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니아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북부에 위치한 지역이다. 헤르체고비나와 함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형성하는 지역으로서 중심 도시는 사라예보,바냐루카이다. 인구는 320만명이고,수도는 사라예보로 제1차 세계 대전의 진원지가 된 라틴 다리가 있는 곳이다
보스니아의 면적은 약 41,000 km2인데 이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전체 면적의 80%를 차지한다. 북쪽과 동쪽 국경을 만드는 사바강과 드리나강 그리고 판노니아 평원 의 남쪽 국경까지 이르는 지역을 나타낸다. 크게 디나르알프스산맥에 놓여 있다. 남쪽의 지중해쪽은 헤르체고비나 지역이다. 비잔티운 제국의 의 콘스탄티누스7세 황제가 집필한 외교 서적인 《제국의 경영》에 따르면 사라예보에는 보스나강을 중심으로 형성된 작은 지방인 '보소나'(Bosona)가 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보스니아라는 이름은 여기서 유래된 이름이다. 1080년대부터 보스니아 공작의 영지가 되었고 14세기 말에는 헤르체고비나와 함께 보스니아 왕국의 지배를 받게 된다.
1463년부터 오스만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보스니아는 이슬람교의 영향을 받게 된다. 19세기에는 보스니아 각지에서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 저항하는 봉기가 일어났다. 1878년에 열린 베를린회의의 결과에 따라 보스니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점령되었고 1908년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정식으로 합병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을 계기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소멸되면서 보스니아는 유고슬라비아 왕국에 편입되었다. 1080년대부터 보스니아 공작의 영지가 되었고 14세기 말에는 헤르체고비나와 함께 보스니아 왕국의 지배를 받게 된다.
네움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바다에 닿아있는 유일한 항구도시이다. 이 작은 바닷가 마을 때문에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아드리아해로 통하는 약 21km의 좁은 해안선을 확보하여 내륙국에서 벗어났다. 이 마을은 행정 구역상으로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에 속하는 주인 헤르체고비나네레트바 주에 속하며 크로아티아의 두브로브니크는 네움으로 말미암아 크로아티아 본토와 끊어져 있는 월경지이다. 육로로 두브로브니크를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네움을 경유해야 한다. 즉 네움은 크로아티아 본토와 두브로브니크를 갈라 놓는 역할을 한다.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시절까지는 크로아티아나 보스니아나 유고슬라비아의 한 행정구역일 뿐이었기에 네움이 보스니아 영토라고 하더라도 크로아티아 본토와 두브로브니크를 오가는 데에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유고슬라비아 전쟁이 터지며 유고슬라비아가 완전히 분해되면서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가 서로 다른 나라가 되어버리자 크로아티아 다른 지역에서 살던 사람이나 두브로브니크 일대에서 살던 사람이 두브로브니크를 가거나 타 크로아티아 지역으로 가려면 국경을 두 번 넘어야 하거나 여객선을 타고 가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 때문에 답답함을 느낀 크로아티아는 역사적·지리적으로 네움이 보스니아보다 크로아티아와 더 가깝다며 보스니아에 네움의 반환을 요구한다. 하지만 보스니아는 네움의 반환을 거부하는데, 크로아티아에게 돌려주면 보스니아도 바다로 통하는 길이 막혀 내륙국으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내륙국이 얼마나 발전에 심각한 악영향을 초래하는가를 생각하면 보스니아가 기를 쓰고 네움을 지키려는 것이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정작 보스니아는 자국 영토인 네움이 아닌 크로아티아의 플로체를 무역항으로 쓰고 있다. 네움에서 보스니아 쪽으로 붙은 땅은 좁아터졌는데 하필 코앞이 산악 지형인데다기 기껏해서 깔린 간선도로도 2차선 수준이라 화물을 대량으로 실어가는 데 적합하지 않고 앞바다도 길쭉한 반도와 섬들이 가로막고 있어서 항구로 도저히 쓸 수가 없기 때문이다. 기껏 사수하고 있는 항구도시라고 있는 게 겨우 동네 해수욕장 수준인 것이다. 오히려 플로체는 자그레브 쪽으로도 없는철도가 사라예보 방면으로 친절하게 나 있을 정도이다. 왠지 모르게 뒤틀려 있는 듯한 느낌이 난다면 착각이 아니다.
