 동판들이 2000여년의 긴 잠에서 깨어나 빛을 보았다. 거기에는 에스더를 제외한 구약성경과 외경, 위경, 주해서, 각종 종파 문서들이 히브리어와 아람어, 헬라어, 라틴어로 기록되어 있었다. 이로써 성경의 진정성은 더욱 확고히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성지순례 때 쿰란동굴은 필수 코스로 정하자.
(17) 유대인들은 성경을 어떻게 읽었는가?
동서고금을 통해 옛 사람들은 ‘읽고 외우는 것’을 가장 효과적인 교육방법으로 생각하였다. 우리나라만 해도 서당에서는 천자문과 논어, 맹자 등을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는데, 안중근 의사는 옥중에서 “하루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에 가시덤불이 생긴다”는 뜻의 한시를 남기고 있다.
성경을 읽고 낭독하는 것은 유대인들의 일상적인 교육방법이었을 뿐만 아니라 정규적인 예배의식의 한 부분이기도 했다. 유대 어린이들은 엄마 뱃속에 있을 때부터 부모가 소리 내어 읽어주는 토라(율법) 소리를 들으면서 우수한 두뇌를 가진 천재들로 성장하였고, 회당에서는 사회자가 엄숙한 목소리로 들려주는 타나크(구약성경)에 귀를 기울이면서 경건한 믿음을 쌓아나갔다.
사실상 이스라엘 민족이 4000여 년 동안 강대국들에 짓밟히고 세계 각국을 떠돌아다니면서도 자신들의 국가 정체성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것은 성경에 기초한 여호와 신앙이 깊이 뿌리박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다 마카비가 중심이 되어 우상숭배를 강요하는 수리아 안티오쿠스에 맞서 싸울 때(주전 168∼166년) 그들의 한 손에는 언제나 작은 성경 두루마리가 쥐어져 있었으며,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직전 마사다 정상으로 급히 피신했던 960여명의 유대인들이 로마 군단에 포위되어 마지막 저항을 죽음으로 마치기 전까지(주후 70∼73년) 그들의 입에서는 성경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면 그들은 성경을 어떻게 읽었을까?
성경 두루마리는 양팔 길이의 다섯 배(약 7.5m) 정도였고, 왼손으로 풀고 오른손으로 감으면서 읽었다.
원래 회당에서는 회당장이 성경을 읽도록 되어 있었으나 때로는 그가 지정한 외부인도 읽을 수 있었다. 아마도 이런 관습을 따라 예수님께서도 종종 회당에서 성경 읽으실 기회를 얻으셨던 것 같다(눅 4:16). 초대교회에서는 성경 이외에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적은 어록이나 사도들의 서신 등을 읽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살전 5:27).
그런데 한 사람이 오랫동안 성경을 읽다 보면 듣는 성도나 청중들은 자연히 지루함을 느끼게 될 수 있다. 그래서 듣는 사람들에게 흥미와 관심을 끌게 하면서 성경 말씀에 익숙해지도록 하기 위해 성경 읽는 것만을 전적으로 담당하는 독경사(讀經士·Sutra-Chanter)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50여개의 각종 부호들이 적혀 있는데, 그것들은 성경낭독을 위한 음표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리고 헬라어에도 단순하기는 하지만 세 종류의 악센트(에큐트, 써컴플렉스, 그레이브)들이 있으며, 때로는 강하거나 길게 또는 낮고 굵게 발음하도록 되어 있다.
특히 히브리어는 시적인 언어이기 때문에 목소리의 높낮이에 맞추어 노래하듯이 발음하면 사람들의 마음을 크게 감동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독경사들은 각 지역들(팔레스타인, 예멘, 에티오피아 등)의 정서를 최대한 살려 특유의 목소리로 성경을 읽음으로써 그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음악적 분위기에서 자라난 유대인들 중에 멘델스존, 쇼팽, 아이작 스턴, 번스타인, 바렌 보임, 호르비츠 등 세계적 음악가들이 배출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닐 것이다.
유대인들은 마치 파도타기를 하는 사람처럼 고난의 바람과 역경의 파도가 밀어닥칠 때 뒤로 물러서거나 피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당당히 맞서 즐길 줄 아는 민족이었다. 그 힘과 용기는 성경을 목숨처럼 부여잡고 읽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다(시 119:105).
(18) 성경은 어디에 기록되었는가
종이가 없었던 먼 옛날 성경은 어디에 기록되었을까? 원시인들은 동굴이나 바위벽에 사람이나 동물의 형상, 부호 등을 새겨 놓았다. 프랑스의 라스코, 스페인의 알타미라 동굴 그리고 우리나라 울주군 대곡리 반구대에는 그들이 손으로 새긴 흔적들이 지금까지 뚜렷이 남겨져 있다. 변변한 도구도 없이 돌에 글자나 그림을 새겨 놓는 것은 매우 힘든 작업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좀 더 쉬운 필기 재료들을 찾으려고 하였다.
그들이 주로 사용했던 재료는 대리석(그리스), 구리(인도), 가죽(사해 부근과 멕시코), 자작나무 껍질(인도), 용설란(중앙아메리카), 대나무(폴리네시아), 종려나무 잎(인도), 나무(스칸디나비아), 비단(중국, 터키), 상아(오턴) 등이었다. 재료가 여러 가지였기 때문에 필기도구도 갈대 줄기, 붓, 철필, 끌, 깃촉 등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문자가 생겨나면서 사람들은 진흙으로 토판을 만들어 그 위에 글을 쓴 다음 햇빛에 말리거나 불에 굽는 방법을 생각해 내었다. 그동안 중동지역에서 발굴된 엄청난 분량의 토판들은 성경을 해석하는 데 많은 유익한 정보들을 제공해주고 있다. 한 가지 특기할 것은 아직까지 성경 구절이 새겨진 돌이나 비문, 토판은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그것은 그들이 두 번째 계명인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를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새기는’ 모든 것을 금지하신 것으로 오해한 것에서 비롯됐을 수 있다.
성경을 양피지에 본격적으로 옮겨 쓰기 시작한 것은 유대인들이 바벨론으로부터 돌아온 이후였다. 그들에게는 성전을 짓고 예배와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다.
그때 제물들로 쓰인 양과 소, 염소 등의 가죽은 성경을 기록하는 재료들로 가공되었다. 양피지를 만들려면 먼저 날가죽을 석회수에 담근 후 계속 문지르면서 남아 있는 실과 털을 모두 제거한다. 그 다음 남아 있는 기름기를 제거하기 위해 석회가루를 뿌리고 석쇠 위에 말린 후 무두질을 하여 표면을 평평하게 고른다. 필경사(筆耕士)는 먼저 칼이나 속돌로 양피지 표면의 흠집이나 거친 부분을 손질하여 면을 매끈하게 골라야만 했다. 양피지(Parchment)란 말은 헬라어 페르가메네(Pergamene)에서 나왔는데, ‘버가모 가문에서 나온 가죽’이란 뜻이다(참고 계 2:12),
성경을 기록하는 가죽은
(1)정결한 짐승의 것이어야만 하고
(2)유대인이 특별히 성경 필기용으로 만들어야 하고
(3)정확하게 줄을 그어야만 하며
(4)잉크는 검은색
(5)필사자는 유대인 복장을 하되
(6)온몸을 깨끗이 씻어야만 하였다.
성경 두루마리는 양팔 길이의 다섯 배(약 7.5m) 정도였고, 왼손으로 풀고 오른손으로 감으면서 읽었다.
