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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죄 아래에 있다.
말씀/로마서 2:17-3:20
요절/로마서 3:10 , 찬송가/203장
우리는 지난 주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심판 기준이 무엇인가를 배웠습니다. 바울은 오늘 말씀을 통해 유대인의 죄를 구체적으로 지적함으로 그들도 이방인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죄인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며, 온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음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서 참된 자아 발견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7절. “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이 말씀은 자칭 유대인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여기에는 자칭 신자라고 생각하는 자들, 특히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기독교 문화권 속에서 살기 때문에 스스로 신자라고 생각하는 자들이 해당됩니다. 또 형식적이고 습관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자들도 다 이에 해당합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였습니다. 자기들은 유일하신 하나님,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이 선택한 민족이라고 자랑하였습니다. 그들은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전수 받은 십계명과 율법이 있다고 자랑하였습니다. 우리는 겨우 단군 왕검의 자손이라고 자랑하는데, 유대인들은 자랑하는 차원이 우리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들은 구체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 율법을 의지했습니다. 의지한다는 것은 어린아이가 부모를 의지하고 안심하고 살듯이, 그 안에서 안심하고 산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생활의 지침서로 삼았습니다. 또한 율법 안에 구원이 있음을 믿고 안심하고 살았습니다. 이는 참으로 자랑할 만한 위대한 것입니다. 18절.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여...” 이방인들이 무엇이 옳은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몰라 방황할 때, 그들은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가장 선한 일을 분별하였습니다. 인생의 여러 문제들을 바로 바로 해결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는 실로 큰 특권이요,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19,20절은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에 대해서 스스로 어떻게 생각했는가를 말해줍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기 때문에 참된 생명의 길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죄와 영적 무지 가운데서 빛을 찾아 방황했습니다. 그들은 인간적으로는 훌륭하더라도 영적으로는 어리석었으며, 철없는 어린아이와 같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런 그들에 대해서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 율법에 있는 자식과 진리의 모범을 가진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선생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이런 자부심을 갖게 된 것은 하나님께 대한 지식과 진리가 율법에 구체화 된 모습으로 들어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율법을 자랑하는 유대인들의 실제 삶은 어떠했습니까? 바울은 유대인들의 이중적인 삶을 질타합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이 여기는 네가 신전 물건을 도둑질 하느냐?” 당시 랍비의 문헌에는 “유대인들 간의 살인, 간음, 성적타락, 교파의 과격한 분규, 상업 또는 재판상의 부패가 증가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을 떠났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자랑하고 가르쳤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육신의 소욕을 좇아 정욕과 욕심대로 살았습니다. 그들의 말하는 바와 행동하는 것이 달랐습니다. 이는 남을 속일 뿐 아니라 자신을 속이고 하나님을 속이는 가장 가증스러운 죄악입니다. 아마도 당시 먹고 살기 힘들다 보니, 남의 것을 슬쩍 슬쩍 도둑질하는 유대인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보나 안보나 살피다가 아무도 없으면 빵도 하나 슬쩍하고 샌들도 하나 슬쩍합니다. 이방인들과 상거래를 하면서 장부조작도 슬쩍 슬쩍 하고 다양한 방법으로 도둑질을 했을 것입니다. 한국은 카페에 고가의 노트북이나 핸드폰을 놔두고 잠깐 화장실에 다녀와도 아무도 훔쳐가지 않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한국 여행 온 외국인들이 다들 놀랍니다. 왜 그럴까요? 다들 잘 살아 고가의 노트북과 핸드폰을 갖고 있기 때문일까요? 그런 점도 있겠지만, CCTV가 너무 많아, 훔쳐간 것이 금방 탈로 나기 때문이 아닐까요? 또 요새는 나랏돈 도둑질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서류를 조작해 실업급여, 폐업신고로 국가의 돈을 받아냅니다. 이것도 도둑질입니다. 간음은 어떻습니까? 요즘은 성폭행이나 성추행은 큰 죄로 여기지만, 둘이 눈이 맞아서 서로의 동의하에 즐기는 것은 간음이 아니다. 이렇게 가르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레20:10을 보면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의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간음하였다고 하였습니다(마5:28). 타락한 육체의 정욕 중에 가장 오래되고 강한 것이 음욕입니다. 이것은 유대인이라고 해서 피해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유대인 역시 이방인들과 마찬가지로 간음의 죄를 수시로 지었을 것입니다. 당시에는 우상을 섬기는 신전들이 많았습니다. 제우스, 아르테미스, 포세이돈, 바카스 같은 그리스 신상들과 함께 여러 신상들을 새겨 놓은 시전이 가이사랴 빌립보에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세계 각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왔고, 신전에 기부한 물건들이 많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런 신전의 물건들을 슬쩍 슬쩍 도둑질 하였던 같습니다.