그래서 네움의 산업은 무역업이 아니라 크로아티아의 해안 지방처럼 아드리아해의 절경을 살린 관광업이다. 스플리크와 두브로브니크를 오가는 버스 대부분이 네움의 휴게소에 정차하는데, 이게 네움의 주요 수입원 중 하나이다. 한국인 관광객이면 여권만 2번 확인하지 도장은 안 찍는다. 열차로 지날 때도 꼭 도장 찍던 크로아티아의 다른 국경 지대와는 다르다. 크로아티아가 유럽연합에 가입한 2013년 이후로는 여권 확인도 제대로 안 하고 그냥 보내주는 경우도 있다.
한편 보스니아의 네움 알박기(?)로 인해 국토가 단절되는 불편함을 안게 된 크로아티아는 적어도 두브로브니크 지역과 나머지 크로아티아 지역들 간의 왕래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 1998년에 보스니아와 네움협정을 맺었다. 크로아티아 차량들의 자유로운 통행을 골자로 한 협정이다. 그래도 답답함을 참을 수 없자 인접한 크로아티아 본토 남부 연안 지역에 네움을 지나지 않는 다리인 펠레샤츠 대교를 건설하였다. 해당 교량은 2018년 착공, 2021년 준공, 그리고 2022년 7월 26일에 정식으로 개통했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정부는 명시적으로 환영하거나 반대하지 않았다. 명확히 육상 국경과 해상 국경에 대한 합의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는 없고, (다리 건설이) 크로아티아가 네움에 더 이상 집착하지 않겠다는 의미일 수도 있어서 반대할 명분 역시 만들어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보스니아 정치권에서는 상당한 논란이 발생했는데, 펠레샤츠 대교를 건설하면 네움에서 나가는 배의 통행에 방해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독립하여 세르비아와의 통합을 원하고 있는 스릅스카 공화국 측은 보스니아 정치인들이 논란을 만든다며 크로아티아 대교 건설에 적극적으로 찬성했다.
심 산
사라예보 라틴다리의 역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황제 계승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은 군사훈련을 참관하기 위해 보스니아 헤르체코비나 공동통치령의 수도인 사라예보를 방문하기로 했는데 문제는 하필이면 그 날을 1914년 6월 28일로 잡은 것이었다. 이 날은 세르비아인들에게 치욕인 동시에 영광의 날로 1389년 1차 코소보전투에서 패배하여 세르비아 왕국이 오스만 제국에 정복당한 날이자 제2차 발칸 전쟁에서 세르비아 군대가 튀르크인들에게 영광스러운 승리를 거두어 과거의 패배를 갚아준 날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비도브난(성 비투스의 날)'이라고 부를 정도로 세르비아 사람들은 가슴 깊이 기억하고 있는 날이다.
'젊은 보스니아'는 이때를 노려 그를 암살하기로 했고 검은 손이 그들의 공작을 도와주기로 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날은 또 대공의 결혼 14주년 기념일이었다. 그리고 진정한 함정은 민족 불균형 문제 해결을 위해 오스트리아-헝가리를 민족/언어권에 따라 행정 구역을 분할한 연방국가로 만들려 한, 즉 독일계와 황실의 기득권도 내놓는 대인배스런 발상을 한 장본인이 바로 이 사건으로 암살당한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었다는 것이다. 아래 항목을 보면 알 법하지만 위급한 상황에서 무한한 자비심을 보이는 등 페르디난트 대공은 굉장히 대인이었다.
1914년 6월 28일 대공 부처는 9시 20분 사라예보 역에 도착했다. 이후 황태자와 조피는 보스니아 총독 오스카르 포티오레크 육군 대장과 함께 레오폴드 로이카가 운전하는 자동차에 올랐다. 한편 가브릴로 프린치프 등 검은 손 단원들도 권총과 수류탄, 그리고 자살용 청산가리를 챙겨서 각자 자신의 위치에 배치되었다.
이날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아내인 조피와 굳이 동행한 것은 프란츠 본인의 강력한 의지에서 비롯하였다. 왕족 출신이 아니었던 조피는 엄격한 귀천상혼 제도로 인해 오스트리아 황실 내에서 큰 차별을 받았다. 공식석상에서 프란츠 페르디난트와 마주할 수도 없었을 정도였다. 프란츠는 이런 아내의 정치적인 위신을 높여주기 위해서 조피와 함께 참석했던 것이었다. 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총감찰관'이기도 했고 군사훈련 참관에 동석한다는 명목으로 아내도 참석할 수 있던 것이다. 참관 날짜가 결혼기념일인 것에는 이 점 또한 있었다.