신약성경은 주로 양피지보다 가볍고 값도 싼 파피루스에 기록되었다. 파피루스는 나일강 삼각주 지역에서 많이 자라는 식물이다. 이 파피루스에서 종이를 의미하는 영어의 Paper와 독일어의 Papier가 유래되었다. 사실상 파피루스는 팔레스타인의 복음이 유대와 사마리아를 넘어 땅 끝까지 이르러 세계를 복음화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왜냐하면 성경이 알기 쉬운 코이네 헬라어로 값싸고 대중적인 파피루스에 기록되었을 때 누구든지 손쉽게 이 십자가 복음을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양피지와 파피루스! 인류 역사를 바꾼 작은 기적들이다.
(19) 영어로 성경 번역
오늘날 영어는 세계 어디를 가든지 서로의 의사를 소통할 수 있는 사실상 세계 공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200여년 전까지만 해도 영어는 유럽 대륙에서 조금 떨어진 브리튼(Britain) 섬에서 사용하는 한낱 지방 언어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여장부 빅토리아 여왕에 의해 영국이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확장되고 청교도 후예들이 세운 미국이 세계무대 최강자로 떠오르면서 영어는 명실공히 세계인들의 필수 언어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성경을 맨 처음 영어로 번역한 사람은 존 위클리프였다(1388년). 주로 라틴어 벌게이트를 대본으로 삼았던 이 번역 성경은 출간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거의 모두 불태워졌으며 오직 한 권의 완역판 만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 다음 등장했던 윌리엄 틴데일은 영어 성경을 최초로 인쇄했으나(1525년), 결국 벨기에에서 체포되어 화형에 처해졌다. 그 후 커버데일, 매튜, 타버너 등에 의해 계속 번역되었지만 대중적으로 널리 읽혀지지는 못하였다. 그 이유는 당시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었던 가톨릭교회가 사제들 이외에 성경을 가르치거나 번역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경이 공식적으로 영어로 번역된 것은 1611년 제임스 1세 왕에 의해서였다. 그는 적대관계에 있는 대영제국의 종교 당파들과 더불어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시키기 위해 54명의 학자에게 성경을 번역하고 개정하는 업무를 맡겼다. 7년여 만에 완성된 이 성경 번역은 왕이 그 권위를 부여했으므로 흠정역(欽定譯), 공인되었으므로 공인역(公認譯, Authorized Version), 제임스 왕이 추진했으므로 킹 제임스역(King James Version) 등으로 각각 불린다.
이 흠정역(KJV)은 영어성경 번역의 고전적 교과서로 인정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현대 영어의 효시로도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흠정역이 대본으로 사용한 히브리어, 헬라어 사본들은 레닌그라드 사본과 시내 사본, 기타 권위 있는 사본들이 발견되기 이전 것들을 사용했기 때문에 후대에 2000여개의 구절이 생략되었고, 또 고어체를 사용하여 직역되었기 때문에 현대인의 어감과 차이가 있고 이해하기에도 어려운 부분이 많이 있었다. 이런 점을 보완하기 위해 ERV(English Revised V. 1885년), ASV(American Standard V. 1901년), NKJV(New King James V. 1979년)의 개정판들이 계속 출판되었다.
그런데 흠정역(KJV)의 개정판들 이외에 새로운 번역들이 시도되었는데, RSV(Revised Standard V. 1952년), NEB(New English Bible, 1970년), GNB(Good News B. 1966년), LB(Living B. 1972년) 등이 그것들이다.
그러면 120여 영어번역본들 중에서 어느 책이 가장 잘 번역되었을까.
NIV(New International V.)는 복음주의자들이 초교파적으로 우아하고 부드러운 문장으로 의역하였다(1978년).
NASB(New American Standard B.)도 복음주의자들이 최신의 사본과 자료들을 종합하여 원문에 충실하게 축어적으로 번역하였다(1971년).
NRSV(New Revised Standard V.)는 각 교파의 학자들이 총동원되어 15년에 걸쳐 ‘가능한 한 문자적으로, 필요한 만큼 자유롭게’ 번역하였다(1990년). 필자는 원문 성경 이외에 이 세 가지 번역 성경을 늘 참조하고 있지만 그 중에서 NASB에 가장 많은 손자국이 남겨져 있다.
(20) 한글 성경은 번역사
우리나라가 미국과 공식적으로 접촉한 것은 1871년 신미양요 때였다. 앞서 제너럴셔먼호 사건(1866년)으로 군함과 승무원들(순교자 토머스 선교사 승선)을 잃었던 미국은 또다시 군함 5척을 이끌고 강화도에 와서 수교통상을 끈질기게 요구했다. 그러나 구한말 조선의 완강한 쇄국정책에 의해 심각한 인명피해만 입은 채 철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로부터 15년 후 두 미국인을 태운 상선이 제물포에 조용히 닻을 내렸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라는 낯선 이름을 가진 두 선교사는 통상이나 외교관계를 요구하지 않았다. 그들은 5000년 동안 깊이 잠들어 있던 사람들의 영적 무지를 일깨우고 예수 안에 생명과 구원이 있음을 알려주었다. 그들은 곳곳에 병원과 학교, 교회를 세웠지만 무엇보다 성경 번역하는 일을 최우선적으로 추진했다. 그것은 하나님 말씀만이 고요한 아침의 나라를 복음화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서둘러 한국인들과 함께 번역위원회를 조직했고, 마침내 성경 번역을 완성하게 됐다(1911년). 이 ‘구역 성경’은 영어 흠정역(AV)과 중국어역을 중역한 것이었지만, 문장과 문맥은 비교적 간결하면서도 매끄럽게 다듬어져 있었다. 그러나 번역 여건이 열악하고 시간과 언어능력 등이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히브리어, 헬라어 성경과도 충분히 대조하지 못했기 때문에 원문의 의미에서 빗나간 내용이 많았다.
따라서 책이 출간되자 곧 개정 작업이 시작되었고 무려 26년 만에 ‘성경전서 개역본’이 힘겹게 마무리됐다(1938년). 이때 번역에 참여한 사람은 선교사와 외국인 31명, 한국인 35명이었다. 그 후 6·25전쟁을 거치고 나서 조선어학회의 한글맞춤법에 맞추어 수정된 최종 결정판이 출판됐다(1956년). 이로써 우리말 성경은 모든 번역이 완료되었고, ‘개역성경’은 한국 교회의 공식 강단용 성경으로 확정됐다.
그런데 한국 교회가 기하급수적으로 부흥되고 원어독해력을 비롯한 신학 수준이 크게 향상되면서 새로운 성경 번역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점차 높아져 갔다.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해 새번역(1967년) 공동번역(1977년) 표준새번역(1993년)과 여러 종류의 번역본이 계속 출간됐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교인들에게서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그 이유는 개역성경의 문체에 오랫동안 익숙해 있던 한국 교인들에게 새 번역들은 낯설게 느껴졌을 뿐만 아니라 원문의 의미도 온전히 되살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한국 교회가 여전히 개역성경만을 선호하고 있는 점을 고려해 또 다시 수정하는 작업이 진행되었고, ‘성경전서 개역개정판’이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었다(1998년). 많은 부분이 수정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원문의 의미에서 벗어난 오역과 졸역, 부적절한 삭제나 첨가 등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은 참으로 아쉽고도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서 한가지 명심해야 할 것은, 지금 우리가 가진 개역개정판은 99년 전 번역한 것을 두 차례나 수정, 보완한 성경이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마치 처음 지은 초가집을 여러 차례 뜯어 고친 것과도 같다. 이제 우리는 최근까지의 사본학과 고전학, 언어학 연구 결과 등을 총망라함과 동시에 확고한 신앙과 정통신학에 바탕을 둔 최고 수준의 원문 독해력을 발휘해 하나님의 원 계시, 곧 본래의 ‘그 말씀’을 정확하게 우리말로 옮겨야 한다. 지금 곧(hic et nunc) 그 일을 시행하는 것이 한국 교회의 최우선 과제다.