그들이 이런 위선적인 생활을 하게 된 근본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21a절.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그들은 다른 사람을 열심히 가르쳤지만 정작 자신은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저와 같이 남을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자들이 범하기 쉬운 죄입니다. 성경 선생은 남을 가르치기에 앞서 먼저 말씀 앞에 자신을 비추어 보고 회개하는 생활을 힘써 해야 합니다. 남을 가르치기는 쉬워도 자신을 가르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남을 가르치고 자신을 가르치지 않을 때, 영적 성장이 없고 이중인격자가 되어 버립니다. 우리는 먼저 진리의 말씀 앞에 자신을 쳐 복종시키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럴 때, 영향력 있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회개하는 생활을 하지 않을 때, 자신도 모르게 위선적인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들이 미친 악영향이 무엇입니까? 23,24절. 그들은 율법을 자랑하고 하나님을 자랑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율법을 어김으로 오히려 하나님을 욕되게 했습니다. 그들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인 가운데서 모독을 받게 되었습니다.
불신자들은 신자들을 보통 사람 이상으로 높이 봅니다. 불신자들이 죄를 범하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자가 죄를 범하면 "예수 믿는 자가 뭐 저래"하며 예수님을 욕합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신자만큼은 높은 수준으로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한국 사람이 다른 나라에 갈 때는 한국의 대표가 됩니다. 그래서 한국 사람이 잘하면 한국 전체가 칭찬을 받고, 한국 사람이 잘 못하면 한국 전체가 욕을 먹게 됩니다. 이 때문에 외국에 나갈 때는 한국인으로서 조심스럽게 행동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우리 믿는 자들은 이 불신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대표가 됩니다. 신자들이 어떻게 행동하는가에 따라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기도 하고 모독을 받기도 합니다. 불신자들은 신자들의 말보다도 행동이나 생활을 예의 주시합니다. 신자는 말을 잘하는 자가 아니요 말씀을 실천하는 자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신자는 많지만 영향력 있는 신자는 심히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족하지만 가정이나 학교, 직장에서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향기를 풍기는 영향력 있는 신자가 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25절. 유대인들이 자랑하는 두 번째 특권의식은 할례였습니다. 할례는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몸에 새긴 자랑스러운 신분증이었습니다. 할례를 행하지 않으면 백성 중에서 끊어졌습니다(창17:14).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에 난지 8일이 안식일이라도 할례만은 꼭 행했습니다(요7:22). 그런데 문제는 육신의 할례 받는 것으로 다 된 줄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들은 육신의 할례를 받음으로 구원은 이미 확보해 놓았기 때문에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날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이미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살아도 반드시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율법을 지키면 할례를 받는 것이 유익하지만, 율법을 어기면 할례도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합니다. 또한 할례를 받지 않는 사람이 율법의 규정을 지키면 그 사람은 할례를 받지 않았더라도 할례를 받은 것으로 여겨질 것이 아니냐고 말합니다(26). 더 나아가 할례를 받지 않는 사람이 온전히 율법을 지키면, 오히려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을 정죄할 것이라고 말합니다(27). 