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이쁜꽃향 2002-01-28
아들녀석 면회를 갔다.
면회를 가겠다는 말에 요번에는
예전처럼 오시지 말라든가 뭐하러 오시려하느냐 등등의
구구한 이유를 붙이질 않는다.
아침부터 날씨가 좋질않더니 기어코 진눈깨비가 내린다.
점심 시간에 늦지않도록 가려는 마음에 부산을 떨어야 했다.
이렇게 날이 안 좋으면
운전병인 아들녀석 세차하느라 고생이 많겠구나
이젠 그런 생각이 먼저 앞선다.
부대와 가까워질수록 눈발은 더 세지고
주변엔 눈이 많이 쌓여 있다.
어머나, 울 아들 눈 치우느라 힘들겠네...
새로운 걱정거리가 더 생긴다.
휴게실에서 기다리는데
잠시 후 녀석이 나타났다.
아직도 청소년 티를 못 벗은 듯한 여드름 투성이의 아들을 보니
추위에 얼마나 힘 드랴싶어 두 손을 덥석 잡았다.
탁자에 놓인 먹거리를 보더니
"엄마,지난 번에 부대 막 들어가는데
먹다 남기고 간 음식 생각 나서 얼마나 후회막심이었던지
오늘은 하나도 안 남기고 먹기로 했어."
먹었던 것은 하나도 기억이 안 나고
남긴 것들만 머릿속에 내내 떠올랐다며
면회 온다하니 어젯밤부터 밥이 안들어가더라던 녀석을 보니
얼마나 마음이 아리던지...
남들은 거의 여자친구들이 면회 온 듯한데
녀석만 가족 면회인가 보다.
"넌 찾아오는 여자 없어 섭섭하지 않니?"
"차라리 속 편해요.
관리하는 데 신경 써야 하고
친구 보니깐 일주일 내내 전화로 싸우더니
오늘 면회 왔다네요."
어느 정도 배가 부른지 먹는 속도가 느려지더니
갑자기 품 속에서 무언가를 꺼낸다.
"뭐 드릴 것이 있어서..."라며.
가죽 장갑이었다.
자기는 상관에게 따로 받은 게 있어
새 걸 아빠 드리려 가져왔다는데
아마 비밀리에 숨겨 온 듯한 감이 왔다.
"패딩 조끼도 두 갠데
할머니 하나 갖다 드릴까 해요..."
"그런데 신경 쓰지 마라.
사회엔 더 좋은 게 얼마나 많은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뜻밖의 아들 행동에 남편은 흐믓한 미소를 지었다.
아들을 보내고 오는 길에
남편은 장갑을 껴 보더니
"아마 둘째 같으면 이런 생각 하지도 않을거야."
중얼거리듯 기특하단 듯이 혼잣말을 한다.
나도 동감이었다.
늘 자기것을 잘 챙기는 열 살 아래의 둘째는
뭐든지 형과는 달랐다.
참을성도 덜하고
할 말은 참지 않고 모두 하는 거며
특히 자기 것에 대한 소유욕이 강한 점까지.
가족들과의 여행을 즐기는 남편과 함께 장거리를 가노라면
이따금 점심 때를 지나서 식사를 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도로는 복잡하고
남편은 지도를 살피며 어떻게 하면 가족들에게
가장 많은 볼거리를 제공할 수 있을까 궁리하느라
시간을 놓치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때면 두 아이의 반응이 어쩌면 그리도 다른지...
큰 녀석은 배 고프다고 투정을 해 본 적이 없다.
어렸을 적에나 자란 후에아.
그런데 둘째는 달랐다.
"아빠, 뭐 좀 먹고 가자.
굶길거야? 배 고파 죽겠는데..."
잔뜩 볼 멘 소리로 독촉을 해 댄다.
남편은 그에 질세라 아이 약을 올리곤 한다.
"오늘은 아빠가 진정한 배고픔이 뭔지 알게 해 주마."
"아~ 그건 아빠 혼자만 그냥 알아도 되잖아.
내가 언제 여행 가고 싶다 했어?
아빠가 일방적으로 데리고 와선
밥도 못 먹게 하고 있어."
앞으로는 절대로 안 따라오겠다고 오기를 부리는 아들과
이 시각에도 굶는 어린이가 전세계에 얼마나 많은 줄 아느냐로
이어지는 부자간의 다툼.
언젠가 난 큰녀석에게 물었었다.
"넌 배 안 고파?"
"고파요."
"근데 왜 아무 말 안하니?"
"뭐 나만 고픈가요?
언젠가는 먹겠죠.
조금만 참고 있으면 되죠 뭐."
세대 차이가 나다 보니 성격도 유별나게 다른 건가.
아무튼 우는 애 젖 준다고
둘째는 자기 몫을 분명히 챙기며 살 것이다.
대학 입학 때까지 큰 애를 구박만 하던 남편이
아들 군입대 후로 많이 달라 진 걸 보니
자기도 이젠 나이를 먹었다는 건지,
아니면 주변의 또래들과 비교하여
아들의 좋은 점을 비로소 깨달은 건지...
참을성 강하고
희생 정신이 특별한 장남에겐
엄마로서 늘 부족하기만했던 지난 날이 떠 올라
항상 가슴 한 켠이 아리기만 하다.
6남매의 장남인 남편의 사고방식이나 행동,
그리고 아들녀석을 보더라도
'장남은 타고 난다'는 옛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았단 걸 느낀다.
이러다 더 늙어서 장남과 차남을 차별하게 되면 어쩌누...
두 녀석 다 내겐 소중한 보물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