(21) 성경 연구의 세 가지 필수 요건
성경을 올바르게 연구하려면 세 가지 필수요건을 갖추어야 한다. 곧 역사와 원어, 성경 배경이다. 이 요건들은 마치 큰 솥을 떠받치는 세 개의 다리와 같이 성경을 더욱 명확하고 체계 있게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1. 정확한 역사 이해이다.
성경에는 역사적인 사건들에 대한 많은 기록들이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런 것들이 과연 일반 역사에서 언급된 내용들과 정확하게 일치하느냐 하는 것이다. 만일 역사적 기록들이 서로 다르다면 성경이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난센스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예를 들면 다니엘서에 바벨론의 마지막 왕은 벨사살로 기록되어 있지만(5:29, 30, 8:1), 바벨론 역사에는 나보니두스(Nabonidus)로 되어 있다. 이 사실에 근거하여 성경비평학자들은 성경의 진정성에 대해 계속 악의적인 공격을 해왔다. 그런데 최근 출토된 10여개의 토판에 의하면 벨사살은 나보니두스의 장남으로서 아버지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아 군대 지휘뿐만 아니라 행정, 제사 등의 업무를 관장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성경이 벨사살을 바벨론의 마지막 왕으로 기록한 것은 그에게 왕의 공식 칭호는 없었지만 실질적으로는 바벨론을 다스렸기 때문이었다.
2. 풍부한 원어 지식이다.
성경은 1500여년 동안 히브리어와 아람어, 헬라어로 기록되었다. 언어는 그 속성상 시대와 지역에 따라 끊임없이 발전되었고 그 의미도 수시로 바뀌었다. 우리말의 ‘광’(狂)도 옛날에는 ‘어떤 일에 매우 열중하는 사람’이란 뜻으로 사용되었지만 지금은 다소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고 있다(수집광, 독서광, 야구광 등).
성경 원어에는 지금까지도 그 의미가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단어들이 상당수 있다. 산상보훈의 주기도문에 나오는 ‘일용할’이라는 단어는 신약에 단 한번 사용되었고 다른 문헌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근래에 이 의미를 강하게 암시하는 한 조각의 파피루스가 발견되었다. 거기에는 채소와 과일, 빵 등 하루에 먹을 만한 분량의 품목들이 적혀 있었다. 주부들은 ‘바자르’라고 불리는 야시장에 가서 파피루스 조각에 적힌 물건들을 구입했는데, 바로 이 조각이 ‘에피우시우스’, 곧 ‘일용할’이었다. 그러므로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는 ‘파피루스에 적힌 하루 분량의 양식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3. 폭넓은 성경 배경 연구이다.
성경은 여러 세대에 걸쳐 다양한 지역에서 기록되었기 때문에 그 문화적 배경과 전통 관습을 폭넓게 연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연구 과제가 아닐 수 없다. 특히 이스라엘 사람들은 ‘문안하는 일’을 반드시 지켜야 할 일상적인 덕목으로 간주하였다. 더욱이 문안 인사와 함께 상대방을 위해 진심으로 빌어주는 축복은 내용 그대로 이루어진다고 믿었다. 사도 바울도 서신들에서 언제나 문안하는 내용을 적고 있다(롬 1:7, 고전 1:3 등).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라”(눅 10:4)고 말씀하셨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길거리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면 상대방 안부뿐만 아니라 집안 식구들과 친척, 친구들의 안부도 일일이 묻는 관습이 있었다. 급한 걸음으로 전도하러 가는 제자들에게 장황하게 늘어놓는 길거리 문안은 큰 방해 요인이 될 수 있었다. 그렇다! 성경의 모든 기록들은 진실 그 자체이다.
(22) 성경저자와 원어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다(딤후 3:16, 벧후 1:21). 영감이란 하나님께서 인간 저자를 감동하여 그들의 개성이나 학식 등을 사용하심으로써 자신의 계시를 원본의 내용 속에 오류 없이 작성하고 기록하도록 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영감론은 신학적 경향과 교단의 입장에 따라 여러 가지로 구분된다. 자연적 영감론(성경은 종교 천재에 의해 기록됨), 신비적 영감론 (성경 기자가 성령으로 충만), 기계적 영감론(하나님께서 불러주시는 대로 받아씀), 부분적 영감론(인간 이해를 초월한 부분만 영감됨), 사상 영감론(단어가 아니라 사상이 영감됨), 유오 영감론(영감되었으나 오류가 있음), 축자 영감론(단어나 내용 모두가 영감되었고, 성경 저자의 특성은 반영되었지만 오류는 없음) 등이다.
우리가 채택해야 하는 올바른 입장은 축자 영감론인데,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는 성경 기자들이 사용한 언어와 문체들에 있다. 성경은 오랫동안 많은 저자들에 의해 기록되었기 때문에 자연히 그 내용뿐만 아니라 언어와 문체들도 다를 수밖에 없다.
구약의 히브리어나 아람어 문장들은 대체로 통일된 느낌을 주고 있다. 다시 말하면 거의 1000여 년의 연대적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약성경 저자들의 언어 사용이나 문체 등에는 뚜렷한 차이점이 없는 것이다. 이것은 구약성경 기자들이 기록했던 내용들이 어느 일정한 때에 그 시대의 언어로 기록되었다는 것을 강하게 암시해 준다.
모세시대 전후로부터 주전 7세기에 이르기까지 가나안 전역에서 발굴된 다양한 고대 문서들은 바벨론 문서처럼 음절 방언으로 되어 있지 않고 히브리어 알파벳으로 구성된 방언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고대 가나안 문서들은 대부분 히브리어의 고어체인 베니게어로 기록되었고, 아람어가 직접 영향을 미쳤던 바벨론 포로 전후까지 사용되었다. 바벨론 포로 이전에 기록된 구약성경들이 가나안에 돌아온 후 누군가(에스라로 추정)에 의해 또 다시 옮겨졌다는 것은 히브리어 용어와 문체들이 뒷받침해주고 있다. 주전 2세기쯤 히브리어 구약성경은 헬라어로 번역(70인역)되면서 모든 내용이 같은 시대의 언어와 문장으로 통일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감성은 조금도 손상되지 않고 여전히 원형대로 보존되었을 것으로 확신한다.
신약성경에서는 인간 저자들의 특성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팔레스타인 태생의 마태가 기록한 마태복음에는 빈번한 구약 인용과 유대인에 대한 관심, 아람어적 요소 등을 찾아볼 수 있고, 의사이며 역사가였던 누가가 쓴 복음서에는 수준급 전문가만이 이해할 수 있는 탁월한 문장과 의학용어, 역사적 진술 등이 언급되고 있다.
한편 갈릴리 어부 출신인 요한이 쓴 요한복음과 서신들은 초보자도 읽을 수 있을 만큼 단어도 쉽고 문장도 투박하다. 그러나 그 전체 내용들은 직접 목격한 자가 아니면 도저히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생생하고 심오하다. 당대 최고의 석학이요 문필가였던 바울이 쓴 서신들은 헬라어가 생긴 이후 최대의 걸작품이라는 역사적 평가를 받고 있다.