이는 할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참 유대인은 할례에 있지 않고 성령을 통해 마음이 변화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아브라함의 혈통을 이어 받고, 몸에 할례를 행한 사람만이 유대인이라는 패러다임 속에 살아온 유대인들에게 가히 혁명적인 선입니다. 바울은 어떻게 이런 주장을 할 수 있을까요?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마음의 할례는 바울이 만들어낸 사상이 아닙니다. 신10:16절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즉 마음의 할례는 이미 구약성경에 나와 있는 내용입니다. 이 때문에 바울은 담대하게 마음의 할례가 진짜 할례고, 이면적 유대인이 진짜 유대인이라고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한편 또 하나의 문제가 있습니다. 겉모양으로 유대인들은 육신의 할례를 행하고 율법의 조문을 잘 지킵니다. 그런데 그들의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보다 사람을 의식하며 사람의 인정과 칭찬을 구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인본주의 신앙을 가진 자들입니다. 반면 속 사람으로 유대인들은 신본주의 신앙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들은 성령으로 마음에 할례를 받고 영을 좇아 생활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인정과 칭찬을 구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자 애씁니다. 하나님을 의식하며 하나님 앞에서 살아갑니다. 따라서 누가 진짜 신자입니까? 세례를 받으면 신자입니까? 직분을 맡으면 신자입니까? 성령으로 그 마음이 변화된 사람이 진짜 신자입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그 사람을 하나님이 칭찬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성령으로 마음의 할례를 받아 변화된 삶을 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사람의 인정과 칭찬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정과 칭찬을 받는 자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바울은 이제까지 유대인들이 자랑하는 것이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말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의 마음 속 깊이 자리 잡고 있는 모든 자기 의를 산산이 깨뜨렸습니다. 자기 의는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가장 큰 방해 요소입니다. 자기 의가 있는 자는 결코 복음을 영접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 속 깊이 자리 잡고 있는 자기 의는 어떤 모양으로든지 반드시 깨뜨려져야 합니다.
이렇게 바울이 유대인의 의를 산산이 깨뜨리자 이에 대해 항의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에 바울은 문답형식으로 그들의 모든 변명을 다 막습니다. 첫째 질문은 유대 사람의 특권은 무엇이며, 할례의 이로움은 무엇입니까? 라는 것입니다(1). 이에 대해 바울은 유대인들이 받은바 특권이 모든 면에서 많다고 말합니다(2).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특권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는 것입니다. ‘맡았다’는 것은 ‘책임을 지게 되었다’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책임지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메시야를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시고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제사장 나라 삼으시고 그들을 통해 세계 만민을 구원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들은 세상 만민의 목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성경 선생으로서의 특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것이야말로 그 어떤 것보다 더 값지고 소중한 특권을 받은 것입니다. 그들도 이것을 알았기 때문에 말씀 맡은 것을 자랑했습니다. 특권에는 반드시 사명이 따릅니다. 그런데 그들은 특권의식에만 사로잡혀서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불신하고 영접치 않았습니다. 그들의 불신으로 하나님께서 이루고자 하신 만민 구속역사는 폐하여진 것 같이 보입니다. 여기서 두 번째 질문이 제기됩니다.