대공 부처가 아펠 강둑에 도착했을 때 첫 번째 단원인 무하메드 메흐메드바시치가 암살에 실패했다. 이후 10시 10분경 두 번째 단원인 네델코 차브리노비치가 기어코 수류탄을 던졌지만 차를 맞고 튕겨 나갔다. 이때 수행원 2명과 구경꾼 10명이 다쳤다. 황당한 것은 네델코는 암살에 실패하자 자살하려고 바로 독약을 삼킨 후 옆의 강으로 뛰어들었는데 독약은 유통기한이 지난 물건이라 효과가 없었고 강은 말라서 깊이가 10센티미터밖에 되지 않았다. 덕분에 바로 생포되고 곧이어 자백했는데 나머지 단원들은 폭탄 투척이 실패하자 암살을 포기했다.
이후 암살 시도에 분노한 대공은 시청에서 페힘 추르치치 사라예보 시장에게 이 도시는 나를 폭탄으로 환영하냐고 따졌지만 아내 조피가 말려서 그만두었다. 이후 영접행사가 끝나고 그와 동승한 포티오레크 총독은 빨리 군사지역으로 가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런데 갑자기 대공이 폭탄 테러로 다친 수행원의 위문을 위해서 그들이 입원한 병원에 가 봐야겠다고 주장했다. 당연히 주변에서는 말렸지만 대공이 이를 강행했는데 아마 암살 시도로 인해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 간의 갈등이 커지는 것을 막을 목적이었던 것으로 추정되기에 의도는 좋았다. 하지만 이것이 대공 부처의 목숨을 앗아가고 말았다. 결국 포티오레크 장군은 암살을 피하기 위해 지름길로 가기로 했지만 정작 운전기사에게는 지름길로 가야 한다는 말을 알리지 않았다. 운전기사는 예정된 길로 갔고 포티오레크 장군은 길을 잘못 들었다고 운전기사에게 소리쳤다. 그러나 길이 V자 모양으로 되어 있는 밀랴츠카 강의 라틴 다리에서는 반드시 서행을 해야 했고 후진을 하던 차에 멈추게 되었다. 그런데 그 때까지 작전에 아무런 참여도 하지 못하고 있던 프린치프가 하필 자기가 자주 가던 모리츠 실러 카페 주변을 서성거렸는데 갑자기 눈앞에서 대공 부처가 탄 자동차가 나타난 것이다. 사실 당시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380ACP를 막을 수 있는 실크 방탄조끼를 입고 있었으며 이 방탄조끼는 1901년에 이미 알폰소 13세의 목숨을 살리면서 효용성을 입증한 바 있었다. 하지만 프린치프의 총탄은 방탄조끼가 아니라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목에 명중해 경동맥을 끊어 버렸기 때문에 이 방탄조끼는 아무 의미가 없어졌다. 프린치프의 첫 발은 대공을, 두 번째 발은 조피를 맞췄으며 피격 직후 대공 부처는 시청으로 옮겨졌다. 당시 운전기사 로이카의 증언에 따르면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조페를! 조페를! 죽으면 안 되오! 아이들을 위해 꼭 살아주시오!"라고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조피는 시청에서 죽었고 프란츠 페르디난트도 몇 분 뒤에 승하하였다.
사실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두 번째로 노린 사람은 조피가 아니라 같은 차에 동승했던 포티 오스카르 포티오레크 보스니아 총독이었고 프린치프는 조피가 죽었다는 말에는 유감을 표명했다. 포티오레크 총독은 발칸 전쟁 이래 오스트리아에서 세르비아에 대한 위기감이 증가하자 이에 호응하여 보스니아의 세르비아인 공동체 여럿을 탄압했기 때문이었다.
세르비아 민족주의자 프린치프에게 암살당해 세르비아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선전포고로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위 사건으로 인해 제1차 세계대전에 병력 9천만 명이 참가한 가운데 군인 천만 명,민간인 수백만 명이 사망 하였다.
<라틴 다리, 이곳에서 제1차 세계대전의 비극은 시작되었다>▼
그날의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강물은 오늘도 유유히 흐르고 있다.
암살 당시 사용한 권총, 오그트리아 빈 군사박물관에 있다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