중요한 것은 수준 높은 지식과 헬라어 문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 저자의 다양한 특성들을 사용하여 자신의 뜻을 성경에 친히 기록하셨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성경에서 자신을 계시하셨고 지금도 성경을 통해 말씀하신다.
(23) 성경 원어는 영감에 찬 詩
언어는 화석(化石)의 시(詩)라는 말이 있다. 언어는 단단히 굳어버린 싸늘한 돌이지만 그것을 꾸준히 연구하면 영감에 찬 시가 되고 아름다운 노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성경을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그것이 쓰인 원어의 형성 과정과 의미에 대해 면밀히 연구해야 할 필요가 있다. 물론 고대 특정 국가의 언어를 문화와 어법이 전혀 다른 현대인의 시각에서 번역하고 이해하는 것은 매우 힘든 과제가 아닐 수 없다.
1. 우리가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해석하는 ‘아가페’라는 단어는 성경에 쓰이기 이전에는 세속적인 사랑이나 불륜적인 애정 등을 나타낼 때 빈번히 사용되었다. 70인역은 암논이나 다말, 삼손의 이야기에서도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신약성경 기자가 순수하고 거룩한 사랑의 의미로 사용하면서 아가페는 소위 ‘거듭난(renati)’ 새 단어가 되었다.
2. 신약성경에서 죄를 의미하는 헬라어 ‘하말티아’는 원래 창이 표적을 빗나가거나 사람을 만나지 못하거나 일을 그르칠 때 사용되는 단어였다. “헬라인은 지혜를 구한다”(고전 1:22)는 말이 있듯이 본래 헬라인들은 형체가 있고 감각으로 알 수 있는 것(형이하학)뿐만 아니라 시간이나 공간을 초월한 관념적인 것(형이상학)까지도 모든 것을 학문적인 개념으로 규정하려고 했다. 따라서 그들은 사도 바울이 죄 및 율법과의 투쟁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롬 7:24)라고 부르짖은 고통스런 갈등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3. 예나 지금이나 계약을 맺는 당사자들은 서로 증서를 써서 주고받는다. 신약시대의 문서는 주로 파피루스에 매연과 고무를 섞어 만든 잉크로 기록되었다. 이 문서의 내용들은 헝겊에 물을 적셔서 문지르면 말끔히 지워졌다(엑살레이페인). 계약증서를 폐기하려면 또 다른 방법이 있었는데, 그것은 ‘키아제인’, 곧 ×(헬라어 문자 ‘키’)표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안의 내용들은 그대로 남겨지기 때문에 오랫동안 누구든지 읽을 수 있었다. 그런데 ‘엑살레이페인’이란 단어는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골 2:14)로 번역되고 있다. 사탄 마귀는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증서를 썼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찢으신 살에 흘리신 죄를 적신 후 꺾으신 뼈로 우리 죄가 적힌 증서의 내용들을 다 지우시고 제해 버리셨다(엑살레이페인). 만일 ×(키아제인)표를 하셨다면 마귀는 계속 우리의 죄목을 들여다보면서 고소하려고 했을 것이다.
4. 요한복음 2장에는 예수님께서 최초로 행하신 가나의 포도주 이적기사가 소개되고 있다. 마리아가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말하자 예수님께서는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하고 대답하셨다. 한국교회 초창기에 어떤 사람이 이 구절을 읽다가 어머니를 여자라고 부르는 불효막심한 종교를 더 이상 믿지 못하겠다고 박차고 나갔다는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여자여’로 번역된 헬라어 ‘구나이’는 로마 황제가 클레오파트라 여왕을 불렀을 때 사용한 최고의 존칭어였다.
지금 성경 원어(히브리어, 헬라어)는 화석처럼 굳어져버린 사어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 본래적인 의미를 깨닫게 되면 영혼을 더욱 감동시키는 영감의 시와 찬미, 신령한 노래가 될 수 있다.
(24) 성경 원어의 비밀
‘성경 원어를 알면 성경이 보인다’는 말이 있다. 성경 원어(히브리어, 헬라어)는 망원경처럼 멀리 있는 것은 가까이 보이게 하고, 현미경처럼 가까이 있는 것은 더 자세히 보이게 한다는 것이다. 물론 성경 원어가 성경에 나오는 단어와 문장의 의미를 정확히 밝혀줌으로써 성경 해석에 필수적인 도구 역할을 한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성경 원어는 모든 난제들을 해결해주고 깊은 비밀까지도 깨닫게 해주는 만능 열쇠나 마법상자는 아니다. 무엇보다도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하려면 성경이 기록된 ‘그 시대, 그 장소’로 되돌아가서 성경 기자와 함께 호흡하고 대화하듯이 영감 된 말씀을 경건하게 읽어야 한다.
1.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제국이 지배하는 식민지 국가였다. 그런데 그때 유대인들이 가장 수치스럽고 끔찍하게 느끼는 단어가 있었다. 그것은 ‘앙가류오’라는 단어인데, ‘억지로 가게 하다, 강제로 시키다’는 뜻이 있다. 로마 군인들은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는 아무에게든지 억지로 무거운 짐을 지우거나 자기들이 원하는 일을 언제든지 강제로 시킬 수 있었다. 길을 지나가던 구레네 시몬이 엉겁결에 십자가를 지고 간 것도 이 로마법에 의한 것이었다(마 27:32).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오리를 가자고 하면(앙가류오), 십리까지도 동행하라고 말씀하셨다(마 5:41).
2. 우리말 성경에서 ‘유앙겔리온’은 ‘복음’ ‘좋은 소식’ 등으로 번역되고 있다. 이 단어는 그 역사적 배경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실로 충격적인 감동을 느끼게 해주었다. 주전 490년, 아테네 북동쪽에 있는 마라톤 평지에서는 헬라(그리스)와 파사(페르시아) 사이에 나라의 운명을 건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예상과 달리 헬라군이 큰 승리를 거두자 한 무명의 병사가 무려 36.75㎞(마라톤 코스보다 짧음)를 달려와서 “우리는 이겼다”고 외치고는 쓰러져 죽었다. 바로 그 소식이 ‘유앙겔리온’, 즉 기쁜 소식이다. 성경 기자는 이 단어를 예수님께서 죄와 죽음과 마귀의 권세와 더불어 싸워 승리하신 기쁜 소식을 나타내는 데 사용하고 있다(막 1:1, 롬 1:16).
3. 헬라어 ‘파루시아’는 사람이 임재하거나 물건이 도착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성경에서는 ‘재림’을 뜻하는 전문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파피루스 자료나 고대 헬라 문헌에 보면 이 단어는 황제나 왕, 총독과 같이 최고 지위에 있는 고관이나 유명인사가 어떤 마을에 도착하는 것을 나타낼 때 쓰이고 있다. 왕의 파루시아 날짜가 정해지면 먼저 세금이나 곡식들을 거두어 그 돈으로 도로를 만들거나 건물들을 지었다. 낮은 골짜기는 메우고 굽은 것은 곧게 하며 험한 길은 평탄케 하였다(눅 3:5). 만왕의 왕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다시 파루시아(재림)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를 맞아들이기 위해 우리는 절망의 골짜기를 메우고 죄악의 굽은 것을 곧게 하며 교만의 험한 길을 평탄케 해야 한다.