둘째 질문은 유대인의 불신으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없어지겠는가 하는 것입니다(3).유대인들의 불신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 이루고자 하신 만민 구속역사는 이룰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신실하지 못하신 분이 되어 버립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그럴 수 없느니라.”고 잘라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다 거짓말쟁이이지만 하나님은 참 되시기 때문입니다(4). 바울은 이를 시편 말씀으로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
이 말씀은 시51:4절을 인용한 것인데 다윗이 범죄 하였을 때 나단 선지로부터 책망을 받은 후, 죄를 통회하며 지은 시입니다. 그는 회개할 때, 하나님이 의로우신 분이시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실 때마다 그의 옳으심이 드러나고 또 판단을 받으실 때는 참 되시기 때문에 재판에서 항상 승리하신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본성이 거짓되어 약속을 잘 배반하고 어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참 되시고 신실하시기 때문에 인간의 불신으로 인해 계획을 변경하시거나 약속을 어기시는 일이 없습니다. 믿는 자들을 통해 만민 구속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십니다.”(4) 이 말씀은 우리에게 바른 인간관과 바른 하나님의 관을 가르쳐 줍니다. 사람은 본질적으로 거짓되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믿을 만한 존재가 못 됩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사람을 믿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을 믿기 때문에 은혜를 배반당할 때, 사람이 어찌 그럴 수 있을까? 하며 사람에 대한 협오감을 가지고 절망하게 됩니다. 또 도와주어도 결국에는 다 도망갈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에 더 이상 사람을 도울 의욕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람은 거짓되기 때문에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사람을 믿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서로 불신을 해야 합니까? 그러나 우리는 또 근본적으로 사람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근본적으로 사람을 믿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믿을 수 없지만 그 사람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나 자신조차 거짓되어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미쁘신 하나님은 믿을 수 있습니다. 미국의 동전에는 ‘In God We trust’라는 말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 안에서 서로 신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을 버렸을 때, 서로를 믿지 못하고 불신하게 되었습니다. 참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 안에서만 서로 신뢰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미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셋째 질문은 해괴합니다. 이는 그들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한다면, 공로를 세웠음으로 상급을 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진노하신다면 진노하시는 하나님이 불의한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불의하시면 세상을 어떻게 공정하게 심판하실 수 있겠습니까?(6) 그런데도 그들은 나의 거짓됨 때문에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서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간다면 왜 내가 여전히 죄인으로 판정을 받습니까? 하며 항의를 합니다(7). 캠퍼스에 전도를 하다보면, “가롯유다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인류 구원역사가 성취되었는데, 왜 유다가 배반자이고, 심판을 받아야 하는가? 유다는 단지 악역을 맡았을 뿐이다.” 하며 가롯유다를 옹호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럴듯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내가 강도짓을 해서 경찰이나 판검사가 다 일거리가 생겼는데, 나에게 고맙다고 해야지 왜 나를 처벌해요?” 하는 말과 같습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가룟 유다에게 그런 죄를 지으라고 하신 것도 아니고, 그런 죄를 지을 존재로 만드신 것도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은 현재, 과거, 미래에 동시에 존재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가 그런 죄를 짓는 것을 미리 아시고 성경에 미리 예언을 하신 것에 불과합니다. 가룟 유다는 정죄를 당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참되신 하나님 앞에서는 목적이 아무리 선하다하더라도 수단과 방법이 선하지 않으면 어떤 행위도 정당화 될 수 없습니다. 가룟유다는 목적도 악하고 수단과 방법도 악했는데, 어떻게 그의 행위가 정당화 될 수 있겠습니까? 나타난 결과만 가지고 그의 죄를 정당화 할 수 없습니다. 결국 나의 거짓됨으로 하나님의 풍성하심을 드러내고 있다는 이런 말도 안 되는 해괴망칙한 이론을 만들어 내는 사람은 죄를 회개하기 싫고, 육신의 소욕대로 살고 싶은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이런 자들을 향해 “그들은 정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분명하게 일침을 놓았습니다(8).
9,10절을 읽겠습니다.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이상의 모든 논리를 통해 바울은 유대인이 결코 이방인보다 낫지 않음을 밝혔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내린 결론이 무엇입니까?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의인이 한 사람도 없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죄 아래 있다고 선언합니다. ‘다 죄 아래 있다’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다 죄의 영향력 안에, 다 죄의 세력 안에, 다 죄의 권세에 붙잡혀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예외인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의인이 하나도 없습니다. 누구나 다 죄인입니다. 교도소에서 쓰이는 몇 가지 은어가 있다고 합니다. 먼저 교도소를 빵이라고 하는데, 빵에 들어가면 다 같은 죄수가 아닙니다. 가장 대접받는 죄수가 정치범, 소위 양심범입니다. 그 다음이 범털소리를 듣는 도둑입니다. 그 다음이 강도입니다. 가장 저질스럽고 무시받는 죄수가 강간범이나 가정 파괴범입니다. 이런 죄수는 뺑끼통 옆에 앉힙니다. 다 죄인들인데 그 안에서도 무슨 죄를 지었느냐에 따라서 급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빵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도 그러합니다. 자칫하면 신자들끼리도 그러합니다.