4. 아마도 성경에서 다양한 의미로 많이 쓰이는 단어가 있다면 ‘카리스’이며, ‘은혜’ ‘기쁨’ ‘매력’ ‘호의’ ‘감사’ 등으로 번역되고 있다. 이 단어는 원래 매력적인 것, 아름다운 사람을 의미했는데, 누구든지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사람을 보면 기쁨과 호의와 감사의 마음이 생겨나게 된다. ‘카리스’(은혜)를 받은 사람은 그런 마음을 지니게 된다.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고 싶고, 늘 울어도 다 갚을 수 없어 눈물 흘리며 숨질 때까지 늘 찬송한다. 그렇다. 오직 은혜(Sola Gratia)다!
(25) 성경 기록·보존에 공헌한 사람들
성경이 오늘의 66권으로 완성되기까지는 매우 복잡하면서도 다양한 형성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그것은 고통스러운 해산의 수고였고, 불꽃 튀기는 토론의 장이었고, 끊임없이 되풀이된 도전과 반전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특히 성경을 기록하고 보존하는 데 남달리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몇몇 역사적 인물들이 있다.
◇알렉산더(Alexander, 주전 356∼323)=사실상 알렉산더는 성경이나 유대교 혹은 기독교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한낱 냉혹한 정복자에 지나지 않는다. 역사에는 가정법이 없다고 하지만, 만일 알렉산더가 없었다면 오늘날과 같은 형태로 성경이 보존되었을까 하는 의문을 품게 할 만큼 그의 영향력은 실로 막강하였다. 아버지 필립의 뒤를 이어 마케도니아 왕이 된 청년 알렉산더는 당시 최강국이었던 파사(페르시아)의 왕들을 차례로 격파한 후 팔레스타인을 비롯하여 이집트와 인도 서쪽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에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그는 전쟁터에서도 호메로스의 시를 즐겨 읽었으며, 학자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헬라 문화를 보급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무엇보다도 알렉산더 대왕은 그동안 도시국가별로 다르게 사용되고 있었던 각종 헬라(그리스) 방언을 한데 모아 간결하면서도 읽기 쉬운 코이네(Koine·공용) 헬라어로 언어를 통일시켰다.
이 코이네 헬라어로 구약성경이 번역되고(70인역), 신약성경이 기록되었을 때 당시 헬라 문화권에 속해 있었던 전 세계인은 누구든지 손쉽게 하나님 말씀을 접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알렉산더가 닦아놓은 헬레니즘의 토양 위에 헬라어로 기록된 하나님 말씀의 씨가 뿌려져 순식간에 수백 배 복음의 열매들이 맺혀졌던 것이다.
◇마르키온(Marcion, 주후?∼160?)=그는 사도 시대가 끝나갈 무렵 소아시아 북쪽에 있는 시노페(Sinope)라는 곳에서 태어났는데, 교회사에서는 파문당한 이단자로 기록되어 있다. 마르키온은 초대교회를 큰 혼란에 빠뜨리게 했던 영지주의를 주창하였고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정한 가현설을 지지하였다. 더욱이 그는 구약성경을 정경에서 전부 폐기시켰고 구약과 신약 사이에는 모순이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는 성경 형성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그 이유는 그가 누가복음서(1·2장 제외)와 바울서신들(목회서신과 히브리서 제외)을 모아 최초로 정경목록표를 작성했기 때문이다. 그 후 250여년 동안 여러 회의에서 마르키온의 목록표는 끊임없이 비판과 보충과 수정의 대상이 되었으며, 모든 논의는 카르타고 회의(주후 397)에서 66권을 정경으로 최종 확정함으로써 완전히 종결되었다.
◇제롬(Jerome, 주후 340∼420)=그는 달마디아의 국경 부근에 있는 스트리돈(Stridon)에서 태어났으며, 성경번역사에서 가장 탁월한 업적들 중 하나인 벌게이트(Vulgate)역을 완성하였다. 당시에는 정경이 확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정경과 외경, 위경 사이에 많은 혼선이 빚어지고 있었다. 그는 신구약 성경을 20여년에 걸쳐 세계 공용어였던 라틴어로 번역했는데, 이 벌게이트역은 지금까지 가톨릭교회의 공식 성경으로 사용되고 있다. 세베르스는 제롬을 “밤낮 쉬지 않고 읽거나 쓴 사람”이라고 평하였다. 그는 연구와 집필에 전념하기 위해 스스로 성불능자가 된 극단적인 금욕주의자였다. 알렉산더와 마르키온, 제롬! 그들은 서로 다른 색채로 하나님의 최고 걸작품을 그려낸 엑스트라들이었다.
(26) 성경책을 짓밟고 불태운 인물들
영국 역사가 아널드 토인비는 고대와 현대를 거시적으로 연결시켜 집필한 ‘역사 연구’에서 26개의 고대 문명권을 면밀히 검토한 다음 “문명이 생성하고 소멸하는 과정에는 일정한 규칙성이 있으며, 부패와 이교적인 대립은 도전적인 역할만을 할 뿐이고 기독교의 진리가 가진 응답의 힘이 더 강력하여 새 역사를 충분히 전개, 발전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고 나서 “이스라엘은 강대국들이 도리깨질하는 마당으로 사용되었다”라는 말을 덧붙였다.
굳이 세계 문명의 역사를 더듬어 보지 않더라도 고대 최강국이었던 애굽과 앗수르, 바벨론, 파사, 헬라, 로마 등의 발생과 성장과 해체 과정은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고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역사의 도전과 응전은 ‘누구의 신이 참된 신인가?’의 물음에서 시작되어 험난하고도 가혹한 검증 기간을 거쳤지만 언제나 최후 승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끝까지 부른 자의 몫으로 돌려졌다. 이 과정에서 성경을 불태우고 믿는 자들을 잔인하게 학대한 악인들의 이름은 여전히 역사 기록에 남겨져 있다.
■수리아의 안티오쿠스 4세=주전 323년, 알렉산더 대왕은 바벨론에서 열병으로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 자신이 정복한 광활한 영토를 4명의 장군에게 나누어 주도록 유언하였다. 애굽 지역은 톨레미에게, 수리아 지역은 셀류큐스에게 각기 할당되었는데, 안티오쿠스는 그 가문의 4대째 후손이었다. 에피파네스라고도 불렸던 그는 성격이 잔인하고 포악했기 때문에 ‘에피마네스’(‘미쳤군!’의 뜻)라는 별명을 얻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헬라 문화를 보급시킨다는 구실을 붙여 자신들의 제우스 신을 강력히 거부하는 유대인들을 무자비하게 박해하였고, 율법책을 가진 것이 발견되면 즉석에서 처형하였다. 아마도 다니엘서에 나오는 “멸망케 하는 가증한 것”(11:31, 마 24:15)은 안티오쿠스를 가리키는 듯하다. 결국 안티오쿠스의 잔인무도한 학정은 유다 마카비 혁명을 일으키게 하는 빌미를 제공하였고, 나라는 점차 멸망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로마 황제들=예루살렘의 복음이 유대와 사마리아를 넘어 전 세계로 급속히 전파되자 크게 당황한 로마 제국은 즉시 무서운 박해의 칼날로 대응하였다. 그것은 하나님 이외의 다른 신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 기독교가 자신들의 황제 숭배 사상에 최대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하기까지 무려 290여년 동안 로마 황제들은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기독교인들을 괴롭히고 죽였으며, 성경책을 찢고 불살랐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로마법으로 십자가에 못 박았었던 나사렛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야 말았다.
■로마 교황들=중세 가톨릭 교회는 교회의 권위가 성경이나 국가, 왕들보다 더 위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더욱이 그들은 성경의 내용이 자신들의 주장을 전적으로 뒷받침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성경이 번역되어 대중적으로 읽혀지거나 개혁의 목소리를 높이는 것을 몹시 두려워하였다. 독일 뮌스터 박물관에 보관된 당시의 각종 고문기구들은 로마 교황청이 성경 번역자나 개혁자들을 얼마나 야만적으로 고문하고 죽였는가를 생생하게 증언해주고 있다. 요컨대 십자가의 검붉은 피로 쓰인 성경은 피를 쏟더라도 지키고 목숨과 바꾸더라도 읽을 만한 절대 가치가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27) 로마서 읽고 변화 일군 사람들
어떻게 사람이 쓴 글이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는가? 그 이유는 간단하면서도 분명하다.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벧후 1:21)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뒷받침하는 증거들 중의 하나는 ‘사람을 감화, 변화시키는 능력’(뒤나미스, ‘다이너마이트’의 어원)이다. 교회사는 성경, 특히 로마서를 읽고 삶의 극적인 전환점을 이루었던 역사적인 인물들을 소개하고 있다.
◇어거스틴(354∼430)=‘바울과 루터 사이에 맞설 만한 인물이 없었다’(하르낙)고 평해지는 어거스틴은 초대교회 이후 성경에 기초한 신학을 체계적으로 수립했을 뿐만 아니라 서구 정신세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던 초기 최대의 신학자였다. 그러나 그의 젊은 시절은 무질서하고 방탕한 삶의 연속이었다. 그는 19세 때 미천한 신분의 여자와 동거하여 사생아를 낳았는가 하면, 어머니 모니카의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절대적 선악 이원론을 주장하는 마니교에 빠져 도덕적 타락과 정신적인 방황을 계속 이어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어거스틴은 “집어 들고 읽으라(tolle lege)”는 신비스런 음성을 듣게 되었고, 즉시 펼쳐 보니 로마서 13장 13절이 눈에 띄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라” 마침내 뜨거운 회심을 체험한 그는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으로 갈아입은 후 34년 동안 기도와 명상에 전념하면서 수많은 책들을 집필하였다.
◇마르틴 루터(1483∼1546)=16세기 종교개혁과 프로테스탄트 창시자인 루터는 기독교뿐만 아니라 서구문명의 중추적인 역할을 한 인물들 중의 한 사람이다. 무엇보다도 그는 자신의 활동과 저술을 통하여 로마 가톨릭과 동방 정교회에 이어 개신교라는 또 하나의 대교단을 탄생시켰고 경제와 정치, 사회, 문화 등 각 분야에 걸쳐 새로운 개혁운동을 주도하였다. 18세가 되던 해 루터는 에르프르트 대학에 입학하여 문과와 법과를 차례로 이수하였으며, 동급생의 죽음과 벼락의 공포를 체험한 후 학업을 잠시 중단하고 수도사가 되었다.
1511년 1월, 루터는 로마 베드로 성당의 빌라도 계단을 무릎으로 올라가면서 Pater Noster(우리 아버지)를 암송하고 있었다. 마지막 계단을 올라섰을 때 불현듯 성경 말씀이 떠올랐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 그는 곧장 일어서서 계단을 걸어 내려왔고, 위대한 종교개혁의 첫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존 웨슬리(1703∼91)=영국 국교 목사의 열다섯째 아들로 태어난 웨슬리는 오늘날 감리교의 전신인 메소디스트 파를 창시하였으며, 당시 영적으로 침체되고 부패했던 영국 교회와 사회를 일깨워 다시 일으켜 세운 기념비적인 인물이었다. 일찍이 소명을 받아 성경 연구와 부흥 운동에 전념했지만 미국에서의 선교사역이 실패로 끝나자 극심한 고뇌와 좌절을 맛보게 되었다. 1738년 5월 24일 오후 9시 15분, 그는 런던 올더스 게잇의 작은 집회에서 루터의 로마서 서문 읽는 소리를 듣다가 놀라운 회심을 체험하게 되었다. 그는 일생 동안 35만㎞ 이상을 전도 여행하면서 4만번 이상의 설교를 했다. 하나님의 말씀, 성경! 그것은 곧 변화와 기적의 다이너마이트이다.
(28) 성경 뜻 오해한 사람들
신약성경, 특히 사복음서(마태, 마가, 누가, 요한)를 읽다 보면 자주 눈에 띄는 이름들이 있다.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 셀롯인, 헤롯당. 그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예수님을 적대시했을 뿐만 아니라 성경의 뜻을 오해하거나 왜곡한 것이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향해 “회칠한 무덤” “어리석은 맹인들” “외식하는 자”라고 통렬히 책망하셨다. 그러면 그들은 어떤 인물들이었으며, 어떻게 성경을 해석했는가?
◇바리새인=‘바리새’라는 말은 ‘분리된 자, 구별된 자’라는 뜻의 히브리어에서 온 말로서 예수님 당시에는 6000여명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바리새파는 원래 하시딤(주전 4세기쯤)으로 불리는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며 공식적으로는 요한 힐카너스(주전 135∼105)때 처음으로 등장하였다. 그들은 모세 율법과 그것을 해석한 자신들의 전승이 동일한 권위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철저한 유일신관과 율법 준수를 강조했기 때문에 백성들로부터는 존경을 받았지만 인본주의적 율법 해석을 지적하는 예수님을 자신들의 종교적 기득권에 대한 적대 세력으로 알고 사사건건 트집을 잡았다.
◇사두개인=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대제사장 사독(왕상 1:34, 삼하 15:24)에게서 시작되었고 예루살렘 멸망(주후 70년) 때까지 존속하였다. 숫자로는 바리새파보다 소수였지만 주로 교육을 받은 자들이었으며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었다. 사두개파(자연주의자)는 바리새파(초자연주의자)와는 달리 하나님의 예정과 부활, 천사와 마귀의 존재를 부인하고 개인의 자유만을 강조하였다. 특히 그들은 구약성경 중에서 모세 오경만을 인정하고 모든 구전을 부정했기 때문에 바리새인들과 자주 충돌하였다(행 23:8).
◇에센파=성경에는 언급되고 있지 않지만, 당시 기록에 의하면 유대의 여러 마을에 흩어져 있었고 중심지는 사해 서쪽에 있었다. 숫자는 4000명 정도, 주전 2세기부터 예루살렘 멸망 때까지 계속된 이 종파는 바리새파보다 더 철저히 율법을 지켰으며 외부에서 들어온 음식은 일절 먹지 않았다. 그들은 독신을 강조하였고, 손 씻는 결례와 세례, 기도 등 수도원적 생활을 했기 때문에 쿰란 종파 중 하나로서 세례 요한이나 예수님과도 어떤 연관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물론 비슷한 점은 있지만 그것을 뒷받침할 만한 결정적인 증거는 없다.
◇서기관=유대인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있었을 때 율법에 대한 깊은 연구가 시작되었고, 그 결과 서기관이라는 새로운 계급이 생겨나게 되었다. 율법을 옮겨 쓰거나 가르치는 역할을 했으며 때로는 랍비(선생, 율법교사)로 불렸다. 랍비는 예수님을 부를 때에도 사용되었고(37회), 사도나 교회 지도자들에게도 적용되었다.