왜 이런 문제가 생깁니까? 죄를 단지 행위로만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이해하기 때문에, 죄인끼리도 더 악한 죄인, 고상한 죄인 하면서 등급을 나누고 서로 비교하고 따집니다. 죄인이 죄인을 손가락질합니다. 죄인이 죄인을 판단합니다. 그러면서 자기에 대해서 내용 없는 자부심으로 자기 죄는 깨닫지도 못하고 회개치도 않습니다. 죄에 죄를 더할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죄인인 것은 단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인이 아닙니다. 우리가 죄인인 것은 우리가 다 죄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죄의 세력, 죄의 권세아래 우리가 붙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어떤 죄를 짓는 것은 그 죄의 세력에 붙잡힌 것입니다. 내가 교만한 것은 교만의 세력에 붙잡힌 것입니다. 내가 음란한 것은 음란의 세력에 붙잡힌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죄 아래 있기 때문에 도저히 내 스스로의 힘으로 죄를 이길 수 없습니다. 또 아직 죄를 짓지 않았다 할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죄가 나를 충동하면 나는 죄를 짓게 됩니다. 죄에 이끌려 다닙니다. 이렇게 일생동안 죄의 세력에 붙잡혀 죄의 종노릇하며 살다가 끝나는 것이 모든 사람의 슬픈 운명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의 실존입니다. 칼뱅은 이것을 인간의 ‘전적 부패 혹은 전적 무능력(Total Depravity or Total Inability)’이라고 불렀습니다. 파스칼도 말했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 의인이나 위인이나 성자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오직 한 가지 종류의 사람만 있다. 즉 죄인이다.”
그럼 죄 아래 있는 사람들의 상태가 어떠합니까? 11-18절. 사람은 죄 아래 있기 때문에 깨닫는 사람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가 곁길로 빠져서 쓸모가 없게 되었습니다. 선한 일을 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입니다. 무덤이 열리면 그 안에서 시체가 썩는 냄새만 나듯이, 사람에게서 온통 썩은 냄새가 나는 것입니다. 또 혀를 가지고 사람을 속입니다.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어서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인격을 죽이는 말을 합니다. 입에는 저주와 독설이 가득 찼습니다. 또 발은 피를 흘리는 일에 빠르며 그들이 가는 길에는 파멸과 비참함이 있고, 평화의 길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의 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빛이 없습니다. 이것이 죄 아래 있는 사람들의 상태입니다.
19절.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구약이 말하는 바는 3:10-18절에서 살펴본 바대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율법 아래 있는 모든 인류에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모두 하나님 앞에 할 말이 없는 죄인입니다.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고 법에 따른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려 줄 뿐입니다. 율법은 그 이상의 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즉 사람들이 자신이 죄인인줄도 모르기 때문에 그것을 깨달으리라고 주신 것이 율법입니다. 율법에 비추어 봤을 때, 세상 그 누가 자신은 죄인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을 뿐입니다(20). 온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저주스러운 세상에 살면서 죽도록 고생하다가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받아야 하는 진노의 자식이요. 멸망의 자식이 되었습니다. 인간은 소망이 없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모두가 죄인이라는 것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래야 여기서 벗어날 길이 없나? 살길은 없나?를 찾습니다. 이 때문에 이런 절망적인 인간의 상태를 깨닫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즉 죄인된 자아를 발견하는 것이 구원에 이르는 첫 걸음입니다. 죄인된 자아를 발견해야 만 은혜가 얼마나 귀한 줄 알고, 또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풍성히 누릴 수 있습니다. 또 복음이 왜 구원의 능력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전혀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어둠이 깊으면 새벽이 가깝다’는 말대로 이 절망의 어둠을 깊이 인식할 때 복음의 새벽이 오는 감격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음을 깊이 깨닫게 하시고 복음의 새벽을 사모하는 마음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