그 밖에도 종교 종파는 아니었지만 헤롯 왕가를 지지하고 헬레니즘을 찬성하는 비교적 온건한 정치집단이었던 헤롯당, 율법과 유대민족을 광신적으로 옹호하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죽음이나 무력도 불사한 열심당(혹은 셀롯인) 등이 있었다. 그 외 ‘무리들’ ‘군중들’로 불린 대다수의 일반 백성들은 극심한 가난과 폭정에 시달려야만 했다. 앞서 유대 종파들에 속한 자들은 열심히 성경을 연구하기는 했지만 실천하지는 않았으며, 성경을 올바르게 가르쳐 준 예수님을 향해 돌을 던지려고 했다. 그들에게 걸림돌이 되었던 예수 그리스도, 우리에게는 구원과 영생의 모퉁이 돌이 되신다.
(29) 말씀 오해한 유대인들
일찍이 독일의 프레데릭 대왕이 그의 신하 짐머만에게 “그대가 믿는 기독교를 즉시 눈으로도 볼 수 있는 증거가 무엇인가?” 하고 물었다. 그러자 이 현명한 신하는 “그것은 유대인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흔히 유대 민족을 설명할 때는 최상급 ‘가장’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가장 오랜 기간 나라 없이 떠돌아다닌 민족, 가장 혹독한 역경과 시련을 겪은 민족, 천재적인 인물들과 노벨상 수상자를 가장 많이 배출한 민족, 세계적인 부호들이 가장 많은 민족, 가장 많이 읽힌 성경책을 기록한 민족 등.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에게 맡겨진 성경 말씀을 오해했을 뿐만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 질렀다. 그로 말미암아 그들은 자신들이 요구했던 대로 엄청난 ‘피 값’을 자손 대대로 치러야만 했다. 그들은 날마다 성경을 읽고 가르쳤지만 그 본래의 뜻을 크게 왜곡시켰다.
◇율법=율법은 주로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계명을 의미하지만 광범위하게 모세의 다섯 책들(모세오경)을 가리키기도 한다. 예수님 당시의 랍비들은 율법을 613개(십계명 글자의 수)의 조항으로 나눈 다음 그중 248개(사람 몸의 지체 수)는 ‘하라’는 적극적 계명이고 365개(일년의 날 수)는 ‘하지 말라’는 소극적 계명으로 분류하였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반드시 지켜야만 구원을 얻는 것으로 오해한 나머지 일점일획이라도 완벽하게 지키려고 애썼다. 유다 마카비 혁명 때 유대인들은 안티오쿠스 군대의 공격을 받았는데도 안식일이라는 이유로 저항이나 반격을 하지 않아 모두 전멸당한 적이 있었다. 원래 율법은 죄를 심히 죄 되게 하고,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알게 해주며, 인간이 구원받을 필요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주어졌다. 사실상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려고 애쓰다가 실패했지만 예수님은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다 이루심으로써 율법의 저주 아래에 있는 죄인들을 모두 해방시켜 구원하셨다.
◇선민의식=유대인들은 스스로를 ‘암 하아레츠’, 즉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 땅에 사는 택한 백성이라고 부른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어 가나안 땅에 살게 하셨고 그 후손을 하늘의 별과 바다의 모래처럼 번성케 해주실 것임을 약속하셨다.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내세우는 유대인들은 병적인 선민의식에 집착한 나머지 다른 민족을 멸시하고 증오하였으며 그로 말미암아 오히려 그들로부터 무서운 핍박을 받아야만 했다. 사도 바울은 “오직 이면적(신앙적) 유대인이 유대인”(롬 2:29)이라고 했고, 세례 요한은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마 3:9)고 말했다.
◇메시아=이사야 선지자는 장차 이 땅에 오실 메시아(그리스도)는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는”(사 53:2∼3) 고난 받는 종임을 예언하였다. 메시아는 이미 2000년 전 이 땅에 오셨으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후 부활·승천하셨고 언젠가 다시 오실 것이다.
지금 이스라엘 상공에는 푸른색 두 줄(나일강과 유브라데강·수 1:4) 바탕에 그들이 고대하는 다윗의 메시아 별이 새겨진 국기가 펄럭이고 있다. 이미 이 땅에 오신 메시아를 여전히 기다리고 있는 유대 민족! 어쩌면 그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민족일지 모른다
(30) 성경의 시대적·문화적 배경
성경은 하나님께서 친히 영감을 통해 기록하셨지만,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그 말씀이 기록된 시대적 배경과 문화적, 종교적 상황 등을 폭넓게 살펴보아야만 한다. 당시 문화와 종교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었던 주체들은 유대교와 헬레니즘, 로마의 제국주의였다.
그중 유대교는 기독교의 뿌리가 되었고, 헬레니즘은 기독교를 성장시킨 지적 토양이 되었으며, 로마의 제국주의는 교회 형성과정에 도움을 주고 기독교가 성장할 수 있는 환경, 즉 로마의 안정된 정치와 법률, 건축물, 조직력 등을 제공하였다. 그렇지만 이 세 가지 문화적 요소는 역설적으로 기독교를 적대시하는 가장 무서운 세력이 되었다.
◇유대교=1세기 팔레스타인 인구는 150만∼200만명이었으며, 그중 유대인은 3분의 1 정도 되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유월절 예루살렘에 모여드는 유대인은 무려 270만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들이 예루살렘을 찾은 것은 짐승을 잡아 드리는 피의 제사(1년에 18만5000여 마리)가 요시야의 종교개혁 이후 반드시 예루살렘 성전에서 드려야만 하는 것으로 제도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도 이 관례를 따라 유월절에는 예루살렘을 방문하셨으며, 오순절에 각 나라에서 찾아왔던 유대인들은 제자들이 ‘자기들의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듣고 크게 놀라워하였다(눅 2:42, 행 2:6). 주후 70년, 예루살렘을 점령한 로마의 티도 장군은 성전을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유대인들의 반발을 의식하여 “모든 것들은 다 죽이고 불태우되 성전만은 남겨두라”고 명령하였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몇몇 로마 군인들이 명령을 무시하고 성전 문 곁에서 불을 피우고 쬐다가 크게 번져 성전 전체가 불타버렸다고 한다. 이때 성전 안에 붙여 있던 많은 금이 녹아 돌 틈으로 스며들었고, 군인들은 금을 얻기 위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기지 않고’(마 24:2) 다 무너뜨렸다. 이로써 예수님의 예언이 정확히 이루어졌다.
◇헬레니즘=헬레니즘, 특히 헬라 철학은 기독교 사상이 확대·발전되는 과정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사도 바울은 이미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이 서로 교차되었던 가말리엘 문하에 있었고, 어거스틴은 교리적 기초를 세우는 데 신플라톤 철학을 많이 이용하였다. 그리고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연결시켜 가톨릭 신학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헬라 철학의 이원론적 사고방식과 신비주의는 초대교회를 큰 혼란에 빠뜨렸던 영지주의(Gnosticism)와 각종 이단을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게 했다. 그 밖에도 쾌락이 최고의 선이라고 주장한 에비크로스파와 완전한 자기 절제와 금욕을 강조한 스토아파(행 17:18), 개인주의적인 냉소주의, 상대주의적인 회의주의 등이 있었다.
◇로마의 제국주의=특히 로마의 법률과 모든 제도는 초대교회에 큰 영향을 주었고 당시 건축양식이나 음악 등은 중세까지 계승되었다. 더욱이 로마의 세계적인 통일은 온 세계를 한 이웃으로 만들면서 교통과 언어와 문화 등의 통일을 가져다주었으며, 기독교의 복음 전파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유의해야 할 것이 있다. 유대교와 헬레니즘, 로마의 제국주의는 단지 성경의 배경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것들은 마치 그림물감이나 악기와 같았다.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성경이라는 캔버스와 악보에 친히 구원의 역사라는 위대한 그림을 그리셨고 최고의 오케스트라를 연주하셨다.
(31) 성경기자가 인용한 책
일반적인 성경 외의 다른 성경책들이 있다. 말하자면 성경이 인용하고 있는 여러 권의 책들이다. 이런 책은 성경 기자가 직접 인용하고 있으므로 성경과 동등하거나 성경에 버금가는 권위와 가치를 지닌 것으로 인정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책들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몇 개의 구절만을 성경에 남겨둔 채 역사에서 그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성경이 인용한 책들은 다음과 같다.
1. 여호와의 전쟁기=이 책에 관해 자세히 알 수 있는 역사적 자료는 없지만, 아모리 족속의 ‘바알 전쟁기’나 후대 왕정(여호사밧) 시대(BC 873∼849) 작품들 중의 하나였을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 책의 내용이 성경 본문에까지 언급된 것을 보면 매우 귀중한 책이었음에 틀림없다. 특히 여호와의 전쟁기라는 표제를 사용한 것은 하나님께서 전쟁의 주관자이심을 고백하기 위한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아르논 강 근처에 위치한 ‘아르’에 관해 구체적으로 명시한 것을 볼 때 가나안 정복을 기원하고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찬양하며 불렀던 일종의 민요 모음집이었을 가능성도 있다(민 21:14∼15).
2. 야살의 책=여호수아(10:12∼13)와 사무엘하(1:17∼27)에 언급된 책이며, ‘의로운 자의 책’이란 뜻이다. 이 책의 기원은 잘 알 수 없고 다만 정경 외에 이스라엘 역사에 관한 여러 가지 자료들(위대한 인물이나 사건들)이 연대기에 따라 기록된 일종의 고대 수집 문서나 민족적 시편이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여호수아에서는 아모리 족속과 이스라엘 사람들 간의 전투에서 태양을 중천에 머물게 한 내용이, 그리고 사무엘하에서는 다윗이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활 노래’가 각기 인용되고 있다.
3. 다윗 왕의 행적에 관한 기록들=사무엘과 나단, 갓 등과 같은 선지자들이 다윗 왕의 ‘왕 된 일과 그의 권세와 그와 이스라엘과 온 세상 모든 나라의 지난날의 역사’(대상 29:29∼30)를 기록했었다고 언급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이 어떤 내용을 기록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성경 기자가 직접 인용한 것을 보면 역사적으로 검증되고 신뢰할 만한 내용들이 기록되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아마도 이 책에는 다윗 왕이 블레셋과 에돔, 모압, 암몬 등과 같은 주변 국가들과 벌였던 전쟁과 외교관계 등의 역사적 사실들이 기록되었을 것이다.
4. 솔로몬 왕의 행적에 관한 기록들=솔로몬의 행적이 ‘선지자 나단의 글과 실로 사람 아히야의 예언과 선견자 잇도의 묵시책 곧 잇도가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에게 대하여 쓴 책’에 기록되었다는 내용이 있다(대하 9:29). 역대기 기자가 인용하는 자료들은 크게 역사적 자료들(이스라엘과 유다 열왕기 등)과 예언적 자료들(사무엘, 나단, 갓, 아히야, 잇도 등의 글)로 구분될 수 있다.
5. 에녹서=앞서 언급한 책들과는 달리 유다서(1:14∼15)가 인용한 에녹서는 1773년 아비시니아에서 발견되었다. 물론 번역본(에티오피아판)이기는 하지만 초대 기독교인들의 사상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바울 서신에는 에녹서에서 발췌한 인용문이나 비유들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성경 기자가 인용한 책들이 정경에 속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명확하게 정리된 바가 없다. 그러나 그 책들은 성경에 나오는 인물이나 사건들이 실제로 존재했고 역사적으로 일어났었음을 강력히 뒷받침해 주고 있다.
(32) 성경의 문자와 해석
이 세상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은 어떤 형태로든지 자기의 뜻을 전달하는 독특한 기능과 방법을 가지고 있다. 동물은 반갑다는 표식으로 몸이나 꼬리를 흔드는가 하면, 적개심을 나타낼 때는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린다. 한편 호모 사피엔스인 인간은 언어와 문자를 통해 의사를 소통하거나 정보를 교환한다.
아득한 옛날에는 매듭이나 막대, 뼛조각, 조개껍질 등이 의사를 표현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는데, 점차 회화문자(그림글씨), 표의문자(뜻글자), 표음문자(소리글자) 등으로 발전되었다. 성경을 기록한 히브리어와 아람어, 헬라어는 원래 고대 페니키아 문자(이집트의 상형문자를 간소화한 문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며, 여러 시대를 거치면서 아람문자라고도 불리는 소위 각문자(角文字, Square)로 변형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보훈에서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8)고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점’이란 히브리어에서 가장 작은 문자인 ‘요드’를 가리키며, 헬라어로는 ‘이오타’ 정도의 가장 작은 문자를 의미한다. 히브리어 ‘요드’는 매우 소홀히 다루기 쉬운 문자이며, 때로는 점이나 연결부호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문자는 매우 중요한 단어들(여호와 또는 예수의 히브리어 형인 여호수아)의 첫 문자로 쓰이거나 시상(미래를 나타내는 미완료)을 나타내는 접두어로 사용되었다. 예를 들면 ‘요드’가 있느냐의 여부에 따라 미래가 되기도 하고 과거가 되기도 한다. ‘획’이란 말은 헬라어로 ‘뿔’을 의미하는데, 히브리어에서는 문자를 구별하기 위해 사용되는 획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히브리어에서는 획에 따라 전혀 다른 뜻을 가지게 된다. 예를 들면 ‘베드’와 ‘카프’, ‘요드’와 ‘와우’, ‘헤드’와 ‘헤’와 같은 문자는 모양은 비슷하지만 획의 길이와 각도에 따라 전혀 다른 내용이 될 수 있다.
신명기 6장4절에서 ‘한(에하드) 하나님’의 ‘달렛’을 ‘레쉬’로 바꾸면 ‘거짓(아헬) 하나님’이 된다. 레위기 22장32절에서 ‘속되게 하지 말라(테할루)’의 ‘헤드’를 ‘헤’로 바꾸면 ‘찬양하지 말라’가 된다. 시편 150편6절에서 ‘찬양하라(테할렐)’의 ‘헤’를 ‘헤드’로 바꾸면 ‘모독하라’가 된다. 예레미야 5장10절에서 ‘여호와의(라이와)’의 ‘베드’가 ‘카프’로 되면 ‘여호와처럼 거짓말하였다’가 된다. 사무엘상 2장2절에서 ‘카프’가 ‘베드’로 바뀌면 ‘여호와에게는 거룩함이 없다’가 된다.
따라서 유대인 랍비들은 일점일획을 바꾸는 것은 세계를 파멸시키는 것에 해당될 만큼 중대한 사건으로 간주하였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일점일획이라도 변경시키거나 가감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은 지나치게 문자주의에 얽매인 나머지 성경의 본뜻을 오해하고 예수님의 말씀에 강력히 반발하였다.
“우리가 만일 성경에서 어떤 분명한 모순으로 인해 혼란스러워진다면, 그 잘못은 하나님의 계시에 있지 않고 인간의 해석에 있다.”(어거스틴). 성경은 문자로 기록되었지만, 문자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고영민 총장 <백석문화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